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齋舍)란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나 입향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당 인근에 지은 건축물로 정의된다.
양반고장으로 일컬어지는 안동은 풍산 류씨, 안동 권씨, 안동 김씨 등 양반 혈족이 문중, 세거지, 씨족사회의 형태로 많이 살며 조상들 중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아 자연스레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생겼으머, 이 때에는 문중에서 많은 후손들이 1년에 한 번 모이게 되어 자연스레 숙식을 할 수 있는 구조가 갖추어져 있는 재사가 생기게 되었다.
대개 음력 10월경에 각 파를 아우르는 문중이 대거 참석하여 조상을 숭배하고 문중의 결속을 다진다.
재사는 재실, 재궁, 재각 등으로 불리며 재실이리는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이나 안동지방에서는 재사라는 표기가 일반화 되어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지나고 조선 후기로 오면서 양반사회의 권위가 약해지는 사회변동에서 씨족공동체를 다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사를 짓고 문중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기대하는 재사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17~18세기에 많이 지어지게 되었다
요즘은 문중에서 시제를 모시거나 가족묘지 평장묘에 참배를 하더라도 몇 시간을 넘기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숙소가 갖추어진 재사라는 양식은 조선사회의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이 반영된 특이한 형태의 문화적 건축물이라 하겠다.
안동에는 안동 권씨 능동재사, 풍산 류씨 금계재사, 안동 김씨 태장재사, 의성 김씨 서지재사 등이 있는데 영양 남씨 남흥재사와 안동 김씨 태장재사를 둘러볼 수 있었으며 고택을 살펴볼 수도 있었던 하루였다.
1)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낙동강과 풍산평야가 가까이 있지만 약간 외진 지역에 뒤쪽에 정산(井山)을 끼고 앞쪽으로는 풍산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가일못(가곡지) 옆에는 수령 300년의 보호수 회화나무가 있고 항일구국열사 권오설선생기적비가 있다.
구한말 독립운동을 하던 투사들 중 상당수가 그랬듯이 한 때 사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던 권오설선생은 재평가를 받고 항일구국열사 반열에 올랐다.
가일못 변두리에는 나무데크길이 놓여서 물위를 걸을 수 있다.
마을에는 병곡종택, 수곡고택, 권성백고택 등이 있는데 수곡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산 아래 가일마을과 가일못
300년 수령의 보호수 회화나무
항일구국열사 권오설선생기적비
병곡종택
병곡종택 축담 아래 송엽국
가일마을 고택 담장
병곡종택 처마의 풍경
국가민속문화재 수곡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수곡고택
웬 쪽파를 말리는지
2) 안동시 풍산읍 소산마을 삼구정(三龜亭)
.소산마을은 안동 김씨 집성존이다.
벼슬을 지낸 김영전 3형제가 88세의 노모 예천 권씨를 위해 낙동강을 바라보는 동오동산에 정자를 짓고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 3마리를 닮은 바위가 정자를 떠받치는 듯한 이곳을 삼구정이라 하였다.
효도를 생각하는 상징적 건축이라 하겠다.
삼구정을 떠받치는 듯한 거북을 비유한 세 개의 바위
3) 낙동강변의 봄꽃
남흥재사로 가는 길에 태화동 낙동강변에는 금계국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금계국과 송엽국
붉은 인동
4) 영양 남씨 남흥재사
고려 공민왕 때 판서를 지낸 남휘주와 그의 아들 민생의 묘제를 지내기 위한 재사다.
남민생은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낙향하여 은둔하다가 왜구토벌을 위해 다시 관직에 나아가 공을 세운 데 대한 소회를 담은 시가 편액으로 원모루에 걸려있다.
1,500년 전후에 지어져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천정 대들보의 양식은 고려 공민왕 때의 선조를 모셔서인지 고려시대의 분위기가 있다 한다.
2020년 12월에 심사를 거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ㅁ"자 형의 뜰집구조로 되어 있는데 안뜰을 중심으로 사방에 공간배치가 되어있다.
비교적 좁은 공간에 사방으로 구조가 되어있고 누마루는 오히려 한 뼘 정도 낮게 설치되었으며 누마루의 바닥은 들어올릴 수 있게 되어 아래로는 곳간이 설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다
멀리 경모한다는 뜻의 원모루(遠慕樓)라 이름 붙여진 누마루의 나무는 틈새가 벌어지고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는 등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누마루에서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영양 남씨의 묘소가 있다.
재사의 특징은 조상을 모시는 위엄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건믈을높게 지은 경향이 있는데 원모루 또한 그러하다.
세월을 담은 누마루 바닥.
바닥을 들먼 아래쪽 곳간과 연결된다
원모루 내부
누마루 바닥과 연결된 아래쪽 곳간
"ㅁ"사 형으로 비교적 즙고 계단이 있는 님흥재사의 안뜰
"ㅁ"자 형 안뜰구조의 남흥재사
5) 안동 김씨 태장재사
안동 김씨 시조 태사 김선평공의 단소를 지키고 봉제를 올리기 위한 재사이며 규모가 크다.
