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꽃이 있다.
옥토와 박토를 고집하지 않는다.
논두렁 밭두렁이면 어떠랴.
햇빛 한 줄기 드는 곳이면 쇄석 자갈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뼘의 빈 땅만 허락하면 가나안의 복지인 양 바득바득 덩굴손을 뻗어 꽃을 피운다.
인심 넉넉한 외할머니를 닮은 꽃, 담장 위에 노란 별로 뜨는 꽃이 호박꽃이다.
소낙비 한 줄금 긋고 간 아침,
텃밭을 뒤지던 뒤영벌 한 마리가 나를 시간 저편으로 끌고 간다.
유년 시절, 초가집 일색인 동네에 유일한 기와집이 우리 집이였다.
땡감나무에 몸을 숨긴 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면
담장 위에는 분칠한 듯 노랗게 핀 호박꽃이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내겐 어머니가 둘이었다.
살을 주신 어머니는 내가 네살일 때 병마로 하늘의 별이 되셨고,
그때부터 키워주신 새엄마와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내게 어머니란 존재는 포근함도 친숙함도 아니다.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 분은 영원한 그리움이고, 한 분은 갚을 수 없는 고마움이었다.
새엄마는 혼기를 놓친 노처녀였다.
겨우 밥걱정이나 면한 살림에 꼬질꼬질한 강아지 둘이 딸린 홀아비에게 생의
전부를 걸만 했을까.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찼다.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새엄마는 실한 엉덩이를 빼면 볼품이 없었다.
우묵주묵한 뱃살, 자유분방한 얼굴에 액간의 들창코까지 천하의 박색이었다.
근동에서 미인으로 이름난 어머니가
장미라면 새엄마는 어린 내 눈에도 분명 호박꽃이었다.
부드러운 천성까지 호박을 빼닮은 새엄마는 소처럼 일만 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여름은 호박꽃의 계절이다.
이른 봄, 씨앗을 심으면 숨기척을 내기 무섭게 넝쿨은 가뿐하게 울타리담을 타고
올라 푸짐한 꽃 잔치를 벌인다.
능글맞게 달달 볶는 한낮의 열기도 개숫물 한 바가지이면 족하다.
이기적인 인간에게 햇순을 무참히 꺾인다 해도 절망하거나 요절하지 않는다.
더 많은 줄기를 뻗어 마디마디 열매를 품는다.
잎을 내고 줄기를 뻗는 옹골찬 기상만은 칠월의 태양 볕보다 뜨겁다.
호박꽃은 집념의 꽃이다. 허공이든 장벽이든 가리지 않는다.
표독스런 탱자나무 울타리도 기필코 오르고야마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꽃이다.
황무지에 맨몸을 갈면서도 열매를 맺는 게 호박꽃의 운명이라면
각박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것 또한 사람의 몫이 아닐까.
어쩌면 '성실'이라는 단어는 사람보다는 식물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호박꽃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생명의 꽃이요 환상의 꽃이다.
시골 처녀처럼 수수한 호박꽃은 요염한 장미처럼 별난 미색도 백합 같은 유혹의 향도
없다. 누렇게 익은 열매까지 촌부의 둔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쯤되니 '호박꽃도 꽃이냐'고 추녀의 대명사로 내몰려 애꿎은 여심만 박박 긁어 놓는다.
옴팡눈이 대세인 요즘,
짝퉁 장미가 소원인 여인들은 멀쩡한 코에 실리콘을 넣고 눈까풀을 찢고 턱을 깎는다.
하지만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랴.
외모가 능력이라고 믿는 작금의 씁쓸한 세태를 호박꽃에서 읽는다.
호박꽃을 닮은 새엄마는 넉넉한 잎 속에 몸을 숨긴 애호박처럼 속을 드러내려
애쓰지도 않았다.
단명인 아버지가 속도의 바퀴에 치여 비명횡사하자 할머니는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생트집으로 새엄마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마음의 생채기에도 피가 나고 진물이 나는 법.
