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인류학계의 일각에서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중심으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카니발리즘에 관한 정의가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논의의 범위가 서구를 제외한 지역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주목을 하고 있지 않다. 이 현상을 집요하게 추적해 나가면 지식과 힘의 연계성이라는 구태의연한 푸코식 설명방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서구인류학이 배태한 제 1세계적 시각의 힘이 여전히 하나의 문화적 세력으로서 인류학적 지식체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카니발리즘에 관한 일련의 지식체계는 서구의 방대한 지식케이블에 의해 유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카니발리즘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은 이미 서구의 "先지식"(Vorwissen) (Gadamer 1973)을 동반하고 있다.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하여 서구의 선지식을 해체하고자 한다. 식인담론을 끊임없이 생산, 재생산하고 있는 서구 지식공장의 노우하우를 포착하자는 의미이다. 이는 필자가 제기한 "카니발리즘은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인가?"라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2. '경계의 저편'(Jenseits-der-Grenze)에서...
카니발리즘이란 사람고기를 먹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승인된 관습을 의미한다. 서구 인류학계는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카니발리즘의 다양한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족내 카니발리즘(endocannibalism), 족외 카니발리즘(exocannibalism), 오토카니발리즘(autocanniba lism), 의례 카니발리즘(ritual cannibalism) 등이 그 예이다. 족내 카니발리즘은 죽은 친족구성원의 몸(몸의 일부)을 먹는 관습이며, 친족집단외의 구성원이나 적의 몸(몸의 일부)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족외 카니발리즘이라 불리어 진다1).
오토 카니발리즘은 자신의 몸(몸의 일부)을 음식물로 섭취하는 관행이며, 죽은 사람의 몸(몸의 일부)이나 재를 음복함으로써 죽은 이를 경외하는 의례적인 행사를 가리켜 의례 카니발리즘이라 한다(Seymour-Smith 1990:30; Panoff & Perrin 1991:155; Hirschberg 1993:244).
우리는 카니발리즘을 규명하는 이러한 서구의 시각을 단순히 수용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민담이나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포착할 수 있는 현상을 통해 쉽게 카니발리즘을 발견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우리도 식인종의 부류에 속하게 된다. 칼에 손이 베 여 피가 뚝뚝 떨어질 때 흐르는 피를 입으로 빨아 먹기도 하는 데 이는 카니발리즘의 일종인가? 일전에 한 이웃 사람이 필자에게 자신의 체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의 모친이 어느 날 중병에 걸려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효성스런 아들인 그는 밤을 틈타 어느 외딴 곳의 무덤을 파헤쳐 뼈를 추려낸 뒤, 이 뼈를 가지고 탕을 만들어 병든 모친을 낫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카니발리즘의 일종이라 할 것인가?
카니발리즘에 관한 서구적 정의의 불투명성이 이 논문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초점은 아니다. 비인류학자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정의의 난이성이 관심사가 아니라, 이 정의가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작금의 지역적 범위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카니발리즘은 왜 비서 구사회의 특수한 문화적 현상으로 인식되는가? 왜 식인의 모습은 서구문명의 중심부가 아닌 '저 멀리' 주변부에서, 즉 유럽문명의 중심권에서 벗어난 곳이면 어디서라도 쉽게 등장하는가? 아프리카의 심장부에서, 남미의 밀림속에서, 남양의 열도에서... 이렇게 식인담론이 비서구적 공간과 연계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필자는 이 필연적인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서구 식인담론의 생성과정을 면밀히 추적하고자 한다.
서구의 식인담론은 이미 Homer의 오디세이 신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경계의 저편'에 위치해 있는 '한 눈을 가진 거인'들의 섬 주인인 Polyphem은 오디세이에게 있어서는 잔악한 '식인종'이었다.
".......Poyphem은 나의 물음에 이렇다 할 동요 없이 전혀 대꾸를 하고 있지 않다가, 불쑥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나의 일행에 손을 뻗쳐 한꺼번에 두사람을 끄집어 내어 새끼 개를 다루듯이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뇌수가 바닥위에 터져 이리저리 흩어졌으며, 바닥 의 흙은 피로 흥건히 젖었다. 그 거인은 죽은 자들의 사지를 차례 차례 잘게 자른 뒤, 이를 저녁식사용으로 준비해서 마치 며칠 굶은 사자마냥 다 먹어치워 버렸다.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내장, 살, 그리고 골수로 채워진 뼈까지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다 처치하였다"(Homer 1966:154).
