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庸 소설을 통해본
'僞君子'와 '眞小人'의 實用理性
임춘성
목포대학교 어문학부 중어중문학전공 교수
1.
문학사가 천쓰허(陳思和)는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사를 '중국 신문학사' 연구시기, '중국 현대문학사' 연구시기, '중국 20세기문학' 연구시기로 나눈 후, 그 기점을 각각 1933년, 1949년, 1985년으로 설정하였다.1) 그 세 번째 단계인 '20세기 중국문학'이 제기된 후 15년이 지난 시점에 중국 '근현대'문학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바로 '통속문학'의 문제제기인 듯싶다.
1) 陳思和(1996),「關於編寫中國二十世紀文學史的幾個問題」,「犬耕集」, 上海遠東出版社, 上海, 236~242쪽.
중국 근현대문학사에서 '신문학(新文學)'은 이른바 '구문학'을 비판함으로써 성립하였다. 그러므로 신문학 제창자들은 과장된 목소리로 '신문학'이 아닌 문학을 일괄적으로 '지주사상과 매판의식의 혼혈아', '반봉건(半封建), 반식민지(半植民地) 십리양장(十里洋場)의 기형적 태아', '유희적이고 소일거리(消遣)적인 금전주의'라는 식으로 매도하였고 자신을 그들과 대립항에 놓았다. 그러나 통속문학의 문제제기는 '신문학'이 '구문학' '지우기(erasion)'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했던 것이 정당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이에 대해 류짜이푸(劉再復)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문학이 사회변화와 외래문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다른 문학 흐름(流向)---'신문학'과 '본토문학'---으로 분열되었다. 후자는 전자와 함께 '20세기 중국문학'의 양대 실체 또는 흐름을 구성하여 완만한 축적과정을 통해 자신의 커다란 문학 구조물을 건설하였다. 20세기 초의 쑤만수(蘇曼殊), 리보위엔(李伯元), 류어(劉鶚), 1930~40년대의 장헌수이(張恨水)와 장아이링(張愛玲) 등을 거쳐, 진융(金庸)에 이르러 본토문학의 전통을 직접 계승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집대성(集大成)하고 그것을 발양(發揚) 광대(光大)시켰다.(劉再復 1998, 19~20)
'현대문학사' 연구단계의 문학은 혁명문학논쟁 이후 급속하게 좌경화되었고 동반자문학이나 우파문학은 그 존립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옌안(延安) 문예좌담회'에서 '인민문학'이념형이 제출된 후 라오서(老舍), 바진(巴金) 등의 이른바 '민주주의 작가'들조차 발붙이기 어려웠다.2) '20세기 중국문학사'의 공헌의 하나는 바로 '현대문학사'가 억압했던 '우파문학'을 근현대문학사의 연구시야로 복원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2) 劉再復는 이런 분위기를 ‘독백의 시대’라고 개괄하였다. 이 용어는 1949년부터 문화대혁명 종결까지의 시기를 지칭한 것으로, '중국 현대문학사' 연구단계와 일치한다. 이것은 연구분위기가 연구대상에 영향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從獨白的時代到複調的時代」, 『放逐諸神---文論提綱和文學史衆評』(天地圖書有限公司, 1994, 香港) 참조.
'신문학'이 '구문학'의 즉자적인 대립개념이고 '현대문학'이 마오저뚱(毛澤東)의 신민주주의혁명기의 문학과 동일한 개념이라면, '20세기 문학'의 개념은 그들(錢理群, 陳思和等) 나름의 고민과 전망을 담은 참신한 개념이었다. 천쓰허는 이를 “현대문학의 연구대상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 자신의 학술 시야도 해방시켰다”(陳思和 1996, 241)고 평가하였다. 이후 '20세기 중국문학'3)이라는 용어는 중국문학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되었고4), 한국의 중문학계에서도 낯설지 않은 개념으로 자리잡았다.5)
이상의 맥락에서 고찰할 때 판보췬(范伯群)의『중국 근현대 통속문학사(中國近現代通俗文學史)』의 문학사적 의미가 자명해진다. 그것은 '20세기 중국문학사'가 '우파문학'을 해방시킨 것에 뒤이어, '신문학사'가 배제시켰던 '통속문학'(구문학, 전통문학, 특히 전통 백화문학, 본토문학, 봉건문학)을 중국 근현대문학사의 연구 시야로 끌어들인 것이다.6)
3)
'20세기 중국문학'에 대한 검토는 임춘성,「중국 근현대 문학사론의 검토와 과제」(『중국현대문학』제12호, 1997)의 3장을 참조.
