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1. 착취와 불의와 억압.
프라하의 봄에서 시작되었고, 코시긴 독트린으로 퍼진, 68혁명의 불길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북한, 소련은 개혁 사회주의의 채택으로 불만을 조기에 조절했고, 그리스와 북 일본의 경우, 통제에 대한 명분이 있었고, 일치를 구할수 있었으며, 몽골과 핀란드는 관심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불길의 핵심인 북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또한, 보수파의 실각과 더불어, 숙청당한 이들이 복권 되면서 얼추 해결되는 낌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인, 독일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독일은, 지난 양차 대전의 주범으로, 종전 된지 근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우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통제는 영구 할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다만, 그 통제에서 벗어난 독일의 행보를 생각해 보았을때의 여파는 그리 작지 않을것 입니다.
당장, 소련 수뇌부에서, 독소 전쟁을 아예 피해가거나, 가족을 전장에서 잃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며, 안드로포프 KGB 의장, 브레즈네프 제1부주석 등의 참전 용사또한 다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소련 지도부는, 독일 내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 그 결정을 내리기로 했으며, 휴민트를 대거 이용해, 독일 내의 여론을 파악 했습니다.
그리고, 여론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했고, 국가에 차출되었던 기성 세대들은, 자신들만 선하다 주장하며, 자신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소련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시기를 제대로 겪지 않은 전후 세대는, 기성 세대의 생각에 전면적으로 찬성을 표하지 않았고, 소련의 침로 변침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발언권이 매우 약합니다. 그렇기에, 통제를 무턱대고 풀 경우, 우려했던 사안이 발생할 가능성은 명약관화 합니다. 소련의 지도부는, 이 사안을 해결 할 수 있을까요?
S-D2. 대타협.
독일에서의 시위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타 공산권에서의 시위는 이제 진정되었지만. 독일의 시위는 지옥의 유황불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강해지고만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일에서 공산정권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서방으로 전향할 수 없다는 것이겠군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역시 독일에 대한 우호적 시선을 보내지는 않고 있으니 말이죠.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연일 모스크바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으나, 소련은 1956년과 같은 리스크뿐 아니라, 코시긴 독트린에 대한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시위대는, 개혁 사회주의의 도입만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소련의 강력한 통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와 함께, 동등한 동지로 대접 해 달라는 구호또한 소수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의견으로, 동 프로이센을 돌려달라는 구호나, 탈 소련화의 구호도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KGB가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시위를 주도하는건,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그리고 대학이나 대학원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들을 위시로 한, 청년세대. 즉, 68세대였습니다.
68 세대들은, 나치등의 과거사를 부끄럽게 여기며, 과거사를 부정하는 기성세대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만, 그 과거사로 본인들이 불 이익을 보는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크며, 그걸 바꿀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코시긴 지도부에 희망을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세대입니다.
일부 인사는, 그 68세대를 아군으로 포섭하며, 다른 지역에서의 해결책과 같이, 그들을 중심으로 삼아, 개혁파를 세우고, 과거사 반성을 획책하자는 안건을 내었습니다. 물론, 불가능 하다면, '최후의 수단' 을 사용해야 한다는게 부언 설명이었지요.
그리고, 그 제안은 받아들여져, 알렉세이 메스너라는 젊은 외교관이 전권을 위임 받아 독일로 파견 되어 시위대 수뇌부를 설득 해 내는데 성공 했습니다. 물론, 이는 비판적 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소련은 독일 내의 소외받던 사민당 개혁파 인사를 적극 지원하여, 보수파를 끌어내리고, 개혁파를 올리는데 성공 했습니다. 슈미트 서기장은, 개혁 사회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제일 먼저 바르샤바와 크렘린에 추모를 행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독일의 변화를 위한 회담을 가졌습니다. 주변국은 독일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서서히 풀어 나갈 것입니다. "물론, 이 시기가 유지 된다면 말이죠."
S-C1. 우수리강 국경 분쟁.
중국이 통일 된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만주의 변경 지역에는 제대로 된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곳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정보적 취약 계층은 더 있게 마련이지요. 문맹이라거나, 빈곤층이라거나, 노인이라거나...
네. 이 사건은 이미 예견 되어있던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주가 자유 중국 정부의 소관이 되면서, 예전에는 비교적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한 곳이 갑자기 출입 제한 지역이 되었으니까요.
발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바오, 다만스키. 두 이름으로 불리는 한 섬이 있었습니다. 이 섬은, 국경의 주민들에게 작은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자작나무를 베어 땔감을 구하고, 사슴이나 버섯을 채취하며, 낚시로 식량을 구하는 장소였죠. 물론 배급만 잘 되면 이렇게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되었겠습니다만...
아무튼, 이 섬의 출입은 통일 이후 만주의 주민에게 출입이 제한 되어 있었지만, 사정을 어느정도 봐주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사람 사는 일이니까요. 문제는 코시긴 독트린 이후, 개혁파의 성장이었습니다. 새로 국경 수비대에 사령관이 보임 되었고, 그는 이 지역의 느슨한 태도에 불만을 가졌고, 국경의 섬과 지역에 강한 통제를 가했습니다.
