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에 내리는 눈/이창하
눈이 몹시도 내리던 날이었네
그것도 첫눈이었네
막 익어가는 남쪽의 겨울 섬
그곳의
소녀들이 처녀로 진화하기 시작하던 날이었네
까만 눈동자에 붉은 눈으로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듯
흰 이불을 뒤집어서 쓴 채
천 개의 붉은 심장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네
이윽고
순한 눈빛이 되어
익숙한 듯 나를 보는
수많은
소녀들이 청순한 처녀로 변해가던 날
솜이불을 뒤집어 선
예쁜 소녀들이 붉은 눈을 깜박거리며
처녀로 진화하던 날
내가 처음 당신을 느끼던 날
첫사랑, 그때처럼 현기증이 났었네
꽃잎에 내리는 눈/김 철
나 두고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해
저만큼 갔다
다시 와
까꿍 하는
너처럼 시절 모르는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맨밥 먹지 말고
레인지 안에 국 있어요
일 분만 돌리면 돼요
메모 적어 놓고도
다시 와
까꿍까꿍
너처럼
푼수 없는 사람 하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큰 눈 오시는 날/윤제림
딴 세상과 거래할 일이 있거든
이런 날에 해야 한다
천국이 망했는지 이승저승 통일이 가까웠는지
세상의 지붕이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날,
큰 눈 오시는 날
천상의 공무원들이 희망도 절망도 아무데나
묻고 덮고 흘리며 던지고 지나갈 때,
임무를 잊어버린 귀신과 도깨비들이
아이들 목덜미나 간질이며 시시덕거릴 때,
염라국 고관과 용궁의 별주부가
눈싸움을 하고 있을 때,
평양건달이 엉터리 무당 짓으로
배뱅이 넋을 불러내고 있을 때
딴 세상과 거래할 일이 있거든
이런 날 해야 한다
평복차림으로 내려온 하느님이
창식이네 뒷간에
앉아 계실 때
눈 내리는 시인의 나라/이인평
아름다운 시인들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고통 중이었습니다
주여, 시대는 늘 가난의 고삐를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짊어지고 시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인들의 마음으로 눈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시인들은 거리를 바라보며
지상에 서 있는 자신들의 언어를 통하여
사랑을 느낄지도 모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오후의 찬바람을 안고 시인들이 길을 걸을 때
시의 옷자락 같은 눈송이들이 가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눈 내리는 시인의 나라에서
주여, 겨울보다 맑은 시인들의 발걸음을 함께 따라 걷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시인들의 가슴에서 눈처럼 녹아내리는 꿈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시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듯
눈구름 사이로 노을을 이끌고 가는 해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시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여, 아픔이 흘러도 시인들의 영혼은 따뜻했습니다
당신의 언어가 시의 혈관을 흐르듯, 어느새
시인들의 자유는 깨어 있는 당신의 봄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통의 노래가 꽃잎처럼 안겨 오는
아름다운 봄의 나라를 쓰고 있었습니다
눈처럼 하얀 사랑/남낙현
눈이 내립니다
눈이 내리면 세상은 온통
하얀 그리움으로 가득찹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세상
아무도
걷지 않은 눈같이
하얀 그대의 마음
차마 하얀 그대의 마음을
내 발자국으로
더럽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세상을 뒤덮고 있는
눈의 양만큼
무지 무지
그대를 사랑합니다
세상을 뒤덮고 있는
새하얀 눈의 색깔만큼
깨끗한 마음으로
그대를 사랑합니다
시월에도 내리는 눈/문이레
괜찮아요, 아직 장롱 속 감춰둔 상자가 있고, 읽다가 그만둔 편지가 있고,
거실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화분이 있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내일이 있습니다
장미가 피지 않아도 밖으로 나가 햇빛에 빨강을 널어야겠어요!