4)
陳鳴樹 主編의 『二十世紀中國文學大典』(총 3권, 1994, 上海敎育出版社); 王曉明 主編의 『二十世紀中國文學史論』(총 3권, 1997, 東方出版中心); 唐文一等 編著의 『20世紀中國文學圖典』(2001, 四川人民出版社) 등.
5)
陳思和의 『中國新文學整體觀』을 번역하여 출간할 때 그 제목을 『20세기 중국문학의 이해』(한국외대 중국현대문학연구회 옮김, 청년사, 1995)로 바꾸기도 하였다.
6)
이 글은 2002년 5월 3~4일 연세대학교에서 거행된 한국중어중문학 제1회 국제학술발표회(한국중어중문학회 외 주최)에서 발표한 「通過金庸小說試看 "僞君子" 和 "眞小人" 的實用理性」의 한글 원문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이날 토론을 위해 不遠千里 서울에 온 孔慶東 교수에게 다시금 감사를 표한다. 孔교수가 당일 제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위군자와 진소인은 공통의 세계관과 심리동기가 없는지?
2.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상층사회와 하층사회의 구별과 같지 않다. 한국은 어떤지?
3. 진융은 韋小寶를 통해 康熙 盛世를 부정했고, 한국에서도 유교 건설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진소인의 성공은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붕괴에 대해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
2.
'통속문학'에서의 '통속'이라는 개념은 '대중문화(popular culture)'7)에서의 '대중' 만큼이나 복잡하고 모호한 개념이다. 'popular' 또는 'common'이라 번역되는 '通俗'8)은 '대중'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레이먼드 윌리엄즈(R. Williams)에 의하면 'popular'란 용어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열등한 작품들', '사람들의 선호에 일부러 맞춘 작품들', '사람들이 사실상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 문화'9)라고 하였고, 존 스토리(J. Storey)는 "대중문화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좋아하는 문화라고 말하는 것"(존 스토리, 19쪽)이 가장 명확한 출발점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처한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7)
존 스토리는 대중문화가 “사용 맥락에 따라 때로는 여러 가지 모순되는 것들로 채워질 수 있는 사실상 ‘비어있는’ 개념적 범주”라고 하였다. 존 스토리(1999), 13쪽.
8)
戴鳴鐘,戴煒棟 主編(1991),『漢英綜合辭典』, 上海外語敎育出版社, 上海, [通俗]조(884쪽)에 보면, '通俗讀物'을 ‘books for popular consumption, popular literature’로 번역하고 있다.
9)
R. Williams, Keywords, p237. 존 스토리(1999) 18쪽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중국 근현대(晩淸~ 1949년)10) 시기에 '열등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좋아했던' 통속문학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은 무엇일까? 우선 주편자 판보췬의 통속문학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10) 范伯群의 ‘근현대’는 이전의 ‘삼분법’에서 ‘근대’와 ‘현대’를 단순 통합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晩淸시기부터 1949년까지의 시간을 ‘근현대’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는 필자가 여러 차례 언급한 ‘근현대(modern)’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임춘성(2000), 「중국문학의 근현대성 단상」,『중국현대문학』18호, 221쪽 참고.
중국 근현대 통속문학은 청말민초(淸末民初) 대도시의 상공업경제 발전을 기초로 삼아 번영, 발전한 문학을 가리킨다. 그것은 내용적인 면에서 전통적인 심리기제(mental mechanism)를 핵심으로 삼고 형식적인 면에서 중국 고대의 소설 전통을 모식(模式)으로 하는 문인 창작이나 문인의 가공을 거쳐 재창조된 작품을 계승하였으며, 기능적인 면에서 취미성과 오락성, 지식성과 가독성(可讀性)을 중시하지만 '우교어락(寓敎於樂)'의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효과도 고려한다. 그것은 한민족(漢民族)의 우세한 감상습관에 부합하는 것을 기초로 삼아, 광대한 시민층을 위주로 하는 독자군을 형성하였고 그들에 의해 정신적인 소비 품목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들의 사회 가치관을 반영하는 상품성을 가진 문학이다.11)
11) 范伯群(2000) 主編, 『中國近現代通俗文學史』(上), 江蘇敎育出版社, 南京, 18쪽. "中國近現代通俗文學是指以淸末民初城市工商經濟發展爲基礎得以繁榮滋長的, 在內容上以傳統心理機制爲核心的,在形式上繼承中國古代小說傳統爲模式的文人創作或經文人加工再創造的作品; 在功能上側重趣味性,娛樂性,知識性和可讀性,但也顧及 '寓敎于樂' 的懲惡勸善的效應; 基於符合民族欣賞習慣的優勢,形成了以廣大市民層爲主的讀者群,是一種被他門視爲精神消費品的, 也必然會反映他們的社會价値觀的商品性文學。” 范伯群은 1994년 『中國近現代通俗作家評傳叢書』(南京出版社)의 「總序」에서 비슷한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張華(2000),『中國現代通俗小說流變』, 山東文藝出版社, 濟南, 3쪽 참조.
