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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탁구 최강국인 중국을 꺾을 기대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 김선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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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국내에서 ‘탁구 신동, 탁구 천재’는 유승민의 이름 앞에나 붙는 수식어였다. 그러나 몇달 전 재중동포 출신의 정상은(16)이 남자고등부 녹색 테이블에 신선한 충격을 안기면서 정상은이라는 이름 앞에도 ‘탁구 신동’이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다.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태어난 정상은이 탁구와 인연을 맺은 건 6살 때인 지난 1996년. 탁구선수 출신인 아버지 정두헌 씨는 자신이 선수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늦게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탁구대에서 얼굴이 보일락말락 한 아들을 10cm 정도 다리를 자른 탁구대에 세웠다. 아버지의 지도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난 정상은은 중국 북부 지역 대회 13세 이하부에서 우승하는 등 탁구 최강국 중국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들을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에게도 중국이라는 벽은 한국선수들만큼이나 높아 보였다. 그래서 정두헌 씨는 아들을 세계적인 선수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경찰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뒤로한 채 한국땅을 밟는다.
이후 정상은은 홀로 하북성 보정시 탁구학교에서 지내야 했고, 자신이 탁구를 포기하면 가족이 모두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2년여 동안 탁구 라켓 대신 컴퓨터를 벗삼아 지내는 반항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도 어머니가 한국국적을 얻으면서 소리소문 없이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탁구 신동은 한국땅을 밟게 됐고 동인천고 선수로 테이블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국내에서 재중동포 출신 탁구선수가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일선 지도자들이 재중동포를 국내 무대에 받아들이는 선례가 생기면 기존 선수들이 설 자리가 그만큼 좁아진다는 생각에 정상은의 대회 출전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대한탁구협회는 정상은이 국적을 취득한 이상 대회에 출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 1년 동안 중고연맹이 개최하는 대회의 단체전에는 뛸 수 없다는 합의 아닌 합의를 한 끝에 정상은은 국내선수로 첫 발을 내딛게 됐다.
2년 정도 방황한 정상은이지만 가족과 함께 살며 안정을 찾아 지난 5월 대전에서 벌어진 2006년 아시아주니어탁구선수권대회 대표 최종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태극마크를 당당히 달았다. 한국은 7월 일본 기타규슈에서 열린 2006년 아시아주니어탁구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3-0으로 완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남자단체전 우승은 1997년 인도대회 이후 9년 만이었고, 만리장성을 넘은 주역은 대표팀 에이스 정상은이었다.
정상은에게 중국선수들은 오랜 기간 경기를 했던 친구이자 동료들이다. 그들과의 경기 경험도 많고 기본적인 자신감이 있다. 이 점이 정상은에게 유승민 이후 만리장성을 무너뜨릴 꿈을 가져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른손 셰이크핸드 드라이브 전형인 정상은은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고, 포핸드 드라이브의 파워와 발놀림의 빠르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 다만 서브와 백핸드 드라이브는 보완해야 할 점이다.
정상은에게는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겠다는 큰 꿈이 있다.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대표팀에는 아쉽게 탈락했지만 실력차를 인정하기에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은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해 중국의 벽이 결코 높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정상은의 목표는 바로 한국탁구의 목표인 것이다.
정상은
생년월일 1990년 4월 2일
신체조건 168cm/ 57kg
약력 중국 하북성 보정시 탁구학교(초,중학교) - 동인천고 1학년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