문제는 이 조치는 너무 갑작스러웠고, 이 지역에 의지하던 노인들은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전바오 섬에 진입하여 수렵하던 노인들에게 국경 수비대는 경고했으나, 노인들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곤 해도, 그것이 즉각적으로 발포해야 했을 사안 이었을까요? 결국 전바오 섬은 총격으로 피에 물들었습니다. 노인 2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한 이 사태를, 어떻게 치유 할 수 있을까요...
S-C2. 상처는 치유 받을수 있다. 아직은.
다만스키 총격 사건은, 소련과 중화민국 양국 모두에 큰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지난 밀약으로, 다만스키 등 우수리강 지역의 모든 섬은 전부 소련령으로 귀속 하기로 결정 했으나, 그것이 밀약이라, 양측 모두 공표 할 수 없다는게 문제였습니다. 소련은 공포 하는 순간, 동유럽 위기를 겪을것이고, 중국 또한 어느정도의 위기를 감수 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1차적인 책임은, 몰랐다곤 하더라고, 무단 월경과, 수비대의 경고를 무시한 중화민국의 시민에게 있으나, 즉각적 실탄 사격으로 대처한것은 소련의 책임이었습니다. 중화민국은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거기에 양국 국경 수비대간 충돌이 터지며, 사건은 파국을 바라보는듯 했습니다.
독일건을 간신히 마무리한 지금, 소련은 극동에서 문제가 터지는걸 원치 않았습니다. 책임자의 소환과 처벌은 다수의 의견이나, 국경 문제를 다시금 타협 해야 하는게 문제였습니다. 밀약은 "어쨌든" 이쪽이 공표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따라서, 소련은 중화민국과 이 사안의 해결과, 국경 문제 해결을 위한 공식 회담을 요청했으며, 중화민국은 이를 받아들여, 울란바토르에서 회담을 열었습니다.
그로미코는, 이 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와 그 유족에 대한 보상과 추도문을 보낼테니, 국경 조약은 밀약때와 다르지 않게 하자고 요구 했습니다. 현임 중화민국 외교부장 웨이다오밍은, 선창환 전 외교 부장에게 밀약을 계승 받았고, 장 주석에게 밀약을 공식 조약으로 체결 하는건 받아 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는 확약을 받아 왔으나, 그것이, 중국 인민들에게 굴욕 외교라는 파문을 불러 올수 있다는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이다오밍은 이 결정으로 3차 대전이 벌어지는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소련의 제안은 받아들여 졌습니다.
그렇게 이 사건은 종결 되었습니다. 며칠 후, 베이징에서, 양국간의 국경 협정이 체결 되었고, 사건의 책임자인 파벨 이바노프는 민간인 학살 혐의와 불필요한 외교분쟁을 불러왔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유족과 피해자들은 소련의 배상과 사과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이 전쟁의 위기는 지나간것 같군요...
NK1. 지금, 평양에선…
코시긴 독트린 채택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에서 제7차 조선노동당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습니다. 1956년 김일성을 비롯한 만주파와 갑산파가 축출된 이래 국가주석직을 역임하던 최창익이 사임을 선언, 신노선 하에 지도부 개편을 논의해야 할 시기였습니다.
최창익이 돌연 사임을 선택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습니다. 그는 연안파의 거두였고, 그 연안파는 구 중화인민공화국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뒷배를 상실했기 때문이었죠. 김일성에 맞서 동맹을 형성했던 소련파와 연안파였지만, 권력기반이 심각하게 약화된 연안파는 명시적인 숙청 없이도 하나둘씩 요직에서 밀려난 채 쇠락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노동당 총비서 남일을 비롯한 소련파에게 실권이 넘어가 최 주석이 간판으로 전락한 지도 어언 수 년의 세월이 흐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소련파가 마냥 독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작은 지분만을 겨우겨우 지키고 있던 군소파벌들이 연합해 이들을 견제했기 때문입니다.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계, 홍명희 등 독립파벌들, 그리고 만주파의 방계로서 김일성을 축출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던 김상덕 등 봉천파가 바로 그들이었죠.
원래 계획대로라면 당 총비서 남일이 국가주석직을, 방학세나 정상진같은 소련파 중역들이 총비서직을 차지하고 타 파벌들에게는 내각총리 이하의 집행부 직책만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파들이 단일전선을 형성해 “개혁사회주의 현실화”를 주장하고 나서자 이들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죠. 타협 끝에 갓 50세의 개혁성향 소련파 정상진이 국가주석으로, 연안파 윤공흠이 당 총비서로, 내각총리는 남로당파의 리현상이 가져갔습니다. 당 원로들은 반소련파동맹의 물귀신 작전으로 자의반 타의반 명예직으로 물러나야 했죠.
새로이 국가주석으로 등극한 정상진은 곧바로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38선 인근 전연부대들의 기동훈련이 갑자기 부쩍 활발해진 것과는 연관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요…
S1. 편지와 답장
신-신경제정책과 코시긴 독트린의 발표, 개혁사회주의의 도입으로 체질개선에 나서고, 군축에 대해 고민하는 크렘린에 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현재 소련군에서 복무중인 빅토르 이바노비치 일린 중위였습니다. 현재 크렘린이 가고 있는 개혁사회주의 노선이 옳긴 하나. 콤소몰이 이제 필요를 다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정치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코시긴은 그 편지에 아주 정성스러운 답장을 해주었습니다. 본인 역시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며, 소련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길을 걸어갈 날이 올 것이라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며칠 후 또 다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지난번에 편지를 보낸 일린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동의를 표한 코시긴의 편지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소련과 인민을 위해 힘써달라는 말을 담았습니다.
