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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
내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노래 '고향역'이다. 산업화 시대를 맞아 이농현상이 심해지던 무렵에 나온 이 가요는 고향 떠난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출향민'들은 너나없이 노래를 입에 올려 흥얼거리며 향수를 달래곤 했다.
고향이 더욱 그리워지는 추석 때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애창곡 1위 자리에 단골로 올랐다.
이 노래가 나온 건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인 1970년이었다.
무명의 작사ㆍ작곡가였던 임종수씨는 이 곡으로 '촌놈의 한'을 풀었다.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가 가수의 꿈을 접고 작사ㆍ작곡가로 진로를 바꿨다.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
전북 순창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이리 남성중ㆍ남성고)부터 노래를 무척 잘했다고 한다.
1963년 12월, 수도육군병원에 복부 중일 때 이등병으로 군복을 입고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문화방송 주최 '톱싱거대회' 연말결선에 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가수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대신 작사ㆍ작곡가로서 대중음악의 길을
계속 걸었다.
그래서 내놓은 노래가 '차창에 어린 모습'. 당대의 명가수 나훈아가 취입한 이 노래는 1970년 5월 음반으로 시중에 나왔으나 방송불가 판정을 받고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노랫말이 국민의식개혁운동과 배치된다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물러설 임씨가 아니었다.
이듬해 제목과 가사, 리듬을 일부 바꿔 1972년 2월에 새로이 선보였다. 이게 바로 '고향역'. 임씨는 학창시절 익산 황등역에서 이리역(현 익산역)으로 통학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다듬었다.
여기서 말하는 '고향역'은 당시의 '황등역'인 것이다.
이 노래가 음반의 타이틀곡으로 나오자 전국이 '고향역'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무명의 임씨의 인생도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처럼 활짝 피어났다. '고향역'은 어디서나 남녀노소에 의해 애창됐다.
앞서 얘기한 바처럼 이 노래는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인구의 도시이동현상이 뚜렷해지면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고, 그만큼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도 깊어갔다.
'고향역'은 바로 그들 모두가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였던 것이다.
'고향역'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마는 반짝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노랫말 속의 고향역은 그저 '황등역'이나
'이리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그 따뜻함을 떠올리게 해주는 위안과 힘이 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다. 내 고향 장흥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 향수가 문득 느껴지곤 했다.
노랫말 때문인지 코스모스 피는 가을이면 더욱 그러했다.
오랜 생명을 지니는 명곡은 시공을 초월하는 그 나름의 비결이 있나 보다.
'뚜~!' 하는 기차의 기적소리와 함께 노래 '고향역'은 이렇게 이어진다.
"♩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