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마음으로 뜻을 위해 살다
이광수(아내 노수영) 가정
뉴욕의 이스트가든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라클랜드 카운티가 있다. 그 카운티 안에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허드슨강을 끼고 울창한 숲이 병풍처럼 놓여있는 곳에 라클랜드 세메트리가 있다. 섹션D의 원전에 ‘오직 한마음으로 뜻 위해 살다.’라는 묘비명이 있다. 나의 영원한 반려자 노수영의 비석에 새겨진 글이다. 그 이름 옆에는 내 이름도 새겨져 있다.
‘오직 한마음으로 뜻 위해 살다’ 이 한 구절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왔던 나와 아내의 삶의 스토리를 지면에 옮겨 보련다.
1. 흙에 살리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두교리는 높고 장엄한 칠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칠현산 기슭에서 발현한 맑은 물이 흐르고, 마을 뒷산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온통 수를 놓는다. 나는 1954년 11월에 두교리 223번지에서 부친 이병록님과 모친 곽맹순님의 3남 4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내 위로는 형님 한분과 누님 두분이 있고, 아래로는 한명의 남동생과 두명의 여동생이 있다. 우리는 할머니를 모시고 부모님과 7남매가 한집에서 살았다. 거기에다 고종 사촌 동생 하나가 함께 자라 그야말로 대가족 이었으나 형제지간에 싸움이 없었다. 그래서 늘 동네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곤 했다.
나는 8km 떨어져있는 곳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를 저전거로 통학하였다. 그 당시에는 졸업 후에 진학을 하든가 아니면 직장을 따라 상경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나는 졸업 후 농촌계몽에 뜻을 두고 고향에서 살고자 했다. 청소년기에 참여했던 4H 활동과 그 시절에 즐겨 읽은 농촌 계몽소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1년 동안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어 드리면서 어떻게 하면 그 꿈을 이룰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내가 농촌에서 사는 것보다 도시로 진출하기를 바라셨다. 결국 나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가기로 하였다.
그즈음 헌수생 출신의 장세임씨가 우리 마을에 찾아와 둘째 누님을 전도하였다. 누님은 소녀시절부터 성공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오던 중 원리를 듣고 입교했던 것이다. 상경하는 나를 배웅하면서 간절히 말했다. “내가 성공회를 6년 동안 다녔어도 타락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못했는데 통일원리를 듣고 풀렸단다. 선악과는 과일이 아니라 해와의 사랑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들려준 타락론이 내 머릿속 깊이 박히게 되었다. 누님은 계속해서 기동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렇다면 그 기동대가 언제 출발하지? 내게 알려 주면 가도록 하겠어.”라고 약속했다. 기동대원들이 농촌을 순회하며 봉사활동을 한다는 설명이 농촌계몽에 뜻을 두었던 나의 의식을 일깨웠던 것이었다.
상경 후 어떤 회사에서 경리사원으로 일하다가 약 6개월이 지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저녁에 누님의 인도로 마을에 있는 개척전도소를 찾아갔다. 장세임 교회장이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10여명의 청년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서 그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심장은 매우 고동쳤다. “여인의 몸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농촌 계몽활동을 하고 있는데, 나는 사나이로서 품은 뜻을 저버리고 도시로 가다니…” 나 자신이 부끄러워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
그날따라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달을 쳐다보며 이렇게 다짐했다. “나도 저 여인과 같은 삶을 살리라.” 모였던 사람들이 돌아간 후 나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는 입회원서를 제출했다. 1973년 7월 8일이었다.
2. 가야만 합니다.
다음날 다시 상경하여 고양군 벽제면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다. 헌수생 진경희 교회장님이 시무하는 교회였다. 2주일에 한 번씩 의료봉사단들이 찾아와 진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나의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다. “나도 저들과 같은 삶을 살리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고향에 있는 누님에게 기동대에 입단하겠다는 결심을 편지로 보냈다. 그것이 부모님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때부터 누님은 부모님으로부터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9일은 고종사촌 형님의 결혼 날이었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제가 자연스럽게 나의 기동대 입단으로 넘어갔다. 그 자리에서 아버님과 형님으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다. 가서는 안 된다고 나를 설득하고는 “그래도 가겠느냐?” “네, 가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질문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나 끝까지 가야만 한다고 고집했다. 나의 본심은 이미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 녀석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묶어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야겠어.” 형님이 나를 때리면서 한 말이었다. 거기에 친척들까지 동의했다. 어머님은 차마 자식이 매를 맞는 꼴을 볼 수 없어 고함치며 만류했다. 피로연의 자리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뛰쳐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자녀를 찾으신 하나님의 눈물이었나 보다.
다음날 아버님과 형님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사무실 옆에 있는 작은 주점으로 인도 하시더니 주모를 보고 물었다. “이 녀석이 내 둘째 아들인데 통일교회인가 뭔가를 다니더니만 직장 팽개치고, 부모 형제 다 버리고 기동댄가 뭔가 하는 데를 간다고 하는데, 여보! 주모, 그게 잘 하는거요? 못하는거요?” 손님 눈치 보기에 달인이 된 주모가 말했다. “아이구! 젊은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부모가 말리면 들어야지.”
그 말을 들으신 아버지는 신이 나서 나를 윽박지르셨다. “그래 이놈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네가 잘못한다고 하지 않더냐. 그래도 가겠느냐?” “예! 저는 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요, 아버지를 위하는 길인 것을 알았기에 저는 가야겠습니다. 지금은 불효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먼 훗날 이해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도 가고 싶단 말이냐? 그렇다면 가야지. 가거라. 그러나 이 순간부터 너와 나는 부자의 인연을 끊는다.” 극구 만류하시던 아버님께서 훌쩍 자리를 뜨셨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누님댁으로 전화를 걸어 아버님,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아침에 잠깐 들렸는데 자식한테 배신당하고 살아서 무엇 하느냐고 하시면서, 훌쩍 떠나셨어.” 큰 누님의 대답이었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는지라 무슨 일인가를 꼭 저지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순간부터 3일 금식을 하면서 아버지를 지켜달라고 하늘 앞에 매달렸다.
