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31 일본 군수공장(추상)
일본군 중위가 끌려온 한국 처녀들을 마당에 집합시켜 놓고 일장연설을 한다.
중위(일본어) “너희들은 지금부터 근로정신대가 아니고 대일본제국의 군 위안부다. 여기에 온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대일본제국의 국민이 된 이상 조선말을 써서도 안 되고 조선을 들먹거려서도 안 된다. 만약에 조선말을 지껄이면 이 대검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천황폐하에게 충성하고 애국을 맹세하는 증표로 종군 위안부의 표시를 새겨 주겠다. 모두 옷을 벗어!”
일본 군인들이 처녀들에게 옷 벗기를 강요하고, 벗지 않으면 구타한다.
옥영 맞지 않으려고 알몸이 된다.
문신 담당 병사가 시뻘건 불칼을 들고 와서 한 명씩 문신을 새긴다. 옆줄, 그 옆줄에서도.
몸의 중요 부위에 모두 ‘대일본제국’이란 한자어를-
살 타는 연기가 자욱하고 처녀들의 비명소리.
하마 같은 두 병사가 반항하지 못하게 붙잡는다. 아비규환의 지옥이다.
한 처녀가 알몸으로 달아난다.
일본군이 쫓아가서 처녀를 붙잡아 끌고온다.
중위 대검을 뽑아 처녀의 목을 후려친다. 처녀는 비명도 없이 고혼이 된다.
중위, 잘린 처녀의 머리를 들고 처녀들에게 보이며,
중위(일본어) “누구든 반항하면 이렇게 된다. 살고 싶으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처녀의 머리가 옥영의 앞으로 툭 떨어진다.
옥영 묻어 주려고 처녀의 머리를 집을 순간 일본군이 군화발로 옥영을 걷어찬다.
옥영 비명을 지르며 그 머리 위로 쓰러진다.
쓰러진 옥영의 목과 가슴에 불칼이 파고든다. 옥영 몸부림치고 울다 기절한다.
S♯32 일본 ××항 부두
위안부들을 실은 군용 트럭들이 달려와 멎고 위안부들이 트럭에서 내린다.
위안부들은 일본군 감시 속에서 두 대의 군함으로 승선한다.
옥영과 춘화, 명자, 덕자, 점희, 하선 등도 승선한다. 미례가 마지막이다.
미례 승선하기 전, 그녀들을 인솔해 온 감시병에게 묻는다.
미례(일본어)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감시병(일본어) “남지나해.”
미례(일본어) “거기가 어디예요?”
감시병(일본어) “필리핀 어느 섬인 줄만 알아라.”
미례(일본어) “친절히 가르쳐 줘서 고마워요.”
지휘 장교가 빨리 승선하라고 재촉한다.
발판이 거두어지고 이윽고 군함이 출발한다.
S♯33 동 군함 갑판
멀어지는 육지를 보며 슬피 우는 위안부들.
한 처녀(명자)가 자살하려고 갑판 난간으로 달려간다.
바닷물로 뛰어들 순간 일본군이 붙잡는다.
명자는 실컷 구타당하고 선실로 끌려간다.
다른 일본군이 갑판의 위안부들을 모두 선실로 내려가라고 명령한다.
S♯34 동 선실
일본군, 코피 흐르는 명자를 끌고와서 창고에 감금한다.
이를 지켜보며 울분을 참는 위안부 처녀들.
S♯35 미 군함 선실(현실)
아늑한 침대와 세면도구가 갖춰진 고급 사병실.
병사들의 방 한 칸을 네 여자가 쓴다. 귀빈 대우이다.
옥영과 춘화, 침대에 누워 미국 그림책을 보고 있고, 하선은 자고 있다.
명자는 우울증이 심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공상만 한다.
옥영 “명자야 이리 와. 이야기하고 놀자. 그렇게 그리던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는데 왜 그렇게 슬퍼하니?”