헤로도투스도 스키트민족이 살고 있는 광활한 목초평원의 끝이 죽음의 사막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이 '경계의 저편'에는 식인왕국이 번창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고대인, 중세인들은 유럽이라는 그들의 생활공간을 넘어선 '경계의 저편'에서 카니발리즘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인도와 에디오피아는 식인 왕국의 대명사로 알려졌으며2), 특히 이 왕국의 주민인 식인종은 괴물이나 신비한 존재 혹은 우화적인 인물 (예를 들자면 백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 개머리를 한 괴물, 다리가 하나이거나 귀가 하나인 사람, 아마존의 여걸, 스핑크스)로 묘사되었다3).
Marco Polo, Columbus, Pigafetta는 고대와 중세인의 카니발리즘관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Marco Polo는 동방견문록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서구의 공간을 벗어나 '경계의 저편'에 존재하는 기이한 인종과 그들의 관습에 관해 보고하였다. 그는 결코 가본 적도 없는 일본에서, 그리고 그가 잠시 지나쳐 항행했다는 곳으로 추정되는 Angaman(아마도 Andamanen 군도일 것이다)에서 식인종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Marco Polo는 Angaman인을 개머리 모습을 한 식인종으로 묘사했다(Polo 1912:173). Columbus는 1492년 카리브 제도에서 원주민인 인디안을 발견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인디안과 수일간에 걸쳐 '대화'를 나눈 뒤, 이 원주민 섬이야말로 백개의 머리를 가진 인간과 아마존의 여괴물이 득실거리는 장소, 즉 극악 무도한 식인종들의 온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F rster 1911: Columbus의 1492년 11월 4일자 서간중에서). 항해자인 Pigafetta도 그가 돛을 달고 지나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거인 혹은 난장이 모습을 한 식인종을 발견했다고 한다(Hamann 1972:48). Marco Polo, Columbus, Pigafetta 이들 모두는 고대인과 중세인이 추정했던 환상과 전설의 식인종들을 '경계의 저편'에서 실제로 목격했다고 보고하였다.
'경계의 저편'이라는 범주에 중세의 유대인들과 수많은 개혁파 신흥종교단체들도 함께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카니발리즘의 정치, 문화적 기재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해 준다. 당시 그리스도교문화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소위 정통파 카톨릭교인과 비교해 볼 때, 유대인과 개혁파 신흥종교인은 유럽사회의 '주변인'인 셈이다. 이 유럽의 변방인도 오지의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신대륙에서 발견되는 야만적인 식인성을 그대로 노정하였다는 사실이 당시의 수 많은 기록문헌에 글과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중세 시대의 '마녀' 또한 이 시기를 지배했던 카톨릭 교회에 반기를 든 '경계의 저편'에 사는 또 다른 존재였다. 당시 종교재판의 소송기록은 이들이 연출한 과도한 식인행태에 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Russell 1972; Trevor-Roper 1969; Leff 1967). 중세 카톨릭교회는 마녀를 신에 대립된 악령의 존재로 공인함으로써, 이들을 소멸해야 할 정당성을 정치, 문화적으로 확보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이광주(1992: 190)는 "마녀 사냥에는 광신적인 성직자나 무지몽매한 서민뿐만 아니라 왕후, 귀족, 고위 성직자, 저명한 학자들까지도 스스로 합세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대량 학살은 6백 23면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 [마녀의 망치](1487년 간행)가 말해주듯이 스콜라 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도 뒷받침되었다"고 묘사한다. 결국 마녀 사냥, 마녀 재판은 정치, 문화적 도구로서 이용되어, '반란적 세력'을 정복, 통치할 수 있는 기재를 마련했던 것이다.
