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가수 데뷔 30주년을 맞은 태진아(49)는 2002년초 발표한 신보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가 극심한 불황인데도 10만장 돌파를 예감한다며 스스로 “아, 대박이에요”라거나 “나이든 god"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질쏘냐. 송대관(50)은 2001년에 MBC 10대 가요제에서 ‘30세 이상 국민이 뽑은 가수’에 선정되었고 대중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문화훈장을 받는 겹경사를 치루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 모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성인 가요로 송대관의 ‘네박자’가 꼽혔다는 보도도 있었다.
가만히 있지 못할 가수는 또 있다. 현철(53)은 지난 83년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히트시키면서 15년 무명 가수의 설움을 딛고 지금까지 20여년 간 줄곧 ‘트로트 3대 천황’의 맏형 소리를 들어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태진아, 송대관, 현철, 이렇게 세 사람을 한 무대에 올려놓고 보면 그 옆에 뻘쭘하게 서있을 것 같은 또 한명의 트로트 가수가 떠오른다. 설운도(43)다. 데뷔 20주년을 넘긴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중 단연 돋보이는 말은 ‘트로트 왕자’다. 이쯤이면, 천황이 무려 세 명이고 왕자가 한 명이나 되는데, 당장 텔레비전을 켜도 확인할 수 있는 이들의 건재를 보고 있노라면, 트로트는 지금 지난 50년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제 값을 하면서 누려야 할 영광을 구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노래평론가 이영미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텔레비전을 켜고 트로트 가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니 트로트는 종말을 고했다고. 이게 왠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저렇게 건재하고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말이다. 당혹스러운 분들은 이제부터 그 전말을 함께 살펴보자. 트로트에 관해서는 가장 대중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핵심을 짚으며 비평 작업을 해온 이영미씨의 주장에 귀 기울여보기를 바란다. 나는 먼저 그가 쓴 ‘한국 대중가요사’(시공사)와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황금가지) 두 권에 쓰여있는 트로트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위의 ‘트로트 3대 천황’과 ‘트로트 왕자’에게 적용해볼 수 있는 다음 세 가지 전제를 내 식대로 추려보았다.
1. 음악 정의 : 트로트는 단조 5음계의 선율에 쿵짝쿵짝 하는 리듬을 사용하여 꺽는 창법으로 노래하는 우리 사회의 대중음악 유형이다. 물론 장조도 있고 다른 음악 장르의 요소가 섞여 들어오기도 하지만 전형은 단조 5음계의 쿵짝쿵짝 리듬이다. 이런 음악이 처음 유입되었을 때에는 그냥 유행가로 불리웠을 텐데, 언제부턴가 쿵짝쿵짝 리듬을 빗대어 ‘뽕짝’이라고 비하해서 불렀고, 또 언제부턴가 쿵짝대는 리듬이 비슷해서인지 서양의 춤곡 장르 이름인 트로트를 그대로 빌려와 대신 쓰고 있다.
2. 역사 변천 : 트로트는 일제 시대에 도입되어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까지 당시의 대중가요였던 민요와 경쟁하는 신문화의 유행가였고 개화기의 지식인들이 선호했다. 이후 트로트는 60년대에 본격적인 황금기와 대중화를 맞았고, 70년대에 이르면 타 장르와 뒤섞이는 다양한 변신을 선보이며 서민 계층의 일상을 노래하는 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을 넘기면 트로트는 이미 고유의 맛을 완전히 잃어버리면서 단순 유치한 오락으로 전락했고, 90년대는 그 종착역이었다.