끄덩이라도 잡히는 날이면 새엄마는 앞뜰에 있는 우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럴 때면 장독대 옆 담장에 핀 호박꽃이 말없이 그녀의 서러운 한숨을 들어주고 있었다.
호박꽃은 그리움의 꽃이다.
그 속에는 서둘러 떠난 내 어머니가 숨어 계신다.
유년시절, 어머니에게 호박꽃은 삶이고 세월이었다.
구수한 호박잎쌈은 단골메뉴다.
여름 별식으로 호박전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입이 호사를 했다.
배가 허출해지면 맵찬 손으로 뚝딱 만들어주던 얼큰한 애호박 된장찌개며 고소한 부침개,
호박풀떼기의 별미까지 그 부드러운 맛이 지금도 호박꽃에 묻어있다.
꽃샘에 분탕치는 꿀벌을 구금하여 흔들고, 밤이면 반딧불이를 가두어 초롱 밝히던 꼬마도
어느새 은발이 성성하다.
별난 계모슬하에 콩쥐로 자란 새엄마는 우리에 와서 아기를 넷이나 가졌다.
아버지와의 재혼도 어린 우리 남매를 보고서야 결정했다는 그 따스한 마음도 지금은안다.
곱게 늙어가는 새엄마를 통해 호박꽃의 의미를 되새긴다.
결코 외모는 삶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사람도 청둥호박처럼 당당하게 늙어간다면 쇠락하는 시간에도 행복이 스며있다고 늘그막이 진실 하나를 보탠다.
천대받는 꽃과는 달리 호박의 삶은 고귀하다.
늙어 약이 되고 떡이 되는 게 호박이지 않는가.
좌르르 쏟아지는 호박씨를 연주에 꿰면 단발머리 순이, 옥이가 걸고 다니던 유백색 비취 목걸이가 아니겠는가.
어디 금은보화가 흥부의 박속에만 있으랴.
조물주의 섭리 또한 얼마나 지혜로우신가.
꽃이 화려하거나 좋은 향을 가지면 작은 열매를 주고,
꽃이 보잘 것 없으면 크고 넉넉한 열매를 주셨다.
꽃도 열매도 훌륭하다면 금상첨화지만 하찮은 꽃에 열매마저 시원찮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래서일까.
탐스런 오곡도 꽃은 별로다.
벼꽃이 그렇고 꽃콩이 그렇다. 사람들은 장미를 꽃의 여왕으로 입줄에 올리지만
그 열매는 얼마나 초라한가.
꽃을 엑스레이로 촬영하여 연구하는 어느 의학자의 말을 빌리면 엑스레이에 잡힌 호박꽃의 아름다움은 장미보다
훨씬 더 빼어나다고 한다.
내면의 미를 관조했음이리라.
들녘에 황금 알을 낳는 호박꽃에 주목해보라.
연인과의 해후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고 따스한 훈김이 심장에 별로 박힐 것이다.
몇 덩이의 호박이 대청마루에서 가부좌를 틀고 면벽 수행중이었다.
마지막 한 점의 풋내까지 털어내는 숙성의 시간이리라.
나도 이처럼 곱게 익을 수 있을까...
사람에게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설익은 패기만 믿고 대책 없이 세상에 부딪히다간 좌충우돌로 겉돌기 마련이다.
냉철한 담금질로 자숙의 시간을 거쳐야 어떤 사람과도 화합할 수 있다.
손톱만한 작은 씨앗이 모진 풍상을 이겨내고 바위만 한 결실을 보기까지의
지난한 시간이 곧 내가 달려온 인생역전이 아닐까.
호박꽃의 멋은 누가 뭐래도 진솔함이다.
가식이 없는 꽃은 늘 훤칠한 목을 빼어 당당하게 하늘에 시선을 모은다.
