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시문학 회의실
·일시: 2000년 2월 25일 13시-15시
·참석자: 김용오(시인)
김욱동(서강대 교수)
이상옥(창신대 교수)
정신재(문학평론가)
* 좌담회 순서
1.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입, 개념, 타사조와의 관계
2. 포스트모던과 자본주이 사회의 현상, 풍속
3.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시 현황과 문제점
4.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망
1.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입, 개념, 타사조와의 관련성
정신: 요즘 출판 문화와 전자 문화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규범이 무너지고 다양화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런 여러 가지 시대적 상황이 포스트모더니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엄밀히 따지면 포스트모더니즘도 유럽권의 포스트구조주의가 문화 현상으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 제2차 세계 대전 후 영화 산업의 발달과 함께 유럽 문화에 대한 콤플렉스와 종속성 극복 차원에서 대두된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한국에서 80년대에 리얼리즘과 함께 발달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별할 수 있을텐데요. 아울러 매체의 변화에 대한 작가들의 위기의식, 영화 산업의 발전에 대한 위기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미국쪽에서 제삼세계, 흑인문학, 페미니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죠. 먼저 이제까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입과 개념에 대해서 정리하도록 하죠.
김욱: 서양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새로운 사조, 세계관으로 시작되었고요. 우리 나라에는 1980년대 말, 그리고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소개한 사람들은 외국 문학 전공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외국 문학의 새로운 이론을 수용하면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개념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 그 개념이 분명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모더니즘에 있다고 봅니다. '포스트'란 말은 '-이후에', '-다음에'라는 접두어니까, '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의미소입니다. 곧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의미가 모더니즘이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쉬운 말로 한다면 애프터 모더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서양에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진 후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모더니즘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이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설정이라든지 그 본질이나 성격 같은 것이 애매하게 소개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정신: 어떤 의미에서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 상황, 곧 일원적 경직성을 극복하고 다원적 유연성을 지니는 문학 세계 등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김용: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을 특징짓는 일종의 시대 정신이며 다원적 문화 현상입니다. 리얼리즘이 현실 재현의 문제에 의심하지 않았다면, 모더니즘은 현실의 재현성 문제 회의에서 태어났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현실의 재현성 문제보다는 그 허구성이 문제되고 현실과 재현성 문제가 해체되죠. 그러니까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맞물리게 되어 있어요.
저는 서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책을 추려 보니까, 이합 합산의 <포스트모더니즘>, 알렉스켈리니코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김욱동 편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이승훈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등이 눈에 띄더군요.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첫 페이지에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해서 물고기 한 마리를 그려 놓고 '자웅동체'라고 써 놓고, 그 밑에는 집을 그려 놓고 큰 창문을 한 그려 놓았더라구요.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 놓고 언제라도 보면 알 수 있도록 해 놓았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물고기도 '자웅동체'라는 것이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과 따로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창문 그려 놓기'도 마찬가지예요. 옛날에는 추위를 덜 타기 위해서 창문을 적게 만들었지만, 살아 보니까 답답하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창문을 크게 달아 놓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의 틀 속에 새로 크게 창문을 달아 놓은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예요. 결론을 내리자면 이합 핫산의 말대로 우리는 조금은 리얼리즘적이고, 조금은 모더니즘적이고, 조금은 포스트모더니즘적입니다. 세 개를 동시에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념을 정리할 때 모더니즘과 관련시켜 봐야만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개를 분리시켜 보지 말고 변증법적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 포스트모더니즘 도입 문제에 대해 김욱동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위기, 모더니즘의 종말'이라는 의식과 더불어 6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거의 보편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고 보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80년대 후반에 소개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학사상>에서는 70년대 말에 이어령 교수가 [세계 지성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당시에 한창 포스트모더니즘 현장에 있었던 피들러, 토도로프, 바스 등을 초대해서 대화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다가 80년대 초에 정정호 교수가 <심상>지에 81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 등을 번역 소개하고 그러다가 85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말에 오면서 급격하게 확산되었는데, 그러나 우리 나라에 문학 작품들이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을 지니면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량 소비 문화의 확산이라든지, 아니면 컴퓨터 등의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더불어 후기 자본주의의 특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 나라의 