위의 글에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중국 근현대 통속소설이 대도시 상공업 경제의 발전을 기초로 삼아 번영 발전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도시 통속소설'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현대문학사' 또는 '20세기 문학사'의 주요한 유파인 '사회해부파(社會剖析派)'의 도시소설이나 '신감각파'의 심리분석소설과는 달리, 현대 도시생활에서 광범한 제재를 선택하여 재미있고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다양한 사회 풍경화를 제공하였다. 이 작품들은 중국 민족의 전통적인 문화심태(cultural mentality)를 잘 파악함으로써 사회의 세태와 인정(人情)의 반영에 뛰어났다. 그리고 고대 백화소설의 언어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문학의 기교를 적당히 융합할 줄도 알았다. "그들은 민족 전통형식을 숭상하는 동시에 외국문학에서 창작기교와 살아있는 문학언어를 학습하였다."12)
12) 范伯群(2000), 21쪽; "他們在崇尙民族傳統形式的同時, 也向外國文學學習創作技巧和活的文學語言."
또한 문학사 연구와 관련된 아래의 언급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20년 동안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자들은 한 가지 공통인식(共識)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근현대 통속문학을 우리의 연구 시야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순문학과 통속문학은 우리 문학의 두 날개이므로, 이후 편찬되는 문학사는 두 날개로 함께 나는 문학사여야 한다.
최근 20년 동안 근현대문학사 연구자들은 하나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근현대문학사의 통속문학의 중요한 유파인 원앙호접-『예배육』파(鴛鴦蝴蝶-『禮拜六』派)를 역류(逆流)로 보는 것은 좌경사조의 문학사적 표현이라는 사실이다.13)
13) 范伯群(2000) 主編,『中國近現代通俗文學史』(上), 江蘇敎育出版社, 南京, 35~36쪽. “在這20年中, 代文學史硏究者正在形成一種共識. 將近現代通俗文學攝入我們的硏究視野。純文學和通俗文學是我們文學的雙翼, 編纂的文學是應是雙翼齊飛的文學史。在這20年中,近現代文學史硏究者正在接受一種觀點: 過去將近現代文學史上的通俗文學重要流派---"鴛鴦蝴蝶派-≪禮拜六≫派"---視爲一股逆流, 是"左"的思潮在文學史中的一種表現." 이 내용도『中國近現代通俗作家評傳叢書』「總序」에서 언급되었다.
여기에서 판보췬이 제시한 공통인식(共識) 변화의 대표적인 예를『중국 현대문학 30년(中國現代文學三十年)』(錢理群等)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초판본(1987년, 上海文藝出版社)과 수정본(1998년, 北京大學出版社)의 사이에는 11년이라는 시간의 차이와 상하이로부터 베이징이라는 공간의 변화가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수정' 내용이다. 저자들을 대표하여 첸리췬은「후기(後記)」에서 "총체적인 변동"을 하지 않고 "개별적인 조정"(665쪽)을 했다고 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면 상당한 '조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판보췬(范伯群)이 말한 '공통인식'과 관련된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보노라면, 초판본에서는 장(章)과 절(節)의 제목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속소설'이 수정본에서는 세 장에 걸쳐 다루어지고 있다. '첫 번째 10년'(1917~927년), '두 번째 10년'(1928~937년 6월), '세 번째 10년'(1937년 7월~949년 9월)에서 각각 '문학사조와 운동', '소설', '신시', '산문', '희극' 등의 장이 서술되고 있는데, '통속문학'은 바로 이들 장르와 동등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통속소설을 문학사 연구 시야로 받아들여 매 시기 그 주요사항을 서술하게 된 것은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변화는 근본적이라기보다는 부분적이다. 판보췬이 제시한 '공통인식의 변화'를『중국 현대문학 30년』에서는 통속문학을 연구대상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켜주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첸리췬 등의 저자들은 아직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두 날개로 함께 나는 문학사라는 인식에까지 이르지는 않은 듯하다(아니면 그런 문학사 인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두 날개로 함께 나는 문학사'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므로『중국 근현대 통속문학사』를 과도적인 산물로 간주한다. 진정한 '두 날개 문학사'를 위한 무수한 과정이 앞으로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진정한 아속공상(雅俗共賞)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진융(金庸)의 작품이 아속공상의 지고(至高)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는 가설을 전제로 삼아, 그의 작품이 '중국인의 지혜'의 핵심 기제의 하나인 '실용이성'(李澤厚)을 구현하고 있다는 추정을 조심스럽게 접맥시켜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진융의 작중인물중 전형성이 두드러진다고 판단되는 위군자(僞君子)와 진소인(眞小人)의 특징적인 모습을 통해 실용이성 개념과 연결시켜 보고자 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형상으로『소오강호(笑傲江湖)』의 위에부췬(岳不群)을 들어 그의 권력욕망을,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녹정기(鹿鼎記)』의 웨이샤오바오(韋小寶)를 통해 그의 생존본능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들의 실용이성이 중화민족을 통합(統合)시켜주는 한 가지 기제(機制)로서의 가능성을 점검해 볼 것이다.
