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육의 눈을 감으면 하나님이 거기 계십니다!”
+ 본 문 : 고린도전서 13장 9절 - 13절 (신약성경 279쪽)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아멘!
서로 인사 / “잘 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편 26편 2절)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행 13장 47절)
50살에 선교사로 부름 받고 순종한 후,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선교지에서 헌신하고 있는,
강원희 의료 선교사님 부부 - 그는 아무도 오르지 않는 산 끝까지라도 사랑하는 영혼을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30년 선교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보았습니다.
그가 하루하루를 선교 훈련이라 여기며 묵묵히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선교는 사람의 젊음이나,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 이라는 진리를 굳건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턴을 거쳐 전문의 과정과 무의촌 진료로 젊음의 때를 다 보냈지만, 끝까지 품었던 그의 꿈대로,
결국 선교지에서 아픈 영혼과 함께 울고 있는 강원희 선교사님 부부! 예수님은 거기 함께 계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아픈 영혼과 함께 울 때 예수님은 거기 함께 계십니다.
저는 어린 유치부 때부터, 내 고향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에 있는 성진교회에 다녔습니다.
초가지붕을 얹은 4칸 한옥집 형태의 교회당이었고, 교회당 앞 살구나무에는 산소통을 반으로 자른,
교회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그 산소통 종을 두들겨 울리기 위한 동백나무 망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은 반드시 기도 후, 박자에 맞추어 “천당 천당!” 을 외치며 친 다음, 다시 기도로 마칩니다.
교회당 안은 제재소에서 내린 판자로 마루를 깔았고, 얕은 강단과 작은 강대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래 강단은 주일학교용 강단이었고, 윗 강단은 오직 전도사님만이 올라갈 수 있는 강대상이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바로 그렇게 생긴 교회당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한동네 살았기 때문에, 평상시 어떤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일이면 완전 딴사람처럼, 거의 변장에 가깝게 아름답고 깨끗하게 단장하고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웃거나 놀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단장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전 9시면 어린이 주일학생들의 예배와 분반공부, 그리고 10시부터는 어른들의 공과공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대예배가 오전 11시에 시작됩니다. 이 대예배에는 저를 포함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예배가 마쳐지면, 저녁시간에 찬양예배로 모여서 드립니다. 그러면 주일이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든 말든 나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사라졌습니다.
물론 식사기도 때 잠시 하나님을 떠올리며 기도하지만, 내 앞에 실존해 계신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주일에 교회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만, 교회 밖에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430장 찬송 가사인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 가리!” - 이 찬송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주일이 지나고 학교에 가면, 나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아이로서 전혀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식사기도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는 시간에는 기도하지 않았고, 친구에게 양보와 배려도 전혀 없었고,
친구의 잘못을 용서하고, 미운 마음을 자제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개구쟁이 그 자체였습니다.
왜 교회에 있을 때와 학교에 있을 때의 내 모습이 그토록 달랐을까요?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고,
교회를 떠나 교회 밖으로 나오면 - 곧 가정이나 학교나 동네에는 하나님 안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학교 선생님을 통해서, 너무나도 깜짝 놀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바라보고 계시며, 내 마음의 생각까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가 주일 예배시간 맞춰서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도 어디 멀리 가 계시다가 시간 맞춰서,
나를 만나러 오시는 하나님은, 예배가 끝나면 예배를 받으시고 나를 멀리 떠나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어디서 누구와 무슨 짓을 하고,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 다 보고, 다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행위에 따라 갚아주신답니다.
다 보고 다 듣고 계신 하나님께서 때로는 상으로, 때로는 무서운 벌을 내리기 위해 함께 하신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그리고 역대하 16장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대하 16:9)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하나님이 다 보고 다 듣고 계셨단 말씀에, 하나님이 무서웠습니다.
교회에서는 천사와 같은 얼굴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교회 밖에 나가면 별짓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하는 생각에 양심이 마구 찔려 왔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주일 아침 교회에 앉아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 이 생각만 하면 내 작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강대상 뒤에? 강단 벽에 걸린 십자가에? 믿음 좋은 아이와 함께!
