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절 제4주일)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행4:5~12; 요일3:16~24; 요10:7~18
우리가 예배 전에 부른 노래, <아무 것도 너를>은 16세기의 아빌라 데레사의 기도시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nada te trube(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마십시오) 혹은 solo Dios basta(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라고 불리는 이 기도시는 진작부터 유명해서, 그 동안 여러 노래로 만들어졌습니다. 떼제 노래, “두려워말라” 도 이 시에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도/ 하느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시다/ 인내함으로써 모든 것에 도달하십시오/ 하느님을 품은 자는/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nada te trube/nada te espante/ todo se pasa/ Dios no se muda/ la pacencia/ todo lo alcanza/ quien a Dios tiene/ nada le falta/ solo Dios basta
이 시는 우리 신앙의 핵심을 바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데레사는 “(세상의) 아무 것도 너를 방해할 수 없다, 아무 것도 너를 놀라게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없으니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아무 것도 방해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놀라게 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을 살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말라고,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말라고,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아니 그래야 할 이유는,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도,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나님은 불변하시니) “그 모든 것” 속에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이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듯이,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이며(약4:14),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우리는 풀이요 들의 꽃과 같을 뿐입니다. 시편시인이 말하듯이, “우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은” 존재입니다(시편90:5~6) 이것은 우리 기독교에서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지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불교의 반야심경에 보면, 그 첫 마디가 “조견오온개공”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관자재보살이 저 피안에 이르는 가장 깊은 최고무상의 지혜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덩어리들의 결합체(오온: 색수상행식 다섯 개의 덩어리)더라 하는 말이죠. 이걸 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도일체고액”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건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든 고대의 지혜들이 전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아니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아침에 잠시 일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이면 사라지는 풀과 같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은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불변하신다. 이 말은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잠시 지나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힘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입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자, 승리하자! 이건 마치 힘없는 건달들이 힘센 보스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힘없는 약자와 힘센 보스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SOS를 치면 달려오는 구조대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힘센,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그런 대상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있게 한 원천이시며 바탕이십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공간이십니다. 소리를 있게 하는 침묵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바다와 바다에 일고 있는 파도와 같습니다. 바다에 파도가 일고 또 사라집니다. 그러나 바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다는 파도의 원천이며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고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 안에서 사라집니다. 아니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있습니다. 우리를 비롯하여 모든 우주 삼라만상은, 모든 피조물은 있다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로 나와서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 안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원천, 그 바탕, 그 공간, 그 침묵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품은 자는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자신이 바다와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은 알게 됩니다. “부족함이 없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자신이 그 바탕과 원천과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바탕, 그 공간, 그 침묵은 바로 행복의 원천이고, 사랑의 원천이고, 평화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알아차린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고, “양의 문으로 드나드는 양”이라고 부르고, “선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그 꼴을 먹는 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한 것이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으므로(행17:28)
여러분,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할 때, 세상의 것 다 필요 없고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위 세상 것 갖지 못한 사람들이 그 보상으로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세상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피조물들과 경쟁하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바다는 파도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파도를 만들고 파도가 일게 만들 뿐입니다. 너른 들판은 그 위에 핀 꽃들과 나무들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너른 품으로 꽃과 나무를 품고 자라고 열매 맺게 할 뿐입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은 별들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별들이 자리를 잡고 거대한 궤도를 돌도록 공간을 제공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고 유지하고 성장시킬 뿐입니다. 그러다가 사라질 때 온전히 받아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빌라 데레사는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방해받지 않고 살 수 없고, 놀라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 온전히 하나님을 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실패와 실수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아직도 외부의 재난과 궁핍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건사고들에 방해를 받습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많은 일들로 인해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그런 일들을 극복하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욱 근원적인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에서 탈락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 데레사는 말합니다. “인내함으로써 모든 것에 도달하십시오.”(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여기서 인내함은 무조건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의 힘듦을 참아내라, 억지로라도 이겨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내함으로써 모든 것에 도달하십시오”라는 말은 계속해서 우리의 본질로, 바탕으로,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질이, 우리의 바탕이,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사랑임을, 행복임을, 평화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할 것이고, 실패할 것이고, 실망할 것이고,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함으로 모든 것에 도달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의 바탕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누릴 행복이고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1966년 12월 어느 수녀님(안젤라 콜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씁니다. “나는 엄청나게 서툴고 잘 틀린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I just live.)” “나는 단지 살아갈 뿐입니다”는 말 속에, 인내함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겁니까? 바탕을 알고, 원천을 알고, 근원을 알고 사는 것!