3.
리저허우(李澤厚)는「중국인의 지혜 시탐(試探中國人的智慧)」에서 '자아의식의 반사사(反思史)'라는 전제아래, "중국 고대사상에 대한 스케치라는 거시적인 조감을 거쳐서 중국 민족의 문화심리구조의 문제를 탐토(探討)하는 것"(李澤厚 1994, 294쪽)을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사상사 연구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들의 심리구조 속에 침전되어 있는 문화전통으로 깊이 파고들어 탐구하는 것이다. 본 민족의 여러 성격 특징(국민성, 민족성) 즉 심리구조와 사유모식을 형성하고 만들고 그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고대 사상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같은 책, 295쪽) 리저허우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중국의 지혜를 발견하고자 한다. 중국의 지혜란 "문학, 예술, 사상, 풍습, 이데올로기, 문화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그것은 “민족의식의 대응물이고 그것의 물상화이자 결정체이며 일종의 민족적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의 '지혜'의 개념은 대단히 광범하다. "사유능력과 오성", “지혜(wisdom)와 지성(intellecture)”을 포괄하되, "중국인이 내면에 간직한 모든 심리구조와 정신역량을 포괄하며, 또 그 안에 윤리학과 미학의 측면, 예컨대 도덕자각, 인생태도, 직관능력 등을 포괄한다." 중국인 사유의 특징은 바로 이 광의의 지혜의 지능구조와 이러한 면들이 서로 녹아 섞인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295쪽) 지혜의 개념은 그의 또 다른 핵심어인 '문화-심리구조'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용이성은 리저허우에게 있어, 혈연(血緣), 낙감문화(樂感文化), 천인합일(天人合一)과 함께 중국의 지혜의 하나이다. 혈연이 중국 전통사상의 토대의 본원이라면, 실용이성은 중국 전통사상의 성격상의 특색이다. 그것은 선진(先秦)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진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은 당시 사회 대변동의 전도와 출로를 찾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기 주장을 펼쳐, 상주(商周) 무사(巫史)문화에서 해방된 이성을, 그리스의 추상적 사변이나 인도의 해탈의 길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실용적 탐구에 집착하게 하였다. 장기간의 농업 소생산의 경험론은 이런 실용이성을 완강하게 보존되게 촉진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중국의 실용이성은 중국 문화, 과학, 예술의 각 방면과 상호 연계되고 침투되어 형성, 발전하고 장기간 지속되었다. 중국의 실용이성은 중국의 4대 실용문화인 병(兵), 농(農), 의(醫), 예(藝)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병, 농, 의, 예는 광범한 사회민중성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사(生死)와 관련된 엄중한 실용성과 관련되어 있고 아울러 중국 민족의 생존과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실용이성의 전통은 사변이성의 발전을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반(反)이성주의의 범람을 배제하였다. 그것은 유가사상을 기초로 삼아 일종의 성격-사유 패턴을 구성하여 중국 민족으로 하여금 일종의 각성하고 냉정하면서도 온정이 흐르는 중용(中庸) 심리를 획득하고 승계(承繼)하게 하였다.(李澤厚 1994, 301~302쪽)
여기에서 실용이성의 구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전통적 가치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의 전통적 가치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출장입상(出將入相)과 같은 것도 그 하나일 터이고,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으로 나누는 방법은 나름의 체계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14) 그 중에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변별은 유난히 두드러지는 항목이다. 초기 유가의 경전에서 출현하는 군자는 이상적인 인격체이다. 그들은 현존하는 인물이기보다는 지향 목표라 할 수 있다. 특히『논어(論語)』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킨 구문이 많이 출현한다.15) 이 예문들을 통해 볼 때 군자와 소인의 대비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군자는 유가의 덕목을 모두 갖춘 이상적인 인격체인 반면, 소인은 그런 덕목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럴 가능성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다. 사실 예문 외에도 유가들이 제창한 덕목은 모두 군자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마지막 예문처럼 소인들은 그와 반대되는 대립항으로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14)
「春秋左傳」 襄公24年: "大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竹添光鴻의 해설에 따르면, "箋에 말하기를, 제도와 범을 만들어 널리 베풀어 衆人을 구제하고, 聖德이 당대에 세워지고 만대에 백성이 혜택을 입게 하는 사람을 立德이라 한다. 위난을 구하고 제거하여 공이 당시에 성하고 그 외에도 백성을 勤勉하게 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며, 재난과 환난을 막은 것을 모두 立功이라 한다. 말함에 요점을 얻고 그 이치는 족히 전할만하며 몸이 죽은 후에도 말이 세상에 存立하는 것이 立言이다."『左傳會箋』, 明達, 臺北, 1982.