춘화 “명자야 슬퍼하지 마. 우리가 위안부가 되고 싶어서 됐니? 일본놈들이 강제로 시킨 거지. 우린 죄 없다. 떳떳이 고국에 돌아가서 큰소리 치고 살 거야. 몸만 성하면 무엇이든지 할 테야. 농사도 짓고 과수원도 하고 목장도 할 테야. 우리 집이 농가치곤 꽤 잘살거든.”
옥영 “얘 또 거짓말 한다. 언제는 군산에서 어물장사를 한다고 해 놓고선.”
춘화 “그래. 어물장사도 하고 촌에 농토도 있단 말이야. 소작농이 아니고 우리 꺼지.”
옥영 “두 가지를 어떻게 다 하니? 네 부모님이 항우장사야? 신이야?”
춘화 “정말이야. 그래서 부자라는 거다.”
옥영 “네 후라이를 누가 믿을까? 하여간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꿈이 커서 좋겠다. 우리 집은 농사 지을 땅도 없어. 모두 일본놈한테 빼앗기고 수탈당해서 어떻게 끼니나 때우시는지 모르겠어.”
명자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
옥영 “어디 가 명자야.”
명자 대답이 없다.
옥영(춘화에게) “좀 따라 나가 봐. 또 자살할지도 모르니까.”
춘화 “온갖 만고풍상을 다 겪었는데 설마 초개같이 목숨을 버릴라고?”
옥영 “천한 목숨이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살고 봐야 하니까 친구 목숨 지켜 줘야지. 내가 가 보겠어.”
춘화 “우울병이 옮아서 너까지 자살하면 안 돼.”
옥영 “걱정 마. 난 개똥밭에 굴러도 살 테야.”
옥영 그림책을 덮고 나간다.
하선 문소리에 잠에서 깬다.
하선 “밤이야, 낮이야?”
춘화, 하선의 침대로 가서 하선 위로 몸을 포개며,
춘화 “좋은 약 먹고 좋은 대접 받고 편히 놀고 편히 자니 시간 관념도 없나 보지?”
하선 “지금 배가 가는 거야 멈춰 있는 거야? 바다 한번 보고 싶다.”
춘화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지? 분명히 우린 살아 있다. 살아서 숨만 쉬고 있어. 만신창이 된 더러운 육체로.”
하선 “짓밟히고 짓뭉개진 허깨비 같은 몸뚱일망정 고국땅에 데려다준다니까 기분은 좋수.”
춘화 “지금은 밤이고 내일 저녁쯤 부산에 도착한대. 한국말 할 줄 아는 상사님이 그랬어. 도착하면 일단 위안부 수용소로 보내진대. 거기서 신분과 국적을 확인하고 자기 나라로 보낸다는 거야.”
하선 “위안부들이 그렇게 많은가?”
춘화 “일본군이 점령한 나라의 젊은 여자는 모두 위안부로 끌려왔지. 조선 여자들만 해도 수십만 명이 되나 봐. 그중에 우리처럼 살아 남은 위안부는 행운이지. 명자가 자꾸만 죽고 싶다고 해서 걱정이야.”
하선 “미례 언니가 보고 싶다. 내게 참 잘해 줬는데. 날 살리려고 애쓴 언니들 다 고맙고 보고 싶어. 미례, 덕자, 점희……어디로 갔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춘화 “살았을 거야. 하늘이 조선의 딸들을 사랑하신다면,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꼭 그날이 오길 빌겠어.” (울먹거린다)
하선 “울지 마 언니. 우리 다른 이야기 해요. 미군들이 정말 우리를 부산까지 데려다줄까? 난 믿어지지 않아요. 일본놈들에게 하도 많이 속아서……”
춘화 “지금까지 그들이 한 언행, 그리고 우리들에게 잘해 준 걸로 봐선 믿어도 괜찮겠지. 설사 창녀가 돼도 일본놈들보다 더 잔인하겠니?”