슬픔과 기쁨, 미움과 고마움도 한 심장에서 일색으로 피우는 꽃이 아니던가.
'포용, 관대함'이라는 꽃말처럼 순박한 외모에서부터 믿음과 넉넉함이 묻어난다.
내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속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이름 없는 풀꽃도 사랑한 사람이라고,
세상의 비웃음이 주는 고통까지
가슴에 안은 사람이라고..."
빗물에 세수한 호박꽃을 다시 바라본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이가 들면 외모에도 자유로워지는 걸까.
나잇살이 붙어 두꺼비상이 된 내게 "호박덩이 같다"라고 툭툭 던지는 아내의 퉁마저 칭찬으로 들리니 나도
하릴없이 늙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첫댓글 지나온 삷이 흑백영사기
돌아가며 보여준 한편에
영화같은 장면이 스처갑니다
그나저나
왜 내 호박은 조막한하게
달리다가는 떨어지는지
누구는 벌이 없어 그렇다고
하고 누구는 기온이 안맞어
그런거라고 하고
누구는 거름이 모자른다 하고
우야둔둥 올해 호박은
잘 안되고 있어라~~
작년에 단호박씨가 있어서
화분에 키웠는데 거름이 없어선가 크질 못하고 방울토마토 크기서 멈추더니
장마철에 그냥 녹아버리드라구요..
아무데나 잘자라는 호박두
초보 농사꾼은 힘드네요.ㅎ
@새벽여신(예산39) 저 호박은
으느 할매 궁댕이만큼
노~~오랗게 키우고 있는데
잘 될련지 모르것어라
호박이나 수박은 구덩이를 미리파고 밑거름을 잘해줘야하고 꽃이피면 벌들이 많이 몰려와서 자연 수정이되 돼야 하지만
요즘엔 벌들도 많이 없어서 사람이 직접 숫 꽃수술을 암 수술에 비뱌줘서 수정을 시키는데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줘봐.
@난폭한오리(전주)185 뜨문뜨문 벌들이 있긴
있는데~~
활발하지가 않어라
먹을만큼은 열려있어라
마누라가 자꾸 따서리
남 쥐서 그렇치~ㅎ
@켑틴 장마 지나고나면 누루스름하게 익어 갈텐데 머하러 벌써 따서 남들에게 주는지 하긴 우리도 그랬지만..
올해는 한포기도 안 심어서인지 편하긴 하드만..대신 윗동네 처형한테 다 얻어다 먹긴 하지만..
@난폭한오리(전주)185 저 위에놈
오늘 가보니
이리 되었으~
뭐 하나 버릴것 없는 호박
잎부터 씨까지 아낌없이 주는
호박..새어머니가 그런분이셨네요..
어제 장보다가 로컬푸드서 크고 못생긴 호박을 보면서
천원밖에 안하길래 넘 싸서
하나들고 왔는데
저녁에 호박 듬북넣어
고추장찌개나 끓여 먹어야겠네요..~~^^
감자도 넣어야 맛나유
@켑틴
햇감자.호박.양파.돼지고기 .청양고추 .대파.전 이정도 넣어서 끓여 먹어요.
밥도둑이죠.ㅎ
우리 생모는 내나이 세살때 지금의 코로나처럼 전염병이 한창 유행할때 폐결핵에 걸려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전염이되어 내나이 16세에 먼곳으로 가시고 그뒤부터 계모의 모진학대로 고교도 2년만에 자퇴를 했네요..
하여튼 일반호박이나 단호박이나 거름이 풍부해야 합니다..
@새벽여신(예산39) 어제 우리집도 햇양파 둥근호박 햇감자넣고 갈치 지졌는데 정말 맛있더군요.
@새벽여신(예산39) 청량고추도 두어개 넣어야지요..
@난폭한오리(전주)185
그러셨군요..
저두 어머니가 16살때 뇌출혈로 돌아가시고
바로 새엄마가 들어와
본의 아니게 일찍 혼자 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