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前 추억의 방송대 졸업앨범을 넘기며 오늘은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방송대졸업앨범을 보게 되었다 앨범을 뒤져보니 옛 추억이 새롭게 떠올라 카메라 앵글에 담아 사진 몇 장을 올려본다. 방송대 사정이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다닐 때는 학생들이 대부분 직장을 다니며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7년 만인 1986년도에 스물일곱(27)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학하여 1991년 서른둘(32)에 졸업하였다. 당시는 방송대가 4년제가 아니라 5년제의 대학이었다. 5년제인 이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경야독을 하다 보니 4년 만에 정규과정을 마치가가 버거워 그렇게 배려를 하지 않았나 싶다. 【아래 그림】책장 속에서 찾아낸 앨범 먼저 먼지를 닦아내고 딤카로 담아본다. 지금도 앨범을 이렇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아래 그림】아! 옛날이어! 다시 돌아올 수 없나 그날 옛날이어! 나에게도 저런 꽃미남 시절이 있어나 싶다.
【아래 그림】31년 전 우리는 이렇게 입학을 했다. 당시에는 바쁘고 입학식을 하는 줄도 몰라 참석도 못했다. 【아래 그림】금년이 졸업 25주년이다. 졸업앨범을 열어보니 당시 교수 분들의 사진이 제일 먼저 들어온다. 이 분들이 지금도 학교에 계신지 모르겠다. 【아래 그림】졸업앨범 속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보며 우측사진 맨 아래 좌측에서 두 번째가 나의 모습이다. 왼편 사진 속의 교정은 방송대가 아니라 성균관대 교정이다. 당시 방송대불어과는 출석수업을 성대에서 실시하였고 사실 방송대는 변변한 교정이 없어 저 그림을 넣지 않았나 싶다
【아래 그림】함께 공부했던 동창들의 모습 방송대가 원격 교육을 하는 학교라지만 한 학기에 1주일간 실시하는 출석수업을 5년 동안 최소한 10번 이상을 함께 받아 낯익은 얼굴들이지만 서로 대화 한번 안 해본 분들도 많다. 【아래 그림】졸업한지가 25년이 흘렀으면 빛바랜 앨범이란 표현을 쓸 법도 한데 컬러사진이라 빛바랜 앨범이 아니라 금년에 졸업한 앨범처럼 화려하다. 【아래 그림】멋쟁이 사각모자를 벗고 나니 나의 시원한 앞이마가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위에서 셋째 줄 맨 우측이 나의 모습이다. 【아래 그림】불어과에서 개최한 각종 행사인 것 같은데 참석하질 않아서 그런지 기억에 없다. 【아래 그림】졸업여행 사진 같은데 이 그림속에서도 나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아래 그림】샹송반 행사 사진 속에서 기타를 치는 친구가 정종식이란 친구로 불어과 학생회장도 했던 친구다.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 했다. “La Novia"란 노래를 멋지게 잘 불러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래 그림】지역별 학생회 활동 모습 【아래 그림】지역별 학생회 활동 모습 【아래 그림】5년 동안 열심히 주경야독 후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들고 금년이 졸업 25주년이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그립고 보고도 싶다. 그런데 아쉽게도 방송대 불어과 86학번 친구들은 동창회가 없다. 【아래 그림】방송대 졸업생들은 대부분 힘들게 주경야독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일상이 바쁘고 삶이 버겁고 힘겨워서 그런지 졸업 후 동창 상호간 우정과 친교를 다지기 위한 모임이 없는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우연히 낮선 거리에서 만나도 모르고 지나쳐 버릴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서로들 모습은 변했어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나간 추억들을 되새겨 볼만도 한데 말이다. 【아래 그림】방송대 졸업 후 나의 도전(The Road Not Taken)은 계속되고 나는 방송대를 졸업한 후 그 당시 나에게 남아 있는 향학열을 마저 불태우기 위하여 “성균관대무역대학원” 이라는 전문대학원에 도전한다. 나는 1991년 도전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자랑스러운 방송대 출신답게 입학시험(영어시험와 면접)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당시 입학등록금의 약 50%에 해당되는 86만의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금은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자 어느 날 조교가 불러 사무실로 가보니 “당신이 학기 초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며 당시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자기앞수표 860,000원짜리 건너 주었다. 그날은 나의 생의 많은 날 중 내가 매우 기뻤던 날들 중 하루로 기억되고 있다 그 후에도 나의 도전을 계속 이어져 다시 한 번 CPA(미국공인회계사)에 도전하여 결국 꿈을 이루어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올리는 이유는 혹시 이글을 읽게 되는 방송대에 다니는 분들이 계시면 후배 여러분께서도 방송대 졸업에 만족하지 마시도 끝없는 도전의 길(The Road Not Taken)에 나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글을 올립니다. 내가 경험해 보니 어떤 사람들은 방송대 졸업한 것은 숨기며 대학원 다닌 것만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방송대 다닌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고 항상 떳떳하게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래 그림】이번에도 대학원 졸업앨범을 뒤적이며 하나 하나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내가 1991년도 대학원에 입학했으니 1993년도에 졸업을 했어야 하는데 앨범을 보니 1995년도 졸업이다.