하선 “꿈에 나타날까 무서워요 그 악마들! 으으-”
두 여자 이를 부드득부드득 간다.
춘화 “겉으론 웃어도 고국땅이 가까워지니까 명자처럼 마음이 답답해진다. 이 몸뚱이로 어떻게 부모형제를 대하고, 어떻게 낯을 들고 세상을 살아갈지……”
S♯36 중천에 떠 있는 달(인서트)
S♯37 파도를 가르며 북쪽으로 달리는 미군 군함
S♯38 동 군함 갑판(밤)
갑판에 앉아 달을 쳐다보고 있는 두 여자.
바람이 두 여자를 날려 버릴 듯 거세게 몰아친다.
옥영 “들어가자 명자야. 내일을 위해서 눈을 좀 붙여야 돼.”
명자 “너 먼저 들어가.”
옥영 “널 혼자 두고 어떻게 나 먼저 들어가니? 과거지사는 다 잊어 버리고 새출발하면 돼. 고국에 돌아가는 게 우리 꿈이었잖아? 지금 그 꿈이 가까워지고 있어. 얼마나 다행이니? 제발 딴맘 먹지 마 명자야.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참회하면 되는 거야. 약소국가에서 태어난 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죄. 그런 지도자를 믿고 나라 살림을 맡긴 죄. 그리고 내 나라 내 겨레를 지키지 못한 죄는 인정해야 한다. 나도 그 지도자, 매국노들과 똑같은 피를 가진 국민이니. 참회하면서 일본에 복수해야 한다. 살아서 일본이 꼭 망하는 꼴을 볼 테야. 네 마음도 나와 똑같지?”
명자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이 굳어 있다.
옥영, 한숨을 푹 내쉬고 일어선다.
옥영 “그렇겠지. 너의 집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이고 너는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니까 그럴 만도 할 거야. 그러나 가문이 뭐지? 양반이 밥 먹여 주니? 양반 가문, 높은 벼슬, 많은 재산, 다 필요없는 거야.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와 벼슬은 버러지의 삶만도 못한 거야. 그게 그렇게 소중했니? 네 육체보다 소중했니?”
명자 “버려진 가문보다도 병들고 쓸모없이 된 내 육체가 너무 서러운 거야.”
옥영 “다 잊고 새출발하기로 우리 넷이 맹세했잖니?”
명자 “새출발하기엔 내 양심이 용납하지 않아. 양심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그땐 몰랐어. 그저 그 지옥에서 탈출하고픈 소원뿐이었는데, 막상 탈출했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슬플 수가 없어. 내 앞에서 죽은 수많은 위안부들의 얼굴이 생각나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단 말이야.”
옥영 “그러지 말고 들어가자. 곧 날이 샐 거야. 내일 저녁이면 부산항에 도착할 거고 그리던 조국 땅을 밟게 되지. 6년만인가 7년만인가? 내 나이도 잊었어. 할머니가 된 기분이야. 소녀가 쭈그렁탱이 할머니로 변했어. 그래도 이 목숨일망정 가지고 돌아가서 일본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폭로해야지. 꼭 그 일에 앞장설 테야. 내가 당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을 쪽바리 새끼들한테 안겨 줄 테야. 그 잘난 후손들에게……”
옥영이 안아 일으켜 주자, 명자 마지못해 선실로 내려간다.
갑판에서 유심히 그녀들을 지켜보던 두 미군 초병이 천천히 마주 걸어와서 반대 방향으로 멀어진다.
S♯39 화면(자막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원폭 투하
S♯40 화면(자막과 함께), 일본 천황 무조건 항복
S♯41 농가 방안(남지나해 ××섬)
미례 눈을 뜬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원주민 노부부 기뻐한다. (음악 M-)
미례 일어나서 노부부에게 감사의 큰절을 한다.
