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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풍수 특집 | 도선의 생애와 풍수사상] 道詵의 한국 풍수 1,100여 년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05 15.03.26 1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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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특집 | 도선의 생애와 풍수사상]

道詵의 한국 풍수 1,100여 년

 

글·사진 최원석 경상대 교수

글 박정원 부장대우

 

全세대·사상에 지대한 영향

고려 4대 성인으로 추앙… 술승(術僧)으로 인심 미혹 인물로 비난받기도

 

한국 역사 속에 승속과 계층을 막론하고 아마도 도선(道詵)만큼 큰 족적을 남기고, 수많은 인구에 회자되고, 정치·사회·문화·사상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람을 찾기 힘들다. 한국의 전통사찰 치고 창건 및 중창 과정에 도선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많지 않다.

그의 비보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풍미한 사회 담론이었다. 풍수서, 도참 비결서에는 도선이 지었다는 수많은 책들이 현존하고, 지방 도처의 마을마다 도선에 관련된 설화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전승되고 있다. 서울 성동구에는 도선동이라는 지명까지 있고, 도선이 주석했던 전남 광양 옥룡사 근처에는 도선국사테마마을까지 생겨났다. 도선이 입적한 후 1,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자취와 숨결은 전국 곳곳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도선만큼 역사적 평가 상반된 인물 드물어

 

그런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도선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극적이라 할 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도선은 고려왕조 초 개국 조사(祖師)로서 태조 왕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기반을 제공한 인물로 부상했다. 고려 중기에는 원효, 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국사로 추존되었고,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존숭 받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어와 유교를 나라의 이념으로 삼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도선은 터무니없는 사회적 예언을 일삼는 술승으로, 비기(秘記)로써 인심을 요혹(妖惑)시키는 인물이라는 비난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추앙의 대상과 비난의 표적이 되게 하였는가? 천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민간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그의 참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도선(827~898)이라는 인물에 대해 접근하기에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어렵다. 역사상 한 인물의 평가가 도선만큼 다양하고 상반되는 사례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도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호칭마저도 국사(國師), 성승(聖僧), 선승(禪僧), 도승(道僧), 신승(神僧), 풍수도참승(風水圖讖僧), 술승(術僧), 권승(權僧), 간승(奸僧) 등 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심지어 실존 인물이 아니라 지배 권력에 의해 가공된 인물이라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다.

 

 

▲ 구례 사성암에서 바라본 섬진강 자락 사도리. 도선이 풍수를 전수한 현장이다.

 

 

도선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기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도선에 대한 1차 사료의 부족 때문이다. 도선이 썼다는 많은 글이 있지만 직접 남긴 글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를 알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사료인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 병서(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幷序)>마저도 사후 250년이나 지난 1150년에야 찬술되었다는 사실이, 도선의 참모습을 살피는 데 어려운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도선에게 가까이 갈 때, 역사의 한 시점에서 ‘실재했던 인물로서의 도선’과, 역사의 과정에서 ‘역사화된 인물로서의 도선’을 구별해야 한다. 실재한 도선은 역사적 사실성의 규명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역사화된 도선은 역사 속에 반영된 의미와 해석에 중점을 둔다. 역사적 인물의 생애나 사상을 다룰 때, 좁은 의미에서는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생애가 서술의 범위가 되겠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역사적인 배경 조건과 시·공간적으로 퍼져나간 영향까지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도선의 참모습을 밝히기 위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 배경에는 도선에 대한 역사적 정체성의 사회적 평가에 왜곡과 폄하가 심했다는 반성적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제 역사적 인물로서의 도선과 그의 사상에 대한 참모습을 되찾아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도선의 명예회복은 무엇보다도 그의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상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평가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풍수 술법성은 생활 지식정보로 널리 활용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프리즘에 따라서 도선의 참모습은 굴절된 스펙트럼으로 역사에 투영됐다. 척불숭유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던 조선조에서 도선은 풍수승, 도참승, 권승 등의 꼬리표가 붙은 술승으로 치부됨으로써, 조선 왕조의 유신(儒臣)들에게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고려조에 성인과 국사로까지 존숭되었던 도선의 명예는 조선조에 바닥으로 추락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왜 그랬는가? 그의 사상에서 한 본령을 차지하고 있는 풍수지리설과 사탑비보설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도선에 대한 사회적 논쟁과 평가에 있어 뇌관은 바로, 풍수적 논리로 국가사회의 길흉을 예언하는 풍수도참설이었다. 

