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 아이유에게 내가 몰입하는 이유 -
나의 드라마 덕후 변천사를 말하자면, 모래시계에서 부터 시작해서 커피프린스, 파스타, 시크릿가든, 그리고 시그널 이후 나의 아저씨에까지 이르렀다. 우연히 처음 몇편을 보거나, 중간에 잠깐 보다가 “이거 괜찮네” 하게 되면 그때부터 집중해서 보게 되는 스타일이다. 이야기 구조가 탄탄하고, 연출이 세심하고 짜임새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드라마에 집중하다보면 어떤 스트레스 같은 게 해소되는 느낌이다. 달달한 로맨스에 빠져 엔돌핀이 솟아나기도 하며, 머리가 복잡한 날은 기분전환도 하게 해주고, 의구심이 전혀 들지 않을만큼 짜임새있게 연출된 잘 짜여진 드라마 한편을 보고나면, 심하게 말하면 카타르시스도 느껴진다.
나는 그렇다. 이처럼 긴 세월동안 드라마덕후 변천사를 지나오면서 드라마를 골라보는 안목도 생겼다.
“나의 아저씨”가 요즘 내가 가장 볼 만하다 느껴지는 수작이다.
아이유의 낮고 감정없는 목소리. 냉소적이고 창백한 얼굴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아이유의 극중 이름은 이지안.
삶에 지친 스물한 살 어린 여자.
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어른이라 하기엔 너무 이른 스물한 살. 사채빚을 잔뜩 남겨놓은 채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더 어릴 때 돌아가셨다. 여섯 살에 할머니와 단둘이 남겨졌다. 이후 귀도 들리지 않고 거동도 불편한 할머니를 돌보며, 하루하루 닥치는 대로 살고, 버는 족족 사채빚을 갚아나가며, 참혹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어쩜 당연하게도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하다. 낮에는 회사에서 파견직으로 일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알바하며, 손님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몰래 가져와 끼니를 때우고 회사에서 몰래 가져온 커피믹스를 한꺼번에 세개씩 타 마시며 피곤함과 주린 마음를 채우곤 한다.
세상을 다 안다는 듯한 말투.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절대 하지않는 굳게 다문 입술,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혈색없는 창백한 표정. 가냘픈 어깨와 하얗게 드러난 발목이 시리다.
차가운 세상을 살아야했기에 거칠고 냉소적이며, 감정을 잃어버린듯한 무표정이지만 할머니에게만은 따스한
스물한 살의 지안이.
할머니만이 지안이의 살아야할 이유였고, 지안이가 버틸수 있게 해주는 기둥이었을 것이다.
병원비가 없어서 요양병원에서 밤늦게 할머니와 함께 몰래 도망쳐 나오는 지안이.
아무리 친절하고 상냥해도 지 식구 건사 안하는 애가 있구, 아무리 싸가지없구 무뚝뚝해도
지 식구 건사하는 애가 있어, 누가 더 착한 거야?
지안이를 감싸며 이렇게 말하는 아저씨, 박동훈 부장.
그렇게 출구라고는 없어 보이는 삶에 어느 날 아저씨가 나타났다.
나이 어린 여자아이와 중년아저씨와의 그렇고 그런 멜로가 아니다.
지안이는 돈 때문에 박동훈 부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면서, 그에 대해 알게 된다. 보통의 직장 상사들같은,
그저 그런 아저씨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하믄 월5,6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 있을까?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지안이가 자신에게 한 말이 계속 떠오르는 아저씨 박동훈.
" 누가 나를 알아. 나두 걔를 좀 알거 같구. 그래서 슬퍼, 나를 아는게 슬퍼. "
#박동훈과 이지안의 대사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 보다 쎄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아파트는 평당 30킬로 하중을 견디게 설계하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나 강당은 하중을 훨씬 높게 설계하구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쎄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인생의 내력이 뭔데요?
몰라.
나보고 내력이 쎄보인다면서요
이런저런 스펙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이력서보다
달리기 하나 쓴 이력서가 훨씬 쎄보였나부지.
지안이와 아저씨는 이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공감하기 시작한다.
