김안국(金安國,1478,성종9∼1543,중종38)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고 학자다.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모재(慕齋)이며 본관은 의성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503년(연산9)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 이듬해 부수찬, 1506년(중종1) 부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합격하여 지평, 장령을 거쳐, 1510년 사성, 다음해 사가독서했다. 1515년 예조참의, 대사간, 이듬해 승지를 지냈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유생에게 <소학>을 권하고, 각종 언해와 의학서를 편찬하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고 백성 교화에 힘썼다. 1518년 동지중추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공조판서, 우참찬이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일파라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 은거했다. 1537년(중종32)에 동지성균관사에 서용되어 이듬해 지중추부사, 예조판서, 다음해 좌참찬, 1540년 대사헌, 우찬성, 대제학, 좌찬성,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어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구입을 상소하고, 닥나무에 물이끼를 섞어 만든 태지(苔紙)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판돈녕부사를 거쳐, 1542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냈다.
길 가다 본대로 짓다 (途中卽事)
하늘 끝의 나그네 나이 먹는 게 아까워 천 리 밖에서 그릴 뿐 집에 가지 못하네.
외길 샛바람이라 봄도 어쩔 수 없어 들의 복사는 주인 없이 절로 꽃을 피웠네.
天涯遊子惜年華 千里思歸未到家 一路東風春不管 野桃無主自開花 (慕齋集 卷1)
이 시는 그가 1506년(연산12) 봄에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의주에 나갔다가 안주 백상루에서 영유로 올 때 지은 칠언절구로 마(麻)운이다. 길에서 본 봄 경치에다 자신의 서정을 부쳤다. 기구와 승구는 중국사신 서목길(徐穆吉)을 맞이하려고 의주로 파견된 상황과 나그네의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천 리 밖의 먼 곳으로 집을 떠나와 길에서 날을 보내는 고달픈 신세를 읊고 있다. 전구와 결구는 봄날의 풍광이다. 자신의 고달픈 처지와는 상관없이 동풍은 봄을 재촉하고 복사꽃은 길가에 절로 피었다는 것이다. 담담하게 봄 경치를 서술하는 속에 자신의 서글픈 감회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연자루에서 포은선생의 시에 차운하다 (次燕子樓圃隱先生韻)
쌍쌍이 나는 제비 하루에 몇 번이나 오나? 강남 길 나그네는 봄을 좇아 왔네.
봄바람에 매화꽃은 다 지고 동백꽃만 비에 젖은 채 피어 있네.
燕子雙飛日幾回 江南行客逐春來 東風落盡梅花樹 唯見山茶帶雨開 (慕齋集 卷1)
그는 1511년(중종6)에 일본사신 붕중(弸中)이 오자 선위사가 되었는데, 이 시는 밀양 도호부 근처 연자루에 올라 지은 칠언절구로 회(灰)운이다. 제목 뒤에 쓰기를, “내가 왔을 때 마침 봄이 저물었는데 포은의 시에서 ‘매화꽃이 나무에서 이미 졌다’라고 한 것을 받들어 읽고, 서글퍼하다가 한참 후에 그 운에 따라 지었다.(余來適春暮 敬讀圃隱詩 所謂梅花樹已落盡 悵然久之 爲次其韻)”라고 했다. 늦은 봄날의 남쪽 풍광에다 자신의 서정을 보태었다. 기구와 승구는 연자루에 올라 주위에 날고 있는 제비를 자연스럽게 등장시키고 거기에 부쳐서 자신의 정황을 서술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기교라고 하겠다. 이 시가 차운한 포은의 시는 제목이 ‘헌납 이첨이 안찰사로 나가는 데 준다. 그때 김해 연자루 앞에 손수 매화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이른다.(寄李獻納詹按行 時金海燕子樓前 手種梅花故云)’이고, “연자루 앞에 제비는 돌아오는데, 낭군은 한번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네. 당시 손수 심은 매화나무야, 묻노니 봄바람에 몇 번이나 피고 졌던가.(燕子樓前燕子回 郎君一去不重來 當時手種梅花樹 爲問春風幾度開)”인데, 포은의 시는 제비가 돌아와도 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리움의 정서를 읊었는데, 여기서는 자신이 찾아왔지만 매화꽃은 이미 졌다고 하여 고인의 정서를 교묘히 이용했다. 전구와 결구는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남쪽으로 와 매화꽃을 볼 줄 알았지만 늦은 봄이라 매화는 이미 졌고 비 속에 동백꽃만 피어있다고 하여 포은의 시와는 다른 서운함의 정서를 드러내었다.