경우에 90년대에 적기가 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상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욱동 선생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계시는데, 모더니즘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김욱: 저는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일차적으로 보면, 모더니즘가 급격한 단절을 뜻하는 것 같지만, '포스트'라는 접두어 속에는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론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모더니즘과 다른 사조라면 다른 새로운 용어를 쓰지 굳이 모더니즘 앞에 접두어를 붙일 필요가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이중적인 관련성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첫째 관련성은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이라는 뿌리가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식물이 줄기를 뻗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모더니즘을 전제로 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해야겠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두 번 째 입장은 모더니즘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이지, 기존의 모더니즘과 차이점이 없다면 굳이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계승인 동시에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꾀하고 있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모더니즘의 연장선이며, 어떤 면에서 단절일까를 살펴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파악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이거든요. 리얼리즘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시킨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면, 모더니즘은 그러한 재현성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한 것이거든요. 과연 예술가들이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시킨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모더니스트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재현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모더니즘이 재현성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는 거죠. 그러니까 리얼리스트들이 눈에 보이는 외부의 실재, 곧 리얼리티에 관심을 가졌다면, 모더니스트들은 주관적인 면, 내면적인 실재에 관심을 가졌지, 여전히 재현에 대한 믿음은 떨구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재현성에 대한 회의가 좀더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이죠.
그 다음에는 중심의 문제입니다. 모더니즘에서는 여전히 중심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는 절대적인 중심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두 가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모더니즘이 여전히 중심을 지향하고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중심적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는 계승과 비판이라는 양면적인 관계에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김용: 김교수님 얘기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두 개를 아울러서 함께 보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 이제 범위를 넓혀 타사조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80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리얼리즘적인 요소도 원용했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암살되고 정치적 음모가 위선으로 가려지며 진실이 은폐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경직된 이데올로기들이 해체를 맞이하게 됩니다. 극도의 억압된 현실에서 진실을 갈구하는 민중의 저항이 결집되며, 후기 자본주의의 득세로 문화가 상품화되고, 순수와 대중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중간문학이 나타납니다. 광고에 의해 베스트셀러가 양산되기도 하죠. 이때 사람들은 무엇보다 위선에 가려진 은폐를 들춰내고 진실을 갈구하며 사회성에 대한 과부하를 나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의 386세대가 논리적인 힘을 얻은 것도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이나 경직된 전세대의 관념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당시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극도의 억압된 현실에서 극단적인 해체시가 나왔다는 것도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상: 논의를 진행하다 보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은데요. 재현성의 문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즘에 대한 불신이 극단화되는 과격한 모더니즘적인 측면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모더니즘에서 발전한, 진전된 모습을 보이는데, 한편에서는 구조주의와 연결되어 가지고 탈중심으로 나아가니까 모더니즘과 탈구조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얘기가 진전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신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서양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렇게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절충되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80년대의 전위적인 실험시를 보면 리얼리즘적 요소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가 혼용되는 양상도 보입니다.
정신: 맞습니다.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즘적인 요소, 모더니즘적인 요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구별할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잠깐 그 통시성을 고찰해 보면 이렇습니다. 30년대 모더니즘은 기교의 우위성과 도시 체험의 내용과 형식상의 새로운 감각을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李箱詩의 경우처럼 초현실주의 양상도 있었던 것이죠. 아울러 임화, 백석, 이용악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현실 비판을 위한 담시체 형식도 나타납니다. 50년대엔 전쟁 후의 허무주의와 개인주의가 나타나고,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적 삶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법이 모색됩니다. 60년대엔 김수영의 일상시가 선을 보이고, 현실 비판의 요설체도 보입니다. 그러다가 80년대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90년대에 이르러서 민중시는 현실 비판 타겟을 잃고 방황하며, 포스트모던시는 일상성과 기표의 미끄러짐이 문화의 상품화·대중화와 맞아 떨어집니다.