K1. S-2 격추 사건.
유세종 사건 이후, 북한은 군 파견 요청에 대한 일로 실랑이를 겪었으나, 소련의 배치 의사 없음으로 1차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남한의 도발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건 사실이었고, S-2 전자 정찰기를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남-북 국경에 대한 순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순찰은 결국 박정희에 눈에 닿았고, 그의 성정상 그 정찰기가 격추 명령을 받는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결국, S-2는 도주에 실패해 격추 되었고, 그 잔해는 북한에 추락 했습니다. 승무원은 1명 이외 모두 사망했죠. 그리고 소련은, 승무원에 대한 추도는 하되, 적극적 대응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건을 더 키울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겠지요. 그리고 남한은 이 사건으로 더욱 도발의 공세를 키워 나가려 했습니다...
A1. 우울한건 '모두' 파란 하늘에 '묻어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남미 전쟁이 전선 고착화로 고지전만 일어나고 있을때, 아르헨티나 최고의 공업 도시인 코르도바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다고 해도, 그 틈새에서 정보가 새 나가는건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68혁명의 정보가 어느새 아르헨티나에도 퍼지기 시작 했습니다. 최악의 독재, 탄압 국가로 프로파간다 된 소련의 해빙은, 마찬가지로 통제와 독재로 새로운 질서를 세운 아르헨티나에게 위협적이었지요.
결국, 코르도바에서 노동자와 시민의 시위가 시작 되었습니다. 노동자 처우 개선으로 촉발된 시위는, 비백인 차별 철폐, 이사벨 페론 하야등 정치적 요구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르헨티나의 이너 서클에게 봐줄수 있는게 아니었죠.
피의 참극이 시작 되었습니다. 코르도바는 봉쇄되었고, 그 안의 시민들은 친위대의 참혹한 진압으로 인해 죽어나갔으며, 시위대는 결국 해산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살극은 내부 통제를 위해 아르헨티나 전역에 보도 되었지요... 이 학살극이 통제에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도 어느정도 도움이 되겠지요. 죽기 싫으면 일을 해야만 할테니까요... 이 참극이, 끝날 수 있을까요?
U1. Trial of the Chicago Eight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극우주의자에게 피격당해 반신불수에 빠지고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며 대통령이 의회에서 선출, 그것도 초유의 동거정부 상황이 발생하는 혼란기. 전미는 인종갈등과 우주경쟁 지속여부 논쟁, 복지제도 개편 논쟁, 키프로스 파병 등으로 극심한 국론분열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상원에서 신임 부통령으로 선출된 민주공화당의 휴버트 험프리는 1969년 1월 신년연설에서 “인종차별에도, 연방대법원 민권법 해석 번복에도 반대한다”며 이후 “Double Veto”라고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물론 사상누각의 동거정부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합리적 정치인으로서 신중론을 택한 셈이었지만, 이 연설은 미국 내 진보주의자들이 기성 정치세력들에 등을 돌리고 과격론으로 선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민주사회학생회 의장 톰 헤이든 등 8인의 학생대표들은 흑표당 등 흑인민권단체들과 연합해 시카고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고, 이들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일리노이 주 검사 리처드 H. 슐츠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슐츠 검사는 이들에게 소요죄, 기물파손죄, 교통방해죄 등 ‘비교적 가벼운’ 죄목을 적용하려 했으나, 신임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진 커크패트릭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본래 외교안보 계통에서 일하다 양당간 타협으로 이 자리에 앉은 그녀는 국가자유당 골드워터 전 부통령 계파의 정치인으로서 작금의 혼란상을 잠재우려면 강한 국가권력이 필요하다고 믿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시위 주도자 8인에게 내란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슐츠 검사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말입니다.
외압에 굴복한 일리노이 주 검찰이 8인을 내란죄로 기소하자, 다시 한번 난리판이 벌어졌습니다. 좌익 지하학생조직인 “더 웨더먼(The Weathermen)”은 1886년 헤이마켓 시위 당시 사망한 경찰관들을 기리는 동상을 폭파시켰고, 민주사회학생회는 각지에서 “Fxxk the Government”라는 과격한 구호를 내걸며 소요사태를 이어갔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이들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비난했고, 발언이 있은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주지사용 관용 차량이 주차장에서 폭발하는 경고성 테러공격을 당해야 했습니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민주공화당 내부에서 험프리 부통령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헨리 잭슨을 위시한 진보파가 전격 탈당을 선언하고 진보당에 입당했고, 이는 상하원에서 공화민주당과 진보당 간 의석차이를 좁혔습니다. 동부 및 오대호 지역에서는 “대통령선거를 지금 치른다면 선거인단은 진보당이 가져갈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죠.
