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복’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입니다. 그런데 이 ‘마카리오스’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과 그리스인의 개념은 달랐다고 합니다.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합니다. 헬라 문화권 속의 유대인, 헬라 문화권 속의 그리스인 이들에게 어떻게 복의 개념이 달랐을까요? 일단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땅을 샀는데 그 땅이 갑자기 개발되어 땅값이 올라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헬라 문화의 그리스 사람들은 “재물의 신이 복을 준 것이다”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진짜 예쁜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헬라 문화 사람들은 “미모의 여신이 복을 주신 것이다”라고 이해한다고 합니다. 어떤 남자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헬라 문화에서는 “건강의 신이 복을 준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헬라와 로마의 종교적 가치관속에서 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문화권의 사람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모든 일을 주관하는 신이 있고 그 신이 복을 주어야 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범신론적인 가치관과 다신교적 신화를 가진 가치관이 바탕이 된 복의 개념이었습니다. 모든 일마다 이것을 주관하는 신이 있고 좋은 일은 그 신이 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그리스, 헬라문화에서는 자연과 환경을 주관하는 신이 그 자연, 그 상황속에서 복을 주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성경속에서 살펴보는 ‘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복의 근원으로 인도하신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이 세상의 사람들 생각하는 복에 대한 개념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복이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불행을 극복해서 신의 본성과 손길이 닿는 내적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수단이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유대인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압제를 받았던 약 400년 정도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복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의 강대국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며 그들과 동화되어 살아가던 시대에 그들에게 찾아온 가치관의 변화 중 가장 큰 가치관의 변화는 복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복문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수훈이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산상수훈의 취지는 복의 개념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이미 세상에 동화되어 세상적인 복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갔고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복의 개념이 왜곡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원래의 인간에게 주셨던 가치관, 원래 인간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복의 개념을 회복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회복시키시는 복의 개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복’에 대해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와 수 많은 무리들이 부르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제 제대로 된 신앙, 제대로 된 가치관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듯이 제자로 부름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 것만 바라보고 살았던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 제대로 제자로의 삶, 제대로 신앙인의 삶을 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제대로 된 복의 개념을 그 때까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제대로 된 복의 개념을 깨닫지 못하고 참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산다면 주님을 믿고 따라는 것이 기쁨이 되지 못할 것이고 천국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의 개념을 제대로 깨닫고 은혜의 삶속에서 기쁨이 충만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어려움과 힘든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복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 진짜 복있는 사람일까”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중 우리가 일명 팔복이라고 지칭하는 이 복받은 부류의 사람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하나 찾아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은 ‘온유한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서론 부분에서 제가 말씀드린 신약성경 말씀에 등장하는 ‘복’이라는 단어의 신약원어 헬라어는 ‘마카리오스’입니다. 이 단어의 구약원어인 히브리어 표기는 ‘바라크’입니다. 이 ‘바라크’는 ‘축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실 복이라는 단어는 명사형이기에 히브리어로 보자면 ‘아쉬레’라는 단어가 실제적인 의미와 꼭맞은 단어일 것입니다. ‘바라크’와 ‘아쉬레’의 차이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히브리어 ‘바라크’는 어떤 사람에게 “앞으로 잘 되기를 바랍니다.”라며 축복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아쉬레’는 ‘너는 참 좋겠다’라는 뜻입니다. ‘너는 복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복받은 존재, 복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쉬레’라는 말속에 ‘이미 복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예수님께서 복을 회복시키기 위해 산상수훈의 말씀을 주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마태복음 5장에 등장하는 복은 이미 복받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주신 복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누가복음 6장이 말씀을 보면 ‘심령’이라는 부분이 기록되지 않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하다’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프토코스’(πτωχός)인데 이 단어는 ‘구걸하다’, ‘가진 게 없다’,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거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할 때 ‘심령’은 ‘프뉴마’(πνεῦμα)로서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를 합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만 가난한 게 아니라 그 마음 상태 그 영적인 상태까지 가눌 길 없는 처절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4절에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는 헬라어 단어 ‘펜데오’(πενθέω)는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이 실은 3절에 나온 ‘심령이 가난한 자’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애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애통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위선과 거짓의 눈물을 흘리는 정치인같은 사람들을 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애통은 심령이 가난할 때 나타나는 것이고 자신이 삶속에서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애통도 이해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아파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복받은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온유’로 나온 헬라어로 ‘프라우스’(πραΰς)는 ‘온화한 성품’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영적인 부드러움’으로 해석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온유’라는 단어가 우리가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성품으로서의 부드러운 성격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하는 말씀은 구약 시편에 기록된 말씀의 인용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시편 37편 11절을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37편 11절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편에 ‘온유한 자’라고 번역된 단어에서 ‘온유’의 히브리어 원어는 ‘아나빔’(עֲנָוִ֥ים)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겸손한 사람’, ‘온화한 사람’을 모두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아나빔’의 첫 글자 ‘아인’(עָ)이라는 철자는 ‘절하는 행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뜻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사람,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할 때 ‘의(義)’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의’에 해당하는 성경원어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입니다. 