부장 박동훈은 지안이가 어린나이에 할머니와 단 둘이 남겨져서, 귀도 안들리고 거동도 불편한 할머니를 혼자 돌보고 있고, 사채빚을 갚아가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무료로 들어가실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가 있음을 알려주고 할머니를 업어서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직원들 사이에서 서먹서먹하니 섬처럼 지내는 지안이에게 회식자리에 함께 가자고 하고, 혼자 왕따처럼 앉아있는
지안이에게 고기를 건네기도 한다.
"나와 친한 사람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게 좋아서"라며 우는 지안이
지안이의 어린시절 얘기를 들은 아저씨는 사채업자 이광일을 찾아가 빚이 얼마냐며 대신 갚아주겠다고 하고, 불쌍한 애를 왜 패냐며 몸싸움까지 벌인다.
지안이가 자신과 할머니를 괴롭히는 사채업자를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 같아도 죽여",
"내 식구 패는 놈들은 다 죽여" 하고 말하며, 자신을 이해해 주자 오열을 떠뜨리며, 세상에 대한 원망과 설움을
토해낸다.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하고, 사채업자를 찾아가 몸싸움까지 벌이는 나의 아저씨를 보고, 지안이가 느끼는 감정은 어떠했을까?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사랑? 그렇게 오글오글 간지러운 감정은 아니다.
세상 아무것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함과 다정함. 그리고, 한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오는 안도감. 그랬다.
바로 안도감이다.
그래 나와 친한 사람중에도 이런 믿음직한 어른이 있어.
나를 도와주고 이해해주며, 힘든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하는 사람. 전화하면 언제든 뛰어오겠다고 말하는 어른 아저씨.
부모님을 모두 잃고, 여섯살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며, 할머니와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지안이에게 아저씨는 엄마이자 아버지이며, 동네 다정한 아저씨이고 속 깊고 말없는 친구 같은 존재다.
박동훈과 이지안의 아래 대화에서는 지안이게게서 아저씨가 갖는 정체성이 드러난다.
#지안.
어차피 한 사무실에서 얼굴보기 불편한 사이됐구
회사에서 나 때문에 골치아픈거 같은데
다 얘기하구 그냥 짤라요. 난 아쉬울거 없으니까.
#아저씨.
안짤라.
이 나이먹어서 나 좋아한다고 했다고 자르는 것도 유치하고
너 자르고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면 아는척 안하고 지나갈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소화안돼
너 말구두 내 인생에 껄그럽고 불편한 인간들 널렸어.
그딴 인간 더는 못 만들어. 그런 인간들 견디고 사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더는 못 만들어
그리구 학교 때 아무 사이 아니었어도, 어쩌다 걔네 부모님 만나서 인사하구 몇 마디 나누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 아니게 돼. 나는 그래.
나 니네 할머니 장례식에 갈거구, 너 우리엄마 장례식에 와.
그니까 털어. 골부리지 말구 털어.
사람들한테 좀 친절하게 하구.
인간이 인간한테 친절한거 기본아냐. 뭐 잘났다고 여러 사람 불편하게 퉁퉁거려.
여기 뭐 너한테 죽을 죄 지은 사람 있어? 직원들 너한테 따뜻하게 대하지 않은 거 사실이야.
앞으로 내가 그렇게 안하게 할 거니까. 너두 잘해.
나 너 계약기간 다 채우고 나가는 거 볼거구. 딴데서도 일 잘한다는 소리 들을거야.
그래서 십년 후 든 이십년 후 든 길에서 너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아는 척 할거야
껄끄럽고 불편해서 피하는 게 아니구, 반갑게 아는 척 할거라구
그렇게 하자.
그러나 어느 한 분이 있어, 이들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그의 양손으로 떠받들어 주고 있다.
- 가을, 릴케의 시 中에서 -
아저씨는 이렇게 밑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존재.
어떤 일을 해도 품어줄거 같은 한 없이 너그러운 어느 한 분이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남자답거나 시원시원한 성격도 아니고,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 착하고 경쟁하기 싫어하고, 곧이 곧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한 보통의 아저씨. 흔한 농담도 할 줄 모르고, 부끄럼 많고, 그러나 한결같은 그 속 깊은 아저씨에게 외롭게 자라온 지안이가 호감을 갖는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 호감은 점점 이성에게서 느껴지는 연정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 나도 나를 지켜줄 든든한 어른이 있다는
안도감으로 바뀌게 된다. 상처입고, 힘없는 작은 영혼을 치유해주는 힘이 있는 강력한 신뢰감이다.