 

 

 

▲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 있는 도선국사 진영. 1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전남 유형문화재제176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왕조에서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도선의 사탑비보설도 호되게 비판했다. 고려의 쇠망기에 사탑비보설의 사회적 폐해가 무척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 말에 혁신적 사회사상으로 역할을 다했던 본래 도선의 풍수지리설 및 비보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후대의 정치세력이 이용하고 꾸민 풍수도참설은 오리지널한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사탑비보설이 아니었다.

 

최병헌 전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가 이미 선구적으로 밝힌 바 있지만(1975년도 발표 논문),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후대에 왜곡된 미신적인 풍수도참설은 구별되어야 한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국토환경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에 바탕을 둔 인문지리학이었다.

 

그렇다면 도선이 풍수승이자 한국 풍수지리설의 시조라는 평가는 도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폄하의 요인이 될 수 없다. 고려왕조에서 도선은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평가되었기에 원효나 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로서 이른바 ‘지리국사(地理國師)’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충선왕, 1309년). 더구나 옥룡사도선비문에서도 분명히 표현되었지만, 도선이 지녔던 풍수지리설의 사상성은 단적으로 ‘대 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법(大菩薩救世度人之法)’이었다.

 

근래에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도선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사회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도선이 선승이라는 주장이 우세하지만 일각에서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승려, 풍수도참승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선의 참모습과 그의 역사적 평가는 기존의 주장만으로는 충족되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정작 도선의 역사적 평가에 필요한 것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르고 온전한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그동안 도선에 대한 연구는 각 분야에서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조명됐고, 다른 부분은 제외되거나 부정되었다. 도선은 선승만도 아니고, 풍수도참가만도 아니었다. 그의 온전한 참모습은 무엇인가?

도선은 나말여초의 지식인으로서 그 시대의 지식을 섭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념적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적 실천의 길을 모색한 사상가였다. 그는 선승이자 풍수승이었다. 도선 사상에는 불교, 풍수, 도참, 선, 밀교, 음양오행설, 선도, 도교가 두루 포함되어 있다.

 

 

▲ 구례 사성암의 도선굴. 도선이 지리산의 이인(異人)을 만났던 곳으로 추정된다.

 

 

도선의 풍수는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대로 위치를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이 논의의 출발은 도선의 풍수를 술법적인 풍수, 미신적인 풍수와 대비하는 구도에서부터 분명해질 수 있다.

 

술법풍수 혹은 술수풍수를 옳다 혹은 그르다는 식의 가치론적으로 양분해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술법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생활의 지식정보로 널리 활용되었고, 기술로서 기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기의 천문(점성술), 음양오행술, 의술, 풍수술, 명리, 점술 등도 그 명칭처럼 대표적인 술수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에서 기술관으로서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 등의 술수 혹은 술법 분야를 뽑았던 것으로 보아 제도권 학문 분야의 하나로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술법 혹은 술수로서의 풍수 역시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의 경험적이고 전근대적인 땅에 대한 지식이자 기술로서 의술과 함께 중요한 분야를 차지했고, 자연환경에 적합한 삶과 죽음의 공간적인 생활사를 영위하는 실제적 방식으로서 기여했다.

 

고려 태동기에 불교와 풍수사상 결합 응용

 

풍수의 술법성이 문제되는 것은 의술과는 달리 경험적인 증명이 어려워 비합리적이거나 미신적인 논리가 게재될 여지가 많고, 역사적으로 도참의 예언 논리와 결합하면서 미신풍수로 변질되어 수많은 사회적인 폐해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술법적인 풍수는 미신적인 풍수로 왜곡될 소지와 위험성이 다분히 컸던 것이다. 따라서 술법풍수와 미신적인 풍수(미신풍수)를 차별화하는 학술적이고 사회적인 기준이 필요하리라 판단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술법풍수는 미신풍수와 질적으로 달리 볼 수 있으며 동일시 될 수 없다. 미신풍수는 술법풍수가 타락한 허무맹랑하고 미혹된 풍수이다. 아무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 없이 맹목적인 명당발복과 길흉화복을 말하고 앞일을 예언하는 따위의 풍수론과 풍수신앙적 행태는 모두 미신풍수라고 할 수 있다. 미신풍수는 도참, 비결과 결합하여 미신적인 풍수도참설로 사회에 등장해 민중을 혹신(惑信)시켰다.