3. 문헌자료의 생성과 그 취약성
카니발리즘에 관한 서구의 기록자료들을 면밀주도하게 비교, 검토해보면, 이 자료들이 소위 카니발리즘을 행한다는 해당 종족사회 구성원의 직접적인 진술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관계에 있는 이웃 종족의 구술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마찬가 지로 중세의 유대인, 이교도 그리고 마녀들에 관한 기록문서도 기피관계에 있는 '이웃'지배집단에 의해 조작,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풍문이나 제 삼자의 진술에 의해 "카니발리즘의 세계지도"(Volhard 1939:89)를 작성하는 일은 용이하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목격자의 진술에 근거한 자료나 아니면 신빙성이 있는 기록문서를 찾아 내는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통상적으로 학계에서 자주 인용되는 카니발리즘의 지역적 분포와 특정 형태에 관한 분석이 신뢰도를 전혀 보장해 줄 수 없는 자료나, 혹은 체계적이고 엄밀한 역사문헌검증절차(Wernhart 1987:62)를 통과하지 않은 텍스트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아무런 엄선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료를 역사적 원자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카니발리즘을 생태학적 배경에서 설명하려는 최근의 인류학적 시도들(Harner 1977a, 1977b; Harris 1977, 1985)이 과연 어느 정도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확보한 민족사문헌에 기초했는 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필자는 카니발리즘에 대한 서구인들의 지식체계가 상당히 불충분한 자료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시공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카니발리즘에 관한 서구인들의 지식은 '경계를 침범한 사람들'의 작업을 통해 형성, 축적된 것이다.
시간적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과거라는 시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침범'하는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에 카니발리즘의 실재를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깨져있는 수골(髓骨), 열려 있는 두개골, 음식 찌꺼기에서 탄화된 상태로 발견된 유해(遺骸)등은 선사인이 사람고기 를 즐긴 '증거'라는 것이다(Lutz 1991). 그들은 과거의 유물을 통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왜 카니발리즘이라는 현상만을 부각시키는가? 현재의 비서구 원주민이 선사인의 잔재를 그대로 투영한다는 통념이 서구학계에 여전히 지배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4).
카니발리즘의 실재를 입증한다는 고고학적 연구는 원주민의 카니발리즘을 기록한 민족지적 문헌자료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Helmuth 1968:101-119).
공간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카니발리즘에 대한 서구인들의 담론은 서구라는 공간적 경계를 넘은 사람들이 남긴 민족지적 문헌자료를 토대로 형성된다. 카니발리즘을 '경계의 저편'에 존재하는 문화현상으로 기술했던 최초의 유럽인은 소위 식인왕국을 침범하여 그 경계를 무너뜨린 식민지 정복자들이었다. 이 서구의 정복자들은 신의 질서와 세계정의의 실현이라는 명분 하에 그들의 종족살륙행위를 구원사업의 일부로 정당화했으며, 이때 그들은 저항하는 종족사회 구성원들을 '식인종'으로 둔갑시켰다. 한 일화에 따르면, 스페인 왕실은 중남미 주재 총독부에 다음과 같은 어명을 하달하였다. 만약 어떤 인디안종족이 식인종출신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면 이들을 사냥해서 노예로 삼으라는 내용이었다. 포루투칼의 전문 노예사냥꾼인 Pedro Teixera는 아마존강의 중상류지역에 거주하는 인디안 종족들은 사람고기 이외에는 다른 고기를 전혀 먹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다는 목격담을 전해 준다. Omagua와 Yurimagua 종족으로 알려진 이들 인디안종족이 비축용 야생동물고기와 생선을 그와 그의 정복대원들에게 제공하였다고 한다. 사실 Teixera일행은 이들 인디안의 도움으로 아마존강 어귀인 Par 에서 에쿠아도르의 안데스 산맥을 넘어 Quito를 거쳐 다시 Par 로 돌아가는 수주일간의 대장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수십년 동안 Pedro Teixera와 그의 친위대에 의해 노예사냥의 표적이 되어 왔으며, 결국 Teixera의 노예사냥부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공공연히 자행된 '사람사냥'은 Teixera와 그 밖의 다른 전투대가 이 인디안종족의 잔인한 식인근성에 관해 보고하게 됨에 따라, 포루투칼의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이 '식인인디안' 집단과 함께 거주하며 포교활동을 벌여왔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Teixera가 목격하였다는 광란의 카니발리즘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기록문은 카니발리즘의 부재를 입증할 수 있는 반증의 자료로 제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카니발리즘과 전혀 무관한 보고서로 간과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Frank 1987:207).