15)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君子上達 小人下達, 「憲問」);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里仁」);
"군자는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되 태연하지 못하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子路」);
"군자는 그 책임을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衛靈公」);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군자는 두루 사귀어 치우치지 않고 소인은 한쪽으로 치우쳐 두루 사귀지 못한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爲政」);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이루어지게 해주고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지만 소인은 그와 반대이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顔淵」) 등.
과연 현실에서 군자는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섣불리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통 중국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은 군자를 지향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층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영웅서사에 등장하는 주인공(外王)들은 군자(內聖)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일부 지식인들은 현실적인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표층적으로는 군자를 지향하는 체 하면서 심층적으로는 소인배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바로 진융이 질타(叱咤)하는 인물형인 위군자(僞君子)이다.『소오강호』의 위에부췬(岳不群)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통 중국에서 군자의 대립항에 자리한 소인(小人)은 현실적인 인간의 총집합을 추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가에서 언급하는 소인의 내함(內含)에는 인간의 일차적인 본능과 욕망 그리고 결점 등이 총합되어 있다. 이들은 항상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고 그들이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대로 살아간다면 사회는 그야말로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게 정통 유가의 진단이다. 과연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인은 그 존재의 가치와 의의가 없는 것일까? 진융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작품에 출현하는 매력적인 인물 중 군자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품성을 가진 인물들이 다수 출현한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소인임을 자인하는, 달리 말하면 군자 또는 영웅을 자처하지 않는---이런 점에서 그들은 도덕적이다---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군자의 명분을 포기하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하고 싶은 바를 실천한다. 비록 그런 과정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굽히지 않고 관철한다. 그들은 술(令狐冲)과 도박(韋小寶)에 탐닉하기도 하고, 여자에게 미혹되기도 하며(段譽), 음식을 탐하기도 하고(洪七公), 정(情) 때문에 일생을 소외시키기도 하며(李莫愁),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도 하는(桃谷六仙, 包不同) 등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약점을 위장하려 하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 전통의 인물유형 분류의 한 가지 방법인 군자와 소인은 진위(眞僞)라는 기준에서 진군자(眞君子), 위군자(僞君子), 진소인(眞小人), 위소인(僞小人)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16) 이 중에서 진군자와 위소인은 그 배합이 단순하기 때문에 그다지 복잡하지 않지만, 위군자와 진소인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가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두터운(thick)17)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위군자의 전형인 위에부췬을 통해 그의 사회적 욕망---권력 욕망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고, 진소인의 전형을 웨이샤오바오로 설정하여 그의 자연적 욕망---생존본능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16)
네 가지 분류 중 眞小人의 개념은 陳墨로부터 빌려왔고, 僞小人의 개념은 孔慶東의 보충을 수용한 것임을 밝힌다.
17)
이 용어는 클리퍼드 기어츠로부터 빌어왔다. 기어츠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의 문화에 당면하게 되는 상황은 "여러 겹의 복합적인 의미구조이며, 이 개개의 의미구조들은 서로 중복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기어츠 1998, 20쪽) 우리는 이 의미구조를 파악하여 설명(explanation)하고 해석(interpretation)한다. 그 설명과 해석이 유용하기 위해서는 'thick description'(두텁게 기술하기)이 요구된다.
4.