3. 스타 계보 : 이애리수, 이난영, 고복수, 남인수 등 1세대를 지나서 60년대엔 이미자와 배호라는 불세출의 남녀 스타를 배출했고, 70년대엔 남진-나훈아의 경쟁과 더불어 트트로 고고(록과의 결합)나 트로트+포크와 같은 교배 실험에서도 조용필이나 송창식 같은 걸출한 가수가 등장한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한편으로는 주현미가 연말 가수왕상을 해마다 휩쓸면서, 또 한편으로는 텔레비전에서 ‘3대 천황’이 회자되는 시기부터 90년대 내내 트로트는 스타다운 스타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영미씨는 80년대 중반 이후 트로트가 음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전환점을 84년 주현미의 ‘쌍쌍파티’에서 찾는다. 첫째 하나의 노래 작품이 갖는 독자적 성격이 아니라 동일한 빠르기와 동일한 리듬이 끝없이 반복되는 패턴으로 트로트를 대체했다는 것. 둘째 트로트가 갖고 있던 단조의 비극적 정서를 장조의 (해학이라고는 없는) 고조된 기분으로 바꿈으로써 트로트가 성인의 향락 가무를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해졌다는 것. 셋째 트로트 특유의 꺾는 창법에서 애잔함을 제거하고 기계적이고 기교적인 질감만 강조한 창법을 정착시켰다는 것 등등. 이후 ‘3대 천황’과 ‘왕자’가 선보여온 트로트의 세계는 주현미가 터닝 포인트를 찍은 이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십수년 이상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송대관의 경우 76년 그의 첫 히트작인 ‘해뜰날’에 대해서 이영미씨는 “하도 절제감이 없어서 당혹스러운 노래”라며 이미 그 시기부터 트로트의 정체성 위기를 진단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차표 한장’과 ‘정때문에’에 이어 그의 문제작 ‘네박자’까지 모두 같이 묶고 싶다. 음악도 가사도 그저 발랄하고 상쾌하게 시종일관 붕붕 허공을 날아다닐 뿐이다. 특히 ‘네박자’의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쿵짝쿵짜자쿵짝”하는 대목에서는 이미 노래의 경지를 벗어나 지극지순한 단순미를 달리고 있어서 뭐라 덧붙일 말이 없을 뿐이다. 성인용 응원가 또는 같이 흥겹게 웃기 위한 즉흥 노래 한 소절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현철의 꺽는 창법은 이미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때부터 기교 위주였으나 최근에 이르면 이를수록 더욱더 감정이나 정서의 전달 없는 기교의 반복으로 일관하고 있다. ‘봉선화연정, ‘싫다싫어’, ‘사랑은 나비인가봐’, ‘내마음 불질러 놓고’ 등 예전이나 최근의 히트작들을 비교해봐도 세월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기는 흔적은커녕 정말이지 거기에서 바로 또 거기다.
태진아의 경우 ‘옥경이’부터 ‘노란 손수건’을 거쳐 ‘거울도 안보는 여자’와 2년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에 이어 이번 신보의 ‘사랑은 장난이 아냐’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트로트를 가장 폭넓게 모든 장르에 덮씌우기 하거나 아니면 역으로 트로트 아닌 음악들을 트로트처럼 포장하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냐’는 그냥 디스코라고 하면 될텐데…, 이 방면으로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를 자랑하는 설운도 역시 만만치 않다. 데뷔곡 ‘잃어버린 30년’의 신파조 설움을 빼면 ‘다함께 차차차’, ‘쌈바의 여인’,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여자여자’ 등 그의 유쾌한 히트작 줄줄이 트로트라고 불러야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14번째 음반의 타이틀곡 ‘애인이 되주세요’는 로큰롤 풍의 배경음악을 깔고서 가늘게 떨어주는 트로트 기교로 부르는 한 소절 반복 노래라고 하면 된다. 이 두 가수의 경우 대개의 노래는 음악의 구성이라는 면보다는 우리네 입에 착 달라붙는 말 맛과 재치를 살려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오선지에 옮겨 놓은 것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쯤에 이르러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트로트를 트로트답게 해주었던 요소들이 모두 탈각되어 더 이상 굳이 트로트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없어진 노래와 가수들에게 여전히 트로트라고 이름 붙이고 ‘천황’이니 ‘왕자’니 하는 헌사까지 받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나름대로 이유를 붙여보면 이렇다. 이제는 완전히 하향길로 접어든 아이돌 댄스 음악이 그랬듯이 트로트 또한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까지 누구나 손쉽게 즉석에서 한번 듣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오락용 한소절 흥얼대기가 되어서 가사 몇 줄과 음 몇 개만 달랑 바꾼 채 무한정 반복 소비될 뿐인데, 이런 종류의 상품에도 붙여줄 이름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이유. 그렇다면 트로트는 음악적 정의와 상관없이 그냥 성인 댄스용 보조 음악? 당신은 동의하는가? 아니면 당신은 지금 술자리에서 한번 불러 제끼거나 시간 죽이기 용도로 한번 듣고 내다버려도 그만인 트로트에 뭘 더 바라냐고 나한테 되묻고 있는 건가?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렇게 덮고 가기엔 트로트의 찬란했던 과거가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트로트라고 이름 붙여 행해지는 작금의 행태가 ‘이건 해도해도 너무해’ 하는 트로트식의 탄식을 저절로 자아내게 하기 때문이다.
이영미씨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한다. “내용적으로는 완연히 종말이지만… 90년대 트로트는 말맛과 익숙함으로 산다”고. 놀라울 뿐이다. 지식인의 신유행에서, 도시 서민 및 여성의 감수성과 교감하면서, 그리고 성인 하층민까지 아우르는 노래로 대중화되면서 트로트는 지난 50여년의 역사적 사명을 다해왔다. 모든 문화는 충격으로 시작되어 스타일을 확립하고는 매너리즘으로 빠지면서 소멸한다. 트로트도 마찬가지다. 가능하다면 ‘3대 천황’과 ‘왕자’가 스스로 트로트 타이틀을 반납하던가,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다. 아니면, 트로트는 그냥 지금처럼 ‘타임 킬링’용으로 있던가. ‘3대 천황’과 ‘왕자’가 그 이름 아래 죽이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