이튿날 오후 어머님과 고모님이 큰 보따리를 이고 화사한 웃음을 지으시며 나의 거처로 오셨다. “이거 할머니가 너를 생각하고 햇솜으로 만든 이불이란다. 갈 때 가더라도 따뜻한 것이니 잘 덮고 자다 가거라.” 갑작스런 반전(反轉) 상황의 배경도 모른 채 며칠 덮고 자다가 제 4차순회전도단 출발을 위한 21일 수련회에 참석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내가 기동대 갈 뜻을 굽히지 않자 어머님은 인왕산 밑에 있는 어느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보았다. 조상들이 들고 일어나 아들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부적을 써주면서 이불과 베개 속에 넣고 3일만 자고나면 마음이 달라질 거라고 무당이 말해서 그렇게 내게 친절하게 시도한 것이었다. 나를 하늘 앞에 세우기 위해 영계 있는 조상들이 협조했던 것을 무당이 잘못 해석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원리와 뜻을 잘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가고 싶은 충동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성령의 은사였다.
그해 12월 20일에 제4차 순회전도단 21일 수련회에 참석하였다. 처음으로 전후편 원리를 공부하면서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고는 몇 번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료 후 충청남도 지방 곳곳을 순회하면서 연단을 쌓았다. 전도 활동, 만물복귀 활동, 노력 봉사, 원리공부, 성전 건축 등 많은 활동을 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단원들간의 끈끈한 심정 관계는 혈육의 정을 넘어선 천정(天情)으로 맺은 형제들이었다. 6개월간의 활동을 마친 후에 충남 공주군 장기면으로 개척전도를 나갔다.
3. 죽으면 죽으리라!
면 소재지에서 4km 떨어져있는 산학리에 작은 방 하나를 얻고 개척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이집 저집 다니며 일손을 거들어주고 밤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원리 강의를 해주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다 앉을 수가 없어 방문을 열어 놓고 밖에 서서 말씀을 들어야 했다. 얼마 후에 20여명이 입회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은사 뒤에는 반드시 시련이 따른다고 했던가? 6개월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교회장님, 큰 일났구먼유…. 근애가 아버지한테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몰라유… 제대로 걷기나 할런지유. 옆집 명옥이도 그렇구유.” 주인 아주머니가 들려준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일손을 거들어 주고 밤에는 원리를 가르쳐 주는 나를 고맙게 여겼다. 그런데 그들의 친척 중에 기성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 교회를 비난했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이 10월호 <새농민> 잡지에 탁명환씨가 사교(邪敎) 운운하면서 우리를 비방하는 글을 실었다. 순박한 농민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자식들에게 통일교회는 나쁜 곳이니 절대로 가지 말라고 만류한 것이었다. 은혜받은 자녀들이 그 말을 따를 리가 없었고 오히려 더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졌다. 거기에서 비롯된 가족의 폭력이었다. 그 행위는 이집에서 저집으로 연쇄반응을 일으켜 나갔다. 그들의 어머니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 애가 맞아죽게 되었어유. 교회장님 때문이어유. 교회장님이 안 왔더라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겠어유? 우리 가정을 위해 떠나주셔유.”
그 말을 듣고 내가 떠날 리 없었다. 그러자 동네 회의를 열고 쫓아내자는 결론을 내린 후 이 사람 저 사람 몰려와 나가라고 야단을 했다. 이런 일이 3일 동안 계속 되었으나 나는 완강히 버텼다. 어린 나이에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동리 청년들까지 덩달아 야단이었다. 그들을 먼저 굴복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에 교회로 오라고 했더니 8명이 몰려왔다. 설득해 보려고 애를 썼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중 한명이 “때려서 내쫓아버리자.”라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렇다면 좋소! 당신들은 낮과 도끼를 가지고 있으니 그걸로 나를 찍어서 끌어내시오. 나는 죽으면 죽었지 떠나지 않겠오.” 말을 마친 후 손가락을 우지직 깨물어 뚝뚝 떨어지는 피로 일기장 위에 ‘충효’라고 썼다. 그리고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리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엎드려 흐느끼며 기도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청년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빠져 나가 한참동안 무언가를 의논하는 듯 했다. 다시 내게로 돌아오더니만 그 중에서 가장 심하게 반대했던 종렬이가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뭔가 잘못 알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봅시다.”라고 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제일 심하게 반대했던 근애 아버지가 찾아왔다. 겸연쩍은 듯이 머리를 긁으면서 “내가 왜 내 자식을 심하게 때리고 교회장님을 욕했는지 모르겠구먼유. 아마 내 마음이 아니었나 봐유. 잘못했구먼유. 앞으로 우리 근애가 교회 나가는 것 반대하지 않겠어유.” 죽으면 죽으리라! 했던 나의 행위에 사탄이 굴복한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입영 영장을 받고 군대 복무를 하러 갈 때까지 21개월 동안 활동했다. 그러면서 절실히 느꼈던 것은 훌륭한 목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것이었다.
4. 내 사랑 통일 신학교
입대하여 경기도 가평에 있는 제3하사관 학교에서 6개월 동안 고된 훈련을 받은 후 경기도 성남에 있는 모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였다. 내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에 통일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휴가 때는 신학교를 방문하여 공부하는 학생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이 몰라보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고는 제대 후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1979년 1월 16일, 전역한 나는 개구리복(예비군복)을 입은 채로 통일 신학교로 달려갔다. 내 손에는 미리 작성해 놓은 입학원서가 들려있었다. 입학 후 어머님을 모시고 막내 여동생과 함께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를 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에는 부천 역전에 나가 땅콩과 핫도그를 만들어 팔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핫도그를 제대로 만들 줄 몰라 기름에 너무 오래 튀겨놓았더니 딱딱해졌다. 이것을 아가씨 서너명이 몰려와 사먹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저씨! 이런 핫도그 두 번 사먹다간 잇빨 다 부러지겠어요.” 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쌩하니 가버렸다. 찬바람이 쉭 불었다.
