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말씀」 115(1999년 1월호), 41-47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
갈라디아서 3장의 주해와 적용
변 종 길 교 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2장 후반부에서 진술한 복음의 진리를 다시금 여러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복음의 진리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갈 2:16). 이것을 바울은 3장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전체 구도는 로마서 3장의 구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는 로마서에 나타나지 않는 중요한 것들도 많이 설명되고 있어서 우리의 복음 이해를 한층 더 깊이 있게 해 준다.
I.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1-5절)
먼저 바울은 1절에서 격앙된 감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떠나서 잘못된 길로 가려 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되는 것이라면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죽을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이다(갈 2:21).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밝히 보여 준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아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사실을 가지고 최종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2절) 바울은 이제 마지막 수단으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에 성령을 받은 사건에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 받음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누구나 다 공통적으로 경험했던 신앙생활의 공통분모요 기본전제였기 때문이다(롬 8:9, 5:8, 엡 1:13, 딛 3:6 등).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처음에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선물인지를 되돌아보도록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 대답은 물론 “듣고 믿음으로”이다. 그들이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마음속에 임하였으며, 그 때 그들은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 곧 그들이 거듭난 것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얻은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 것은 신앙생활의 시작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사도 바울은 여기서 로마서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인 ‘이신칭의(以信稱義)’와 같은 맥락에서 ‘성령 받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율법의 행위로(εξ εργων νομου)”라는 것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라는 뜻인데, 이는 곧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모든 노력이 다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듣고 믿음으로(εξ ακοησ πιστεωσ)”라는 것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뜻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 곧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공로를 힘입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II. 아브라함의 믿음(6-9절)
바울은 이 사실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절) 이것은 창세기 15장 6절의 인용인데, 이신칭의의 원리를 뒷받침하는 증거 구절로 바울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구절이다(롬 4:3, 22). 여기서 “의로 정하셨다”는 것의 원어상 의미는 “의로 여겨졌다(ελογισθη εισ δικαιοσυνην)”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셨다(reckoned as righteous)”는 의미이며, 아브라함이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being made righteous)”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간주’의 문제이지, 우리 실제로 의롭게 되어졌다는 ‘사실적 변화’의 문제는 아니다. 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성경의 뜻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7절). 이 말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할례나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다. 그들은 그 증거로 할례 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서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할례 받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οι εκ πισυεω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다(마 3:9; 롬 2:28, 29 참조).
오늘날도 서양에는 지금 이스라엘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야 하며, 그들에게 선교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고 심지어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유대주의적인 발상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다시금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한 창세기 12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본문은 ‘아브라함의 복’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 교회에서는 대개 ‘자녀의 복’과 ‘물질의 복’을 약속하는 본문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8절). 이 구절의 말씀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우리말 성경에 ‘너를 인하여’로 번역되어 있는 것은 정확하지 못하며 “너 안에서(εν σοι)”라고 번역되어야 옳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 인하여(on account of Abraham)”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안에서(in Abraham)” 복을 받는다. 이것을 바울은 “복을 받으리라”는 헬라어 동사 앞에 다시금 전치사 ‘안에’를 덧붙임으로써 강조하고 있다(ενευλογηθησονται).
그렇다면 모든 이방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할례 없는 이방인들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곧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절)
III.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10-14절)
10절부터 14절까지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10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것은 구약의 신명기 27장 26절의 인용인데, 여기서 핵심 되는 단어는 ‘온갖’과 ‘항상’이다. 곧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모든’ 율법의 행위들을 다 지켜야 하며 하나라도 어기면 죄 있게 된다(약 2:10, 11 참조). 뿐만 아니라 율법의 온갖 일을 ‘항상’ 행해야 한다. 곧 율법에 속한 자들은 항상 율법 “안에 머물러 있어야(εμμενει)” 되며 한 순간이라도 어기면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율법의 ‘모든’ 행위들을 ‘항상’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επικαταρατοσ)” 있게 되며, 그 결과는 불행과 비참과 멸망이다.
사도 바울은 나아가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고 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1절) 이것은 하박국 2장 4절의 인용인데,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εκ πιστεωσ)” 살리라는 것이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 길, 곧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받는 길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롬 3:19-20절 참조).
그리고 나서 바울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인간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13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제시하는 해결책, 아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해결 방법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장 천사로 만들거나 완전한 성인(聖人)으로 만듦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았다. 곧, 우리를 ‘변화시킴’으로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대신 형벌 받음’에 의한 대속적(代贖的) 해결이며 ‘형벌 면제’ 방식의 법정적(法廷的) 해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하여(υπερ ημων)”라는 말이다. 헬라어의 ‘휘페르(υπερ)’라는 전치사는 ‘위하여(for)’라는 뜻도 되지만 ‘대신하여(instead of)’라는 뜻도 된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는 이 단어가 ‘대신하여’로 번역되었다. 여기 갈라디아서에서도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 의미를 깨달은 것은 바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리스도는 좋은 교훈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선한 일들을 많이 하기도 하였지만, 바울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안식일’을 범한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그가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죄인이 아닌가? 게다가 바울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고 신성모독죄를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고 바울은 결론 내렸던 것이다(요 5:18 참조).