우리 모두의 마음에 계신다는데, 어떻게 동시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 마음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계신다는 걸까? 그리고 지금 우리 교회만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려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실까? 세계 사람들의 기도는 어떻게 다 들으실까?
기도를 접수하는 천사들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기도 응답을 받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걸까? 하나님은 평소에는 어디에 계실까?
주일에 사람들 만나러 나오실 때 말고는 어디에서 뭘하고 계실까? 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그런 상상을 하며 예배를 드렸던 어린 날들은 지나가고, 나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시간과 공간에 갇히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임을 말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의 기도를 모두 다 들으시고, 우리 마음과 행동과 고민과 아픔을 다 아십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분임을 어렴풋이 알고 믿을 뿐, 우리 머리로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떠올립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아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모르는 부분이 있었음을 알았을 때에 그 사람에 대해,
참 서운한 마음이 들겠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잘 알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 모든 것 너머에 계시는 분, 모든 것을 다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저는 저의 이 표현이 정확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말을 듣고도 여전히 “그래, 모든 것 위에 계시겠지.” “모든 것 너머에 계신다지?”
“모든 것을 다스리신대, 그렇겠지? 그럴거야.” - 이 정도의 시인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믿음에 대한 정면 도전에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신 면에 대해서만큼은, 깊이 묵상하여 잘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 모든 것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무릎만 꿇으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자신의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장막 한가운데에 성막을 두고 어디를 가든지 함께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항상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아버지 다윗 왕 때부터 준비되어왔던 성전을 다 짓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에 ,
이런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아멘! (역대하 6:20,21)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이 솔로몬 성전에만 계시겠는 것이 아니라, 성전 밖에도 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성전 밖에서의 기도도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짓고, 또 성전을 지으면서 하나님께 봉헌해 올렸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봉헌한 성전 가운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유일한 장소였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사라지지 않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그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왜 사라졌습니까?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성전은, 성전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은 상징일 뿐입니다. 상징을 붙드느라 예수님이라는 실체를 놓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쓰러지지도 허물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온전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전이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어디에서나 계십니다. 항상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곳이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그곳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그곳이 그 어느 곳이든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이렇게 만나는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신, 저와 여러분 각자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우리 가정이 교회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직장이 교회요.
예수님을 모신 그 어떤 곳이든,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속한 모든 신앙공동체가 다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을 그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로 모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종교의 신은 그 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어떤 특별한 곳에만 거합니다.
그곳은 각 종교의 본원지라고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평생에 한 번이라도 가보기를 원하여 순례를 떠나고, 가지 못하면 그곳을 향해 절이라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지나 성전은 신이 계시는 곳이기에, 평생에 한 번이라도 자기가 믿는 신이 있는,
그 곳에 가서 그 신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순례의 길을 그리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한 장소에 가야만 특별히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존재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믿는 자가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늘 보고 계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거하시고, 내가 찾을 때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분이,
우리가 믿고 있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특별한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마치 특정한 곳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든지, 그곳에서만 예배하고 기도한다든지 돕는 행동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 온 세상 위에 거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처럼 주일 낮 예배 시간에, 본당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으로만 꽁꽁 묶어두고,
그 외의 시간과 그 외의 장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은근히 거부하는 성도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주일 낮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선데이 크리스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일 오전예배 시간만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본당 안에만 가두어 두는 성도님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 어떤 한 장소, 그곳이 곧 교회당일지라도 거기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이면 그곳이 그 어느 곳이든, 거기가 교회입니다. 숨어서 모이는 지하교회도,
범죄자가 있는 감옥도, 조금 전까지 가족이 함께 모여 치킨을 먹었던 거실도, 술집과 모텔에도 함께 있고,
심지어 절간이 들어 있는 상가 건물에 있는 개척교회도, 그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면,
그곳이 곧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을 사람들의 눈에 신성한 곳으로,
보이도록 꾸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임재가 이루어지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보고 믿어야 하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교회당은 굉장히 무미건조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다가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교회당 안에 그 어떤 종교적인 분위기를 잡는 장치가 없는 것에, 다소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대형교회는 이런 면에서 좀 나은 편입니다. 전면에 큰 강대상과 파이프 오르간, 길고 긴 복도,
화려한 조명이라도 있으니, 본당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종교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80%를 차지하는 교인 100명 이하의 교회에서는, 이런 종교적인 분위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복잡한 시장통 상가 건물 지하에 있지 않으면, 그래도 그 교회는 다행입니다.