카니발리즘에 관한 서구인들의 지적 표상이 상당히 굴절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빙성이 결여된 자료의 수용과 연계되어 있다. 일부 인류학자들이 Marco Polo, Magelh es, Antonio Pigafetta, Francisco de Orellana, Gaspar de Carvajal, Alexander von Humboldt, Martius , Bates, Stanley 등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교사, 탐험가 혹은 식민지 관료가 작성한 보고문이라고 해서 이를 일방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기초자료의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저명한' 관찰자들이 기술한 카니발리즘을 상당히 신빙성을 보장해주는 '증언 '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가 체계적이고 엄밀한 자료 검증과정이 무시된 채 어느 정도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카니발리즘에 관한 기록이 '유명인사'인 어떤 선교사에 의해 작성되었다 할지라도 그의 기술이 자신의 목격담이 아닌 제 삼자의 전언에 근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울러 비서구사회의 카니발리즘을 기술한 식민주의 시대의 선교사, 탐험가, 식민지관료의 여러 자료들을 문헌검증의 절차를 통해 비교, 검토해 본 결과, 카니발리즘에 관한 기록들이 상당부분 왜곡되거나 조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Kohl 1987:92-93).
극적으로 윤색된 카니발리즘상을 창출하는 서구인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어떤 종족은 사람고기 이외에는 어떤 고기도 입에 대지 않는다거나, 사람고기를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해 가축처럼 사람을 사육하고, 또는 사람을 산 채로 도살한 뒤 소금에 절여 시장에 팔아 넘긴다는 서구인들의 목격담이 아프리카의 민담이라고 변모되기까지 한다. 태아의 살이 별미라서 이 '상품'을 집단적으로 '생산'해내는 식인종이 있는가 하면, 연한 살코기를 제공하는 '구이용' 갓난아이를 얻기 위해 애쓰는 식인어머니의 이야기가 뉴기니아의 산악지대에 펼쳐지기도 한다. 결사적인 격투끝에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성교시 배우자의 사지를 잘게 썰어 먹어버림으로써 '행복한 순간'조차도 '실용적인 순간'으로 창조할 줄 아는 식인종이 아마존강을 누비고 있다고 전해진다.
왜 서구인들은 이러한 '식인종시리즈'를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의 목격담으로 수용하였는가? 왜 서구인들은 '식인종'은 상상해 볼 수 있는 온갖 잔악한 특질을 다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는가? 유럽 근세에 지성의 꽃으로 손꼽히는 Humboldt와 같은 석학은 왜 카니발리 즘에 얽힌 불확실한 풍문을 기정사실로 간주하였는가? 그는 어느 남미의 인디안 추장이 여자들을 자신의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즐겼을 뿐만 아니라 어느 때든지 원하면 잡아먹을 수 있도록 여자들의 거처에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고 기술하였다(Humboldt 1860, Vol.3:386). Ma yoruna족이 적의 머리를 절단하여 얼굴의 살과 골수에 구더기로 뒤덮일 때까지 방치한 뒤 식용으로 사용했다는 목격담도 있다. 그런데 Mayoruna'식인종'이 이 부패한 고기를 먹어도 전혀 이상이 없다는 사실은 왜 별다른 이견없이 받아들여지는가(Spiel 1974:170)?