단속하는 경찰이 나타나면 부리나케 리어카를 끌고 후미진 곳으로 피해 가야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카바이트 불빛에서 책을 읽었다. “오빠, 그렇게 리어카 끌고 다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챙피해서 어쩔래?” 여동생의 말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약혼 축복을 받고 동원된 상대의 생활비를 보내줘야 했고, 학비며 나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니 체면과 창피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때로는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공휴일과 방학 때는 공사장에 나가 무거운 벽돌 짐을 졌다. 한편으로는 학교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가면서 시간을 쪼개어 학업에 전념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공부만 전념하는 동료들이 한없이 부러웠었다. 2년 동안 학업을 마친 후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개척전도사로 파송되었다. 당시는 시국이 어려워 안보단합대회를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고성군 124개리를 한곳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가 안보단합대회를 실시했다. 그 자랑스러운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1년 후 철원교역 동송교회장 발령을 받게 되었다. 거기서 시무하던 중에 통일신학교가 4년제로 승격되었다. 나는 4학년에 편입하여 3일은 교회를 돌보고 4일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공부에 대한 집념과 목회에 대한 집념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5. 나의 축복, 나의 가정
1978년 10월,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고 군복무 3개월을 남겨놓은 때였다. 약혼축복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신학생들은 더 많이 갖춘 후에 축복을 받으라는 이요한 목사님의 지시에 따라 약혼축복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나는 신학교에 갈 것이냐, 약혼 축복에 참석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두 가지를 다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휴가를 얻어 약혼장소인 중앙 수련원에 도착하여 참아버님께서 불러주시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난 후에 “저기 앉아 있는 군인! 이리 나와. 부대에 빨리 들어가야 하나?” “3일간 휴가를 나왔습니다.” 대답하고는 남자들이 서 있는 줄에 섰다. 이때 참부모님과 나눈 짧은 대화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참아버님께서는 남녀 약혼 상대자들이 만들어 놓은 통로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짝을 맺어주시었다. 나는 비교적 오랫동안 줄을 서 있는 동안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목회를 할 것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로서 적합한 상대를 만나게 해주옵소서!”
얼마 후 아버님께서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 식구를 데리고 내 앞에 오셨다. 약혼이 성립된 것이다. 부모님께 경배를 드리고 밖으로 나가 명찰을 보니 이름은 노수영, 나이는 27세, 나보다 두 살 위였다. 2살 연상이라고 하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었으나 곧 극복할 수 있었다.
상대는 경남 합천에서 노경조 님과 장신가악 님의 4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나 군산에서 뉴욕양장점을 운영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입교했다. 축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양장점을 정리하고 성동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던 중에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약혼 후에 대상은 전남 장성교회에서 임지생활을 했고, 나는 군 복무를 마친 후 통일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기간에 우리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때 주고받은 편지가 두 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전기스탠드 아래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 불이 휙 나갔다. 열린 창문을 통해 달빛이 살포시 들어왔다. 나는 쓰던 편지를 멈추지 않고 계속 써내려가면서 그 때의 정황을 편지지에 옮겼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던 중에 전기불이 나가 달빛을 받으며 계속 써 내려가고 있어요. 달빛마저 우리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축복가정의 순애보(純愛譜)라고 할까?
전도대원들의 실적이 매달 한 번씩 발간되는 회보에 실렸다. 나의 대상은 거의 매달 최우수 실적을 내었다. 그 결과 협회 창립 26주년에 전국 최우수 전도자로 협회장상을 받았다. 시상식에 참석하고 난 이후 처음으로 시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가족들 앞에서 대상을 어떻게 영접하여 불필요한 박해가 안 생기게 할까를 생각한 끝에 가족들이 보는데서 경배 3배를 올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어머님과 시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중히 경배 3배를 했다. 예기치 않았던 경배를 받고 대상은 감격하여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아들이 귀하게 여기는 며느리를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반대할 리가 없었다.
만4년 동안의 임지생활을 거쳐 1982년 10월 14일에 축복을 받고는 곧 가정생활을 출발했다. “축복 받고 행복하게 사는 걸 보니, 나도 축복을 받고 싶어요.” 우리 부부를 바라보는 식구들로 부터 종종 들어왔던 말이다. 브라질 자르딘에서 참부모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을 때 우리 가정에 대하여 소상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다. 다 듣고 나신 후 참아버님께서는 “네 색시가 너보다 났지? 내가 중매 잘못했다고 욕먹지는 않겠구먼.”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아내는 천품이 좋고 재치와 솜씨를 지녔다. 교회식구들은 나보다 더 사모를 좋아하고 따랐다. 우리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첫딸은 한국남자와 축복을 받아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며, 지금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둘째 딸은 국제축복을 받은 후 11년 만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출산 후에 KAEIU라는 company를 열고 개인 비지니스를 하고 있다. 그동안 살았던 나라(Korea, Argentina, Estonia, Italy, USA)의 첫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딸이 만든 그 이름 속에는 우리 가족들이 같이 고락을 같이하면서 세계를 편력(編曆)한 역사가 담겨져 있다.
셋째는 아들이다. 내가 세계선교사를 지원한지 꼭 1주일 후에 그가 태어났다. 올해 34살, 아직 미축복이며, 현재 Beat Boxer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에는 연예인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뉴욕 할렘의 명소 아폴로 아마추어 나잇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2019년에는 미국 챔피언이 되어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였다.
6. 덤으로 사는 삶
1986년 7월 15일은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의 날이었다. 이른 새벽에 안광준이라는 청년이 우리 부부를 살해할 목적으로 예리한 흉기를 들고 찾아왔다. 강원교구 화천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응접실에 앉자마자 “이단자는 죽어야 해”하며 가슴에 품고 왔던 예리한 칼로 나를 찔렀다. 둘이 엉겨서 생사를 가르는 치열한 싸움이 좁은 공간에서 벌어졌다.
결국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난 후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후의 나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덤으로 사는 삶을 온전히 뜻을 위해 바치겠나이다.” 그는 곧 검찰에 송치되었다. 나는 담당판사에게 관대히 용서해 주라는 내용으로 장문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그는 2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로부터 2년 3개월이 지난 후인 1987년 10월 17일에 한남동공관에서 전국목회자 특별집회가 열렸다. 참부모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이제부터는 한국사람들이 세계로 나가 하늘의 전통을 심어줘야 할 때이다. 1차로 40명을 보내고자 하는데 희망자는 손을 들어라.” 나는 서슴없이 손을 들었다. ‘덤으로 사는 생, 뜻위해 바치겠다.’고 맹세한 것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돌아와 아내에게 이야기하자 아무런 핀잔이나 불평이 없이 “나는 당신의 결정을 따르겠어요. 내 걱정 말고 나가서 열심히 하세요.” 그 한마디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리고 힘이 솟아나게 만들었다. 내게 이 말보다 더 좋은 내조가 어디 있겠는가? 아내가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보배로 여겨졌다.