이러한 각 시대마다의 특색이 한꺼번에 포스트모더니즘 양상에 도출되었다고 봅니다.
2. 포스트모던과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 풍속
김욱: 포스트모더니즘과 자본주의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특히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 자본주의와의 관련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리얼리즘도 자본주의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르네스트 만델이라는 독일의 경제학자는 서구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와 관련시킨 적이 있거든요. 다시 말씀드리면 리얼리즘은 초기 자본주의, 시장 자본주의와 리얼리즘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모더니즘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세 번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인 다국적 자본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요즘 보면 국경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자본이 국경을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다국적 기업이 판을 치는 다국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봅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자본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 또 다국적 기업이 세계 곳곳에서 행세하고 있는 산물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국적 상업주의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만, 그 특징을 따지고 보면 다국적 자본주의라는 경제 제도가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가 생각됩니다.
이상: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다국적 자본주의적 요소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런 측면에서 특히 9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토착화된 것이 잘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80년대가 어떻게 보면 이데올로기의 시대로서 리얼리즘의 요소와 모더니즘의 양상도 나타났지만, 우리 상황은 여러 사조들이 혼재되었지만, 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 같습니다. 동구권이 몰락되고 문민 정부가 들어서고 하면서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이 약화되고, 후기 자본주의 현상이 나타나면서 문화가 상품화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더니즘이 고급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문학이 진지함보다는 상업주의적으로 흘러가고, 고급 문학,대중 문학, 통속 문학 등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신현림의 시가 성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상품화된 것도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문학의 통속화, 상업화가 일반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용: 이제 하나의 문화, 사조, 이즘이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활 속에 동화되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가 서로 구별 없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게 사실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이거든요. 예를 들어 서편제와 결혼 이야기, 코카 콜라와 식혜, 김건모와 조수미, 백건우와 이정현,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 21세기와 노자 등 등을 보세요. 서로 상대적인 것들이 전혀 거부감 없이 수용됩니다. 그것을 개념화한다면 무질서 속의 질서, 부조화 속의 조화, 불균형 속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시 현황과 문제점
김용: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20세기 후반의 정신 현상이고 시대 현상입니다. 그것이 다문화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 출발은 미국적 산물(1960)로서 건축 분야에서 시작해서 연극·비디오·댄스·미술·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미국도 시보다는 소설쪽에서 많이 부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우를 한 번 보죠. 우리 나라에서는 60년대 김수영, 70년대 이성부, 황지우, 최승호 등의 시에서 그 징후가 나타납니다. 그 특징으로는 도시 문명의 반자연성, 또는 시의 의미를 해체하는 등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적 장치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를 정리해 보니까, 패스티쉬, 패러디, 키취, 미니멀니즘, 시소설 등이 나타나 모더니즘의 꼴라쥬 수법과 대비됩니다.