『소오강호(笑傲江湖)』의 위에부췬(岳不群)은 표면적으로는 군자'연(然)'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그와 다른 위군자(僞君子)의 전형으로 거론된다. 소설에 처음 출현할 때는 정인군자(正人君子)로 나오지만,『벽사검보』에 욕심을 내면서부터 그는 더 이상 군자가 아니었다.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통해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벽사검보를 얻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위장하였다. 그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의 부인까지도 속이고 딸까지도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그가 더 이상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위에부췬과 닝중저(寧中則)는 함께 강호를 다니는 잘 어울리는 부부였지만, 닝중저는 본성이 선하였기 때문에 오랜 동안 위에부췬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선을 깨닫지 못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남편이 벽사검법을 수련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둘 것을 권했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었다. 결국 모든 진상을 파악한 후 그녀가 택한 길은 자살이었다. 자살 대신 위에부췬을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그녀의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벽사검법을 익힌 후 위에부췬이 저지른 몇 가지 일은 그에게 일말의 인성(人性)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동문과 다름없는 헝산(恒山)파의 딩센(定閑), 딩이(定逸) 사태(師太)를 살해하였고, 친자식처럼 키워온 수제자 링후충(令狐冲)에게 검보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워 문중에서 축출하였으며, 줘렁찬(左冷禪)의 오악(五嶽)검파 병합 음모를 반대하는 척하다가 마지막에는 그 성과를 가로채어 스스로 오악검파의 장문인 자리에 오른다. 이 시점의 위에부췬은 인성을 포기한 괴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부췬을 애초부터 위군자로 보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다소 억울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벽사검보에 휘말려 들어가기 전의 위에부췬의 모습에 대해 작품에서 그다지 많이 이야기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여중호걸이라 일컬어지는 사매(師妹) 닝중저(寧中則)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결혼하고 화산(華山)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또한 고아 링후충(令狐冲)을 친자식처럼 키웠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었던 라오더눠(勞德若)와 린핑지(林平之)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결코 위군자의 훈도(薰陶)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성격 특징중의 하나는 신중함과 원칙 존중이다. 펑칭양(風淸揚)이나 런워싱(任我行)이 "쥐뿔도 모르고(狗屁不通)"(『笑傲江湖』370) "정직한 척하는 얼굴(一臉孔假正經)"(795) 등이라 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대 종사(宗師)들이 후배에 대한 스타일상의 못마땅함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야지, 그것을 위에부췬의 우둔함이나 교활함의 증거로 보는 것은 지나칠 수 있다.
만약 그가 본래부터 자신을 위장해온 위군자가 아니라, 중간에 전변(轉變)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앞당겨 말하자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권력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그가 위군자로 변하는 과정에는 두 단계의 계기가 작용하였다. 둘 다 『벽사검법』(또는『규화보전』)과 관계가 있다. 첫 번째 계기는『벽사검법』에 욕심을 내기 시작한 것이었고(立志), 두 번째 계기는 그것을 획득(成功)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왜 벽사검법에 욕심을 내었던 것일까? 이는 화산파 장문인의 자리와 관련이 있다.
화산파 장문인으로서의 위에부췬에게는 심원(心願)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종(氣宗)과 검종(劍宗)의 분열로 약화된 화산파를 중흥시켜 무림에 이름을 빛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종과 검종의 분열과 대립은 바로『규화보전(葵花寶典)』에서 비롯되었다. 진융의 독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규화보전』은 원래 황궁의 태감(太監)이 지은 것으로 약 2백년 후 푸젠(福建) 푸텐(莆田) 사오린쓰(少林寺)의 방장 홍예(紅葉) 선사(禪師)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규화보전』에 기록된 무공이 지나치게 사악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연마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는 화산파 제자 위에쑤(岳肅)과 차이즈펑(蔡子峰)이 방문하여『규화보전』을 몰래 훔쳐 본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을 안 홍예선사가 자신의 득의제자인 두위엔(渡元)선사를 보내어 보전의 무공을 연마하지 말도록 권하였지만, 두위엔은 화산에 갔다가 스승에게 편지를 보내고 환속(還俗)을 청한다. 사실 그는 거꾸로 화산파 제자들로부터 보전의 무공을 전해 듣고 그것을 가사(袈裟)에 기록한 후 환속하여 벽사검법을 창시하고 푸웨이(福威) 표국(鏢局)을 개설하여 무림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위에부췬이 천신만고 끝에 얻은 것이 바로 두위엔이 가사에 기록한『벽사검보』였던 것이다. 한편 화산파의 위에쑤와 차이즈펑은 각각『보전』의 앞과 뒷 부분을 외웠기 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 대조해보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본 부분이 옳다고 여기어 기종과 검종의 분화가 시작된다. 이즈음 '일월신교(日月神敎)'의 10장로가 화산을 공격해와 위에쑤와 차이즈펑 등을 살해하고『규화보전』을 탈취해간다. 런워싱(任我行)이 동팡부바이(東方不敗)에게 물려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위에부췬은 이런 사실을 스승으로부터 자세하게 들었을 것이다. 그의 목표는 일월신교를 공격하여 빼앗긴 보전을 되찾고 선배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그러나 일월신교의 세력은 너무 강성하다. 그리하여 차선책, 즉 푸웨이 표국의『벽사검보』를 노리게 된다. 사실 칭청(靑城)파의 위창하이(余倉海)도 한편으로는 동문 선배의 복수를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검보를 탈취하기 위해 푸웨이 표국을 공격한다. 작품에서 위창하이는 드러내놓고 검보를 노리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에 반해 위에부췬은 은연중에 목표를 달성한다.
