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서도 산남동에 두꺼비동산 철죽꽃....작년에
사실, 저의 집은 시골에서
좀 부유한 집에
딸 많은 딸 부자집이기도 합니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
제가 세째 딸입니다....
어릴때도 많이 놀림을 받았지요
왜냐구요?
그땐 먹는게 부실해서~
피부가 좀 까매었거든요...
절 낳았을 적엔 엄마가 가난해서
잘 먹질 못해서~ 힘든때 였대요.
다른 언니나 동생들은 피부가 다 하얗거든요~
해서 어릴때에 맨날~
언니와 동생들이~
'너거 엄마, 저 다리밑에 똥떡 굽고 있으니까,
니엄마 찾아가라이' 하고 놀리면
그날은 마, 밥도 안묵고 이불 뒤집어쓰고~
종일 울었던...기억이....
저의 엄마는 늦게 성당에 다니셨습니다.
영세하신지~ 얼마 안되어~
너무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모르긴 해도 어릴적부터 성당에 가시면
내가 항상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오월~성모성월 행사때 보면
꼭~ 행사후에 찍은 사진에 내가 끼어 있습니다.
엄마는 말없이 남을 도우는 일에나
집안 친척들~
그 시절엔 다들~
어려운 때였지요...
넉넉한 집안은 드물고~
사촌,육촌 오빠들~
대학 다니기 힘드는 오빠들...
언제나 엄마가 형편 되는대로 도와주었던~
그리고, 고종사촌오빠는 그 시절에
성균관대 상대를 다녔는데,
인물이나 모든스팩이 넘 좋았지요.
여름이면 우리집에 와서 낚시나 즐기면서
엄마를 도와주고 용돈도 받아가는....
우리집은 그 옛날에
아이스케키 공장을 했습니다.
해서 사는게 남들보다는 좀 나았습니다.
그 시절엔 밥 굶는이들이 참 많았지요
해서 아침밥을 푸려고 하면
우리집 대문에 일명 거지(죄송함다) 들이
우리집 앞에 줄을 섭니다
밥주는 곳이 많지않기에
우리집은 줄 수 있는 한계까지만 주기 때문에~
우리집은 항상 일찍 줄을 섭니다.
우리집 텃밭은 무척 큽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데~
그땐 엄청~~ 컷습니다....
해서 낮에 젊은이들이 와서 밥달라면~
밥을 한상 차려주고는~
밥먹은 값을 하라면서~
밥상도 저희와 똑같이 차려줍니다.
밥을 다 먹으면 뒷밭에 밭을 메고 가라 하십니다.
공짜가 없다면서~~
밥값을 하라십니다.
그럼, 텃밭을 다 메고 나면
아버지 입던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어라고 건네 주곤 합니다....
그런것을 보고 저는 자랐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일한만큼~
정당하게
밥을 얻어 먹으라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지요..
제 엄마는 성당에 힘든일라면 언제나
말없이 도왔습니다.
대구 대교구의 교구장님이셨던
최요한 교구장님이 저희 고향 분이십니다
언젠가~
경주에서 신부님으로 계실적에~
사석에서 만나서 인사를 드렸더니~
'너의 엄마가 내 신학교 갈 적에 와이샤스를
사줘서 입고 갔단다.'
하시면서
'너의 엄마는
참 대단하신 분이야....'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하양에 무학중학교, 고등학교를 세우신
이임춘 교장신부님께서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너의 엄마 만큼
휼륭하신 분은 첨이야~
너의 엄마는 순교자이시다....
내가 교리를 가르치면서
항상 너의 엄마를
자랑으로 얘기 한단다...'
언젠가~
그 신부님을 찾아갔다가~
그분은 뇌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뇌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때에~ 첨으로 우리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너의 엄마는 성녀야~
너의 엄마 같은 분은 없지...
하느님 말씀대로 살다가 순교하셨지....
살 수도 있었는데,
내가 하라는대로 하는바람에
하느님 나라로 가셨지...
너의 엄만 성녀야.....'
신부님께서는 항상 멀리보시고
사회사업을 하셨지요....
잘 살아야 한다시며...