마음놓고 그들 집에서 묵어도 좋다고 수다를 떠는 노부부.
말이 통하지 않아도 표정과 몸짓으로 통화한다.
S♯42 샘길(××섬)
먼 샘에서 물을 길러 물동이에 이고 오는 미례.
들판에서 도리깨로 곡식을 타작하던 노부부 흐뭇해한다.
S♯43 들판(석양)
익숙한 솜씨로 도리깨질을 하는 미례. (M 음악 계속 흐른댜)
노부부가 하지 마라고 말려도 소용없다.
일손이 빨라지며 금방 하루해가 저문다.
미례, 노부부에게서 농기구 이름부터 원주민어를 하나씩 배운다.
S♯44 저녁 식사 시간
미례가 손수 지은 밥을 차려 노부부에게 드리고 그녀도 함께 먹는다.
미례가 만든 반찬이 맛있다고 칭찬하는 노부부.
원주민 노파(원주민어) “갈 곳이 없으면 언제까지나 우리 집에 머물러도 좋아요. 자식이 없어 쓸쓸했는데 색시가 있으니까 집 안에 사람 사는 것 같소.”
원주민 노인(원주민어) “그렇게 해요. 일본군이 없어졌으니까 색시를 괴롭힐 사람도 없어.”
미례 알아듣지 못하지만 손짓과 표정으로 대강 이해한다.
미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없이 절한다)
S♯45 미 군함 선실(저녁)
미국 그림책을 보며 ‘봉선화’ 노래를 흥얼거리는 옥영.
옥영 “두 시간 후면 부산에 도착하겠구나. 아이 좋아라!”
춘화 “난 하나도 안 좋다.”
하선 “난 통곡하고 싶어.”
반알몸으로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하선.
춘화는 하선의 국부에 정성들여 약을 발라 준다.
하선 아파서 낯을 찡그린다.
춘화 “조금만 참아. 전보다 많이 좋아졌는데.”
옥영(발끈해서) “썅! 내가 정말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 나도 울고 싶단 말이야. 씹할!”
춘화 “또 운다 또 울어. 저건 걸핏하면 눈물타령이야. 그 문드러진 육체에 어디서 그런 눈물이 나오는지. 난 눈물샘이 메말라서 흘릴 눈물도 없는데. 아, 가련한 이내 신세여!”
명자 턱을 괴고 멍히 앉아 있다가 살며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다.
하선 “어디 가 언니?”
명자 “오줌 싸러 간다.”
S♯46 동 군함 갑판
명자 갑판으로 올라와 살금살금 난간으로 걸어간다. 초병이 안 오는 곳이다.
북쪽을 향해 큰절을 하고 신발을 벗어 곱게 놔둔다.
동편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쳐다보고 하염없이 우는 명자.
난간을 부여잡고 울다가 다음 순간 바다로 휙 몸을 날린다.
S♯47 동 군함 선실
시간이 가도 돌아오지 않는 명자.
옥영 불길한 예감에 선실 밖으로 달려나간다.
S♯48 동 군함 갑판
옥영 “명자야! 명자야!”
부르며 명자를 찾는 옥영.
난간 아래 가지런히 놓인 명자의 신발을 발견하고 큰소리로 운다. 춘화와 하선 달려온다.
함께 소리내어 우는 세 여자.
옥영(명자의 신발 안고) “잠시 후면 부산항에 도착할 텐데, 꿈에 그리던 고국땅을 눈앞에 두고 왜 죽어 이 바보야……”
(F. O)
S♯49 옥영의 집 마당(낮)
김씨, 멍석에 말린 콩줄기를 막대기로 쳐서 타작한다.
콩알이 튀어 마당으로 떨어지면 닭들이 달려와 쪼아먹는다.
김씨 “후여!”
막대기로 닭들을 쫓고 콩알갱이를 모아 한곳에 담는다.
콩줄기에 남은 콩들을 다시 막대기로 탁탁탁 후려친다.