분성에서 헤어지며 주다 (盆城贈別)
연자루 앞에 제비가 나는데 무수히 지는 꽃이 사람의 옷을 물들이네.
봄바람은 한결같이 이별의 한을 더하는데 애닯게 봄은 가고 객도 돌아가네.
燕子樓前燕子飛 落花無數惹人衣 東風一種相離恨 腸斷春歸客又歸 (慕齋集 卷1)
이 시는 일본사신 붕중(弸中)과 김해에서 이별하며 그에게 준 칠언절구 증별시로 미(微)운이다. <국조시산> 이하 시선집에는 결구의 “또한(又)”이 “아니(未)”로 되었다. 분성은 김해의 옛 이름이다. 기구는 앞에 소개한 정몽주의 시에서 기구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제비가 연자루 앞에 정답게 날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그들이 그동안 사이좋게 지냈음을 암시하게 했다. 승구는 늦은 봄날 지는 꽃잎이 옷자락에 달라붙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동시에 이별하는 손님과의 아쉬운 정을 절묘하게 표현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기구와 승구에서 경치를 그리고 난 다음, 전구와 결구에서는 이별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전구에서 따뜻한 봄바람 속에 이별하려니 더욱 한스럽다고 하였고, 결구에서 봄과 객이 모두 떠나가니 애를 끊는 것 같이 서운하다고 하였다. “객도 또한 돌아가네.”로 하면 일본사신이 돌아가게 된 사실을 말함이고, “객은 돌아가지 못하네.”로 하면 자신만 홀로 남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태수 박조가 술을 갖고 찾아오다 (朴太守稠載酒見訪)
희부연 꽃 단장한 태평스런 봄이라 태수는 틈을 내어 숨은 백성을 찾아왔네.
술에 취해 하늘에 달 뜬 줄을 몰랐더니 뜰에 가득 꽃그림자 사람을 어지럽게 하네.
煙花粧點太平春 太守乘閑訪逸民 醉後不知天月上 滿庭紅影欲迷人 (慕齋集 卷4)
그는 기묘사화에 조광조 일파라고 파직되어 이천의 주촌(注村)에 은거하였는데, 이 시는 1524년에 술을 가지고 찾아온 이천 군수 박조를 맞아 쓴 칠언절구로 진(眞)운이다. 은거생활 중에 고을수령이 찾아준 것에 대한 흡족함과 술에 취한 흥취를 표현하였다. 기구는 태평스런 봄날을 읊은 것이다. 신진사류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내쫓긴 기묘사화(1519)가 지난 지 5년 후라 그도 은거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모양이다. 희부옇게 단장한 봄날이라고 하여 꽃피는 봄날의 화사하고 편안함을 부각시켰다. 승구는 이천 군수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사실이다. 스스로를 ‘편안한 백성(逸民)’이라고 하여 학문과 교육에 만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구는 태수와 함께 술에 취한 모습이다. 하늘에 달이 뜬 줄도 모르고 태수와 더불어 술 마시며 대화했다는 것이다. 결구에서 시인은 숨겨둔 경이감을 제시하였다. 술에 취해 몰랐는데, 뜰에는 달빛에 어린 꽃 그림자가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구에서 말한 희부옇게 단장한 태평스런 봄날의 호응이기도 하다.
용문산에 놀러가 꼭대기에 오르다 (遊龍門山登絶頂)
걸음마다 위태로운 돌 비탈을 기어오르니 시야가 확 트임을 보네.
한가한 구름은 먼 포구에 아스라하고 새는 아득한 하늘가로 사라지네.