결국 사태를 보다못한 재판부가 시카고 8인 기소를 검찰로 파기환송하고 일리노이 주검찰이 종래 계획했던 ‘약한 죄목’으로 기소의견서를 재작성하면서 상황은 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 후폭풍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U-S1. For All Mankind…
"아닙니다. 땅에 떨어지지도 않았고 멕시코만에 침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밤에 빛나는 저 별들과 지구와 우리 사이의 어둠을 보십시오!" - 쥘 베른 |
세계를 양분하는 두 초강대국은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 숱한 위기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상대보다 앞서나가기 위해 우주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죠. 그 결과물로 스푸트니크가 발사되고,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했으며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들이 달 궤도를 비행했습니다. 이 우주레이스, 또는 돈X랄 경쟁이 누구의 승리로 끝날 지는 미지수였죠.
달에 ‘가장 먼저’ 사람을 착륙시킨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1969년 5월 2일(원래 계획은 모스크바 기준시로 노동절인 1일에 착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일정이 일부 지체되면서 무산되었습니다.) 루나 13호에서 내린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아나스타샤 파블로바는 달 표면에 붉은 깃발을 꽂았습니다. “이것은 나 알렉세이 레오노프에게는 단지 한 걸음일 뿐이지만,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거한 역사의 진보를 상징하는 거대한 발자국이다.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우리는 승리하리라.”
미 NASA는 뿔이 아주 단단히 나버렸습니다. 일부는 무슨 짓을 해도 베르너 폰 브라운-세르게이 코롤료프 듀오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패배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소련에게 빛나는 지성이 있다면, 미국에게는 돈 복사 치트가 있었습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돈을 충분히 썼는지 여부를 검토하라.” 결국 소련의 N2 로켓에 필적하는 프론티어 로켓이 예정보다 앞당겨 개발완료, 미국 역시 7월 29일 닐 암스트롱 팀을 달에 착륙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소련과의 차별점을 두기 위해 (사실상 조금 큼직한 텐트에 가까운) ‘소형 전초기지’를 설치한 것은 덤이었죠. 언론은 연일 “미국이 달에 첫 식민지(colony)를 세웠다”며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미국인들이 제국주의자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며 신나게 씹어댔고요.
아무튼, 달 착륙 이후에도 우주 경쟁은 마무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 레이스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l1. 녹색 혁명
1969년 9월 1일, 무아마르 카다피 ‘대위’가 이끄는 병력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시내로 돌입, 국왕 폐위와 군사혁명을 선포했습니다. 이탈리아를 방문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왕위를 뺏겼고, 그대로 망명해버렸습니다. 고작 27세에 불과한 카다피가 리비아의 모든 실권을 틀어쥔 최고권력자로 등극한 것입니다.
쿠데타 다음 날인 9월 2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호를 ‘리비아 왕국’에서 ‘리비아 아랍국(Libyan Arab State)’으로 전환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아랍민족주의의 두 맹주였던 이집트와 레반트 사이에서 간을 보겠다는 의미였죠.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이끄는 이집트 아랍 공화국은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적 정책을 표방했지만 친서방 국가들인 사우디아라비아 및 이란과 제휴하는 입장이었고, 레반트 연방은 국왕 후세인 1세가 이끄는 반 입헌-반 전제 군주국이었으나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급진적 반미-반서방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 아랍민족주의자인 카다피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죠.
카다피의 선택은 나세르의 이집트였습니다. 그는 나세르 대통령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결단력, 경제와 정치에 대한 비전에 매료되었습니다. 나세르는 카다피의 ‘자마히리야’ 구상에 큰 관심을 보이며 이집트-리비아 국가연합안 작성에 착수했습니다. 문안 작업만 완료된다면 이듬해 아랍연합공화국이 출범할 것으로 기대되며, 이는 북아프리카-중동 지역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입니다.
S2. 진짜로 이래도 되는가?
최근 소련은, 친구를 팔아먹고 실시한 농업 개혁의 성과로 농산물 생산이 늘어나고 있었고, 신-신경제 정책 도입 이후, 대강 인민의 상식으로 퍼진 이후, 모두가 생각하는 과제를 시작 하려 했습니다. 바로 군축입니다. 소련군의 군축은 개혁파들이 일전부터 주장 하고 있었으나, 보수파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개혁파가 우위를 점해, 군축 드라이브에 나섰습니다. 중도파는 이것에 손을 들어주었죠...
소련은 현 육군 500만 편제를 약 300만명까지 대거 감축하되, 징병 기간은 유지, 징병 기준과 훈련 강도를 강화하고, 기계화, 차량화를 증강해, 전투력을 유지 시키고, 전차, 장갑차, 야포, 전투기, 잠수함또한 현역병과 비슷한 비율로 60%대까지 감축, 구식-노후화 장비의 처분및, 기준을 넘을 경우 신형 장비도 감축 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또한, 연안 해군에서, 대양 해군으로 재편하며, 개발 예산을 유지 하기로 했죠. 또한, 감축한 인건비와 장비 유지비를, 병참과 군 복지비로 돌리기로 결정 했습니다.
이렇게 감축한 무기중, 공여 불가 장비는 공장으로 보내져 파기 되어 인민의 이익이 되어야 하고, 그나마 신형 장비는 동맹국에 공여 하기로 했습니다.
