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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교회사 ~ 스크랩 연구1 프랑크 왕국과 신성로마제국[레11:44]
엘랏 추천 0 조회 30 08.09.22 18: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로마(Constantinopie)로 옮겨진 제국에 대하여 교황은 신정(神政)정치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던 때에 프랑크 왕국이 신성로마제국으로 탈바꿈한 것은 교황의 신적 권위와 황제의 세속적 권력의 관계를 재정립한 사건이다. 이제 본문을 통해 교황권이 황제의 임명과 어떠한 관계를 가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프랑크 왕국으로 인한 교황권의 인정

 1) 정치력의 선교지원
 클로비스의 후임 왕들은 독일과 네덜란드에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교회의 도움을 받아 선교사들을 후원하였다. 특히 찰스 마르텔 왕(Charles Martel 715-714)은 왕권으로 서부 독일 일대를 복음화하였고, 프랑크국의 교회를 개혁했으며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간에 협력 관계를 성취시켰다. 교황 세르기우스(Sergius I 687-701)로부터 대륙의 선교 감독으로 안수받은 윈프리드(Winfrid=Boniface 680?-751)의 지도력에 의하여 프랑크 왕국의 교회는 조직과 치리가 개선되고, 교황청의 권위도 중대케 되었다.

 2) 교황청의 황제직에 대한 권한
 황제 레오 3세(Leo Ⅲ 718-741)가 성상(聖像) 예배(iconoclastic)를 금지(725)시킨 데 대하여 교황 그레고리 3세(Gregory Ⅲ 731-741)는 즉위하던 해 로마회의에서 성상 반대자(opponents of icon pictures)들을 파문하였다.
 교황청이 황제를 적대시하였으므로 롬바르드(Lombards)족에게 시달리던 고통을 황제에게 호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 3세는 플랑크 왕국의 찰스 마르텔 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피핀(Pippin the Short 741-768)은 찰스 마르텔 왕과는 달리 교황을 도왔고, 프랑스(France)의 왕권과 왕직(Kingly title and power)을 탐하고 있다가 프랑크 귀족들의 동의와 교회의 도덕적 뒷받침을 얻어 왕이 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이 제국의 황제를 빼앗고 또 세우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3) 교황의 세속적 권한
 피핀 왕(로마황제의 代官: 'Patricians of the Romans')은 교황에게 답례로 교황을 괴롭히던 이탈리아의 아이스톨프(Aistulf)와 그가 이끄는 롬바르드(Lombards)족 그리고 총독 라베나(Ravenna)에게 압력을 가하여 교회령(Sovereignity of the Papacy)과 교회국가(States of Chirch)를 형성, 제공(755)하였고, 이로써 교황의 세속적 권한이 생겼다(1870년까지 지속). 교황은 로마의 실질적 소유주였고(772년 이후에는 동방 황제의 주권을 로마에 미친다고 인정하지 아니함), 피핀의 왕위는 함축성을 지닌 막연한 지위였다.

2. 찰스 대제의 업적

 1) 찰스 대제의 대관식
 피핀 왕이 죽은 뒤(768) 나라를 나눠 가진 두 아들들이 불화하였으나, 한 아들이 죽고 찰스만 남게 되어 긴장은 해소되었다. 주후 800년 성탄절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Leo Ⅲ 795-816)는 찰스(Charles August)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서방 제국의 신정(神政) 정치를 확인하고 서방 제국의 영광회복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영원한 축복이 교황으로부터 황제를 통하여 새 출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현세적 삶 속에 임하리라는 소망찬 행사이었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City of God)과 같은 이상을 실현하리라는 각오를 다짐한 찰스 대제는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2) 찰스 대제의 치적
 그는 조부(Martel)와 선교사(Winfrid)의 선교 사업을 계승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복음 확장과 정치 세력 확장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즉 프랑스,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스페인에 걸친 잦은 군사 원정은 선교적 동기를 가진 것이었고 그 결과 광범위한 유럽의 지배자가 되었다. '세례 아니면 칼'을 받도록 위협하여 세례를 강행한 뒤 종교 교육과 영적 지도를 후속 조치로 실시했다. 점령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 학교, 수도원이 세워졌고 그의 주변에는 많은 학자, 역사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파리대학의 원형이 그에게서 시작되었고, 궁중학교를 세워 독일어의 문법을 작성케 하였다. 성마르탕 수도원을 전프랑크 제국의 학문 중심지가 되게 하고 안팎으로 교회 육성과 선교에 힘썼다. 또한 교육과 선교를 위한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회 출석과 십일조 헌납에 모범을 보였다.

3.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A.D.962-1806)
 
 1) 기원후 8세기말의 상황
 왕들은 카톨릭 교도들로서 이민족을 정복하면 주교들과 협력하여 교황령을 확장하고, 왕국의 통치력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탈리아 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롬바르드(Lombards)인은 교회의 재산권 주장과 전통적 권위를 무시하려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를마뉴(찰스대제)는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고 교황을 보호하기로 약속했으나 자신의 군주권(君主權)을 세속 관료에게처럼 교회 관리에게도 똑같이 행사코자 했다.

 2) 신성로마제국의 성립
 로마제국은 제국의 위(位)가 동방으로 옮겨진 상황에서 급속히 발전하는 서방 세계에서 로마제국을 재현시키려는 이상(理想)을 성취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유능한 독일 통치자이던 작센(Saxons) 왕 오토 1세(Otto I)에 의해 건국된 독일 -이탈리아 제국으로서 로마에서 교황 요한네스 12세(John ?)로부터 황제 칭호를 받은 것이다(962). 그는 보편적 세속 통치 속에 그리스도의 신성(거룩하심)을 실현하기를 원했었다.
 거룩한 카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념의 실현 영역은 범세계적인 것이다. 즉 정통성과 합법성을 지닌 통치권에 의해 교회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정당하게 다스려야 하고 교황은 세속 통치를 지지하고 세속행정을 간섭치 아니하며, 교회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이념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시작은 선하였지만 탐욕과 황제와 교황 사이의 배신, 힘의 불법적 사용으로 타락의 길로 나아갔으며 황제권은 약화되고 교황권은 음모를 통해 강화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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