지하가 아닌 2층에 자리 잡았다고 해도, 좁은 계단으로 겨우 올라가면 작은 예배실이 하나가 나옵니다.
벽에는 하얀색 페인트를 칠해놓았고, 부드럽게 보이는 효과를 위해서 커튼이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장식도 없습니다. 전면에 나무 십자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좁은 강대상과 피아노,
아니면 종교 시설과 정말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전자 피아노와 전자 기타, 마이크와 전깃줄들,
게다가 다른 종교의 사원에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결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이 있습니다.
바로 드럼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원에 드럼이 들어갈 수 있을까? 교회 외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교회음악이라고 정해진 형식이 없습니다. 동시대를 품고 이제까지 온 것이 교회음악입니다.
유행가 가수들의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드럼이, 다른 종교사원에 자리 잡기란 정말 힘들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한쪽에서 아이는 빽빽 울지를 않나 우당탕거리지를 않나 그야말로 난리법석입니다.
아이들처럼 박수치며 율동하면서 노래 부르자고 합니다. 같이 짜고 하는 건지, 각각 마음대로인지,
알 수 없게 노래하다가 갑자기 한 손을 높게 올리기도 하고, 두 손을 양 옆으로 활짝 펴기도 합니다.
교회당 입구에 서 있는 안내를 하는 사람들은 그저 반가워할 뿐, 어색함을 단번에 제압해오기에는,
역부족인 보통 아저씨와 아줌마들일 뿐입니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봉사의 차원에서 교인들이 사역을,
맡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서 제사를 올리는 전문적인 사제들과는 큰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교인들의 비전문적인 활동 모습은, 절대자를 만나고자 노력하는 데에 전혀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곳이 교회입니다. 십자가와 강대상, 헌금함만 치우면 여기가 세미나실인지, 노래 교실인지,
영화관인지, 어린이집인지, 노인 대학인지 전혀 구분하기가 힘든 곳이 바로 교회당의 모습입니다.
이런 교회당의 모습에 다른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잘 적응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도들이 그들의 종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여 도와주기 때문에,
벌써 경내에 들어서서 신전으로 오면서 경건한 마음의 준비가 진행됩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신전,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르게 지어지고 꾸며진 사원들의 안과 밖의 모습들,
엄숙한 침묵 가운데 조용히 타들어가는 향의 냄새는,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돕고 있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종교인들이 그들의 몸과 마음이 준비되도록, 여러 모양으로 도와줍니다.
그리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절도 하고, 기도문도 외우고, 말씀도 듣고, 시주도 넉넉하게 합니다.
눈을 들면 두 눈 가득히 들어오는 사원 내의 이런 모습들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교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얀 벽에 십자가 하나 달랑 있는 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면서 다양한 성화들과,
동상으로 이 종교를 세워왔던 이야기를 눈으로 보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곳답게 꾸며지고 분위기가 연출되어 있어서 교회가 아니라,
어리숙한 사람들이 어설프게 모여 있어도,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성도가 몸과 지체를 이루고,
성도들인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므로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는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그곳이 바로 어디든 교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교회는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래서 살아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도 때로는 혼자여도 그곳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전답게, 예배드리는 곳답게 꾸며졌기에, 그런 것들을 둘러보며 예배드릴 마음이 잡히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잡히지 않아 예배드릴 수가 없다면, 그것들을 바라보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어진 공동체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어 마음을 잡으려는 것은, 우상인 이방종교의 신자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있고, 교회 밖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면,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놓쳐 버리는 것이 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모든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언제든지 -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잠잘 때도 일어나서도, 먹고 마실 때에도,
앉아 있을 때에도 걸어갈 때에도, 일할 때에도 쉴 때에도, 눈을 감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 그곳에 계십니다. 임마누엘! 내가 있는 그곳에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심을 믿고 맡기는 기도로,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되어,
잘 되는 승리자! 성공자! 행복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