무학산에 목장을 운영하시다가 실패하셨지만,
그 다음 사업으로 병원을 운영하셨는데~
유능한 의사들을 스카웃해 오셔서
'카톨릭 성가병원' 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애기를 낳아도 되니깐
굳이 대구로 안가도 된다시며~
이 병원에서 애기를 낳으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제 엄마는 하혈을 하셔서~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대구로 가셨어야 살 운명이였죠~
아마도 그 시절이 1963년도....
우리 성당이 생기고 가장 많은 분들이
우리 엄마 묘소에 연도를 왔다고 하시네요.
일찍 시집와서 꽃다운 나이 35살에
5남매를 두고 하느님 품에 가셨지요.
우리 엄마의 꿈은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장미꽃 이쁘게 꽂아서 이쁜 크리스탈 꽃병에 ~~가신 님들에게 바칩니다.
옛날 동래고녀에 다니시며~
공부도 잘 하셨다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그 재산을 작은 외할아버지인 동생에게
다 물려주시고, 작은 외가댁에서
마지막 등록금을 못내서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지요.
작은 외할아버지댁은 딸이 5명 있었으니깐요
욕심많은 작은 외할머니가
우리 엄마는 안보내고
자기 딸들만 다 학교 보내고 ,
우리 엄만, 그길로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냈답니다....
그러니, 18~19살에
아버지께 시집을 왔지요....
1963년도 5월 15일, (음력 4월 21일)
내 막내 여동생 생일입니다.
그 애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동생은 살아서~
신부님의 특별한 배려로~
대구 샬트르바오로 수녀원 내에있는
고아원에서 1년간 자라고 왔습니다.
울 아버지....
엄마가 벌어둔 돈이 정말 셀 수 없을정도로...
해서 고향에 땅도 사두고~
200여평 되는 요지의 그 집도 샀구요~
다 일구어놓고 살만 하니까~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참~ 하기 좋은말로~
돈있으니 좋긴 좋네,......
처녀장가 가셨습니다.
그녀의 집은 워낙 가난해서~
집 한 채 사주고~
여동생 미용실 차려주고~
그 오빠~ 영업용 택시 한 대 사주고~
그렇게 시집 왔습니다.
그것도 엄마가 돌아가신 그해 가을에....
대구에서 중국음식 잘하는
'기린원'에서~
결혼식을 웨딩드레스 입고~
신혼여행도 몇일씩 가시고....
우리 언니들은 울고~
날씨는 꿀꾸리하고~
내 마음도 꿀꾸리하고...
저와 그 새엄마와의 나이차는 겨우 12살...
그러니까 큰언니와는 8살.....
우리 아버지가 참 철이 없지요...
딸 같은 여자에게 장가 갈적엔~
옆에서 누군가가 꼬드겨서~
그래 장가를 갔겠지요....
우리 큰엄마가
'애들 다섯 있는데~~
마, 애기 못낳는 나이가 비슷한 여자에게 장가가라'고....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습니다.
젊은 여자가 좋긴 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그 가고 싶었던 대학을 못갔습니다.
돈은 있어도 안 보내주는 겁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속이 상해서
대학 못갈바엔~
할게 없었습니다.
해서 맨날~
도서관에서 책이나 보는거 말고는
하고 싶은게 없었지요
그래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조리~
어렵고 내가 읽기 싫은거~ 말고는
거의 다 탐독했었죠~......
대구 살적엔~
대구교구내에 성직자 묘지에 계시는
이임춘 펠렉스신부님의 묘소엔
가끔 가서 기도 해 드리곤 했는데....
그 신부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좋은일 많이 하시고
가난이들 ~장학금 주시어서~
공부한 이들이 참 많지요..
그들 중에는 내가 아는 신부님도 계십니다...
주님, 돌아가신 주교님, 신부님~
그리고 우리 부모님...
영원한 천상가정에 들게 하소서.
성당산에 묻혀 계십니다....
2014년 1월 21일 화요일.....
첫댓글 훌륭하신 부모님 밑에서 참 곱게도 자라셨군요
어릴적 얘기를 실감나게 잘도 쓰셨네요
그시절에 아이스케키 공장 하셨으면 참 부유하셨을겝니다
좋은글 많이 올려 주세요
삼사오행시방에도 들리시면 좋겠네요
카페지기님이시네요~~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