이제 필자는 위에서 제기된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모색하여 적절한 답변을 찾아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서구인들이 고대시대부터 카니발리즘에 대한 일련의 지식체계를 꾸준히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서구인들은 카니발리즘을 소재로 하는 다양한 목격담을 접하게 되면, 내용이 아무리 기상천외한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신뢰도가 상실된 정보로 무시하거나 방기하지 않고 진지하게 수용한다. 시대의 변천 속에서도 일관된 서구 특유의 지식전달 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4. 식인담론과 '모방'의 논리
서구인들이 다양한 기록자료들을 통해 카니발리즘이라는 담론을 창출한 사건은 그들의 식인과 관련된 지식, 관념, 연상체계의 오랜 지적 전통과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식인담론이 형성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역사적 문헌자료뿐만 아니라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경시해 온 비공식적 자료, 예를 든다면 동화, 탐험소설, 유럽의 식인민담 혹은 구술자료 등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이러한 공식, 비공식 자료들은 식인담론의 선지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미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식인종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의 관념, 상징체계에 각인된 식인종을 만난 것이었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카니발리즘이라는 기이한 문화현상을 새로운 세계의 체험담으로 기술했다 할지라도, 묘사된 카니발리즘의 지적 진원지는 식인에 관한 서구의 선지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지식의 지적 전통위에서 형성, 창출된 식인담론은 지속적인 정당성 확보가 필요했으며, 이는 '모방'이라는 서구 특유의 문학적 기법을 통해 실현되었다.
'모방'의 문학적 기법은 전승된 자료를 언어상 혹은 의미상으로 '모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고도의 신빙성을 확신시켜 주는 역사기술적 방식이다. 특히 이 양식은 근세 초기 이전까지 역사가, 천문학자에 의해 빈번히 사용되었던 방법론적 수단이었다. 선교사, 탐험가, 식민지 관료들도 이러한 지적 전통을 따라 카니발리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Vajda 1964).
Humboldt가 주장한 식인추장의 존재는 브라질 탐험가인 v. Martius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그는 '모방'의 기법을 구사하여 식인추장에 관한 이야기를 Humbolt와 동일한 시나리오로 엮고 있다. 좀 달라진 내용이라고 한다면 이 인디안추장의 거주지가 남쪽으로 옮겨졌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 작성된 서구인들의 기록문에는 거의 예외없이 북아마존 유역에 산다는 이 야만적 식인추장에 관한 스토리가 약방의 감초격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마침내 인디안의 설화로 둔갑까지 하게 되었다(Bernheimer 1952 ; Dudley & Novak 1972).
독일인 탐험대원인 Staden은 1554년 난파되어 브라질의 Tupinamba 인디안과 9개월을 보냈다. 2년이 지난 1556년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Tupinamba종족의 잔악한 카니발리즘 행태를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 뒤에 나온 16세기 보고서들은 Staden 이 기록한 Tu pinamba의 '식인행각'의 기본유형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심지어 Tupinamba족과 희생자 사이에 주고 받았던 대화문장조차 '모방'되었다(Whiffen 1915). 카니발리즘에 관한 기록문이 '모방'되었다는 것은 원자료에 내재한 권위에 근거하여 자료의 신빙성을 상대적으로 높이려 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원자료라는 근본토양은 식인의 본질과 식인관행에 관한 서구인의 선지식이며 이미 그들의 관념, 상징세계에 각인된 지식인 것이다. '모방'의 논리는 결국 선지식의 지적 전통이 창출한 식인담론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적 논리였던 것이다. 모방의 논리를 통해 식인담론을 보다 효과적으로 형성, 창출한 선지식의 체계를 이제 좀 더 세분해서 바라보고자 한다.
5. '짐승형' 식인 / '인간형' 식인
서구인의 관념, 상징체계에 자리잡고 있는 카니발리즘의 이미지는 '인간형/짐승형'이라는 이항대립적 구도속에서 움직인다. 이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크리스도교 종교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선과 악이 병행하는 양극적 세계가 카니발리즘에 관한 선지식의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악이라는 어둠의 세계에서 창출되는 카니발리즘관은 잔혹한 '짐승형'의 표상을 상기시킨다. 짐승형 식인종은 광폭한 탐욕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여, 날로 사람고기를 베어먹고,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빨아 먹는다. 그을려지고 있는 사지에서 막 불길로 뚝뚝 떨떨어지는 기름조차도 그에게는 귀중한 음식재료인 것이다. 그는 골수, 손바닥, 여자의 유방, 태아의 살은 특별히 맛있는 부위라는 것을 잘 안다. 가장 맛있는 살코기를 얻기 위해 도살직전에 살을 찌우게 하는 방법도 안다. 필요하면 개인적으로 '통구이'용 아이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자신 이외의 만인은 모두 적이며,
도살용 가축이다.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이들 짐승형 식인종은 악마의 영역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소돔과 고모라인이다. 전혀 계도될 수 없으며 '경계의 저편'에서 날뛰는 '영혼'없는 짐승인 것이다. 짐승형 식인종은 극단적 문명빈곤을 의미하는 나체, 언어능력의 결여, 폭력, 성의 문란(근친상간, 수간)등 악의 범주에 속한다.