수확량이 그리 많지 않은 콩을 체로 까부는 김씨.
대문 밖에서 옥영이 그 광경을 담 너머로 숨어서 본다.
어머니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숨는 옥영.
김씨 고개를 갸웃하고 일을 계속한다.
S♯50 집 앞 골목
울면서 골목길 돌아 나오는 옥영.
지나가는 동네 어른을 보고 얼굴을 가린다. 김씨 집에서 나와 그 광경을 보고
김씨 “옥영아!”
달려와서 옥영을 끌안는다.
김씨 “아이고 내 새끼! 이게 꿈이냐 생시냐? 어디 내 딸 얼굴 좀 보자.”
고개 들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옥영.
김씨 “많이 컸구나. 시집간 색시같이 몰라보게 변했어.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
옥영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다.
S♯51 집 툇마루
옥영, 두 손을 이마에 대고 모친께 큰절을 한다.
김씨 “괜찮다. 절은 무슨 절!”
딸의 손을 잡아 앉히고 얼굴도 만져 보고 몸도 만진다.
옥영 “아버지는?”
김씨 “네 오빠가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전사했단 통지를 받고 화병이 나서 시름시름 앓던 중, 너까지 정신대로 끌려가자 다음해 극약을 먹고 자살하셨어. 나도 죽어야 하는데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모진 목숨 끊지 못했다. 네 아버지가 너를 봤으면……”
말을 못 잇고 우는 김씨.
옥영 “죄 많은 이 자식을 용서하세요.”
김씨 “집 떠난 것이 네 죄냐? 일본놈들이 죽일 놈들이지.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이제 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일본이 망하고 우리 나라가 해방됐으니 다시는 널 끌고가지 않겠지. 돈 벌어서 시집도 가고 좋은 신랑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네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꼭 봐야지. 아이고 내 새끼!”
딸 얼굴에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김씨 울다가도 싱글벙글 웃는다.
김씨 “내 딸이 돌아왔다고 온 동네 자랑해야겠다. 모두들 못 돌아온다고 하더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구나.”
옥영 “자식이 못 돌아와서 슬픔에 잠긴 집이 많을 텐데 자랑하지 마세요, 어머니.”
김씨 “그 말도 맞다. 우리 동네서 살아 돌아온 처자는 너 하나뿐이다. 한 열 집은 초상이 났을 거다. 해방이 되면 돌아올까 하고 부모들이 학수고대했는데 너 하나만 돌아왔어. 그러니 내가 안 기쁘겠니?”
김씨, 딸의 몸을 유심히 훑어보고 깜짝 놀란다.
목과 턱에 난 큰 흉터들.
김씨 “이것은 뭔 흉터냐?”
옷을 벗겨 보고 더욱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전신이 문신과 상처로 얼룩져 있다.
김씨 “아이고 이것이 웬 일이여? 살려서 보낸 줄 알았더니 다 죽여서 보냈구먼. 옥같이 귀한 내 자식을 산송장으로 만들었어!”
땅을 치고 대성통곡하는 김씨.
S♯52 큰방 안(밤)
함께 잠자리에 든 모녀.
밤 부엉새 소리가 부엉부엉 궁상맞게 들린다. (E)
김씨 “내일 떠나겠다니 무슨 말이냐?”
옥영 “여기서는 낯을 들고 살 수 없어요 어머니. 도시로 가서 취직 자리를 찾아야죠.”
김씨 “별소릴 다 한다. 누가 내 딸한테 손가락질 하노? 사지에서 죽지 않고 돌아온 장한 내 딸인데, 지옥에서 환생한 내 자식인데 누가 손가락질한단 말이니? 안 된다. 다시는 널 그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테여. 염라대왕과 약속했다.”