구체적으로 박상배 시인의 [헌시·3]을 보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부활] 등에다가 자기 의견을 상호 텍스트적으로 교환하는 대화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일종의 혼성 모방이거든요. 박남철의 <용의 이름으로>라는 시집은 전부 잘 알려진 시인의 시를 그대로 옮겨 놓고 뒤에 사족 몇 마디를 붙여 놨어요. 패러디는 풍자적 요소가 있지만, 혼성 모방은 전혀 의미도 없이 모방해 놓은 것인데, 박남철 시인은 그 징후가 뚜렷이 나타납니다. 또 김경린 시인은 <시문학>지에 시소설을 연재했는데, 시 속에서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무슨 사건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일본 것을 가져다가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리고 키취 기법은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시의 산문화입니다. 또한 미니멀리즘(minimalism)도 재미 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현상인데, 그 출발은 샤무엘 베케트의 [숨결]이라는 연극에서 출발했어요. 그 연극은 35초만에 끝나 버립니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이라는 아주 짧은 것이 미국에서 유행했습니다. 아람사 로얀이라는 시인은 apple(사과) 한 단어로 시 한 편을 썼습니다. 한국에서는 목포에 사는 조승기 시인의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를 보면 단시적인 것이 많이 나옵니다. [봄날]이라는 시를 보면 '신발에 고이는 뻐꾸기 울음', 딱 그것밖에 없습니다. 또 [봄비]라는 시에서도 '겨울산의 향기'라는 구절밖에 없습니다. 그런 단시들이 그 시집에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 시인이 미니멀리즘을 의식하고 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도 35초만에 끝나는 [숨결]이라는 연극과 같은 시가 나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월간문학> 월평에도 왜 이런 단시를 쓰는 시인들이 안 알려졌는가 하고 써 놓았습니다. 다른 산문시적인 것은 많이 나오는데 그런 미니멀리즘적인 단시들은 잘 안 나왔는데, 그걸 지난번에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이름 붙인다면 손바닥에 얹혀 놓고 보는 掌篇詩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집 한 권 속에 삼분의 이가 그런 시였습니다. 잘못하면 그것이 잡문으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은 잡문적인 요소를 묘하게 극복해 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소설가예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나왔는데, 소설도 쓰면서 시집도 너댓 권 냈습니다. 그 시를 보고 한국에도 이런 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욱: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가운데 몇 가지를 든다면 장르 확산이나 탈장르를 들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시는 시, 소설은 소설, 비평은 비평 등으로 자기 영역을 지키고 다른 장르와의 결합하는 것을 이민족끼리 결혼하는 것처럼 부정적으로 봤거든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는 각각의 장르가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시의 경우를 보더라도 운문을 주된 성격으로 하는 시가 좀더 산문적으로 장시화되는 경향이 김경린 시인의 시에서 나타나는데, 그러한 특징을 선생님이 들어 주셨구요. 그 다음에 상호텍스트성이라 해서 모더니즘만 같아도 작가들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과 같은 위치를 부여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는 과연 무엇이 창조적인 행위냐고 반문하면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성경 구절도 있듯이 모든 문학 작품이라는 것이 이미 기존의 쓰여진 것을 다시 조립해서 만들어내는 거다. 그래서 창조의 개념보다는 재활용의 개념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설득력을 얻고 있거든요. 그것을 상호텍스트성이라 부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패러디'라는 말도 모더니즘 시대에는 비판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패러디라는 말은 좀더 가치 중립적이고 유희적인 성격이 강하거든요. 그리고 패러디가 모더니즘의 장치라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패스티쉬, 혼성 모방이라는 것이 중요한 장치로서 사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시인으로 박남철 시인이 있고, 장정일 시인이 김춘수의 [꽃]을 가지고 패러디화해서 쓴 시들이 있잖아요? 이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 있는 시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작업들이 많이 성행하고 있는데, 패스티쉬, 패러디, 혼성 모방을 지적해 주셨고, 그 다음에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시를 보면,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상업 문화, 대중 문화, 그런 것이 키취 문화라고 하는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죠. 이러한 상업 문화,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한동안 기승을 부린 겁니다. 그런가 하면 해체시라고 해 가지고 형식의 파괴, 모더니즘 시대만 해도 시는 질서와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형식을 일부러 깨트리거든요.
김용: 황지우 같은 사람
김욱: 황지우의 경우나 박남철의 경우가 대표적이죠. 형식의 파괴, 질서의 파괴가 중요한 요소로 꼽게 되고, 또 한 가지는 언어의 유희에 탐닉하는 겁니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언어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경향,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언어의 유희 그 자체에 탐닉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문학이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의 목적성을 지향하는, 언어의 유희를 강조하는 시가 나타나는 것이죠.
