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휴가 때 가족과 함께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노고단을 향해서 열심히 오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원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여기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라고...다른 사람을 부르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돌아보지 않고 계속 올라가는데, 웬 중년의 멋진 남성이 숨을 헐떡이며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원장님, 저 기억 안 나세요?”
“글쎄요...”
“작년 봄에 원장님께 아토피 피부염 치료받았던 L입니다.”
그제서야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그 남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작년 봄 한의원을 찾아왔던 42세의 L씨. 대기업의 간부급으로 사회적 지위가 탄탄한 그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바로 아토피성 피부염이었다.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지금까지 안 해 본 치료가 없고, 좋다는 약은 안 먹어본 게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떻게든 좀 낫게해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보여주는 그의 팔과 다리에는 얼마나 긁어댔는지 밤색으로 변한 피부에 딱지까지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그나마 얼굴이나 손, 발처럼 사람들 눈에 띄는 부분은 옷으로 가려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문진(問診:병력을 물어보는 것으로 진찰하는 것)과 생혈액 검사 등 진찰을 해 본 결과몸 속에노폐물이 많고 피가 탁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어릴 적 얘기를 들어보니, 원래부터 피부 상태는 건강한 편이 못 되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닭고기나 물을 갈아 마시면(평소 생활하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물을 마시는 것을 말함) 꼭 두드러기가 났고, 알레르기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가려움이 심해진 것은 삽십대 후반쯤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 오르기도 했어요. 얼굴이 붉어지면서 머리 끝까지 뜨거운 열이 오를 때면, 온 몸이 가려워 피가 나도록 긁었죠.”
그래서 병원에 가 봤더니 ‘아토피성 피부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보통 아토피는 어린아이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피부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다 자란 어른에게 아토피가 생기다니, 무슨 영문일까?
사실 병에는 어른, 아이에 관한 특별한 경계선이 없는 게 요즘 현실이다. 10대 청소년에게서 성인병이 나타나기도 하고, 다 자란 어른에게서 아토피가 나타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것은 생활 환경이나 습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L 씨의 경우는 아토피성 피부염이 발병할만한 유전적 소인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다지 심하지 않은 상태로 살다가,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종의 자극에 의해 속에 있던 피부염의 뿌리가 피부 밖으로 뚫고 나온 것이었다.
“대기업은 들어갈 때도 어렵지만 들어가서도 경쟁이 심합니다. 조직 생활이라는 게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는 체제라서요.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죠.”
그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긴장감과 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그 스트레스를 풀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한 채 몇 년을 버텨낸 결과가 바로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누적되어 있던 화(火)가 혈독(血毒)을 일으켜서 이런 증상이 생긴 겁니다. 스트레스나 긴장감이 몸 속에 열, 즉 화(火)를 쌓이게 하거든요. 처음에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생겼을 때 적절히 스트레스를 푸셨어야했는데...”
내 설명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동안 안 해 본 치료가 없다더니 내 설명이 쉽게 이해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피를 맑게 해 피 속의 독소를 풀어주는 한약과 몸 속의 열을 풀어주는 약침을 처방했다. 그리고 열로 인해 탁해진 피를 맑게 해 주는 식이요법도 병행했다. 술과 기름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고 야채와 잡곡밥 등을 중심으로 식단을 짜게 했으며, 지나치게 긁어서검붉게 변한 그의 다리는 약침과 부항 요법으로 치료했다.
사실 한약은 호르몬제를 쓰지 않기 때문에 반짝 눈에 띄는 효과는 없다. 오히려 치료초기에는 명현현상으로 혈열(血熱)과 독소가 피부 표면으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가려움증이 더 심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잘 참고 치료를 따라주었다.
“단순히 치료만 받는 것보다는 치료 보조 요법을 해 보는 게 좋겠어요.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아도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 속에 화가 사라지지 않거든요. 뭐든 취미 생활을 한 번 찾아보세요.”
이런 내 제안에 그가 택한 것이 바로 ‘등산’이었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맑은 기운과 산의 정기를 받으며 호흡하다보면 건강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기와 혈이 맑아지면 피부의 면역력이 회복되어 아토피성 피부염도 자연히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일념으로 열심히 치료에 따라준 덕택에 그는 치료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면서 피부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무리 치료까지 그는 총 6개월 동안 한의원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 시기가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기름진 음식을 외면하면서 틈 나는 대로 한의원에 와서 치료를 받고, 주말에는 기공과 등산을 다녔으니 말이다. 아마 예전과 같은 세속적인 재미는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지리산 중턱에서 우연히 만난 L 씨는 내게 바지까지 걷어 올리면서 깨끗해진 다리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정상복귀된 팔 다리를 자랑하던 그는 극구 차를 대접하겠다며 우리 가족을 찻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날 그에게서 차를 대접받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단순히 의사와 환자로 스쳐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몇 만 겁의 인연으로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