옥영 “어머니 마음 알아요. 전들 어머니 슬하를 떠나고 싶겠어요? 저도 이젠 성인이니 자립해야죠. 농촌에 묻혀 어머니 짐이 되느니 도시로 가서 돈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겠어요. 그때 어머니를 꼭 모시러 오겠어요.”
김씨 “그때까지 내가 살지도 의문이지만 널 보내고 내 마음이 편하겠니? 굶어도 같이 굶고 죽을 먹어도 에미와 함께 살자꾸나. 이 자식아.”
S♯53 작은방(아침)
방문이 열리고 옥영 들어온다.
오빠의 책상과 책이 그대로 놓여 있다.
대학 교복을 입은 늠름한 오빠의 사진도.
교복, 교모도 벽에 단정히 걸려 있다.
그 옆에 옥영의 작은 책상이 있다.
책꽂이에 꽂힌 자신의 책과 공책을 꺼내어 쓰다듬고 뺨에 부비는 옥영. 울컥 눈물이 치민다.
S♯54 고갯길(추상)
동무들과 재잘대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세 명의 여학생들. (M)
읍내 고여(여중)에 다니는 부잣집 딸들이다.
갈림길에서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걸어오는 옥영. 걸음을 빨리한다.
뒤에서 일본 순사차가 달려온다.
순사차를 보고 불안해지는 옥영.
옥영 걸음을 더 빨리한다. 옆의 오솔길로 달려간다.
차에서 내린 순사 두 명이 옥영을 붙잡아 우악스레 차로 끌고간다.
반항하는 옥영. 책보의 책이 풀어져 흩어지고, 순사들의 힘을 당할 수 없다.
순사차는 옥영을 싣고 달려간다.
S♯55 일본 헌병대
일본 헌병, 옥영을 끌고와서 창고에 집어넣는다.
S♯56 헌병대 창고 안
어둠 속에서 공포에 두리번거리는 옥영.
반짝이는 눈들이 옥영을 본다.
수많은 소녀, 처녀들이 창고에 가득 갇혀 있다.
밖에서 찻소리가 들린다. 창고문이 열리며 헌병이 소리친다.
일본 헌병(일본어) “모두 나와!”
떨면서 창고에서 나오는 여자들.
두 헌병이 여자들을 두 줄로 집합시킨다.
날카롭게 생긴 일본군 소위가 와서 여자들에게 을러댄다.
소위(일본어) “지금부터 너희들은 이 트럭을 타고 역까지 이동한다.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함경도에 있는 군수공장으로 가는 것이다. 거기에서 일을 잘하면 본국에 있는 큰공장에도 갈 수 있다. 지금 일손이 모자라서 우리는 너희들 같은 젊은 여성이 많이 필요하다. 도중에 소란 피우거나 반항하면 이렇게 총살시킬 테다!”
소위, 마당에서 모이를 먹고 있는 비둘기를 권총으로 탕 쏜다.
비둘기는 처참하게 죽는다.
소위(일본어) “그러니 도망칠 생각은 아예 하지 마. 살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야 해.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면 너희들에게 좋은 보상이 주어질 거다!”
헌병이 질서있게 트럭에 타라고 명령한다.
여자들 두 줄로 트럭에 오른다.
옥영 발을 헛딛고 트럭에서 떨어진다.
죽은 비둘기 위로 떨어져 옷이 피에 젖는다.
옥영의 소리(E) “살기 위해 난 쪽바리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근로정신대는 허울이고 일본 군인들의 정액받이. 내 몸을 능욕한 놈들의 숫자를 하나하나 세며 그 숫자만큼 일본은 망해 가는 거라고 믿었다. 백 번, 천 번, 만 번, 망하고 또 망해도 내 분은 풀리지 않는다. 나라가 식민지에서 해방되면 뭘하는가? 일본의 죄는 덮어지고, 억울하게 고혼이 된 내 형제들의 넋은 구천을 떠도는데……”
S♯57 작은방(현실)
옥영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전신을 와들와들 떤다.
김씨(E) “악아, 밥 먹어라!”