3개월 후에 아버지께서 상속해 준 논 3마지기를 팔아 서울에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이사했다. 선교본부에서는 선교사 가족들에 대한 일체의 지원이 없었다. 지원했던 목회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후퇴하였다. “선교사로 나가는데 너희 교회에서는 왜 생활 대책도 안 해주느냐?” 친척들의 말이었다. 동료 목회자들과 주변식구들 마저도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뜻위해 일할 수 있는데 왜 가족들을 버려두고 해외로 가려고 하느냐?” 그러나 그런 말이 ‘덤으로 사는 생, 뜻 위해 바치겠다.’는 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한국에서 1년, 일본 연수 3개월을 거친 후 제비를 뽑아 결정된 임지는 아르헨티나였다.
신학교시절에 이요한 목사님께서 아브라함의 3대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고통, 아내를 두번씩이나 파라오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던 고통, 독자(獨子)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했던 고통,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3대 고통을 상속받았다.” 그 말씀처럼, 해외선교사를 택하고서 나는 하나님의 3대 고통을 상속받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7. 소박한 맹세
선교출발에 앞서 다음과 같은 소박한 맹세를 했다. “아내와 자식이 보고 싶고, 김치가 먹고 싶어질 때 아르헨티나를 더 사랑하리라.”
1991년 4월 6일 임지국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 교회는 미국 선교사 토마스 필드가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도우며 소박한 맹세를 실천하려 애를 썼다. 멤버들과 함께 전도하며, 한국어를 가르치며, 훤드레이징에 동행하며, 힘들어하는 자를 격려하며, 참부모님의 대신자가 되고자 무단히 노력했다. 헌신 멤버가 많이 늘어났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언어 정복은 필수이다. 나는 도착한지 만1년 되는 날에 스페인어로 설교하겠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공부했다. 그리고 실행했다. 1992년 3만가정 축복식에 아르헨티나 식구 70여명을 인솔하고 고국을 방문했다. 중남미에서 참석한 축복대상자들에게 스페인어로 멋지게 안내를 했던 나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1992년 10월에 토마스 선교사가 CIS로 파송됨에 따라 내가 아르헨티나 선교의 총책을 맡게 되었다. 인수하면서 감당키 어려울 만큼의 큰 부채를 인수했다. 매달 상환해야할 원금과 이자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부채청산을 위해 훤드레이징 팀을 강화하는 한편 액자공장을 운영하여 2년 만에 전액을 갚았다.
1994년에 ‘참부모와 성약시대’를 선포하기 위해 참어머님께서 세계 40개국가를 순회하셨다. 우리는 대회를 준비하면서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만을 초청하였고 환영사를 전직 대통령 프론디시에게 부탁했다. 12월 17일 아침에 공항에서 참어머님을 영접했을 때의 일이었다. 대회 준비 상황을 보고받으시던 참어머님께서 “그럼 모니카가 말씀을 끝까지 듣겠다고 약속을 했나요?” 축송을 맡은 유명한 성악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참어머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씀을 들은 후 모니카를 설득하여 끝까지 참석토록 하였다.
대회장에는 각계각층 지도자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축사를 맡은 전직 대통령 프론디시가 “나는 레버런 문의 자녀가 13명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영상을 보니 열네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 프론디시가 오늘부터 참부모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회장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식탁에서 “네가 세계에서 음식을 제일 잘 차렸구나.” 참어머님께서 아내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다음 일정이 당겨짐에 따라 참어머님께서는 급히 떠나셔야 했다.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다. 홍보를 담당했던 식구가 우연히 종교청 장관 Dr. Centano를 화장실에서 만났다. 이번 대회에 초청하였으나 공무관계로 출국해야했기에 참석을 못한 분이었다. 그는 이륙직전에 참어머님이 탑승한 비행기에 찾아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그는 다음 해에 있었던 참부모님 일행의 아르헨티나 방문 비자발급과 대통령면담 알선에 큰 힘을 보태주었다.
대회 이후 식구들은 영적인 힘을 얻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도시와 지방도시에 개척자를 파송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를 곤경에 빠트린 두 개의 큰 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하나는 가뉴엘라 수련소 구입을 중심삼고 발생한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임금(賃金)에 관한 것이었다. 1992년에 수련소를 매입할 때 잔액 12만 5천 달러를 동수련소와 교회 소유 사무실을 담보로 설정하고 6차례에 걸쳐 상환하기로 계약했다. 우리는 6차례에 걸쳐 모두 갚았으나 매도인은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여 생긴 법정 싸움이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활동을 협조한 사람이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하며 14만 달러를 요청한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여 우리를 곤경에 빠뜨렸다.
결국 우리는 두 사건에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법조계의 부패가 패소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보고를 들으신 참부모님께서 재차 매입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셨다. 그러나 국회의사당 옆에 위치한 사무실은 임금 지불건 해결을 위해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립선교를 위해 식구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아 마련한 사무실을 부정직한 사람과 정의롭지 못한 법조인으로 인해 날려버리고 참부모님께도 누를 끼치게 되어서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는 남반부를 중심으로 전개될 제2차 40년 노정에서 아담국가로 부상하기 위해 치룬 탕감이 아니었나 싶다. 하늘이 주시는 천복을 받으려면 탕감의 고통이 있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8. 자르딘의 추억
1995년 3월에 참부모님께서는 브라질 마토구로소 두 줄의 자르딘에 오셔서 남미섭리 출발을 위한 정성을 쌓고 계셨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자르딘에 갔다. 그 당시 자르딘에는 부모님이 거하시는 집한 채 뿐이었고 우리는 모두 텐트를 치고 생활해야 했다. 참부모님께서는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을 하셨다. 미란다강과 라풀라타강이 만나는 곳에 여러 개의 낚시대를 드리우며 정성을 쌓으셨다. 틈틈이 주변의 농장을 답사하시고 주변을 살피셨다. 반바지에 짧은 셔츠를 입으셨으며 용안은 구리빛이었다. 그야말로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셨다. “너희들 참부모가 이런데 와서 농부처럼 지낼 것이라고 상상이나 해봤어?” 참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어느 날 나는 참아버님께 “낚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렸다. “낚시는 정탐이야. 이렇게 낚싯대를 들고 와서 지형을 살피고 조사를 하면 누가 정탐한다고 생각이나 하겠어?” 낚시는 오해와 박해를 피하기 위한 탁월한 방안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미란다강 상류 쪽을 살펴보겠다고 하셨다. 상류로 올라가려면 지형 때문에 보트가 올라갈 수 없는 곳이 여러 곳 있었다. 참아버님께서 보트를 타고 계시고, 나와 지희선 선교사는 보트를 밀어 올렸다. 발밑의 돌이 어찌나 미끄러운지 보트를 밀 때마다 우리 몸은 배 밑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참아버님과 하늘섭리를 밀어드린다고 생각하니까 기쁨과 힘이 솟구쳤다.