이 단어는 ‘법적인 무죄’ 또는 ‘의로움’을 뜻하는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말씀은 ‘주리다’는 뜻의 헬라어는 ‘페이나오’(πεινάω)와 ‘목마르다’는 뜻의 헬라어는 ‘딥싸오’(διψάω)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고기가 없다고 아우성치는 모습과 같습니다. 북한 땅에서 지금 먹을 게 없어 목숨 걸고 두만강을 넘어 중국, 몽골,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를 거쳐 우리 대한민국을 찾아온 탈북자들의 상황입니다. 그처럼 갈망하고 처절하게 목숨걸고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오직 주님에 대해 목마른 자로 사는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온갖 위협과 세상의 환경을 뛰어넘어 목숨걸고 예배에 나오고 방해를 뚫고 예배에 나올 때 우리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여겨주실 것입니다. 또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긍휼히’로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몬’(ἐλεήμων)은 ‘자비로운’이란 뜻입니다. 그 단어는 ‘엘레에오’(ἐλεέω) 곧 ‘긍휼히 여기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엘레에오’라는 단어는 31번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시각장애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고 마태복음 15장에서 두로와 시돈 지역의 가나안 여자가 귀신들린 자기 딸을 위해 ‘예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말할 때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디매오의 아들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8,9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섯 번째 복있는 사람으로 언급된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 대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 볼 수 있을까요? 우리 말로는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르디아’(καρδία)는 ‘심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보통 심장이 뜻하는 것은 정열 혹은 열정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심장’과 ‘청결’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청결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청결한’에 사용된 성경 헬라어 원어는 ‘카다로스’(καθαρός)입니다. 이 단어는 ‘깨끗한’ ‘순수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실 ‘마음이 청결한’이라는 말씀의 본 뜻은 순수한 마음이라는 뜻으로 쓰여지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우리는 순수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는 강조하는 것이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로 ‘에이레노포이오스’(εἰρηνοποιός)입니다. 이 단어는 ‘평화’라는 뜻의 헬라어 ‘에이레네’와 ‘만들다’, ‘행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포이에오’(ποιέω)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즉 화평하게 하는 자란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피스메이커’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마운스라는 신학자는 화평하게 하는 자란 ‘평안과 화목을 구축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복있는 사람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무슨 의미일까요? ‘의’라는 단어에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가 쓰여졌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의’는 인간의 의로움이나 깨끗함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속에서 의롭다하심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위해 살아가다보니 박해를 받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박해를 받는다’는 표현에 쓰여진 헬라어는 ‘디오코’(διώκω)입니다. 이 단어는 ‘추방을 당하다’, ‘억압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복있는 사람들을 보며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복있는 사람과 어떻게 다르십니까? 사실 오늘 본문의 복있는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 아닙니까? 복있기 위해 가난해야 한다면, 복있기 위해 애통해야 한다면, 복이 있기 위해 한없이 온유해야 한다면, 복있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면, 복있기 위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도움을 한 없이 베풀어야 한다면, 복있기 위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아야 한다면, 복있기 위해 어떤 악한 자들이 나를 괴롭혀도 평화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복을 받기 위해 이 복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런 상태를 기꺼이 받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복을 위해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으시겠냐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상태를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복을 경험하기 위해 이렇게 낮아지고 이렇게 부족하고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이런 낮아짐, 이런 고통, 이런 부족함도 기꺼이 감사하게 받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일까요? 둘째는 결국 최종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8,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복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주시면서 결과들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차지하게 될 영광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인 낮아짐이 있다는 것이기에 하나님앞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드리는 것이고 그러기에 천국이 이런 사람들의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로받다’의 헬라어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라는 단어인데 ‘권고하다’, ‘용기를 주다’라는 뜻입니다.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는 ‘옆’을 뜻하는 ‘파라’(παρά)와 ‘부르다’라는 의미의 ‘칼레오’(καλέω)가 합쳐져서 생긴 단어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당한 자, 슬픔과 외로움을 겪고 있는 자, 눈물이 나며 괴로운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더하시고 용기내도록 역사하십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보니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땅’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들어간 사람들과 출애굽하였지만 광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를 모십시오. 특히 가장 중요한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십시오. 모세는 출애굽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였지만 결국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바로 혈기였습니다. 