카니발리즘에 관한 또 다른 유형의 담론은 '경계의 저편'을 선의 세계로 이상화한다. 크리스도교문화가 정착된 이래 서구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죄악으로 상실한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땅이 언젠가 다시 이 지구상에 도래할 것이라는 소망을 꾸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통해 수천년 동안 꿈꾸어왔던 파라디스가 어쩌면 이 지구상의 어디엔가 실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음부를 가리지 않아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발가벗은 오지의 미개인이 자연인의 모습으로 등장했을 때, '박애주의적' 서구인들은 '경계의 저편'에 도래한 천년왕국을 찾아 길을 떠났다. 자연주의자였던 Rousseau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한다: "수천의 프랑스인, 유럽인들이 자발적으로 이 자연인들의 삶의 터로 도피해서, 이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 평생을 보냈다. 더욱이 이성적인 선교사들 조차도 이들과 함께 보냈던 그 고요하고 청순했던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 했던가!"(Kohl 1987:88에서 재인용). 그런데 '경계의 저편'에서 옥에 티처럼 '식인 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파라독스한 현상을 정당화 혹은 미화시켜야 할 과제가 던져진 것이다. '식인종'은 이제 지옥의 불길에서 영원히 단죄받아야 할 잔악한 짐승이 아니라, 따사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존재가 '인간형' 식인종인 것이다. 그는 동물적 본능이 아닌 '인간적' 혹은 '제의적' 동 기에서 사람고기를 먹는다. 죽은 족내 구성원의 시신을 그냥 차거운 대지에 묻거나 혹은 구더기의 먹이로 방치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사자(死者)와의 영속적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음복한다. 음복은 죽은 자의 요체를 영구히 자신의 몸속에 보존하는 작업으로서 종교적 의례를 통하여 행해진다. 이러한 '인간형' 식인종의 사람먹기는 결코 사악한 식용행위가 아니라 선한 종교행위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음복중에 나타나는 비통과 경외심으로 가득찬 그들의 표정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악의 세계로 묘사되든, 선의 세계로 표현되든 '경계의 저편'은 서구인이 정복, 통치해야 할 세계이다. '경계의 저편'이란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제거해야 할 광기에 가득찬 혼돈의 세계를 노정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갈구하고 꿈꾸어 왔던 유토피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항대립적 구도를 가진 서구인의 선지식은 '짐승형' 식인 / '인간형' 식인이라는 이분법적 식인담론을 창출하였으며, 동시에 이러한 담론의 주체자로서 '인종차별주의자'와 '박애주의자'의 부류5)가 형성되었다. 이 두 부류는 각각 자신의 관점에서 '경계의 저편'을 인식하고 해석함으로써, 이 세계를 이념적으로 지배하려는 정당한 근거를 제공한 셈이었다.
이러한 선택기준에 따라 카니발리즘에 관한 모든 자료를 어느 한 입장으로 분류하는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 기록자료에서도 카니발리즘에 관한 두 범주가 자주 결합되거나 복합되어 묘사되기 때문이다. 또는 동일 기록자가 한 식인유형을 취했다가 다른 형으로 입장을 변경한 경우도 있다.
독일인 인류학자 Frank는 Pano어를 사용하는 동페루 인디안족의 카니발리즘에 관한 다량의 민족사 문헌을 조사하여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선보였다(Frank 1987). 그는 17, 18세기경 '박애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아이러니컬하 게도 이 인디안족을 '짐승형' 식인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는 원인을 추적한 결과 한 선교사의 죽음이 그 직접적 요인이었음을 밝혀내었다. Heinrich Richter라는 예수회 선교사가 Cubino라고 불리는 인디안족을 전교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하자, 그의 동 료 선교사들은 '박애주의'노선을 파기하고 이 인디안족을 포함한 이웃 인디안족(Piro/Campa)에까지 잔악한 식인집단('짐승형' 식인)이라는 전혀 근거없는 낭설을 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살인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동페루 인디안은 이 '박애주의자'들에 의해 평화롭 게 살아가는 자연인('인간형' 식인)으로 기술되었다(Ibid.:217).