돌아오니 어머님께서 활짝 웃으시면서 “모두가 물에 빠진 생쥐 같구나. 자 이리 들어와서 이 옷으로 바꿔 입어요.” 참어머님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매일 저녁 시간이 되면 평상위에 앉아 한사람씩 간증을 했다. 간증 이후 아버님의 말씀이 이어지면 새벽 한시 혹은 두시에 끝났다. 그러나 새벽 다섯시가 되면 아버님은 여지없이 낚시터를 향하셨다. 2-3시간 주무시면서 연일 강행군을 실시하신 것이었다.
아내의 간증 차례가 돌아왔다. 아내는 3년 전도 임지 기간에 활동했던 내용을 중점으로 간증했다. 아버님께서는 무릎을 탁탁 치시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시면서 기뻐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아르헨티나에 봉고차 한대 사줄 테니 전도 많이 해.”라며 참으로 큰 축복을 주셨다. 며칠 후에는 그것이 동인(動因)이 되어 남미 25개 국가에 각각 한 대씩 사주시는 것으로 백만불을 결재해 주셨다. 아내가 간증한 다음날이었다. 아버님 짚차에 동승한 나에게 “내가 남북미 기동대를 만들고, 네 색시를 기동대장으로 세우려는데, 네 색시 내놓을래?” 나는 주저 없이 “아버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그 일을 추진하지 않으셨다.
9. 강변에서 빛내리라
참부모님께서는 자르딘에서 정성을 드리신 후 남미 각나라 정상들을 만나시고자 순방에 오르셨다. 아르헨티나에는 1995년 5월 23일에 올리브궁에서 메넴대통령을 만나 남미프로젝트를 피력하셨다. 메넴대통은 큰 감동을 받았고 면담시간이 예정시간의 30분을 초과했다. 보좌관들은 대통령이 아내와 아들의 죽음 이후 웃음을 잃었다가 비로소 환한 웃음을 띠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참부모님을 만나면 행복하고 웃게 되는 법이다.
그날 저녁 나는 꼬리엔테스로 가서 참부모님을 모실 준비를 서둘렀다. 꼬리엔테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북쪽으로 1200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다. 참부모님을 모시기로 예정한 곳은 브라질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파라나강과, 파라구아이에서 아르헨티나로 흐르는 파라구아이강이 합류하는 곳이며 도라도(황금빛 물고기)가 많이 잡혀 해마다 국제낚시대회를 실시하는 곳이다. 참부모님 일행이 며칠간 낚시 하시는 동안 도라도가 참으로 많이 잡혀 몹시 기뻐하셨다.
두 번째 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인근에 있는 보트를 파는 상점으로 모시고 갔더니 15피트 정도의 작은 보트를 즉석에서 구입하셨다. 그 장면을 코리엔테스의 지방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레버런 문이 보트 한대를 샀는데, 우리들이 빵 한조각 사는 것보다 쉽게 샀다. 그동안 코리엔테스 주민들은 까발로(경제부 장관) 밑에서 굶주려 왔는데 레버런문의 방문으로 잘 살게 될 것이다.” 손수 구입하신 보트는 빌려서 사용하는 보트에 비해 작고 불편한 보트였지만 참부모님께서는 한동안 그 보트만 타셨다. 일정기간이 끝나자 “New Hope”로 이름을 지어주시고는 식구 훈련용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하셨다.
참부모님은 자주 꼬리엔테스를 방문하셨다. 어떤 때는 호텔 방을 구하지 못해 개인 주택을 빌려서 사용하였다. 일가족 몇 명 정도가 살 수 있도록 지은 집에 수십 명이 생활을 하자니 수도물이 동이 나고 정화조가 넘치는 불편함이 뒤따랐다. 참부모님을 편히 모실 수 있는 집이 필요하여 2.5ha의 땅에 작은 주택과 큰 창고가 있는 곳을 매입하여 리모델링을 했다. 리모델링이 끝나자 공직33년 수상자들과 함께 방문하셨다. 방을 둘러보신 어머님께선 “생각보다 방을 잘 꾸몄구나.”며 기뻐하시면서 수상자들에게 “참부모가 쓸 방이에요. 들어와 봐요.”하시며 방을 공개하기도 했다. 수상자들은 창고에 매트리스를 깔고 숙박하였다.
저녁은 대보름을 맞이하여 오곡밥을 차려 올렸다. 모든 음식물 재료는 1200km 떨어져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수해 온 것이다. 밥상을 대하시고는 “웬 진수성찬을 이렇게 잘 차렸지?”하시며 기뻐하셨다. 부모님의 기쁨은 곧 우리 모두의 기쁨이었다. 며칠 후 참부모님께서는 수상자들에게 청평 40일 수련을 거쳐 세계 각국으로 나아가 하늘의 전통을 심으라고 말씀하시고는 손과 발을 들어 맹세케 하셨다. 통일가의 원로들을 국가메시아로 파송하신 것이다.
1996년 3월 16일 아침 식탁에서 있었던 일이다. “광석이라는 이름은 산에서나 어울리는 이름이야. 이제 강가로 왔으니 광수로 해! 삼수변에 붉을 주자야. 태양처럼 붉게 타서 강변을 비추라는 의미야.” 하시면서 나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예수께서 게바를 부르신 후 베드로라 개명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듯이, 오늘 아침에 참아버님께서는 나의 이름을 광수로 개명하여 주셨다. 이는 나의 영광이요, 길이길이 이어질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나 이제 강변에서 빛을 비추어 참부모님께서 가시는 길을 훤히 비추리라.”
내가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참부모님께서 11차례 코리엔테스를 방문하셨다. 어떤 때는 2-3일 짧게 머무셨지만 어떤 때는 보름 이상 체류하시었다. 처음에는 주로 도라도 낚시를 하셨으나 후로는 BOGA 낚시에는 테크닉이 있어야 하고 잡는 맛이 좋다고 하시면서 보가 낚시를 주로 하셨다. 모험과 스릴을 즐기는 모습이셨다.