여기까지만이라면 위에부췬은 교활하고 음험한 인물쯤으로 평가될 것이지만, 정작 큰 문제는 검법 수련과 관련되어 있다. 이 검법을 연마하기 위해서 첫 번째 거쳐야 할 관문은 '거세(自宮)'였다.(여성이 연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본능적 욕망의 거세를 상징한다. 무엇을 위해서? 다름아닌 사회적 욕망, 즉 권력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물이다(天下無難事, 只怕有心人). 설사 그 목적이 선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대의를 위해 작은 일은 희생할 수 있다'는 합리화 속에 무수한 비인간적인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하물며 강호를 통일하고 무림을 지배하겠다는 맹목적인 권력 욕망을 실현함에 있어서랴!
사오린쓰(少林寺)의 팡정(方正)대사와 우당(武當)파의 쭝쉬(忠虛)도장이 줘렁찬(左冷禪)의 야심을 걱정하고 경계할 때 줘렁찬이 밟을 것으로 예상한 수순, 즉 오악검파를 하나로 통일하고, 사오린과 우당을 제외한 다른 문파를 통합하고, 사오린과 우당을 굴복시키고 최후에 마교, 즉 일월신교를 멸망시키겠다는 계획은 바로 위에부췬의 계획이기도 했다. 물론 이 계획은 링후충의 헝산파에 의해 좌절되고 위에부췬은 결국 이린(儀琳)에게 죽는다.
위에부췬의 전변과 관련되어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링후충에 대한 증오이다. 흔히 전통 중국에서 스승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군주, 부친과 동격으로 인식되어 왔다. 위에부췬의 전변 이전 두 사람의 관계는 사제관계이면서 부자관계인 것처럼 보인다.18) 그러나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위에부췬은 링후충을 더 이상 제자(자식)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짓밟은 인물로 생각한다. 첫 번째 사건은 사과애(思過崖)의 면벽(面壁)과정에서 펑칭양(風淸揚)을 만나 독고구검(獨孤九劍)을 배운 이후 링후충은 스승인 위에부췬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고충(風淸揚의 요구)을 가지게 된다. 물론 기종과 검종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겠지만, 링후충이 이실직고(以實直告)했더라면 위에부췬이 링후충을 증오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우빠강(五覇岡)에서 녹림(綠林) 군웅(群雄)들이 위에부췬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링후충만을 떠받든 사건이다. 그 내막이야 성고(聖姑) 런잉잉(任盈盈)때문이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위에부췬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 아픔의 심층원인에 링후충을 설정하게 된다. 제자가 자신의 무공을 능가하고 자신의 명성을 능가할 때 진심으로 그것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즐거워할 스승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그것도 자신의 가르침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가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물론 우리는 그것이 風淸揚의 특별한 가르침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급성장하였다면 그것을 사심 없이 축복해줄 수 있을까? 신중하고 세심한 성격의 위에부췬은 무공을 포함한 링후충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다만 그는 링후충의 기질만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위에부췬의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일약 고수가 된 제자를 용납하기 어려웠으리라. 위에부췬은 도량이 넓은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공의 비약적인 발전은 기연(奇緣)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岳不群은 이것을 벽사검법과 연결시켰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검보를 탈취한 이후에는 의도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호에서 화산파 장문인 군자검(君子劍) 위에부췬에 대해서는 본척만척 하면서 풋내기(그러므로 外號도 없다)인 제자에 대해서는 극진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 친구가 많은 링후충이 자신을 일부러 놀린다고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링후충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스승인 위에부췬의 역린(逆鱗)은 건드린 것이었다.
18)
실제로 令狐冲은 岳不群과 寧中則을 친부모처럼 생각한다. 진융 작품의 주인공들의 '고아의식'에 대해서는 陳墨 등의 논의가 볼 만하다.
5.