 

도선 풍수의 원래 모습이 타락한 미신풍수가 아님은 분명하다. 도선 풍수는 사회개혁을 추동한 대승적인 사상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실 술법이라는 카테고리로 규정할 수 없다. 흔히 술법의 혼잡스러움을 비하해 잡술이라고 하는데, 불교사상 및 선도, 음양오행설, 도교 등을 결합하여 나말여초의 개혁적인 사회이념을 제시한 도선의 풍수비보사상과 그 실현방식으로서의 비보사탑설을 잡술로 볼 수 없다.

 

 

▲ 도선이 평생을 주석하고 생을 마쳤던 광양 백계산 옥룡사지.

 

 

그러나 후대에 도참과 결합하거나 도선의 이름을 끌어댄 풍수는 술법풍수 혹은 잡술풍수이고, 그중 일부는 미신풍수이기도 하다. 요컨대 도선풍수는 술법을 활용하고 있지만 술법에 치우치지 않은 합리적 사회사상성을 견지했으며, 후대에 타락한 미신적인 풍수와는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에서 드러난 도선의 모습은 당시의 사회적 담론이 투영된 단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도선의 지식인상과 그의 사회담론은 역사적 과정에서 정치권력집단에 따라 재구성되었다.

 

신라 왕조가 몰락하고 고려가 건국하는 태동기에 도선은 불교와 풍수라는 두 사상 요소를 결합 응용해 새로운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담론을 만들고 실천한 전환기의 지식인상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사상은 풍수와 불교를 주요한 논리적 근거로 삼고 도교, 음양오행, 도참 등 나말여초 당시의 여러 사상을 포괄적으로 흡수·결합해 이상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실천적 담론으로 평가됐다.

 

당시에 도선 사상은 사회변혁을 이끄는 공간적 논리로 해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토공간의 계획과 운용 원리이자 사회사상적 이데올로기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 왕조 초기의 정치권력은 도선의 비보사탑설을 지방 세력에 대한 공간적 통제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고려 중·후기를 걸쳐서 도선 사상은 풍수도참의 색채로 윤색되어 수도의 천도를 위한 이론적 토대로 이용되면서 취약한 왕조세력의 권력을 강화하거나 개혁적인 신흥계층의 세력 증강을 위한 방편적 논리로 변질되기도 했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서 성리학적인 사회이념으로 건국한 개국 정치세력들은 도선의 사회사상이 지닌 불교적, 도참적 성격을 강력히 비판하고 배제했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에 지방사회의 사족 지배집단은 도선의 풍수담론을 취락공동체의 번영이라는 유교적 담론으로 재구성했다. 현대에 지구적인 생명공동체의 범위로 전개하는 국제사회의 생태환경담론은, 도선 사상을 자연과 인간의 지속가능성에 기반한 전통적 생태환경사상의 지평으로 재해석되기를 시대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도선은 신라 말의 전환기 시대상황을 발전적으로 이끈 사상가요 이데올로그였다. 신라 말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선종 및 풍수사상을 시대상황에 부응하여 통합하고, 이를 비보사탑설이라는 실천적 사회담론으로 제시한 지식인이었다.

 

도선 사상은 동아시아에서 줄곧 추구되어온 마음과 자연의 문화전통을 융·복합한 한국사상사의 한 실천적 성취였다. 인도 불교의 화엄과 밀교, 중국의 선종, 풍수, 도참, 도교, 한반도 고유의 선도 등이 융합되어 역사 속에서 빚어진 산물이었다.

 

 

▲ 광양 옥룡사지에 있는 도선 부도전과 탑비의 복원된 모습.

 

 

도선 사상의 키워드는 ‘마음과 자연의 만남의 미학’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불교의 마음이 풍수의 자연과 만나 새로운 미학을 창출한 것이다. 그 사상적 흐름은 9세기 신라 말 도선이라는 인물에서 비롯되어 고려와 조선을 거쳐서 오늘날까지 도도하게 이어지는 한국 문화사의 큰 줄기이자 특색 있는 문화전통이 되었다.