카니발리즘이 두 범주에 의해 담론화되는 동기는 천차만별이다. 예를 든다면, 기록자들이 자신의 직업, 교육수준, 기질에 따라 특정 식인형을 선호하거나, 혹은 정치적, 윤리적 이유로 개인적 관심을 은폐한 채 상반되는 상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한 시대정신이 카니발리즘의 이미지 창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Cashibo'인디안6) 에 관한 민족사 문헌을 집중조사한 Frank의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하겠다.
Frank는 대략 1790년까지 출간된 문헌에서 Cashibo족의 식인행각을 보여주는 그 어떠한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790년에서 1820년 사이에 기록된 민족사 자료들이 Cashibo족을 극악무도한 식인종('짐승형' 식인)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Cashibo족은 사람고기를 주표적물로 삼는 전문사냥꾼이며, 타오르는 탐욕으로 단지 적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까지 살해하여 잡아먹는 잔인한 식인종으로 등장하고 있다(Ibid.:217). 그런데 1820년 이후의 문헌에는 Cashibo족이 목가적 생활을 영위하는 자유인 ('인간형' 식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Frank에 의하면 1930년이후 Cashibo족은 잔인한 식인행각('짐승형' 식인)을 벌이는 종족으로 다시금 보고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카니발리즘에 관한 담론이 두 유형의 식인상을 오가며 혼란스럽고 일관성없이 구성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는 모방의 논리를 따라 기술된 카니발리즘에 관한 문헌이 소문에 의거하거나, 양의성을 지닌 제 삼자의 목격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 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카니발리즘의 실재를 명백히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단 말인가? 필자는 이 질문에 단순하게 흑백논리로 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아직까지 카니발리즘의 실재를 증빙할 만한 자료를 접할 수 없었다고 답변하고 싶다. Arens는 식인종의 대명사로 불리어 지는 Tupinamba, Azteken, Fore족에 관한 민족사문헌을 심층분석한 결과, 이 종족들에게서 카니발리즘을 입증할 만한 단서를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는 놀라운 결과에 도달했다(Arens 1979). 인류학자들에 의해 주목되지는 않았지만, Fernando Carneiro와 Salas의 카니발리 즘 연구도 동일한 결과를 낳았다(Frank 1987:220).
영국인류학계의 거장으로 굴림했던 Evans-Pritchard도 카니발리즘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20세기 이전의 Azande족에 관한 문헌을 비교, 검토한 결과, 그 어떤 자료도 카니발리즘의 실재를 입증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탐험가들의 증언을 각각 독립적으로 분리해서 살펴 본다면 이 증언이 모호하거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지금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Evans-Pritchard 1965:153). 그러나 Evans-Pritchard는 이 결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수학적 어법으로 환언한다면, 그는 3 X 0이라는 계산에서 0이 세개나 되니까 그래도 최종결과는 0 이상은 될 것이라는 '비수학적인' 소망을 가졌다.
"......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있겠는가(!). 모든 증언을 함께 고려해 본다면, 어쨌거나 우리는 일부 Azande족이 카니발리즘을 따랐다는 강한 개연성을 확보하게 된다"(Ibid.).
이는 타문화 연구의 객관성확보라는 서구인류학자들의 당위적 명제가 과연 어느 정도 양심적인 작업에 근거하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오히려 Evans-Pritchard가 3×0=0라는 수학의 기초적 작업을 충실히 따라 주었더라면 영국인류학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지 않았을까?.