진소인의 대표는『녹정기(鹿鼎記)』의 주인공 웨이샤오바오(韋小寶)이다. 그의 성격적 특징의 하나인 '환경적응'을 '진소인(眞小人)의 생존본능'이라는 각도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진융의 마지막 작품인『녹정기』는 그 제목부터 상징적이다. 제1회에서 해설하고 있는 것처럼 '축록중원(逐鹿中原)'과 '문정중원(問鼎中原)'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녹정공(鹿鼎公) 웨이샤오바오는 평천하(平天下)의 큰 뜻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품었던 '큰 뜻'은 여춘원(麗春院) 옆에 여하원(麗夏院), 여추원(麗秋院), 여동원(麗冬院)을 여는 일이었다. 그는 마오스빠(毛十八)를 만나기 전까지 12~3년 동안 여춘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여춘원은 기방(妓房)이다. 기방이란 여성의 육체와 남성의 금전이 만나는 곳이다. 특히 웨이샤오바오에게 있어 그곳은 생존투쟁의 현장이었다. 진융이 웨이샤오바오의 성격적 특징으로 꼽은 '의리 중시'와 '환경적응'은 바로 이 생존투쟁의 두 가지 표현이다.
웨이샤오바오의 환경적응 능력은 대단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방에서 자라면서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능력을 갖추었다. 엄마에게 매맞을 때 거짓 울기부터 힘센 사람과 싸울 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 상황을 봐서 행동하기, 거짓말하고 사기치기, 허풍 떨고 아첨하기, 아무렇게나 맹세하고 약속하기, 몰래 훔치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런 항목들은 중국의 전통 가치관인 유가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부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에 빠져들면서 그런 행동을 하는 주인공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그가 기방과 도박장에서 배운 생존능력이 황궁과 정치무대에서 그대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운이기도 하지만 그의 환경적응 능력이 발휘된 측면도 있다.
웨이샤오바오의 형상은 독특하다. 작가는 어떤 한 인물을 중심으로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여러 인물들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웨이샤오바오를 빚어냈다. "나는 분명 관찰하고 체험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성격을 웨이샤오바오에게 융합시켰다. 그의 성격의 주요 특징은 환경에 적응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다."(金庸 1994b, 233쪽) 그는 결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이고 있다. "웨이샤오바오의 몸에는 수많은 중국인의 보편적인 장점과 결점이 있다. 그러나 웨이샤오바오는 당연히 중국인의 전형이 아니다. 민족성은 광범한 개념이다. 그리고 웨이샤오바오는 독특하고 개성 있는 한 개인이다."(같은 책, 243쪽)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웨이샤오바오의 형상 분석을 통해 중국인의 보편적인 장점과 결점을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웨이샤오바오는 전통 가치관의 척도에서 보면 결코 군자가 아니다. 그는 전통문화의 지류이자 하층을 대표하는 소인이다. 그러나 그는 군자연 하는 사람들에게 억압받고 아무 소리도 못하는 못난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장점으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진소인(眞小人)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不學) 환경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有術).『녹정기』의 또다른 주인공인 캉시(康熙)가 중국 전통문화에서 군자라 일컬어지는 주류와 상층을 대표한다면, 웨이샤오바오는 소인으로 일컬어지는 지류이자 하층의 문화를 대표한다. 두 사람의 우정은 두 층위의 문화의 손잡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묘당문화와 세속문화는 명확하게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공생적이고 호보(互補)적인 대립통일체"(陳墨 1999, 237쪽)라는 지적은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캉시의 상층문화가 웨이샤오바오의 하층문화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웨이샤오바오의 하층문화(욕설 등)가 캉시의 상층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캉시의 진정한 애민(愛民)은 웨이샤오바오의 감동을 자아내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웨이샤오바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단계에까지 나가지는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웨이샤오바오는 중국 민간문화의 실용이성이 빚어낸 걸출한 기재(奇才)라 할 수 있다.
6.
진융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 두 형상에 대한 고찰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섣부른 일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두 인물을 추출하여 사회적 욕망---권력 욕망과 자연적 욕망---생존 본능으로 분류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아직 총체적이지 못하지만 무협소설을 통해 인간의 욕망---자연적 층위와 사회적 층위---을 고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진융의 작품을 대륙(main land)과 홍콩, 타이완 그리고 여러 지역의 화교들을 통합시키는 기제(機制, mechanism)로 본다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50년대 신문에 연재되면서부터 수많은 중국인들이 그의 작품을 애독하고 끊임없이 연속극과 영화로 재생산되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진융(金庸)을 통해 다시 통합(統合, integration)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1998년 자매대학에 방문학자로 가 있을 때 만났던 교내외 인사 대부분이 진융을 읽었고 아울러 자신의 독특한 관점과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현상들을 '국민문학(national literature)으로서의 진융 소설'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는 이후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진융의 작품이 '중국인다움(Chineseness)'의 어떤 부분을 잘 파악하여 형상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핵심어: 통속문학, 두 날개 문학사, 진융(金庸), 위군자(僞君子), 진소인(眞小人), 실용이성(實用理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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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춘성(林春城)교수님으로 부터 논문게재를 허락받았습니다. 감사드리고, 김용의 문학작품을 이해하는데 이 논문이 많은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