틈틈이 관광 낚시터를 만들 곳을 선정하기 위해 지형을 정찰하셨다. 인근에 있는 농장도 방문하셨다. 나에게 파나마 강변을 탐사하여 낚시터로 적합한 곳에는 말뚝을 박아놓으라고 하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루자 아버님께서 “네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으니 내가 해야겠다.” 하시면서 직접 식구들로 조를 편성하시고는 탐사 구간을 정해 주셨다. 참부모님께서도 한 구간을 맡으셨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파나마 강변 수백km를 탐사했다.
참부모님께서 농장을 구입한다는 소문을 들은 대주주 Caposolo가 30만ha의 농장을 팔겠다고 제안했다. 그 사실을 아프리카 순회 중인 참부모님께 보고를 드리자 큰 관심을 보이시며 답사하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박구배 사장과 함께 Caposolo의 경비행기를 타고 조사하였다. 그 결과 농장이 한군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4군데로 나누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어떤 지역은 나무가 죽어 있는 걸로 보아 수해 지역임도 알아냈다. 그 사실을 보고 드리자 매매를 불허하셨다. 그 이후에 파나마 강변에 2500ha, 공항 부근에 600ha의 농장을 매입했다. 참부모님께서 도보로 2500ha의 농장을 방문하여 살피시고는 카피바라를 사육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종춘 박사를 보내겠으니 나무를 심으라고 하셨다.
공항부근 농장에는 호텔을 짓고 세계 정상들을 초청하여 낚시수련을 하겠다고 하셨다. 후일 엄덕문 선생이 오셔서 지형을 살피고 돌아간 후에 설계도를 만들어 보내주셨다. 건축할 때까지 농장을 놀릴 수 없어 송아지 450마리를 사서 사육하였다.
코리엔테스에서 참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했던 기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보람이 있는 기간이었다. 작은 배에 올라 낚시 시중을 들기도 하고, 잡은 고기를 모닥불에 구워드리기도 하고, 차에 모시고 운전하여 인근 농장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칭찬을 듣기도 했고, 때로는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 모두가 은혜요 사랑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강가에서 점심을 드신 후에 참아버님께서 잠시 깊은 수면에 드셨다. 참어머님께 “아버님을 깨워 드릴까요?” 물었더니 “좀 더 쉬시게 두세요.”라고 하셨다. 잠시 후 깨어나신 아버님께서 “내가 참부모가 아니라면 이런데 와서 고기나 잡아먹고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셨다. 참부모로서 힘들고 힘든 인류 구원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개인적인 욕망을 다 접어두시고 고생을 자청하시며 신천신지의 새 역사를 개척하시는 모습을 내가 바로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이 또한 내게 영광이었다.
참부모님께서는 저택 바로 옆에다 방 20개 정도를 갖춘 호텔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을 파악하신 후에는 호텔건축을 포기하고 현건물을 증축하는 것으로 변경하셨다. 15대의 보트도 들여 놓았다. 증축이 끝나는 대로 VIP를 초청하여 Garden만찬을 하겠다고 하시며 날짜를 정해주셨다. 그런데 건축에 동원된 식구들의 경험 부족에다 우기가 닥쳐 정화조를 묻을 구덩이가 메꾸어졌다. 또 파놓으면 다시 메꾸어지는 것이 반복되어 공사가 지연되었다. 얼마 후 중간 점검차 방문하신 참부모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들어야했다. 그때는 아내도 아이들을 돌보느라 오지 못했다. “네 아내 어디 있어?” “아이들 때문에 오지 못 했습니다.” “뭐라고? 아벨을 희생시켜 가인을 구하자는 것이 복귀섭리인데, 자식을 돌보느라고 오지 않았다고? 너 아직 아버지 성격을 모르는구나!” 이것저것을 지적하시면서 어찌나 질책을 하시던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광수! 아버지한테 혼이 났는데, 그래 여기 더 있을래? 아니면 떠날래?” “채찍을 맞아 죽어도 내 주님의 손에… 제가 부모님을 떠나 어디를 가겠습니까? 여기 있겠습니다.” 그렇게 답변을 드리고 나서 나는 곧장 부에노스아아레스로 내려가서 이사짐을 꾸려왔다.
아버님께서 정해주신 날까지 남은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공사는 50% 밖에 진척이 안된 상태였다. 이삿짐을 풀 겨를도 없어서 창고에 처박아 놓고 식구들을 몰아치며 밤늦게까지 공사를 했다. 시간을 쪼개어 만찬회 준비를 위해 인근 도시를 순회하며 시장과 경찰서장 등 지도자를 만나 만찬으로 초대했다.
참부모님이 도착하는 날에 준공 테이프를 끊으시고는 “이제부터 이곳을 코리엔테스 가든이라고 해라.”고 하시고는 앞마당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으셨다. 다음날에는 주민 400여명과 가든 만찬회를 실시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구원섭리의 원리관을 말씀하셨다. 그 다음 날은 칠일절 행사를 실시했다. 곧이어 선문대학 교수 남미순례단이 들이 닥쳤다. 그날 참아버님께서는 그동안 잡은 것 중에서 제일 큰 수루비를 잡으셨다. 길이 2미터 정도 되는 큰놈이었다. “엄마! 이것 놓아주고 제사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선문대 교수들이 왔는데 가지고 가서 산제사 드리는게 좋겠어요.” 어머님의 의견에 따라 가지고 와서 기념사진을 찍고, 요리를 하여 잔치를 치렀다. 며칠 동안 함께 했던 길영환 교수는 “우리들이 강단에서 참부모를 논하고 있지만 참부모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장에서 직접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눈코 뜰새 없는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내의 수고가 컸다.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환경 속에서 부모님을 모시며 많은 손님을 접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잘 해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참부모님이 떠나시자 겨우 한가한 시간이 생겼다. 한 달 동안 처박아 놓았던 이삿짐을 정리하며 횟수를 세어보니 12번째였다.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 “12번째 이사인데 이것이 마지막인 것 같소.”