무릎이 깨지도록 손 모으는 일
시월에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자처럼
입술을 빈 화분에 심어야겠어요
붉다는 건, 무엇이든 녹일 수 있으니까요
푸른 잎이 하나둘 사라진대도 실망하진 마세요
그 혀 속에는 말 못 한 나무가 한 그루,
상자엔 아직 선물이 남았으니까
첫눈을 기다리기엔 점점 멀어지는,
시월에도 눈이 내려, 빨갛게 물드는 그런 일
처음 한 약속은 어디쯤 머물렀는지,
그러니까, 아무런 상관없이 빨강을 담을 거예요
손안에서 사라지는 알 수 없는 색
맹렬하게 녹아내리는 붉힌 마음으로
사라져야 볼 수 있는,
오랜 고백의 자세로 간직해온
난 빨강을 믿어요
첫 눈이 오는 소리/김고니
서쪽 산이 붉은 하늘을 이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해를 삼킨 나무들이 바람에 어깨를 떨며
온밤을 지키는 소리를 들었다
고기잡이배들이 항구로 돌아오며
새벽울음소리를 감추는 것을 보았다
삼켰던 불덩이에 데어 붉게 멍든 바다,
물거품으로 흐느끼며 눕는 소리를 들었다
첫눈이 내리던 날
바람꽃이 피는 소리를 들었다
서쪽 산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슬픈
바람의 눈물을 보았다,
바다가 눕는 것보다 더 아픈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눈 오는 밤에/김용호(1912∼1973)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 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눈 내리는 마을/최서림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내린다고 하지만
둔촌동 호프집 〈눈 내리는 마을〉엔
일 년 내내 눈이 내린다
맥주잔이 몇 순배 돌고 나서 양주라도 섞이면
폭설로 바뀐다
가난한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약속도 건수도 없이 모여 염소같이 떠들다
주량껏 취하면 핫바지
바람 빠지듯 한 명 두 명 사라진다
어떤 시인은 눈을 맞으려 술잔을 들고
지붕 위에서 풍선처럼 붕붕 떠다닌다
어떤 소설가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으로 간다고 오리처럼 꽥꽥거리고 있다
어떤 평론가는 하이데거 만나러 간다며
『존재와 시간』에다 코를 처박고 있다
1차가 파할 때쯤이면 멀리 이사 간 시인, 소설가들도
부엉이같이 눈 내리는 하늘을 날아서 온다
이쯤이면, 샤갈의 마을에서 키우는
밀, 양, 소들도 첼로나 기타를 들고 몰려든다
낮이나 밤이나 눈이 내리는 〈눈 내리는 마을〉은
포인세티아 같은 시의 동네이다
응달의 눈/박미란
반쯤의 잘못이 서로에게 있다면
차라리 인사하고 가자
그것도 안 되면
온종일
그 집 앞을 왔다 갔다 해보자
서둘러 나간 입술엔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아
바람에게서 털옷을 떼어내려면
마른 가지에 앉았던 새의 발가락을 더듬어보자
새를 떠나보낸 검은 숲의 적막을 기억해보자
질척이는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집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응달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반쯤의 잘못으로 헤어진 사람
가벼운 것들이 쌓이면
얼마나 깊어지는지 아는 사람
무얼 보내줄 수 없어
가야 할 곳도 지우고 이곳에 남으려 하는지
눈이 내리고 있다/임경섭
연일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길고 무거운 몸을 뙤약볕에 지지고 있는
차고지의 시동 꺼진 702A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에 형은 쓴다
눈이 내리고 있다
쓰고 나서 형은 생각한다
이 문장이 실현될 수 있는 확률에 대해
그리고 나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든 문장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고
괜찮다
누구도 진실을 적어 내려간 적 없으니
눈이 내리고 있다고 쓰면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출발 시간이 다 되어도 기사님은 오지 않고
열없이 달뜬 시간 속에서
형의 눈내리는 문장은 삭제되기 시작하고
형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형을 모른다
눈과 얼음/나희덕
사흘 내내 폭설이 내리고
나뭇 가지처럼 허공 속으로 뻗어가던 슬픔이
모든 걸 내려 놓는 순간
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
내 몸에서
시위를 떠난 투명한 화살은
아파트 20층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
깨진 얼음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밟으며
지나가리라
얼음 조각과 얼음 조각이 부딪칠 때마다
얼음 조각이 태어나고
부드러운 눈은 먼지와 뒤엉켜 눈멀어가리라
거의 눈이 올 날씨/이 원
여러분인 나는 당신들인 나를 만나서
개구리알 같은 눈물이 눈 끝에 매달린 존재를
생각해봅시다
위쪽이 검고 아래쪽은 하얀 꼬물거리는 것들을
상상해봅시다
기타와 피아노 중에 하나를 선택합시다
기타 연주는 오른쪽 스피커에서
피아노 연주는 왼쪽 스피커에서
오른쪽 귀를 막으면 피아노 연주가 들리고
왼쪽 귀를 막으면 기타 연주가 들립니다
울음은 닮은 모양인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랐어요
다알리아를 믿기로 했어요
울음이 발음이 같잖아요
울음을 믿기로 했어요
한쪽 귀로 울음이 흘러들면
반은 얼음이에요
반은 붉음이에요 피어나려나봐요
혼자라는 것이 어려워
한 손으로 차를 따르고 한 손으로는
차를 마셨어요 계속해서
노란 물인데 꽃에서 나온 것이래요
꽃에서 나온 것을 마시는 나는 누구인가요
맞은편이 있어요 창에 대고 속삭입니다
죽은 당신 죽은 친구 죽은 나무
죽은 나무 죽은 나무 살아나는 나무
계속 셀 수 있습니다
나도! 나도!
어떻게 했겠어요
소리가 있는 곳으로
나도! 나도!
죽음은 환호밖에 모르는 입이에요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충동이 없다면 죽은 거지
내일 꼭 만나요
사월의 눈/이미산
환호와 절망은 한몸이었나
투신이 뭐예요? 피어나는 호기심과
애써 주저앉히는 숨소리
옥상 곳곳 발자국 속엔
한결같은 십자가의 자세
하얗게 식어간 등이 시뻘건 결심으로 남겨질
무렵 같은
평범한 저녁이란
어둠이 영원을 만나 빚어내는 무사와 감사
혹은 그런 믿음으로
등을 곧게 펴보는
절벽이 되돌려주는 슬로우 모션
수줍은 심장 칸칸이 숨긴
한 방울의 물기와 흩어지는 순간과
피었다 지는 단숨의 무지개들
층층의 계단을 거슬러
떨리는 보폭으로 완성하는
마지막 인사 같은
환호가 끝난 후 호명될
또 한 줌의 절망 같은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