이상: 포스트모더니즘의 시, 즉 황지우, 박남철, 유하 등의 시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죠. 특히 박남철 시인이 최근에 대담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신은 해체라는 개념을 처음에 써 놓았는데 이것을 이윤택씨가 '해체시'라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 자신은 그런 영향을 전혀 받은 것이 아니고 이상을 모방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이윤택씨가 '해체시'라고 말했다는 것이죠. 황지우의 경우는 서구의 포스트모던 영향을 받아 가지고 실험을 하고, 박남철씨는 그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예전에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에 모더니즘의 전통이 있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한때는 황지우의 실험 등이 이상의 과격한 모더니즘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았죠. 어쨌든 이상의 과격한 모더니즘, 김춘수 선생의 무의미시, 문덕수 선생님도 50년대에 언어 실험을 많이 하셨고, 이승훈 씨가 요즘도 포스트모던한 경향의 시를 썼는데, 그러다가 80년대에 황지우, 박남철, 장정일, 하재봉, 기형도 등의 시인들이 나타났는데, 80년대는 형태 파괴를 통해서 민중적 요소가 강하고, 형태 파괴는 시대 상황에 대한 도전이 나타나는데, 90년대 유하에 와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등 후기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시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는 점점 유희적인 속성이 나타납니다만, 9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 시들은 후기 자본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점이 많거든요.
정신: 아까 다국적 자본주의 얘기도 나왔지만, 후기 자본주의의 특성을 시인들이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비교해서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이 8,90년대의 후기 자본주의적 특성에 영향받았다는 데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식에 의해 새로운 생산 양식이 지배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중심에서 해체로, 부르조아에서 대중화로 변화가 진행되고, 이전의 정전이 해체되고 대중 문화가 옹호되는 현상도 나타나는 것이죠. 도시와 시골의 표준화, 문화와 예술의 상품화, 중간 문화가 나타나고,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해체되면서 유희화된 실험성, 정체 불명의 감수성, 속악성이 드러나는 것이죠. 이러한 흐름은 전자 매체의 발달과 함께 독자의 위치를 부각시켜 독자반응비평도 나오고 있죠.
아까 이상옥 교수도 잠깐 언급하셨지만, 우리의 현대시에는 李箱의 [오감도]나 [거울] 등에 나타나는 과격한 모더니즘의 전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령 이성복의 [편지]에서 미로 속에 갇힌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라든지, 박남철의 [깨어진 거울 앞에서]를 보면, 기존의 언어, 기준, 진리가 허구임을 깨어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 그것이죠. 또한 장정일의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는 현대인이 이미 문명으로부터 도피하기는 늦었다는, 그래서 출구가 없다는 길잃은 현대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가 이미 이상의 시에서 실험되었다는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60년대 김수영 시인의 [죄와 벌], [거대한 뿌리] 등에 나오는 일상성과 현실 비판, 요설체 등이 80년대 포스트모던시에서도 이어지고, 문덕수 선생님의 모더니즘, 이추림 시인의 초현실주의 등의 영향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시에서 혼성 모방 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80년대의 해체시, 도시시, 일상시, 문명시, 신서정시 등도 이전에 있었던 전통을 모방하거나 일탈해서 이루어진 것이죠. 말하자면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는 80년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리얼리즘과 얽혀서 매우 복잡하게 발전해 갔지만, 나름대로의 전통성이나 역사성이 있었던 셈입니다.
근데 혼성 모방 얘기가 나왔으니까 어디까지나 창작이고 표절인지를 밝혀 주시죠.
김욱: 음식을 섭취해 가지고 소화해서 나의 영양분으로 만들었으면 그건 창조적인 작품이고, 식중독을 일으켜서 오히려 자기 몸에 이상을 일으켰다면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니까 물건 가지고 새로 물건을 만들 때, 나무를 가지고 책상을 만들 때와 같은 물리적 반응은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포도를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었다는지,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등 제3의 다른 것을 만들었을 때는 그것은 새로운 창조적인 작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상: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이성욱씨가 표절이라고 했을 때 김욱동 선생님이 그건 표절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입장에서 혼성 모방이라고 한 논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우리 시에서 혼성 모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되거든요.