우리는 “엄청나게 서툴고 잘 틀리지만”, 그것에 대해서 반성문을 써대려고 이 땅에 온 것이 아닙니다. 자책하고 검열하기 위해 이 당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단지 하나입니다. 우리가 바다와 하나임을 깨달으려고. 우리가 바탕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함을 알아차리려고. 우리가 행복 덩어리이고 사랑 덩어리이고 평화 덩어리임을 알아차리려고. 이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자기의 실수와 실패를 꼬치꼬치 따지고 외우고 묵상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죄란 “과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라고 했지요.(하타, 죄: 헷트) 그냥 길을 잃은 것입니다. 길을 잃은 것을 알아차렸으면, “아이구, 하나님, 제가 길을 잃었네요. 돌아가겠습니다.” 담백하게 말씀드리고,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러쿵저러쿵 반성문 쓰고 군시렁거릴 틈이 없습니다. 다시 우리의 본질로, 행복 덩어리, 사랑 덩어리,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면 됩니다. (쓰레기만 주우만 쓰레기만 보입니다.) 이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토마스 키팅이 말했지요. “지속적으로 스며들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죄책감은 거짓자아에서 온다. 개인의 죄나 사회적 불의에 대해 반응하는 진정한 죄의식은 용기를 잃게 하지 않으며, 그 대신 삶을 고치도록 이끈다. 이것이 회개로의 부르심이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마귀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끊임없이 네 실수를 봐, 네 실패를 봐, 네 상처를 봐, 네 꼬라지를 봐!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용기를 잃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수하는 “나”는 아주 “작은 나”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고,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 “작은 나”입니다. 파도입니다. 그러나 “큰 나”, 바다는 그 실수, 그 상처 때문에 절망하거나 상처입지 않습니다. 그냥 품어줄 뿐이고, 받아줄 뿐이고, 또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워 또 다른 파도를 일게 할 뿐입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속지 마십시오. 마귀의 핵심과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사랑에서 떨어져 나갔다, 행복에서 제외되었다는 착각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라는 권고는 우리네 인생에서 그런 일들은 늘 있는 일일 테니, 거기에 온 마음을 두지 말고, 인내함으로 모든 것에 도달하십시오, 오히려 당신의 본성을 깨닫는데 온 힘을 기울이십시오. 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오늘 요한1서가 “사랑하라”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서론을 본론처럼 길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부활절 넷째 주일, 우리는 선한 목자에 대한 묵상을 합니다. 이 선한 목자의 요지는 앞에서 말했던 내용입니다. 단지 목자와 양은 바다와 파도처럼 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둘 사이를 그렇게 불가불리로 이해한 것입니다) 시편에 있는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지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그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목자이신 주님이 하는 일이고 사랑이신 그분이 하는 일입니다. 행복이신 그분이 하는 일이고, 평화이신 그분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맛보고 누리고 즐기면 됩니다. 맛보고 누리고 즐기는 일은 무언가를 많이 소유하는 일이 아니고, 내가 인정받는 일이 아니고, 내가 힘을 부리고 지배력을 갖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원천, 그 행복, 그 사랑을 맛보고 누리고 즐기면 됩니다. 이미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은 어떻게 한다구요? 갑자기 주님은 3인칭이 아니라, 더 가까운 2인칭으로 “주님, 그”가 아니라 “당신, 너”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아타 임마디>, 당신은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당신의 막대기와 당신의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와 너는, 여기서 하나입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당신은 나입니다.
요한복음10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에고 에이미 헤 뒤라 톤 프로바톤>) “나는 그 문이다.(<에고 에이미 헤 뒤라>)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은 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넓은 초장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그 넓은 초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통해 그 문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I AM)입니다. 더 “큰 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일고 사라지는 파도와 같지만, 더 “큰 나” 바다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바다로, 더 큰 나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들인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습니다.” 생명은 “더 큰 나”이며, 행복이며, 사랑이며, 평화입니다.
또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 아버지, 서로를 압니다. 뭘 알까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 하나라는 것, 한 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부활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사도들이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이것이 바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증거라고 설교하던 베드로에게 당시의 쟁쟁하다는 율법학자와 대제사장이 모여 힐문합니다.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다시 말해, 이런 일들은 우리가 하나임을 알게 된, 우리의 원천이고 바탕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는 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친절과 평화와 기쁨에 계속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고 자비롭고 친절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따라 가는 어린 양들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기억하게 하시고 잘 따라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당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심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과 사랑과 생명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