 

한국에서 불교와 풍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역사상 독특한 사상, 문화와 경관을 형성했다. 대다수의 전통 사찰은 풍수적 입지 경관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는 불교와 풍수가 결합되어 사회적·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도 불교와 풍수가 결합된 많은 설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불교의 마음과 풍수의 자연이 만나 꽃피운 미학의 정점에는 도선이 있다.

 

도선의 비보사상은 전근대적인 환경관리사상으로서 자연재해를 조절하기 위한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기능도 했다. 오늘날의 논리로 말하자면, 도선 사상은 자연과 인간의 상보적 조화 원리에 기초한 문화생태학이자 환경사상의 담론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도선의 지식인상과 그의 사상적 담론을 조명하고 가치를 매기는 까닭도, 도선 풍수의 정체성이 21세기의 생태환경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담론과 맞아 발전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문화전통이기 때문이다. 새 천년에 인류의 문명사회가 자연환경과 더불어 나아가야 할 상생의 길은 도선 사상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경건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한 에스더 스턴버그(Esther M. Sternberg. M.D.)는, ‘힐링 공간: 장소와 웰빙의 과학’이라는 최근의 저술에서, 공간과 장소가 심신의 건강과 치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며, 가장 강력한 치유의 힘을 지닌 곳은 뇌와 마음속에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이러한 서양과학적인 연구는 도선 사상의 현대적 실용성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연이 지닌 치유의 힘에 의한 힐링 철학이자 방법

 

한국사회의 문화적 트렌드는 웰빙에서 힐링으로 나아갔다. 경제성장 일변도의 근대화 과정에서 놓쳐버린 진정성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 이전투구의 물질적 추구와 경쟁으로 인해 빚어진 사회공동체의 병폐에 대한 치유로 힐링의 열풍이 불었던 것이다. 힐링이라는 사회적 트렌드에 비추어서 도선 사상의 현대적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과 자연의 양면적 힐링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선의 힐링사상은, 마음의 힐링사상인 불교와 자연의 힐링사상인 풍수를 결합한 성격을 지닌다.

 

실상 불교는 마음에 대한 힐링의 철학이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약사경>도 유행했고, 약사여래(보살)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동사열전>에서, 부처를 중생의 마음의 병을 고치는 큰 의사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한 것이다.

 

 

▲ 민중에 필사됐던 수많은 풍수가사 중의 하나인 <국사 옥룡자답산가>. 도선의 이름을 빌어 적어놓았다./출처 한국가사문학이미지 / (아래) <도선답산가>의 본문 중 한 부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불교가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법이라면, 풍수는 자연이 지닌 치유의 힘에 의한 힐링 철학이요 방법이다. 풍수에서 자연과 장소는 사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바다에 가면 답답했던 마음이 확 트여 가슴이 시원해지고, 산 속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옛 절에 이르면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하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특히 도선의 비보풍수는 힐링풍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옛글에도 도선의 비보설은 약쑥과 같아서 산천토지의 병통을 치료하는 것이라 했다. 최창조 선생도 “도선 풍수의 본질은 땅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그 방법론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고침의 추구이다”라고 하여 도선 풍수를 힐링풍수의 측면으로 정의한 바 있다.

 

도선 사상의 힐링은 요즘 유행하는 퓨전이나 융복합의 방식과도 통한다. 사람의 몸과 정신에 한정된 힐링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을 결합한 구도의 대승적 힐링이라는 점이다. 도선 사상의 힐링은 자연과 사람이 상호적 관계로 같이 힐링되는 것이다. 옛 문헌에서 도선이 국토의 3,800군데에 침을 놓고 뜸을 뜨는 의지법(醫地法)을 실행했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맥락과 의의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을 치유함으로써 그 자연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는 사람도 치유하는 것이 도선의 힐링 사상이다. 그래서 그의 비보사탑설도 자연치유를 통한 마음치유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렇듯 도선 사상의 힐링 철학은, 현대의 환경생태주의라는 시대적 사회정신과 연계해, 미래에 인류와 자연이 공존하는 사회사상을 전망하는 데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선이 성취한 불교와 풍수의 결합은 다름 아닌 ‘마음과 자연의 만남의 미학’이었다. 도선사상의 정수는 현대적인 재해석을 통해 되살려야 할 천년의 정신유산이자 문화전통이다.

