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김씨와 그의 딸 경아"
‘아빠가 입으면 좋겠다. 아빠는 초록색을 좋아하는데…' 재활용품들을 분류해 놓은 아파트 경비실 뒤에서 여섯 살 경아가 두툼한 낡은 점퍼 하나를 손에 들고 아빠 얼굴을 떠 올립니다. 경아는 엄마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경아가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엄마는 차마 감을 수 없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신부전증으로 인한 합병증이 악화되어서… 그래서 경아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풍선처럼 부푼 얼굴이 전부입니다.“얘야, 아직 멀었니? 곧 교대할 시간인데….” 경비 할아버지의 재촉하는 소리에 경아는 아빠에게 드릴 낡은 점퍼와 할머니에게 드릴 빨간 플라스틱 소쿠리 하나를 주섬주섬 챙겨 일어섰습니다.
딱한 사정을 아는 경비 할아버지가 자기 근무 시간에 쓸 만한 것들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아직 가을이라지만 바람 끝이 겨울바람처럼 매서운 이른 새벽에, 김씨는 인력시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을 사 줄 사람을 기다립니다. “어이, 아저씨. 이리 좀 와 보슈!” 날이 훤히 밝을 때 쯤 시커먼 봉고차 한 대가 다가와 김씨를 불러 세우지만, “뭐야, 다리를 저는 거요? 에이….” 불편한 걸음걸이를 보고 봉고차는 김씨가 다가가기도 전에 자리를 뜹니다.
두 달쯤 전에 폐자재 위로 솟은 쇠못을 잘못 밟아 발은 크게 다친 뒤부터는 허탕 치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한참 뒤,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배를 채운 김씨는 오늘도 아픈 다리를 끌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깁니다.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죄송하지만 이미 다 구했습니다.” ‘아르바이트 구함’이라는 쪽지를 뒤로하고 주유소를 빠져 나옵니다.
“그 다리로 배달을 할 수 있겠어요? 쌩쌩하게 뛰어도 시원찮은데…” 치킨집 아주머니는 아래 위를 훑어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버립니다. 그리고는 들으란 듯이 문을 나서는 김씨 뒷전에 대고 한 마디를 보탭니다. “에이, 재수 없게… 아침부터…!” 하지만 그보다 더한 말도 많이 들은지라 김씨는 동요하지 않습니다. 아픈 다리가 저려와 잠시 앉아 식은땀을 훔치던 김씨가 다시 걸음을 옮긴 것은 횡단보도 옆에 놓인 빨간 우체통 때문입니다.
김씨는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편지 한 통을 꺼내 들고는 한 동안 멍하니 편지와 하늘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발신인의 주소가 쓰여 있지 않은 그 편지는 경아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경아야, 아빠 보고 싶어도 참아야 돼! 우리 경아, 유치원도 보내고, 학교도 다니게 하려면 말이야….”하며 서울로 올라온 2년 전부터 매달 꼬박 꼬박 보내던 편지 이지만 이번에는 석 달이 더 걸렸습니다.
김씨는 지방에서 제법 규모가 큰 회사에 다니던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얼굴과 손발이 고무장갑처럼 부풀어 오른 아내가 부엌에서 정신을 잃던 날, 김씨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허망하게 떠나갔습니다. 병실에서, 아내의 두툼한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한지 꼭 백 일이 되던 날 새벽에 경아와 자신을 남겨 두고 그렇게 아내는 먼 길을 떠나 버렸습니다.
자신의 신장이 아내에게 맞기만 했더라면, 어렵게 찾은 신장의 이식 수술이 간절한 그의 마음만큼 잘 되었더라면 지금의 김씨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퇴직금만으로는 아내의 치료비가 턱없이 부족했기에 김씨는 여기저기 빚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딸을 늙은 노모에게 맡기고 올라온 서울이 김씨 마음처럼 녹녹치 않았습니다. 힘들게 구한 공장도 유가 폭등과 값싼 중국산 때문에 문을 닫았고, 마트의 비정규직 자리도 IMF때 보다 더 줄어든 소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인원 감축을 당했습니다,
건설 경기마저 죽어 있어 막노동조차 힘들어진 김씨에게는 낡은 고시원의 월세와 컵라면 값도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지하철로 잠자리를 옮겨야 겠어….’ 김씨는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속으로 흐느낍니다. 경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김씨지만 그런 김씨도 어쩌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환하게 웃는 경아 또래의 아이들입니다.
오늘처럼 경아가 보고 싶은 날에는, 오늘처럼 아내가 보고 싶은 날에는…. 재잘거리는 노란 유치원 버스가 시야에서 멀어진 뒤에도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신호등 뒤에 쪼그리고 앉아 경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소리 내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깨물며 흐느낍니다. ‘경아야, 경아야…. 아빠가 밉지? 우리 경아… 유치원 다녀야 되는데….’ 상처가 곪아,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모른 채, 김씨가 마른 어깨를 들썩입니다.
경아가 굽이 떨어진 구두 하나를 안고 작은 어깨를 들썩입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그 아파트 경비실 뒤에서 경아가 흐느낍니다. 풍선처럼 발이 부풀기 전에 엄마가 신었던 구두와 꼭 닮은 구두를 가슴에 안고, 여섯 살 경아가 소리 내어 흐느낍니다. “엄마, 엄마….”
며칠 전에 본 현수막의 글귀가 생각나 짧은 글을 써 보았습니다. ‘주거 지역에 고시원이 웬 말이야!’ ‘결사 반대! - oo아파트 부녀회 일동’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은 행여 생길지도 모를 범죄가 두려워 반대합니다. 고시원에서 잠을 자는 분들은 행여 찬바람 속으로 내몰릴까 싶어, 그러면 간절함 마저, 희망마저 잃을까 싶어 벽에 붙은 현수막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고운 낙엽이 찬바람에 스러집니다. 조금씩 가지를 드러내는 나무를 바라보다, 조금씩 추워지는 날씨를 염려하다가 문득 현수막의 글이 떠올라, 어렵더라도 더 힘든 이들에게 마음을 열자는 취지의 글을 회원님들께 올리려다, 난데없이 짧은 글을 지어서 썼습니다. 가까운 곳에 김씨가 있을 겁니다. 어려울 때라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릅니다. 지하철역에도, 공원에도, 공사장에도, 걷는 사람들 속에도 김씨가 있을 겁니다.
이 낙엽들 다 지기도 전에 금방 추운 겨울이 닥칠 겁니다. 김씨는 또 꿈을 꾸겠지요. 바람조차 가리기 버거운 종이박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절박한 꿈을 꾸겠지요. 경아를 만나고, 경아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가는 꿈을 꾸겠지요. 그런 김씨를 만나게 되면 손이라도 잡아 줍시다. 저도 꼭 그러겠습니다.(좋은 글 중에서)
첫댓글 너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