나에게도 그런 아저씨가 있었음 좋겠다.
나의 엄마도, 나의 아버지도 나의 아저씨가 되어주지 못했다. 남편도 나의 아저씨는 아니었다. 어쩜 남편에게도 나의 아저씨가 필요했을 지 모른다.
능력이 뛰어나지도, 돈을 잘 벌지도 않지만, 나에게만은 뭐든 해주는 아저씨.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옛날의 잘못,
그거 암것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아저씨. 누가 나를 해하려고 하면, 금방이라도 달려와 나대신 싸워 줄것같은 아저씨.
내가 그토록 지안이에게 몰입하는 까닭은 이런 아저씨가 내게도 있었음 하는 이유 아닐까?
보면 볼수록 세상의 다양한 아픔들을 품고 있는 드라마.
다양한 아픔들을 어루만져 줄 거 같은 드라마.
드라마는 이제 끝을 향해서 가고 있지만, 끝은 언젠가 반드시 오고 만다는 것을 모르고 싶은 드라마.
오늘도 본방에 재방에 다시보기까지 하면서, 슬프고 어두운 분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위로의 말들과 장면장면에 딱 들어맞는 OST를 들으며 나는 나를 치유한다.
박동훈과 박기훈, 박상훈 형제, 그리고 나라와 엄마 등, 등장인물들의 주옥같은 대사들이 툭툭 튀어 나온다.
너무너무 재기발랄하고, 진주같은 대사들이지만, 지금은 아저씨와 지안이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싶다.
첫댓글 아....이렇게 멋진 리뷰는 처음이에요.
나의아저씨...우리 부부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 써 주셨네요.
고봉과 제가 수요일 목요일에는 약속도 안 잡는 이유이기도...
좋게 봐주시니 감솨감솨~~!!! ㅎㅎ 오늘도 열심히 보자구요~~^^
이시대 이사회는 어른이 필요한것같아요 골목에서 마주쳐도 두렵지않고 든든한 그런 어른
소중한 리뷰 감사드려요
아저시가 언제부터인가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데, 원래는 푸근하고 정감가는 단어였습니다. 그런 어른들이 다시 많아지길 바라면서~ 감사해요~~^^
쉬는날 몰아치기한판 해봐야겠네요.읽다보니 궁굼증이 화악~^^
네~ 곡 보세요~ 넘 재밌어서 끊지 못하실 거에요~~^^
이드라마보면 가슴저밑에서 서러움이 울컥 울컥 ~~
이선균 목욕탕 목솔 어쩔 ~~~
이건 난 못 본거 같은디 목욕탕 장면이 있었어욤?
이선균 목스리가 목욕탕에서 울리는 소리가나서 ㅠ
아항~~ ㅋㅋ
드라마 재밌게 보고 계시나요? ㅎ 누가보면 드라마 제작진인줄~~^^
@너머니/이미옥/도남 만약 했다면...박기훈이? 막내처럼 망쳤을걸요.ㅎㅎ
@삼보/김세형/월림 망해도 행복하시잖아요~~^^ 그럴수 있는것도 굉장한 능력이죠~~^^
중간까지 읽다가....아까워서 보고 나서 다시 읽기로^^ 감사해용~~
이미 본 드라마들만 찾아다니던 목마른 드라마 생활에 한줄기 소나기를 내려주셨네용~~~^^
아이~~ 신나라~~~~
읽다가 끊다니~~ 그 단호박같은 열정 대다납니다~~~ ㅎ 정말 재밌어요~ 꼭 보세요~^^
@너머니/이미옥/도남 연휴 1박 2일동안 12편 정주행...지금 다 봤습니다. 울림을 주는 책이나 영화를 보면 좋은 친구를 만나
얘기하는 것처럼 일상에도 여운이 남는데...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프리카원숭이/洪景今/위미 다 보셨다니 추카드려요~~^^ 이번주엔 각자의 집에서 함께 공감하며 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