6. 나오며
1991년 겨울학기에 {인류학에서의 진실과 허구문제}라는 한 세미나강좌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인류학과에서 개설되었다. 필자는 이 세미나에서 {서구 식인담론의 발생과 허구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바 있다. 비서구사회의 카니발리즘에 관한 독일 인류학의 주 된 입장은 실증주의적 노선을 따르고 있다. 카니발리즘을 묘사한 수 많은 자료의 존재는 '경계의 저편'에서 행해지는 카니발리즘의 실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카니발리즘에 관한 자료들을 적절한 범주로 분류하는 작업이 주요 관심사를 이루었다. 그런데 수집한 기록자료의 신뢰도를 면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이야말로 인류학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실증주의적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자료검증에 대한 절차가 생략되었다. 절차의 생략은 단순히 간과될 수 있는 '실수'가 아니라,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이 은밀하게 개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는 카니발리즘을 비서구적 '증후군'으로 단죄하는 서구인의 자민족중심주의적 선지식의 결과이다. 본인의 문제설정은, 실증주의라 자처하는 독일 인류학계의 카니발리즘 연구노선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비실증주의적 태도에 회의의 시선을 던지는 것이며, 이는 독일 인류학의 제 1세계적 시각을 비판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서구인인 세미나 참석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필자가 센세이션한 논문을 발표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 오랜 세월동안 은폐해 온 그들의 "문화적 힘"(Cultural Strength) (Said 1978:40)의 운용논리를 부분적으로 폭로시킨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이제 한국인류학계에 재소개 하고자 했다.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서구인의 식인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으며, 그 형성자체가 많은 경우 허구성의 테두리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
을 인식시켜 주고자 했다. 그들의 지적 전통은 이미 식인담론의 맹아를 배태했으며, 그들의 식민지적 광기는 이 맹아를 꽃피우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바로 그들의 식인담론은 '경계의 저편'을 타자화하는 정치, 문화적인 지배양식이다. 카니발리즘은 또 하나의 '오 리엔탈리즘'인가? 카니발리즘에 관한 지식은 서구의 "문화적 힘"을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이 "문화적 힘"은 '경계의 저편'에 있는 '저들'- 야만인 집단을 정교한 지식체계로 관리, 통제하여 '경계의 이편'에 있는 '우리들'- 문명인 집단의 존속을 공고히하는 원동력이다. " 문화적 힘"은 '경계의 저편'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식인'을 창출해내고 있다. 식인은 가공적 진술에 근거한 자료에서 창조된다. 목격자인 서구인의 세계와 대상자인 비서구인의 세계에서 하나의 경계선이 뚜렷이 그어지는 시기와 장소에서 식인담론은 극적으로 창출된다. 또한 서구의 발전사관에서 공식화된, 비서구인의 저급단계로의 자리매김은 비서구인의 식인성을 정당화시키는 데 한 몫을 담당하였다.
서구사회가 창출해 낸 비서구사회에 대한 가공의 신화는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카니발리즘은 비서구사회를 영구히 타자화하려는 제 1세계의 신화이다. 카니발리즘은 서구가 비서구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구인의 머리 속에 비서구인의 기괴성, 잔인성, 야만성, 원시성을 각인시키는 정교한 문화적 장치인 것이다. 이는 Said(1978)가 간파한대로 주체인 서구사회가 비서구사회를 타자화하는 통치의 담론체계, 즉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인 것이다.
주 2) 당시 유럽인은 식인왕국을 지칭할 때 에디오피아와 인도라는 상이한 두 지명 중 아무 것이나 선택하였는 데, 이는 전술한 두 지역이 '경계의 저편'이라는 공간범주에서 동일한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주 3) Plinius(3세기)와 Isidor von Sevilla(7세기) 등이 수집한 자료에 잘 나타나 있음(Perrig 1987 : 31-87).
주 4) 이러한 가설은 진화주의라는 인류학의 초기사조에 등장하는 데, 현대인류학은 이를 '화석화'된 이론사적 유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선사시대 유적을 통해서 현재 원주민의 문화상을 재복원하거나, 아니면 원주민에 관한 민족지적 자료를 토대로 선사인의 삶을 입증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는 고고학자들도 있다(Kohl 1987:112).
주 5) 서구지식사의 흐름상 인종차별주의, 박애주의는 각각 자민족중심주의 (ethnocentrism),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라는 인류학적 개념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주 6) Cashibo라는 말자체는 '식인'을 풍자한 어휘이다.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는 '피 빨아먹는 박쥐인간'이다. 그러나 Cashibo인은 스스로를 일컬어 Uni(=사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