그런데 다음날, 엊그제 참부모님를 모시고 떠난 송영석 회장님이 다시 예고도 없이 불쑥 오셨다. 웬일인가 했다. “이거 공문이요. 급한 일이기에 내가 직접 가지고 왔어요.” 읽어보니 국가 메시아 후보자 청평 40일 수련회에 관한 내용이었고, 거기에 나의 이름 석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풀던 이삿짐을 다시 창고에 집어넣고 청평 40일 수련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동서남북으로 왕래하시면서 복귀섭리를 완결 지으시기 일하시는 참부모님의 지시를 따르자니 정신이 없을 지경이 당연한 것이었다.
10. 국가메시아, 그 숙명의 길
국가메시아 파송을 위한 청평 40일 수련회에 아내와 함께 참석하여 회개와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수료 3일을 앞두고 임지 추첨이 있었다. 참부모님께서는 후보자들이 100%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섭리에 동참하기를 희망하셨기에 추첨으로 임지를 정하도록 하셨다. 사다리를 타는 방식이었다. 하늘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라는 마음으로 단상에 올라갔다. 눈을 들어 보니 185개의 선 중에 유난히 굵게 보이는 선이 눈에 띄었다. 하나님께서 그 곳으로 인도하시는가 싶어 그 선위에 이름을 적었다. 에스토니아와 연결된 선이었다.
수련을 마치고 다시 남미로 돌아와 보니 참어머니께서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대회를 하시는 중이었다. 자상하게 나의 새 임지에 대하여 물으시더니 “Corientes를 잊지 못하겠구나. 나중에 내가 에스토니아에 갈 테니 가서 열심히 해요.”라고 격려해주셨다. 그 당시 참아버님께서는 우루과이에 계셨었다. 참아버님께 보고 드리고 임지로 가기 위해 브라질의 지희선 선교사, 우루과이의 정광해 선교사와 함께 참아버님을 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빨리 떠나보내는 것이 아쉬웠던지 매일 낚시에 동행케 하시면서 많은 사랑을 퍼부어 주셨다. 2주가 지난 후 수행원들과 식구들을 모아놓고 “오늘 저녁엔 국가 메시아로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송별회를 해야겠다.”고 하셨다. “국가메시아는 그 나라의 아벨 왕이다. 국가메시아의 길은 숙명이다. 3대가 찾아가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을 주신 후에 노래하며 화동하는 시간을 베풀어 주셨다. 이는 모든 국가 메시아들에게 베푸신 송별회라 생각된다.
1996년 11월, 남미선교를 위해 선택된 일본여자 선교사들이 우루과이에서 실시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줄지어 들어왔다. 이때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야 했다. 6년 6개월, 나의 인생의 황금시기를 보냈던 곳이다.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하는 식구들, 고락을 같이했던 모습들이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의 눈에서도 진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에스토니아로 가기 전에 동북대륙 본부인 모스크바에서 일주일 체류한 후에 열차로 에스토니아로 향했다. 16시 간의 긴 여행 끝에 에스토니아에 가족과 함께 도착하였다. 그 날이 1996년 11월 27일이다. 에스토니아는 발틱 3개국 중의 한나라이며, 소련 공산주의 몰락에 힘입어 1991년 8월 20일에 최초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은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구소련 연방해체로 이어졌다. 작고 힘이 없어 인접 국가로부터 수없이 밟히고 빼앗긴 역사를 지닌 불쌍한 나라, 인구는 150만명, 국토는 4.5만 평방km이니 남한의 반 정도 크기이다.
선교 역사는 이러했다. 소련 공산주의 몰락 후 러시아 학생 3,000여명이 미국에서 실시한 통일원리세미나에 참가하였다. 이때 러시아에서 유학 중이었던 에스토니아인 올가 키를레바가 거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돌아와 에스토니아 최초의 식구가 되었다. 곧 이웃 나라인 핀란드에서 5명의 식구가 5대 도시를 순회하며 한마음 대축제를 열고 원리를 선포하였다. 이때 피터 라세비치가 전도되어 에스토니아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CIC에 선교사들이 파송됨에 따라 최초의 선교사로 일본인 시위지 기요가 파송되었다. 그 이후 미국인 선교사 라리하프가 수고했다.
1994년에는 구미꼬 미사자기를 조장으로 한 일본 선교사들의 여성연합 활동 지원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도착했을 때는 겐소엔도 선교사와 일본 여자선교사 4명이 15명 정도의 청년 학생들과 함께 수도 탈린과 서북부 도시 나르바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는 360만쌍 축복을 위한 활동이 섭리의 중심이었고, 에스토니아에 배당된 목표는 8,600쌍 축복이었다. 그 목표를 8월 말까지 달성해야 했던 것이었다. 이를 위해 리투아니아에서 실시한 2박 3일 지도자 축복 세미나에 각계각층 지도자 27명을 참석시켰다.
감명을 받고 돌아온 지도자들이 정부 기관을 앞세워서 축복 행사를 협력하며 추진해주었다. 기관이 인원 동원과 문화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우리는 축복식을 집례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만으로는 몇 개월 내에 8600쌍을 축복하기란 불가능했다. 우리는 2인 1개조로 10여 개의 팀을 구성하여 Door to Door 축복활동을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8월 9일 참부모님께서 천지부모천주안식권을 선포하기 전까지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식구들이 수고를 많이 했다. 아침 6시부터 시작된 하루 일과는 매일 자정을 넘어 1시 혹은 2시에 종료되었다. 발이 부르트고 입이 부르트고… 나이 어린 국가메시아 자녀들까지 동원되어 활동했다.
우리가 좋은 성과를 올리자 인접국가 핀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선교사들이 찾아와 방법을 익힌 후에 돌아가 좋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축복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 활동의 방향을 세 가지로 정했다. 첫째는 지속적인 축복 활동과 중심식구 확보, 그리고 순결활동을 위해 <세계와 나>를 중고등학교로 보급하는 일이었다. 순결교재 보급을 위해서 러시아계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초청 세미나를 수차례 실시하였다. 한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좋은 교재를 만들어 주신 문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이 교재를 통해 청소년들의 희망찬 미래를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소감을 발표했다. 우리는 세미나에 참석했던 교장 선생님을 통해 교사초청 세미나를 수차례 열어 70여개의 러시아계 학교에서 우리의 교재를 이용하여 인성교육을 실시하는 큰 실적을 거두었다. 그런 한편 교재를 에스토니아어로 번역하여 에스토니아 학교로 확장시켜나갔다 .