김용: 그걸 전문적 용어로 창조적 파괴라고 해요. 지금 이 시대는 일종의 수직적 사고와 수평적 사고가 있기 때문에 토론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날로그적 생각에서 디지탈적인 마인드로의 전환이 필요해요. 이상: 문학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 문창과 같은 경우도 문예영상창작과로 바뀌더라구요. 문학도 영상 매체와 함께 변화되어야 할 겁니다.
4.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망
김용: 이제 전망을 해 봅시다. 동양적 시각으로 보면 공자의 인위자연을 모더니즘으로, 노장의 무위자연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커다란 의미 속에 묶을 수 있다고 봅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역사적으로 배우며 살아 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포스트모던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가 왜 인기가 있는 줄 아세요.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이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학자들이 동양 사상에서 가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보다 더한 사상을 발견하고 깊이 연구했으면 좋겠어요.
김욱: 서양에서도 이미 고전 희랍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예요. 마찬가지로 좋은 동양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동양에서도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김용: 아이러니 얘기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나온 얘기가 아닙니까?
김욱: 서양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도 우리 문화 사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거죠.
이상: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면에서는 너무 세속화되고 가벼워지고 하는 현상이 있지 않은가 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볼 때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면에서는 우려의 시각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용: 물리학쪽에서 보아도 고전 물리학의 철저한 2분법, 2원론적 시각, 주체와 객체가 반드시 분리되고 객체는 항상 전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것이 현대 양자 물리학 또는 20세기 신과학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 '스스로 흩어지는 구조', '스스로 짜서 맞추는 구조'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한 생물 속에 질서와 혼돈이 공존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2원론적 시각이 아닌 일원론적 시각, 따라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도 서로 가려운(부족한) 등어리를 긁어 주는 상호보완적인 상생 원리로 수용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변증법적으로 수용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죠. 어느 정도 가다 보면 또 다른 좋은 사조가 나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정신: 저도 아까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30년대부터 발전해 왔던 여러 기법들의 수용이 다국적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라는 현대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발전해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노장 사상 뿐만 아니라 동학 사상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면이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전자 문화 시대는 디지탈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지 않습니까? 이전의 고착된 규범들이 와해되고 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존재와 세계를 들여다 보게 된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덕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동학의 도에 종교와 과학을 포괄하는 다양한 시선이 들어 있는 걸 최근에 발견했는데, 이것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산을 1미터 옮긴다는 것이 기존의 합리주의적인 고착된 시각에서 보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좀더 떨어진 자리에서 '나'와 산을 내려다 보면 산을 옮긴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주의 공간에서 보면 내가 1미터 옮겨 가는 것이 산을 1미터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동양 철학에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다양한 시선이 함유되어 있는 거지요.
시에서도 굳이 '기표의 미끄러짐'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이상의 [거울]에서 두 화자가 존재하는 것이라든지, 김혜순의 [눈물 한 방울], [수족관 속의 바다] 등을 보면 다양한 시선을 제공하지 않습니까?
김욱: 포스트모더니즘이 앞으로 우리에게 줄 의미로 경계선의 붕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와 경계, 동일자와 화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듯이, 그동안 인간과 자연도 경계가 지어져 있었는데 이것도 인간과 자연의 조화쪽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봅니다.
정신: 저는 우리의 현실이 아직도 남북 분단이라는 경계가 그어져 있어서 문예사조도 순수와 참여, 또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등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주로 논의되어 왔는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가 분단의 경계를 허물 것이라는 기대도 해 봅니다. 오늘의 좌담도 그런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끝맺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하게 논의하다 보니 90여 분의 시간이 소요되었구요. 원고지에 정리하다 보면 250장 이상의 분량이 될 것 같군요. 그래서 오늘의 좌담을 정리하다 보면 지면 관계상 참석자의 양해 없이 생략할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랜 시간 동안 논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