군 혁신안의 성과는 계속 지속적으로 관찰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데도브시나라 불리는 병영 부조리, 군사 장비의 개발과 군 재편등은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개혁이 원하는대로 진행 된다면, 소련군은 수를 무기로 하는 구식 군대가 아닌, 질과 양 모두를 겸비한 군대가 될 수 있을겁니다. "아마도요."
S3. 이익을 위해서라면
소련은, 신-신 경제 정책을 도입 한 이후, 기업의 이윤 추구를 허가 했습니다. 제도 도입 초반에 혼란이 있었으나, 교육과 라디오 방송은, 적응에 도움을 주었고, 이 제도는 곧 사회 내부로 뻗어나가, 인민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방의 인민들은 당연하게도, 주류 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연방의 주류 소비량은 세계 1위였고, 생산량은 그에 못 미쳤으니까요.
사업은 매우 성공적 이었습니다. 네... 초반엔 말이죠. 질과 양 모두를 잡은 연방의 술이 사회에 팔리기 시작하자, 사업가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료를 조금 싼거를 쓰더라도, 고급 재료의 함량을 줄이더라도, 싼 술이나 주정을 사서 섞더라도. 인민들은 좋다고 사 마시지 않을까? 라고...
그리고 사업가들은 이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초반엔 좋았죠. 질이 떨어져도 좋다고 샀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한 두번 반복 되자... 인민들은, 상점의 술을 믿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마곤" 열풍이 시작 되었습니다. 쓰레기같은 술을 먹느니, 차라리 직접 만들어 먹겠다 하는 생각이었죠. 결국 비극이 시작 되었습니다. 제대로 증류를 못한 술에 함류된 메탄올을 먹고 실명된 환자와, 상한 술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환자가 속출했으며, 주류 회사를 차렸던 사업가들은 파산을 면치 못했습니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이 사태를 보고, 밀주 단속법의 제정과 함께, 품질 관리법으로 주류와 생산품의 품질 단속에 들어갔습니다. 이 여파의 개선은, 얼마나 걸릴지 예상되지 않고 있습니다...
M1. Paint it Black
1969년 5월 13일 작은 갈등에서 시작된 화교와 말레이계 간의 인종 학살사건은 말레이시아 정세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습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주의자 및 인종갈등 조장자에 대항한 싸움을 시작한 툰쿠 압둘 라만 총리였지만, 폭탄 테러로 라만 총리와 라작 부총리가 모두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이마저 여의치 않았습니다.
급하게 후임을 맡은 마하티르 빈 모하맛은 라만 총리의 계엄정국을 강력하게 비판하던 인사였으나, 그 역시 계엄령을 해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혼란을 틈타 칭펭의 공산 반군은 국내 여기저기에 해방구를 만들고 (봉급이 차일피일 밀리기 일쑤인)일선 군부대와 경찰들을 포섭해나갔고, 민족갈등은 좀체 잠잠해지지 않았죠.
그리고 12월 9일, 빈 모하맛 총리가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총리와 사태 해결을 위한 마라톤 회담을 하고 있을 무렵, 일이 터졌습니다. 쿠알라룸푸르 수도경비사단 지도부가 청년장교 및 부사관, 병사들에 의해 감금, 적위군의 일익을 자칭하고 칭펭의 공산 반군에게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백악관, 크렘린, 남경성은 경악을 금치 못했죠. 사태는 완전히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말레이시아에 공산정부가 수립되고 지역 일대가 혼란에 빠진다는 것은 싱가포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했고, 더 나아가 겨우 - 100만에 달하는 이들을 학살하고서야 그야말로 겨우 - ‘안정화’된 인도네시아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아무리 혼란에 빠진 미국이라도 이 상황을 용납할 수는 없었죠. 말라카 해협 수운이 마비된다는 것은 대재앙이었으니 말입니다.
즉시 소집된 아태조약기구 비상회의에서는 말레이시아 사태 개입안이 의결, 미군과 호주군, 싱가포르군을 주축으로 한 지원군이 파병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또 다시 전쟁에 휘말린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자유세계의 정병들이 약소국 말레이시아를 금방 정리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바라건대 말이죠.
U2. 심장은 왼쪽에 있고, 피는 붉은 색이다!
존슨 제2기 행정부가 말레이시아 개입을 선언하고 전쟁선포안이 일부 반전주의자 의원들의 비난 속에 의회를 통과할 무렵, 원내 3당에 속하지 않았던 원외 좌익세력의 역학 역시 급격한 전환을 겪었습니다. 거스 할의 미국공산당(CPUSA)은 마치 수십년 전 프랑스 공산당이 그랬듯 모스크바의 노선을 무비판적으로 맹종했고, 급격히 수정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이는 당원들의 극심한 반발과 지지세 이탈, 각종 노조들의 비판을 받았죠. 미국 내에서 노동자와 유색인종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데 대관절 러시아인들의 사상논쟁이 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공산당의 빈 자리는 자연스럽게 노조와 긴밀히 연결된 대안세력들이 차지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때 ‘트로츠키주의 정당’으로 여겨져 FBI의 강력한 견제의 대상이 된 사회주의노동당(SWP)이 있었습니다. 페럴 돕스(Farrell Dobbs) 위원장은 전미운송노조 위원장 지미 호파(Jimmy Hoffa)의 정치적 멘토이자 그 스스로 운송노조 간부였죠. 이들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도덕적 결함’ 정도는 얼마든지 눈 감을 수 있었습니다.