어머니 목소리에, 옥영 책과 공책을 책꽂이에 꽂고 일어선다.
S♯58 큰방 안(아침)
어머니와 마주앉은 밥상. 허연 열무김치와 젓갈과 된장국뿐.
김씨 “반찬은 없다만 많이 먹어라.”
옥영 “예.”
뼈만 앙상한 주름투성이 어머니 얼굴.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김치가 목에 걸려 캑캑거리는 옥영.
김씨가 등을 두드리고 물을 먹여 준다.
김씨 “반찬이 맛없어서 창자에서 거부하나 보다. 집 안에 있는 가축, 곡식, 쇠붙이 연장까지 모두 공출, 수탈당하고 사는 것 같지 않게 산다. 나는 그래도 밭뙈기가 있어 조밥이라도 안 굶고 먹는다만 그것도 못 먹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제 해방됐으니 더 나을까 몰라. 일본이 망해도 착취의 후유증은 오래 갈 게다. 오래 갈 게여.”
옥영 “백 마지기가 넘은 우리 논밭은?”
김씨 “이 이유 저 이유로 일본놈과 그 하수인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골창에 천수답하고 밭뙈기 하나만 남았어. 그것도 이장이 면장한테 사정해서 지켜 준 거야. 이 넓은 집에 머슴도 없이 나 혼자 살려니 힘들고 적적해 못 살겠다. 이 집을 팔고 더 작은 집으로 이사가야지. 하긴 팔려고 내놔도 얼른 살 사람이 없겠지만.”
옥영 “어머니, 팔지 마세요. 아버지의 혼이 깃든 집이예요.”
김씨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안 팔지.”
옥영 “죄송해요 어머니.”
밥 수저를 놓고 울며 밖으로 나가는 옥영.
S♯59 뒤뜰 감나무 밑
옥영, 감나무를 부여잡고 울다가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를 쳐다본다.
오빠 홍시 따 줘. 홍시 어디 있냐? 저기 있다 저기 저기! 아 맛있다 냠냠냠. 너만 먹지 말고 나도 좀 줘 이 욕심쟁이야. 싫어 나 혼자 먹을 테야 날 잡아 봐라 용용 죽겠지? 천진스런 오뉘의 목소리가 들린다. (E)
옥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돈다. 그러다 흑 흐느껴운다.
S♯60 집 툇마루
보자기에 옷과 떡을 싸 주면서,
김씨 “어릴 때 입던 옷이라 작겠지만 버리지 말고 옷집에 가서 키워 입어라. 속옷도 버리지 마. 모두 내 손으로 길쌈하거나 비싼 돈 주고 산 거니까.”
옥영 “어머니, 떡은 동네분들과 함께 잡수세요.”
김씨 “너 주려고 한 거야. 짐이 돼도 갖고 가서 먹어라. 기차 타고 여행하려면 배고플 거야. 새벽에 방앗간에 가서 사정해서 빻아 만든 거야. 오늘 아침이 네 생일인 줄은 아니?”
옥영 “알고 있어요.”
김씨 “네 부친 제사땐 잊지 말고 꼭 와. 너라도 있어야 내가 덜 외롭지.”
옥영 “예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김씨 “다 됐다. 그리고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노자에 보태라.”
돈 몇 푼을 딸 손에 쥐어준다.
옥영 “돈도 없을 텐데.”
김씨 “아무리 없어도 돈 빌릴 곳은 있대잖니? 내 자식, 그 많은 고생을 하고 또 고생하러 간다니 에미 속이 아프다. 그런다고 붙잡으면 뭘하니? 대처에 가서 몸 건강하고 크게 성공해라.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해. 오늘도 내일도 천지신명께 내 딸 잘 되라고 빌 거야.” (눈물 훔친다)
옥영, 울며 어머니에게 이별의 큰절을 올리고, 보따리를 안고 대문으로 달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