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 산행지 중국 산동성 영성시 남부해안
1.(석도) 철차산, 적산(540m),
2.(태안)태산(1,545m),
3. (청도)노산(1,333m)
4.(연태)탑산
(1일) 2005.2.18
인천 국제선터미날 오후5시 예약 실제로 출항7시40분 (05.2.18)(화동페리호)
중국 석도항도착 다음날오전 8시도착 11시간 (석도항)
(2일)2005.2.19.
◈석도
인천에서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중국에서 조그마한도시 한국 으로는
면단위정도 행정구역으로는 산동성 에속해있고 한국에 여객선이오고가며
요즈음 (해신)방송대면서 한국인 관광객 유치하기 위함이 곳곳에서 엿볼수있었음
대단수가 어업에 종사하며 70%수출한다고함
돌이많아 국내에 건설용 대리석이 이곳에서 수입한다구함
◈.구정 철차산.(석도) (540m),
석도에있는 철차산 해상왕 장보고 동상과 유물 전시하고 있었으며
개발하기위해 아직 공사중 대부분이였다
철차산에서 등산연합회 임원들과함께
해상왕 장보고동상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장보고 엄청 부각시키고 있었음
철차산은 높지않은 야산이지만 바다을 내려다보면서 석도항을 잘 보살펴주는듯한 느낌을...
장보고 동상이 모셔있는 곳
우리에 면단위 정도 한국페리호을 운행하는것은 인천항이 가장 가까운곳이 여서인듯함,,
김영삼 대통령당시 장보고 기념탑을 철차산에 세워놓음..
◈◈
(참고 문헌 퍼옴)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
장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만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생애에 관한 기록은 희소하고 그것도 분명치가 않다.
우선, 장보고를 부르는 이름은 우리측 기록에는 궁복(弓福),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로
되어 있고, 중국측 기록은 모두 장보고(張保皐), 일본에서는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있다. 당시 신라 관습상 평민은 성(姓)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 궁복의 '궁'자와 비슷한 장씨라는 성(姓)을 갖게 된 것이고, '보고'라는 이름은 '복 (福)'의 음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문성왕(文聖王 839~856)의 차비로
장보고의 딸을 맞이하려 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섬사람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그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오늘날의 완도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해상왕국의 근거지를 하필 이면 청해진에 설치하였던가 하는 점이며, 둘째로 자기보다 10세 가량 어린 동향(同鄕)
후배 정년(鄭年)이 뒷날 당나라에서 실직하여 사주(泗州)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고 있다가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면서 청해진으로 돌아오고 있는 점을 들어 볼 수 있기 때 문이다.
청년으로 성장한 장보고는, 정년과 함께, 풍운의 꿈을 안고 당으로 건너가서 30세 쯤에 서주 (徐州)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라는 군직(軍職)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805년에 처음 생겼다고 하니,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 시기는 아무리 빨라 도 805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겠고, 그가 당에 건너간 시기는 일단 805년 전후였을 것 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신라에 귀국한 시점이 828년이었으므로, 그의 재당
(在唐) 기간은 9세기초 20여년간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적산
철차산에서 1시간 거리에 있으며 산 5부등선 이상은 전체가 바위와 도로 이루어져 있고
산높이나 등산로 지도는 전무한상태 산전체을 능선을 등산한다면 7시간정도
적산
눈길에 눈발이 휘날리맞으며 임도을 따라 적산을 오르는 연맹 임원들..
버스가 미끄러져 오르기어려워 세워두고 주차장에서 ,,,,
적산 관리소 무척 반겨주셨다 현지 사장님
바위에 빙벽에 어려움이 있었다..
녹았다 다시언 요걸 무어라 해야하나 상고대도 아니고 ,,,,
적산에 일송,,,
산을 아래는 대부분 해변,,,
빙벽 이여서 장비없이 무리라해서 사진으로만 보는 산..
하산해서 北쪽 주차장에서,,
적산은 곳곳에 공자,맹자.노자. 을 숭배하는 글귀,샘. 굴.많으나 종교적 의미가
많아 아쉬움이 많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