흑인 민권운동의 좌익급진파 포지션은 흑표당이 가져갔지만, 카리스마적 당수 프레드 햄프턴이 경찰의 초강경 진압으로 사망한 이후 그 지분은 타 세력에 의해 빠르게 잠식되어 나갔습니다. 후임 당수인 바비 실(Bobby Seale)이 시카고 8인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동안 흑표당은 사실상 ‘상징’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즉 백인 기득권을 혐오하는 흑인 또는 공산주의자라면 아무나 흑표당 간판을 달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체 없는 조직, 그에 대비되는 높은 지명도. 진보노동당(PLP)의 뉴욕 할렘 출신 공산주의자 빌 엡튼(Bill Epton)이 데마고그적 연설가의 재능을 십분 활용해 흑표당의 새 당수를 자처해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사회주의노동당과 진보노동당, 그리고 몇달새 거스 할 위원장을 축출한 공산당은 1969년 12월 21일 “말레이 전쟁 반대를 위한 합동 규탄대회”에서 진보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좌파정당이라고는 해도 엄연한 원내 합법세력인 진보당은 일부 의원들을 제외하고 난색을 표했으나, 뒷일은 알 수 없었습니다.
광란의 6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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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의 사건.
- 쿠데타. 그리고 또 쿠데타. (소련, 독일. 이 외는?)
- 말레이 토벌.
- 요도호 사건.
-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 미국 동맹 휴학?
- 미국 대한 지원 원조-컨트롤.
- 미시마 사건 (쿠데타 요구? 북진 요구?)
- 바흐 엘-바카르 대학살?
- 아일랜드 위기.
- 캐나다 10월 위기.
+ 위 사건들 또한 모종의 이유로 생략 될 수 있습니다.
+ 당연히 여기 없어도 써주시면 쓰겠습니다. 항상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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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세르는 생존! 심근 경색이니 살려 둡니다. 사다트의 성향과는 별개.
+ 나폴리의 밤... 언제 쓰지...
+ 짤들 고르는 센스는... 티나면 좋겠습니다만 ㅋㅋ... 제목에서 제일 먼저 + 모티브 사건이 있다면 그렇게. 입니다.
@dear0904 1,네 그건 저도 압니다.당장 요즘 뉴스나 다른글 보다 짜증날때 있으니 좀 즐길겸 허가한게 저니까요.
2.그건 당연한거죠.제가 참여형을 할때도 벨런스 맞추려고 애쓰는데.
3.이건 그럼 서술을 좀 바꾸는 정도면 될것 같은데.잘 모르겠네요.전 그렇게 잘쓰는것 같지는 않아서
4.과유불급이라고 보시는거군요
+ 이렇게 참여 성격이 있는 경우엔 눈치를 볼수밖에 없습니다.저처럼 공개적으로 비방을 당한 경우가 있을 경우엔 더더욱.근데 그걸 이용해서 협박이나 겁박을 하는걸로 보인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 같습니다.
눈치를 너무봐도 문제라는건 실제로 국민정부당시 한번 나왔었죠.계속 봐달라고 해서 남미쪽 불안할때 덮어줬다가 결국 남미내 전면전이 벌어지고 말았잖습니까.
+ 전 돈님 말고 다른 분에게 여러번 당했던.그분...
@931117 2. 사실 그래서 "왜 굳이 밸런스를 맞출라 그래요? 쓰는데로 두지?" 라고 할까봐 할 말이 있다면... "국민정부 기억 나시면 좋겠습니다. 게임이라 전면 핵전쟁 안 나고 소련이 굽혀야 했던. 소련 플레이어가 겨우 참아서 그렇지..." 라고. 대외론 맞는데 게임이 개판 낸 밸런스...
3. 그래서 매번 바꾸니까 이정도면 그대로 가자는 소리를 들었죠. 기반 유지하면서 쓰니까 티는 나지만, 많이 바뀌니.
4. 네. 너무 과해도 문제죠. 너무 없어도 좀 그렇지만...
+ 저는 비 공개 비방을 먹은적 있죠... 눈치를 덜 보려고 노력도 하고. 근데 진짜로 그 상태를 악용하면 그건 좀.
+ 저는 두번이 다 달라서 ㅎㅎ...
@dear0904 2.시스템상 한계가 나오고 하니까 아예 비게임으로 전환한거죠.게시판 이전도 요인중 하나지만.제기억이 맞다면 말이죠.사실 이젠 기억도 잘 안나요
3.근데 표현의 문제로 잘못 보인다면 어쩔수가 없습니다.저야 참여형이라 웬만하면 제지하거나 그냥 복붙해 쓰지만 이건 임의로 첨삭해서 서술하는거니.그게 아님 완전 소설형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4.해서 저도 요즘 뽕을 넣으려 할때가(베니스 뽕이라든가 폴리투 뽕이라든가 네덜란드 뽕이라든가(이건 1684가 네덜란드 판도가 안맞아서 제작 중단하고 2안으로 1793을 따로 만들고 있을 정도) 있을 정도로 애착이 있는건 좋은점도 있습니다.말씀대로면 과하면 문제인거지.
+ 전 똥 취급 당한적도...구 로디지아가 자꾸 연상되는군요...