이러한 바울의 판단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었다. 바울이 이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아마도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기쁨으로 손뼉을 쳤을 것이다. “그래 맞아! 나무, 나무로구나!”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성경 구절이 하나 번뜩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이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바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었구나.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어.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분명해. 왜냐하면 그는 나무에 달려 죽었거든. 그가 저주를 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야. 그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어.” 이러한 바울의 판단은 주관적인 견해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의심과 불안을 떨쳐 버리고 확신에 차서 ‘나사렛 이단들’을 박멸하러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살기등등한 바울의 확신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가 여태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일순간에 다 깨어지고 말았다. 그러면 바울의 판단의 어디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판단이었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나무에 달린 것이고, 이것은 신명기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바울의 판단의 잘못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저주를 받은 것이 “자기 죄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것에 있었다. 곧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기는 받으셨지만 그것이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라는 사실을 바울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자신의 이러한 무지를 통탄하며 고백하였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여기서 그리스도를 ‘육체대로(κατα σαρκα)’ 알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오직 ‘인간 예수’, ‘나사렛 예수’로만 알았다는 뜻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곧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고 가슴이 뭉클해져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사랑을 증거했던 것이다(고후 5:14).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갈 3:13).
이러한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다(14절). 곧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며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복’이 참된 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며,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복도 헛되고 만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세에 영생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린다. 따라서 구약의 ‘아브라함의 복’과 신약의 ‘성령의 약속’을 다른 것으로 보거나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객관적 토대’를 마련하셨으며, 그것을 ‘주관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IV. 율법과 언약(15-25절)
15절에서 25절까지 사도 바울은 “율법과 언약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5절에서는 먼저 “언약의 일반적 효력”에 대해, 곧 확정된 유언은 변경치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16절에서 18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이로써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언약은 율법보다 우선하며 율법이 들어온 후에도 계속해서 효력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서 19절과 20절에서는 “율법은 무엇이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규제하기 위해 율법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을 뜻한다. 셋째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으며, 이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의 기능(곧 율법의 제 2 효용)이 끝났음을 말한다.
21절에서 25절에서는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이 둘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지 아니하고 ‘인도적’ 관계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율법은 먼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다(22절).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의 문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렸다. 따라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죄 없다고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롬 3:19 참조).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다(갈 3:22). 즉,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것은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요 피난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율법을 바울은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고 부르고 있다(24절). ‘몽학선생’이란 말은 원어의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ο㎛ ̄σ)’의 번역인데, 이것은 원래 헬라와 로마 시대에 유력한 가문의 아이를 돌보고 인도하는 노예를 뜻한다. 그는 주인집 아이가 7살부터 17살 될 때까지 아이의 외적 행동을 지도하며 길을 다닐 때 보호하는 일 따위를 하였다. 특히 아이를 학교나 체육관으로 데려다 주고 데려 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아이에게 교과목을 가르치거나 감독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으며, 참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인 집 아이가 장성한 후에는 더 이상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지 않듯이,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다(25절). 여기서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의 지배와 속박’을 받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율법이 더 이상 아무 필요가 없다거나 소용없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율법이 아무 효력이 없고 소용이 없지만, 우리의 행동 지침에 있어서는 유익하고 필요한 점도 있다. 주인집 아이가 장성한 후에는 더 이상 몽학선생이 필요 없지만, 어렸을 때 몽학선생의 가르침이 소용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코를 흘리지 말라”든지 “길을 다닐 때에 조심하라”든지 하는 가르침은 장성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도움이 된다. 아니, 장성한 사람은 자연히 그의 생활 속에 그러한 기본적인 윤리가 습관화되어 있으며 체득되어 있는 것이다.
V.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26-29절)
사도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결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절) 곧, 이신칭의의 원리가 가져다주는 중요한 결과는 이 세상의 어떠한 인종이나 민족이나 남녀노소, 신분상의 차별이 없다는 기독교 보편주의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로마서에서도 이신칭의의 원리를 말하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결론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이었다(롬 3:29-30). 이렇게 차별이 없는 이유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원리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조건에도 영향 받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만 요구되기 때문에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기독교 복음은 인종과 국경을 넘어서 온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또한 남녀와 신분, 직업의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보편주의 종교로 전파되게 된 것이다. 유대 민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던 우리 한민족이 오늘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은혜에 동참하게 된 것도 이처럼 오직 “믿음에 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