 

 

 

한국 자생풍수 창시자 도선은 누구인가?

신라 무열왕 서얼손說… 광양 옥룡사서 35년간 머물다 입적

 

구례 섬진강변 사도리서 지리산 이인(異人)에게 풍수 전수해

 

한국 자생풍수의 창시자로 알려진 도선(道詵)은 827년(신라 흥덕왕 2) 영암에서 태어나 898년(효공왕 2) 옥룡사에서 입적한 신라 말의 승려이며,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속성은 김씨, 호는 옥룡자, 이름은 도선이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그 세손과 조부는 역사에 기록이 없으며, 혹자는 태종대왕(19대 태종무열왕)의 서얼손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해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된 후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의 혜철 문하에서 법을 배운 후 옥룡사에 들어와 후학들을 지도하다 72세의 나이에 입적했다.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증성혜등탑(도선 부도)을 세웠다.

 

도선은 신라 하대에 새로 도입되어 당시의 불교계에 신기풍을 일으키던 선종 계통의 승려로서 선종구산파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의 인가를 받아 광양의 옥룡사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했던 승려다.

 

 

 ▲ 순천 선암사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506호인 도선국사 진영.

 

 

도선에 관한 여러 자료 가운데 가장 상세하고 종합적이며,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은 최유청이 쓴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 병서(白鷄山 玉龍寺 贈諡 先覺國師 碑銘 幷序)>, 즉 도선비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비문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그 비문의 내용만이 <東文選(동문선)>에 수록돼 전한다.

 

비문에 의하면 도선의 생애는 5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도선이 출생하여 15세까지의 유년기다. 어머니는 강(姜)씨이며,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 한 개를 건네주면서 삼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만삭이 되도록 오신채(五辛菜, 마늘·부추·파· 달래·흥거)와 누린내 나는 육류는 일절 먹지 않고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불사에 지극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유년기에는 불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제2기는 15세(841년, 문성왕 3)에 출가해 20세까지 화엄을 공부한 시기다. 월유산(지리산으로 추정) 화엄사에 출가한 도선은 대경을 독습해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대의를 통달했다. 도선은 대경, 곧 화엄경을 공부해 문수의 미묘한 지혜와 보현의 그윽한 법문을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제3기는 선종 수학기. 출가한 도선은 6년간 화엄을 공부하다가 20세에 드디어 화엄종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교학에 의한 해설의 한계를 인식하고 언어나 문자를 거부하는 선종으로 개종해 동리산파의 개조인 혜철의 문하에서 선을 수업했다. 혜철은 당에 가서 서당지장으로부터 심인을 받고 귀국해 새로 선문을 열었던 고승이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23세까지 4년간 알뜰히 선을 지도했다. 이른바 말이 없는 말(無說之說)과 법이 없는 법(無法之法)을 허중에서 주고받아 도선은 확연히 크게 깨달았고,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제4기는 은사인 혜철대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15년간의 방랑수련기다. 구족계를 받은 후 이미 일승요의(一乘了義·모든 가르침의 궁극이며 萬善이 함께 한 가지로 돌아가는 귀착점)를 통달하고 참학(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각처를 유람하고 선지식을 탐방해 수행하는 것이 당시 수련과정이었다.

 

제5기는 도선이 광양 옥룡사에서 주석하던 시기다. 37세 때 희양현(광양) 백계산에 있는 옥룡사에 주석해 35년간 내내 이곳에 머물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도선은 옥룡사에 주석한 지 35년이 되는 효공왕 2년(892)에 72세로 입적했다. 이때가 견훤의 후백제가 건국된 지 7년 만이요, 태봉의 궁예가 왕을 자칭하기 3년 전이었다.

결국 도선이 생존한 시기는 흥덕왕 2년(827)부터 효공왕 2년(898)까지의 신라 하대로서 신라 고대사회의 붕괴를 눈으로 확인한 인물이었다.

 

도선은 자생풍수를 그의 인생 제4기인 방랑수련기 중 지리산에 살던 이인(異人)으로부터 전수한 것으로 전한다.

 

그 장소가 바로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섬진강변이다. 이인은 풍수지리설이 곧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글 박정원 부장대우

 

 

/ 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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