자신의 의가 높아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고 자신의 의견,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생각, 그들의 견해, 그들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의 모든 적들은 너무나 강대해보이고 이스라엘이 그들과 싸워 이기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존재로 보여졌습니다. 그들의 지식으로만 따져보면 이 전쟁은 불가능한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다고 했으니 그들과 싸우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 또한 복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세상의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 온유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천국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배부르다’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카르타조’(χορτάζω)입니다. 이것은 ‘음식을 충분히 먹는다’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고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배불리 먹고’에 쓰인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이 단어를 썼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을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기서 ‘배부름’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복있는 사람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배고프지 않을 영원한 양식, 하늘 양식으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면 살아갈 때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긍휼하게 보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하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본다’라고 했을 때 ‘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압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입니다. ‘바라본다’는 뜻도 있지만 ‘나타난다’는 뜻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제자들이 ‘보였던 것’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각종 징조들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보이게 될 것’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일 때’라고 표현할 때 이 ‘보일 때’라는 단어에 이 ‘압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가 쓰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여주시는 것을 알게 되는 걸 말하는 단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소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알 수 있도록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화평케 하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이 화평해야 하고, 더 나아가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과도 화평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화평이야말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표인 것입니다. 팔복의 마지막 복으로 나와 있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표현된 것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헌신한 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더 깊이 들어간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불편을 느낀다면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진실되게 사는 걸 싫어하겠지만 천국에서는 천군천사들이 박수를 보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앞에서 말한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복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우리에게 선물을 허락하시고 상급을 주시고 항상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지켜주시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일까요? 마지막 셋째는 예수님만 발견하면 결국 궁극적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가 흔히 팔복이라고 지칭하는 본문이지만 사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팔복이 아니라 구복이 아닐까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왜냐면 11절에도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이 등장하며 또 다른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는 듯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아홉 번째 복있는 사람은 8절의 복있는 사람, 즉 여덟 번째 복있는 사람을 설명하는 반복구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절부터 10절까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는 복있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의 형식과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아니고 조금 다른 형식으로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기록하며 복있는 사람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12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있을 영원한 기쁨, 영원한 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리게 될 궁극적인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볼 때 신명기 33장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 33장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 나오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쉬레’입니다. 히브리어 ‘아쉬레’는 근본적인 복, 존재적인 복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이런 사람이 되라”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아쉬레’, ‘마카리우스’와 같은 존재이니 ‘복받은 사람이 어떤 향기,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고 어떤 향기나 나타나야 하는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궁극적인 복을 받고 궁극적인 복받은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에겐 진정한 복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받은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지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삶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길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자신을 내버리시고 희생하시며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참된 희생과 낮아지심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런 삶을 따라 희생하고 봉사하며 나를 따르며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고 궁극적인 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오늘 산상수훈으로 주신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쳐주시는 ‘복’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육체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고 남 부러움으로 떵떵거리는 인생이 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권력을 누리고 남들보다 더 부각되어지고 남들보다 대접받고 인정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믿는 우리 주 예수님도, 우리가 가르침을 따르며 존경하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도, 또한 성경속 여러 성경인물들은 어쩌면 복없는 사람, 저주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에 대한 가치관을 철저하게 바꿔야 합니다. 잠시 대접받고 영원히 멸망과 죽음의 삶을 살 것인지, 잠시 괴롭고 힘들지만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 영원한 기쁨으로 살아갈 것인지? 저와 여러분, 가짜 복을 누리다 진짜 복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진짜 복을 누리면서 영원한 복을 차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