나는 1991년도 대학원 1학년 1,2학기를 마치고 1992년 초 은행에서 책임자로 승격하는 영광과 함께 전북 군산이라는 격지에 있는 지점에 발령을 받아 지방 근무를 하다 보니 1년 휴학을 하였고 중간에 은행에서 베트남 유학을 보내주어 공부하러 가느라 또 1년을 휴학하다 보니 남들보다 2년 늦게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래 그림】25년 전 우리는 이렇게 입학을 하였다. 사진이 당시 신입생 환영행사 같은데 당시 직장일로 바쁘다보니 참석도 못했다. 【아래 그림】당시 성대무역대학원에는 경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이 많이 계셨다.
김태동 교수님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과 한국금융학회 회장도 지내신 분이다. 이재웅 교수님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과 한국금융학회 회장을 지내셨다.
【아래 그림】당시 대학원에서 개최한 무역인의 밤 행사인 것 같은데 나는 참석하질 않아서 그런지 기억에 없다. 지금 생각하니 바쁘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게 지금은 후회스럽기도 하다 【아래 그림】졸업앨범 속에서 나의 모습 좌측사진 위에 있는 그림이 나의 모습이다. 방송대 졸업 후 4년의 세월이 더 흘러서 그런지 이마도 더 넓어지고 나의 모습도 중후해진 것 같다.
【아래 그림】나의 졸업 논문
우리나라는 대학원에서 졸업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졸업논문을 작성해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MBA(경영학석사)과정 같은 경우에는 학기 중에 많은 Project를 과제로 수행하기 때문에 졸업학위를 받기위해 별도로 졸업논문을 제출하지는 않는다. 【아래 그림】나의 졸업 논문은 “재무비율을 이용한 기업부실예측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무역대학원 논문이라기보다는 경영대학원 논문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문대학원에서는 졸업논문 주제에 대하여 특별히 제한을 두지는 않는 것 같다. 【아래 그림】졸업사진인데 사진 속에 나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아래 그림】학위 수여식 장면인데 여기에도 나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 것 같다. 【아래 그림】열심히 주경야독 후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들고
나는 당시 직장에서 군산으로 발령이 나서 학교를 다닐 수 가 없어 1년간 휴학을 하였으나 학교 규정상 1년 이상은 휴학을 할 수 없어 나는 다음 한 학기를 등록하여 전라북도 군산에서 서울 명륜동까지 1주일에 두 번씩 수업에 참여하였다.
수업이 끝나면 야간 마지막 열차를 타고 익산으로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군산으로 돌아가는 힘든 일과였다.
그 당시 어느 날인가는 수업이 끝나고 같이 공부하던 학우들과 늦은 시간에 저녁을 겸해서 소주 한잔 하다 보니 금세 12시가 넘어 대중교통수단이 끊어졌다.
그래서 서울역으로 가서 멀리 지방을 운행하던 야간택시를 이용하였다. 이 택시는 승객이 4명이 타야 출발을 한다. 그러다 보면 수원으로 가는 승객, 천안으로 가는 승객, 대전으로 가는 승객, 군산으로 가는 나 이렇게 4명이 늦은 시간에 서울역을 출발한다.
가다가 도착지에 한 명씩 내려주고 나면 마지막으로 제일 멀리 가는 나만 남는다. 그러면 나는 의자를 뒤로 밀치고 잠을 청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면서 나를 태운 택시가 군산으로 들어선다. 그러면 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 아침 먹고 은행으로 향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게 뭔가 싶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나의 지칠 줄 모르는 배움에 대한 향학열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였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아래 그림】호치민대학 문과대학에서 나의 모습
대학원 재학 중 1994년도에 나는 은행에서 베트남 유학생으로 선발된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은행에서는 베트남지점에 보낼 직원을 선발하여 미리 현지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당시 베트남 호치민대학(과거 사이공대학)에 가서 베트남 언어와 현지 문화에 대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전쟁 후 개방된 지 얼마 되질 않아서 도시나 주변 환경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열악하였다.
그런데 왜 베트남을 지원했냐구요? 내가 불어를 전공한 인연(베트남이 과거 불란서 식민지)도 일부 작용을 했고 또 하나는 내가 은행에서 아무리 영어시험을 잘 봐도 고졸자란 한계 때문에 미국이나 영국 같은 곳을 지원하면 가기가 쉽질 않을 것 같아서 남들이 기피하는 오지를 선택하였다.