김선평은 후삼국시대 고창(지금의 안동)의 성주였는데 왕건을 도와 이 곳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왕건은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고장 동쪽을 평안하게 하라는 뜻에서 이 곳을 안동이라 하였다.
김선평의 유허지는 확인되지 않아 숙종 영조대에 터를 잡아 묘를 축조하였으며 고려묘의 양식을 따랐다.
비석에는 지묘(之墓)라는 한자 대신에 제단(祭壇)이라는 표기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재사의 구조는 ㅁ"자 형의 재사, 일자 형 이상루(음식을 먹거나 문중회의용), "ㄷ"자 형의 관리사가 있고 재사에는 유사실, 전사청, 참제원실이 있다.
여러 개의 방은 제사에 참가하는 문중 인원을 짐작케 한다.
이상루 앞에는 북이 매달려 있는데 재사의 규모가 커서 알림북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대청에는 병붕이 펼쳐져 있다.
마루 위아래에는 16켤레의 고무신과 요강 16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고무신은 어린이용 고무신이 있어 어린 아이들도 문중제사에 동반하지 않았을까 한다.
종가집이 봉제사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구조이듯이 재사도 이런 구조를 원용하지 않았나 한다.
재사라는 건축양식이 일반적이지 않고 씨족공동체의 전통이 깅한 안동지방의 특이한 구조라는 점에서 색다른 경험이었다.
안동 김씨 태장재사
태장재사 앞 장독대
태장재사의 숙박을 위한 많은 방
병풍이 펼쳐져 있는 대청
태장재사의 이상루. 높이 건축되어 있다
요강과 고무신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 단묘
태장재사 부근의 양귀비와 수레국화
첫댓글 오래전 둘러봤던 안동의 재사들을 새삼 찬찬히 함께 답사한 느낌이 들도록 실감나게 쓰신 답사기 잘 보았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궁금해 하신 말리는 쪽파는 種子로 쓰려고 건조 시키는거지요. 쪽파는 씨앗으로 심는게 아니고 쪽파(종구)를 하나 하나 떼어 마늘 심듯 한답니다.
감사합니다.
여행 중 일행이 말리는 쪽파는 종자로 심는 것이라 설명해주었습니다.
안동 하면 양반도시로 알려져 있지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저는 경주 김씨 ㅎㅎ
세월속에 묻혀가는 안동의 고택들
다시 설명과 함께 그곳을 안내 해주신 문항님 감사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태장재사에서 하룻밤 묵어 보았으면 하는 기대를해봅니다
언제나 세세히 올려주시는 후기
감사 합니다
능동재사, 금계재사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남흥재사는 태장재사에 비해 규모가 작고 좁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누마루 마루바닥의 세월을 머금은 틈새와 나뭇결, 퇴락한 색깔이 숙연하게 만듭니다. 후손 중 한 분이 서울 직장생활을 은퇴하고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수비용도 지원받는다는데 근년에 보수한 서까래가 원재목과 새로 깐 서까래간 선명한 색상대비가 좀 어색하긴 했습니다.
인동초 향이 코끝을 스치듯~
이상루에 매달린 북의 울림이 다가오듯~
나란히 서있는 고무신과 마루밑에 요강(도자기와 스테인레스 둘 다)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가 떠울라 미소짓다가~
고택들의 정겨움에~역시 안동은 고택의 멋스러움이었지~생각하다가
안동을 가 본지 너무 오래된터라~(예전엔 자주 갔었지만)
재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문항님의 글을 통해 다시 듣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고~참으로 여유없이 내가 사는구나~살짝 슬퍼지고
저 누마루에 누워 김이 솔솔나는 밥을 해먹고 싶다는 ~~~
문항님 덕분에 안동의 곳곳을 누비는 호사를 누렸나이다~
감사합니다~^^건행하소서~^^
언제나 반가운 산마루님
동쪽이 평안한 지 디시 가보고 싶은 안동.
누마루의 오래 된 마루바닥이 정겨웠습니다.
산마루님의 살짝 슬퍼진 감정, 주스르면 새로운 힘이 되기도 하겠지요.
이 땅 어디에선가 뵙기를 기다립니다.
재사 건축이 함의하고 있는
리추얼 (ritual) 을
정확히 전달해 주신 후기 !
독자들에게
재독 삼독...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능동재사 금계재사
볼 수 있는 기회 소망하신다지요.
저도 문항님과 동감입니다. ㅎ ㅎ
우리의 전통, 문화, 역사가 어떻게 잉태되고 전승되고, 그리고 소멸해갔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기란 참 쉽지 않고 시간을 요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벗어나기란 또한 단순치 않아 헤매이는 시선을 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30년 전쯤 안동 하회마을에서 1박 하고 아침 마실을 돌며 충효당 앞을 지나는데 그 전날이 서애 류성룡 제사였던 듯 13대 종부 박필술 할머니가 제기를 닦으시다가 우리를 보고 들어오라시며 절편같이 생긴 쌀로 만든 건빵같은 걸 먹어보라 주셨습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병사들이 전장에서 먹던 전투식량 같은 것이었습니다.
"명가의 내훈"이라는 책도 쓰신 박필술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누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문화와 역사의 소멸을 생각해봅니다.
Manolin님의 과찬,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