골짜기마다 잔설은 남았는데 여러 숲에서 저녁 바람이 울리네.
하늘 끝에 회포는 아득하고 외로운 달이 다시 동쪽에서 돋는구나.
步步緣危磴 看看眼界通 閑雲迷極浦 飛鳥沒長空 萬壑餘殘雪 千林響晩風 天涯懷渺渺 孤月又生東 (慕齋集 卷5)
이 시는 그가 1526년(중종21) 양평의 용문산에 올라 느낀 호쾌한 기분을 읊은 오언율시로 동(東)운이다. 수련은 산정으로 오르는 과정이다. 돌 비탈길을 기어오르는 어려움과 정상에서 바라보는 확 트인 시야를 강조하기 위하여 같은 글자를 겹쳐 썼다. 함련은 정상에서 둘러보는 조망이다. 먼 구름 아래로 보이는 한강의 포구와 아득하게 하늘가로 사라지는 새를 보고 있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이 구절을 “가슴까지 확 트인다.(胸次亦豁)”고 평했다. 원경을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한 데서 활연한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련은 산 아래 가까운 곳을 내려다 본 근경이다. 높은 산의 골짜기라 아직 잔설이 남아 있고 저녁바람이 숲을 울린다고 하여 이른 봄날의 써늘한 느낌을 담았다. 미련은 저물녘에 산에서 느끼는 객수와 달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산정에 올라 자신만이 아득히 세상 끝에 서 있는 것 같이 외로운 감회에 빠졌다가 동쪽에서 달이 돋아오는 것을 보고 새로운 희망과 위안을 얻는다고 마무리하였다. 높은 산에 올라서 느낀 자연의 광활함과 인생의 외로움에 대한 감회를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
용인 최광윤 자박의 시골집 벽에 쓴 운에 따라 (次崔龍仁光潤子璞村居壁上韻)
늙어서 한가히 지내는 맛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홀로 아끼는데
차를 달여 마른 폐 다스리고 약초 심어 남은 날을 보호하네.
아무렇게나 보던 책 꽃나무 아래 던져두고 두던 바둑은 술상 옆에 흩어버리네.
달밤을 기다려 거문고 타니 듣기를 마치자 더욱 기쁘구나.
老得閑居味 無人獨自憐 鍊茶蘇渴肺 蒔藥護殘年 亂帙抛花下 殘棋散酒邊 鳴琴須月夕 聽罷更欣然 (慕齋集 卷5)
이 시는 1526년 친족인 용인군수 최광윤의 시골집 벽에 걸린 시를 보고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은 네 수의 오언율시 중 첫째 수로 선(先)운이다. 전원생활의 여유롭고 한가한 즐거움을 표현하였다. 수련은 대뜸 주지(主旨)를 앞에다 내건 것이다. 출구(出句)와 대구의 의미가 불완전하여 두 구를 이어야 의미 연결이 되도록 만든 점은 송시풍(宋詩風)을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들은 늙어 한가한 맛을 모르지만 자신은 그것을 알아 즐긴다는 뜻이다. 함련 이하는 한가하고 여유로운 전원생활의 실례를 늘어놓은 것이다. 함련은 건강을 위한 보양이다. 폐에 좋다는 차를 달여 마시고, 여러 가지 약초를 심어 노년의 건강에 대비한다고 하였다. 경련은 자유로운 생활이다. 책을 읽다가 싫증나면 꽃나무 아래 던져두고, 바둑을 두다가 술상을 벌여놓고 손님과 대화한다고 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허균도 <국조시산>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한가롭게 살아 자유롭기 그지없다.(閑適自在)”라고 평했다. 미련은 한가로움의 절정이다. 달이 떠오르자 거문고를 타고 그 소리와 어울려 자신과 우주가 하나로 동화되었음을 실감하여 기쁘기 한량없다는 것이다. 그는 벼슬에 나가면 민생을 위한 개혁정치를 실천하고 전원에 돌아오면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자족적인 전원생활을 이렇게 여유롭게 형상화하였다.
[출처] 김안국의 한시|작성자 jase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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