+ 전 거의 연쇄범이었던...ㅎㅎ...
@dear0904 제 의견을 간단히만 말하자면…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원인은 구조적 문제일 수도 있고, 단순한 불화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딱히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지는 않아보입니다. 당장 소련 쪽 투고를 주로 하시는 돈이 곧 진리님께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심지어 남아공이나 아르헨티나 내용을 쓰신다고 해도 전혀 문제없는 상황이니까요.
종전까지의 전개에 비해 좀 생뚱맞거나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자유롭게 수정안을 제시하든 작성자가 조정하든 해서 서로 맞춰갈 수 있습니다. 이건 심지어 참여형일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로콘님의 설정 이의제기를 제가 받아들여서 초기 미국 국내정치 설정을 좀 수정한 적이 있었죠. 그런 식으로 하면 되는 겁니다. 물론 600자 댓글창을 5-6개 채울 분량을 썼는데 “이건 너무 말도 안되지 않나요”라는 얘기를 들으면 좀 기운 빠지긴 하겠습니다만, 그건 투고자가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그냥 마음 상하신 분들끼리 서로 사과를 하든 개인 쪽지로 한바탕 싸우고 다 풀고 오시든, 아무튼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한정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구경기에서 벤치클리어링 일어났다고 리그를 없애지는 않으니..
@E.E.샤츠슈나이더 여러분 제게 댓글이 너무 많이 달려요!!
@렌지파일 앗 ㅋㅋㅋ... 죄송합니다. 맨 윗사람 안 보고 잇다보니. 이거 저번에 통장님께도 그랬던것 같은데.
@E.E.샤츠슈나이더 말이 나온 김에 다음화든 언제든 동구권이나 파쇼권(…) 파트도 한번 써봐야겠군요. 물론 처음부터 막 시리어스하게 가는 건 아니고, 비교적 가벼운 쪽으로…
근데 생각해보니 이미 친소진영인 레반트 내용을 쓰고 있었군요?
@렌지파일 그러고보니 ㅎㅎ...
갱신해서 둘 다 달겠습니다.
2. 네. 한계가 생겨서 (동맹이 풀리고... 아무튼 이래 저래) 전환 했었죠. 호주때 알았어야 하는것 같긴 한데. 인력 부족한데 방법이 없는 그 순간들...
3. 임의 첨삭이긴 한데, 저는 일단 그러겠다고 미리 밝혀 놨죠. 주시면 보고 어느정도 바뀔수 있다. 첨삭 될수 있다.
4. 뽕이 너무 과해서 사고 나는것만 아니면...
+ 그분은... 에혀. 이미 사라진 분이니 맙시다.
슈나이더님 의견도 답하면. 제가 계속 말했다시피, 이거로 전환하진 않을거다. 라고 밝히고 있죠. 오히려 비밀로 받으면 받았지... 거기다 솔직히, 어느 진영을 쓰던, 어느 국가를 쓰던, 저는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문제 삼을거였으면, 북한부터 말했어야 하는거고...
거기다, 너무 어이가 없다면, 다른 사람이 말할수 있는것도 열어 놨었죠. 즉, 말한대로 구조적 문제는 아닐겁니다. 거기다 저 600자 6개도, 한번 컷하고 수정 했죠. 서운 하실수 있지만, 이것도 다 감수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릴레이 소설 몇번 해보면 알겠지만, 터무니 없는거 컷 안하면 10명도 안 오고 끝난다니까요?
아무튼... 돈님과 931117님간 분쟁이 생긴건 어쩔수 없는데... 생긴 김에 한마디 더 얹자면. 너무 과한 애정도 독입니다...
2.그래서 게임으로 못메우는 부분을 메우려고 애를 쓰지만 지금도 그게 안되는것 같다는 느낌이.
3.이거 다음번엔 좀 심각한 상황을 불러올것 같으면 사전에 경고하면서 그래도 하겠냐고 확인을 받는게 나을수도 있겠네요.실제로 소련 군축만 해도 제가 사전에 한마디라도 했을테니.
4.전 프랑스 뽕이 너무 과해서 사고난게 여러번...오죽하면 프랑스나 영국등은 문제 자주 벌어지니 플레이 금지국가 목록에 넣을까 하겠습니까.한번만 더 문제 벌어지면 그땐 진짜로 금지 국가로 넣어야.
+ 참여 인원 문제가 심각하긴 한데.그렇다고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사람을 계속 받을수는 없으니.
@dear0904 지금 이건 돈님이 자신의 멘탈을 위해 지적이나 플롯 얘기도 삼가달라로 보이기에.
저로선 제가 뭘 잘못했는지 지금으로선 알수가 없네요...
@931117 2. 게임이 장 단점 모두 있었죠. 연감 없이도 편하게 했고... 전쟁 안해도 되는 서독은 오히려 편했는데, 전쟁 해야 하는 국민정부랑 호주때는 어후 참...
3. 근데, 경고를 안 하는건 반 참여형이니까 그런거도 있거든요. 거기다 어떤 일이든 반대 급부는 있어 왔고.
4. 프뽕도 프뽕인데... 제국주의 국가들이 사고가 좀 나고 있었죠. 영국, 프랑스... 독일은 적은거 같지만, 그쪽도 싸운적 있고.