참부모님께서 국가메시아를 파송하시면서 “네 가정이 한 집에서 화목하게 살면서 아담가정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세상에 본을 보여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국가메시아 3가정이 자녀를 데리고 임지에 도착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일 중에 하나는 비자에 관한 것이었다. 에스토니아에는 한국인에 대하여 15일간 무비자 입국을 허락하고 있다. 비자를 받아도 15일에 한 번씩 출입국을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그러므로 2년 동안 15일에 한 번씩 이웃 나라를 갔다 왔다해야만 했다.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그것도 혼자 몸이 아니고 5인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했으니 말이다. 가족이 함께 참부모님의 말씀에 절대복종하는 고통을 겪었다. 지금 회고하니까 그것도 큰 참사랑이고 은혜의 추억이다.
1998년 10월에 나는 아내와 함께 국가 메시아 판타날 40일 수련과 축복가정 40일 수련회에 참석하였다. 은혜롭게 40일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서 문제가 생겼다. 출입국관리소에서 나의 입국을 저지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어서 핀란드로 가서 그 사실을 참부모님께 보고 드렸다. 보고를 들으신 참부모님께서는 “어느 나라로 가든지 네 스스로 결정을 해라. 그러나 반드시 네가 가고자 하는 나라의 한국 책임자들과 상의를 해라.”는 지침을 주셨다.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는 박중현 회장님의 도움으로 입국비자를 받아 1999년 3월 2일에 미국에 도착했다.
11. 창살 없는 감옥
나는 미국에서 공직을 맡고자 했으나 UTS에 입학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참부모님의 윤허를 받고자 이스트가든을 방문했다. 그러나 참아버님께서는 “국가메시아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공부보다 중요해!”고 하시면서 단호히 불허하시었다. 그래서 경제적 기반을 닦아 임지국가를 돕자고 방향을 정한 후에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일했다. 공사장, 주얼리 가게, 세탁소 등으로 다니면서 일했다. 아내는 식당에서 반찬을 만드는 일을 하며 힘겨운 생활을 했다. 남에게 얽매여 쉴 새 없이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그 때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사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어느 날 참부모님께서 아내가 일하고 있는 가게를 찾아주셨다. 도시 구석에 있는 작은 가게였다. 참부모님께서 방문하실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참부모님의 방문은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2004년 5월 5일 쌍합십승일을 선포하신 날에 우리는 틈틈이 모은 것과 모기지를 내어 음식 캐터링 가게를 오픈하였다. 가게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아내의 솜씨 덕분이었다. 얼마 후 모기지를 다 갚고 집도 구입했다. 참부모님을 모시고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에스토니아 대회와 참부모님 가정 12자녀 방문 대회에 필요한 경비 조달도 할 수 있었다.
작은 일본 식당 하나를 더 매입하고 운영하여 이익금을 에스토니아로 보냈다. 그러던 중에 크나큰 시련이 다가왔다. 아내가 설암(舌癌)에 걸린 것이었다. 아내는 만 1년간의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2011년 천력 5월 17일에 성화하였다. 나는 아내의 원전 비석에 “오직 한마음으로 뜻 위해 살다.”라고 써넣었다. 그녀의 삶을 한마디로 응축한 글귀라 생각된다. “나는 당신만 있으면 되요.” 이는 아내가 살아있을 때 자주 내게 하던 말이며, 내가 마음껏 뜻길에 전진할 수 있게 응원해 주던 말이었다. 2023년, 아내의 성화 12주년을 기념했다. 아내 없이 12년을 살아오면서 비석에 새겨진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도 그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12. 버킷리스트
덤으로 사는 생, 뜻 위해 바치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왔지만 자랑할 만한 실적이 없어 부끄럽다. 그래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첫째, 성지 복원이다. 성지 복원이란 참부모님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와 안주의 환경 복원를 일컬음이다. 1991년에 북한을 방문하신 참부모님께서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방문하셨다가 돌아오신 후 식구집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내가 차라리 고향에 가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삭막하게 변해버린 고향의 환경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언젠가는 통일가의 젊은 용사들을 모아 반드시 고향을 복원하겠다.” 이 말씀이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젊은 용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유승미 화가에게 참부모님의 고향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을 방 안에 걸어놓고는 성지 복원에 대한 꿈을 키우며 함께 할 동역자를 찾기 시작했다. 8명이 동의하여 그들과 함께 워싱턴 DC에 One World Peace Association을 설립하고 IRS로부터 501-C를 받아놓았다. OWPA의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과 튀르키에 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 캠페인을 벌여 지원하였다. 그러한 활동은 부수적인 것이며 핵심사업은 성지의 복원이 목표이다. 그날이 오면 산에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환경을 복원하여 세계평화공원조성의 토대를 구축할 것이다.
둘째, 지속적인 선교지원이다. 2018년 11월에 쿠바의 산티스피리투스 지역을 방문하였다.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는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자 그곳을 임지로 정하고, 지속적인 정성과 경제적 지원을 해왔다. 2021년에는 조그마한 주택을 매입하여 교회로 사용토록 했다. 쿠바에서 하늘편 소유의 첫 부동산을 봉헌한 것이기에 의미가 깊다. 앞으로 아름다운 성전과 주민들을 위한 생활복합센터를 짓고 그곳에 신종족을 편성할 것이다.
셋째, 후진 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이다. 이를 위해 아내의 성화 10주년을 기념하면서 S-YOUNG FOUNDATION 을 설립하였다. 나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아직은 미미하나 설립자로서 많은 펀드를 만들어놓고 자녀들에게 운영토록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정성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련다. 꿈은 이루어진다. 요즘 나는 “내 인생에 노년은 없다. 청년의 기백으로 중단 없는 전진!”을 외치며 하루를 출발한다. 오직 한 마음으로 생이 다하는 날까지 뜻 위해 살련다.
2023년 7월에 쓰다.
첫댓글 김남순님 댓글
오직 한마음으로
뜻위해살아오신
이광수목사님(노수영)
자서전을감명깊게
한눈에잘~ 읽었습니다^^
어찌나생생리포터가
눈물겹도록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화천교회에서목회하실때저희가정도화천
7사단8연대중대장
시절을결코잊지못하고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뜻앞에자랑스럽고
성공하신목회자로
승리하셨습니다~
또다시한국에오시면
뵙기를희망합니다
늘~건승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