【아래 그림】호치민대학교 문과대학 주차장에 세워 놓은 오토바이
당시 베트남의 주요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전부였다
【아래 그림】당시 우리를 전담해서 베트남어를 지도해 주시던 선생님
중국어에는 소리의 높낮이로 성조가 4성조다. 그런데 베트남어에는 성조가 6성조라 발음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배우기가 만만치 않다. 【아래 그림】그곳에도 스승의 날은 있었다. 당시 함께 공부하러 갔던 동료직원과 함께 【아래 그림】당시 교실은 사진 속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경이 매우 열악하여 대학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시골 초등학교만도 못했다. 【아래 그림】스승의 날 행사인지 선생님 생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칠판에 “Chuck mung” 이라 쓴 것을 보니 축하는 날은 맞는 것 같다.
환경이 열악한 나라로 가다 보니 유학이라기보다는 고생하러 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우리가 선진국이야 어느 때고 갈 수 있지만 후진국은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시간은 뒤로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당시 베트남 여행 중 방문한 베트남 최고의 여행지 하롱베이 하롱베이는 베트남 최고의 명승지 중 한 곳이다. 중국 국경 근처에 위치한 하롱베이는 1,970여 개 기암괴석이 볼거리다. 하롱은 ‘용이 내려온 자리’라는 뜻인데 한자로 ‘하룡(下徿)’으로 쓴다. 【아래 그림】당시 공부하던 베트남 영어사전 우리는 영한사전인데 그곳에서는 영베사전이다. 【아래 그림】또 다른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나는 학교 다닐 때 상업이나 부기란 과목을 수강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CPA(미국공인회계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어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박사과정을 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내가 학자가 될 사람도 아닌데 박사과정은 왠지 나에게 사치스러워 보여 자격증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아래 그림】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제일 두려웠던 것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어렵게 방송대를 마치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나름대로 내가 가졌던 조그만 자신감이 이번 도전으로 실패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과 그로 인하여 내가 느끼게 될 상실감이 제일 두려웠다.
【아래 그림】그러나 2년 반 동안 직장과 학원을 오가며 주경야독을 한 결과 좋은 결실을 맺게 되어 다행이다
문장이 “We congratulate you on passing all sections of the Uniform CPA Examination”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합격인 것 같다. 그리고 Certificate(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윤리시험을 치르라고 씌어있다.
【아래 그림】드디어 윤리시험을 치르고 받은 CPA자격증
CPA(미국공인회계사) 시험은 우리나라에서 치르는 게 아니라 미국영토에서 치러야 하기 때문에 미국이나, 괌, 사이판, 하와이 등으로 비행기 타고 날아가는 비용이 부담되기 때문에 비싼 게 흠이다.
이틀 동안 오전에 4시간 반, 오후에 4시간 반 총 약 18시간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건강관리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아래 그림】속된 말로 나는 어느 정도 Spec을 쌓고 나서부터 최근 15년 동안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민족종교, 무교, 샤머니즘, 풍수, 관상 등 다양한 종교관련 서적과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주역, 노자, 장자 등 수많은 동양철학 관련 서적들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상고사와 관련된 수많은 역사 서적들을 읽으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찾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래 그림】그리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시골동네 친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생 친구들을 만나며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시골 동네(관촌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어느 날 【아래 그림】아래 사진은 내가 익산으로 전학을 와서 함께 공부했던 이리초등학교 동창생 친구들과 함께 【아래 그림】아래 사진은 이리남중학교 동창생 친구들과 함께 【아래 그림】아래 사진은 전라고등학교 동창생 친구들과 함께 【마치면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엘 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늦깎이로 방송대에 들어와 시작한 공부가 나로 하여금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며 나름대로 많은 것을 이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송대가 나의 향학열에 단초가 되어준 것 같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 방송대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고졸이라는 학력의 콤플렉스를 가슴에 한으로 남기고 살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방송대가 있어 나의 삶은 풍요로웠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CPA도전을 마친 후부터는 우리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나침반과 같은 종교관련(성경/불경/코란 등) 서적이나 그동안 내가 소홀했던 자연과학분야의 책들을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여행을 하면서 내가 느껴보지 못한 우리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유람하면서 사진에 담아 글을 올리곤 한다. 그러나 세월과 맞서며 도전에 도전을 하였지만 나도 쉰일곱이라는 나이에 이르고 보니 지난해 연말에 37년 다니던 은행을 퇴직하게 되었다 은행을 퇴직하고 나니 걱정스럽고 불안하기도 하다. 아직은 일하고 싶은 나이이고 할 일도 많은데 말이다. 그래도 어쩌라 인생 이모작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는 또 다시 내 삶을 위한 새로운 도전(The Road Not Taken)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이런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C'est la Vie 이화구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