+ 참여 인원때문에도 반 참여형이 좋긴 좋아요. 물론, 방금처럼 일이 있긴 했지만...
@931117 저도 갑자기 터져서 놀랐습니다. 아까 말했지만, 이번화 올라오고 댓글 단 다음 한 1시간? 정도 확인을 미뤘습니다. 돈님 쓰신 댓글 보니, 내가 좀 과했나 싶어서. 근데...
@dear0904 2.서독은 내각제 때문에...물론 요즘 돌아가는꼴 보곤 내각제가 낫나 하는 아이러니...
3.그렇기야 한데.이런일이 자꾸 생기면 뭔가 조치가 필요할것 같긴 해요
4.독일-프랑스간 전쟁 터질때마다 계속 일이 벌여졌으니까...
+ 전 불행히도 독자적으로 이벤트나 장문의 대화를 짤 능력이 없어서.
@931117 여기 한국은 진짜로 내각제 회귀해버렸죠(?)
@dear0904 오죽하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니 제3자에게 확인 요청을 하겠습니까.
이럼 벨런스 붕괴를 감수해도 소련은 별탈 없이 잘나가게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E.E.샤츠슈나이더 2공의 실패를 답습 안함 다행인데 또한다면 그땐 국민들도 내각제를 거부할걸요?
아님 유신헌법에 의한 간선제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벌써 반발하고 있거나?(실제로 5공때 내각제 개헌 조짐이 보이자 반발여론이 꽤 쎘잖습니까.제가 아는게 맞다면)
@931117 2. ... 지금 한국 정세 말하면 정슈게 가야 하니 (... 개인 게시판이면 막 할텐데) 말을 맙시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맞나 했더니.
3. 그렇긴 한데... 생각은 해봐야겠네요. 반대 급부를 말해 두거나...
4. 그러니까요. 거기다 둘 다 강골인게...
+ 에이... 이번화 S-C1. K1. 둘 다 그리 잘 쓴편이라고는...
+ "소련은" 잘나가게 하는 방법은 있긴 하겠죠. "소련은"
+ ㅋㅋㅋ... 그래서 요약도 전쟁 후에 두고 봅시다... 죠.
@931117 실제로 구상하는 플롯에 따르면 그 반발(정확히는 새 체제를 세운다길래 혁명을 지지했는데 그 결과가 구시대 회귀라는 점에 대한 불만)이 어떤 방향으로든 표출될 전망입니다. 그것도 즉시… ㅋㅋ
@dear0904 3.어쩔수 없잖습니까.이런일이 또 벌어지면 또 차질이 벌어질수 있으니까.
+ 전 그렇게 잘쓴다는 생각이 딱히...얼마전에 전에 쓴 독일 연대기 하나(한스가 주인공인) 몇개 봤는데.제가봐도 진짜 못썼더군요...ㅋㅋㅋㅋ
+ 봐야죠 어찌될지
+ 가만 생각해보니까 한국 국민들이 이렇게 쉽게 간선제를 받아들이나?80년대랑 지금이랑 다른가?해서요
@E.E.샤츠슈나이더 북한으로선 천만 다행일겁니다.한국이 시끄러워야 재정비하고 복구할 시간이 늘어나니.ㅋㅋㅋㅋㅋ
당장 생각나는 대책안으로는 빠른 시일내에 민주적 선거를 진행한후에 다시 개헌하겠다고 하든가 아님 그렇게 민주정부를 출범시킨후 국민들을 달래는 조치를 이행하는 정도겠네요.
일단 대선이든 총선이든 민주파가 승리할건 불보듯 뻔하고
@931117 자세한 건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원역사랑은 좀 다릅니다.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원역사 대통령만 바꿔도 이미 다른데(박정희가 조기에 끌려난 상황에서 최규하,전두환,노태우가 될 가능성이 엄청나게 낮은 상황)요.ㅋㅋㅋㅋㅋㅋㅋ
@931117 한가지 더 풀자면, 여기 한국인들은 내각제인지 대통령제인지 같은 절차적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습니다. 야당 지도부랍시고 거들먹대는 양반들이 그동안 대정부투쟁도 건성으로 하고 금뱃지나 지키던 올드보이들이라는 게 찐으로 빡침 포인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요.
@E.E.샤츠슈나이더 네.그냥 생각해보니 5공 당시에 대통령 직선제하라고 요구한게 생각나서 물어본것 뿐이었어요.
근데 인사는 어쩔수 없는게 당장 중진들이 걔들뿐이니.
뭐 누가 정치적 하극상을 벌인담 모를까
운동하면서 생각해봤고. 지금 와서 댓글들을 봐보니 제가 별거 아닌 일에 과하게 대응해 괜히 감정싸움을 만든 것 같네요. 괜히 싸움건 931117님께 죄송하고, 싸움 보느라 힘들었을 다른 분들께도 사과드립니다.
뭐...멘탈이나 감정 제어가 쉬운일은 아니니까요...
방금 들어보니 북한이 재정비하거나 재건할 시간은 잘하면 꽤 벌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런저런거 다 떠나서, 일종의 마인드콘트롤은 좀 필요해보입니다. 전에 플레이하던 세력에 대한 애정은 존중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