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8일 포항남교회 중고등부 여름수련회 설교>
죄의 심각성과 구원의 주권적 은혜
본문 : 창세기 4장 1-10절, 25-26절
도입
성경의 중요한 주제인 죄와 구원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피기를 원함. 대개 중고등부 수련회하면 어떤 비전이나 멋있는 추진력 등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바로 죄와 구원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교리는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핵심은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것과 구원하심이 오직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실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으며 또한 우리가 비록 처음 보았지만 동일한 신앙 고백 안에서 성령 안에 하나인 자임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람.
등잔 밑이 어둡다
옛 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이 말을 중고등학생들은 어떤 때 씁니까? 선생님 바로 앞에 앉으면 제일 안 걸린다 뭐 그런 말로 쓰이죠? 원래 뜻은 그런게 아닌데도 그렇게 쓰입니다. 물론 선생님 바로 앞에 앉으면 졸든 딴짓을 하든 잘 안걸립니다. 단지 선생님의 침이 많이 튄다는 것 말고는. 이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등잔이 너무 밝다 보니까 그 밝음 때문에 바로 밑이 매우 어둡게 보인다는 그런 뜻 말입니다. 태양이 너무 밝으면 그 주위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좀 다르게 적용해 보면, 이쁜 여자가 길에 지나가면요 그 옆에 있는 좀 못생긴 여자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에 자기가 좀 못생겼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이쁜 친구 옆에 같이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등잔처럼 이쁜 친구 때문에 자신이 등잔밑의 어두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
등잔밑과 같은 본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에 있어서 중요한 본문입니다만,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사건 때문에 등잔밑의 어두움과 같은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 말고도 창세기에는 소외당하는 본문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 본문은 우리가 몇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본문이지요. 역대기나 예레미야 같은 성경에 비교한다면야 이 부분은 우리에게 환영받는 본문일지 모릅니다. 보통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 대개 창세기부터 시작하거나 마태복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창세기 10장 정도까지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요. 몇 달 전에 이제 저희 학교에서 히브리어 쪽찌 시험을 쳤습니다. 그때 창세기 1-3장까지가 본문이었는데요, 우리 동기 중에 한 전도사님은 공부도 별로 안했는데 너무 시험을 잘 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루는 물어봤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공부도 별로 안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시험을 잘 칩니까?” 그랬더니 그 전도사님이 말하더군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창세기부터 시작하다 보니까 창세기 1,2,3장 정도는 달달달 외워서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의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자주 읽기도 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3장의 중요한 본문에 가리워서 등잔 밑의 어두움과 같은 본문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실 창세기 3장만큼이나 중요한 본문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창세기 3장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과 우리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왜 그렇게 중요하느냐? 그것은 창세기 3장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만큼이나 창세기 4장 역시 중요한 본문입니다. 창세기 4장은 3장을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본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리고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창세기 4장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하는 그런 문제를 뛰어넘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것의 시작
2003년에 나온 책 중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빌 브라이슨’이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그 책을 보면 제목은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인데 실제로는 별로 우주와 지구에 대한 역사 말고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거의 모든 것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입니다. 흔히 창세기 하면 ‘시작’을 다루는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우리는 흔히 ‘세상의 시작’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창세기(創世記) 라는 말 자체가 ‘세상의 창조’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1절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단지 세상의 시작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창세기는 ‘거의 모든 것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세상, 사람, 가정, 교회, 죄, 죽음, 은혜, 구원, 살인, 이스라엘’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창세기 1-3장에만 해도 ‘세상, 사람, 가정, 교회, 죄, 죽음, 은혜’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을 곁들일 것).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죄의 결과의 첫 번째 모습을 다루고 있는 본문입니다. 죄의 결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 그 죄가 인류 전체에게 어떤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너무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 중에 “죄의 심각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동시에 은혜의 결과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점점 발전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교의 제목으로 표현하기를 “구원의 주권적 은혜”라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의 시작과 은혜의 결과의 시작을 잘 비교하면서 오늘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죄의 심각성과 구원의 주권적 은혜”에 대해서 살피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죄의 첫 열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범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을 서로에게 그 책임을 돌렸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시킨 것이라고 하였고, 하와는 뱀의 유혹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범죄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은 단순하게 열매 하나를 먹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자기를 지으시고 자기에게 여러 가지 복을 주신 분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먹은 실과는 일종의 왕의 옥쇄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이러한 죄의 결과는 인류 역사 전체에 미치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그 중에서 하와에게는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서는 저주 뿐만 아니라 축복을 하나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급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우리가 꼭 암송해야 할 중요한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저주하시면서 동시에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인 여자의 후손은 후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입니다. 여기에서 ‘여자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귀중한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창세기 3장 15절을 일컬어서 “원시복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이후에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정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들을 구원할 어떤 약속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을 동시에 받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나서 살게 됩니다. 그 첫 부분이 바로 4장 1절입니다.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가인’입니다. 그런데 1절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가인을 낳은 아담과 하와는 그 가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아들로 보았다고 하는 건데, 이건 바로 ‘여자의 후손’인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와 축복을 동시에 들었던 그들은 무엇보다도 축복에 대하여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온다고 했는데 과연 그게 지금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 이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런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교만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진 것에 대해 자랑하는 듯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부부는 또 다른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은 바로 아벨이었습니다. 이 두 자녀가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일입니까? 바로 최초의 살인 사건입니다. 8절에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자신이 낳은 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여버렸습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쇼?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그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모님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지었던 죄의 결과가 이런 식으로 차츰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사건 뒤에 갑자기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소개되는 이유는 바로 아담의 타락이 가져온 죄의 심각한 부패성을 보여주려는 데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 사건은, 아담 안에서 초래된 죄가 어떻게 인간을 확실하게 재배하는 권세로 작용하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의 관념이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는 힘이요, 무서운 권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는 단순히 인간의 윤리적 영역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것을 바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포항남교회 중고등부 여러분~! 죄에 대해서 너무 둔감하게 생각하지 마십쇼. 죄 그까짓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 매우 비참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온 죄는 우리에게 지금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죄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장 “사람의 타락과 죄와 그 벌에 관하여”라는 부분을 보면 죄의 결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과 부분이 전적으로 더러워지게 되는 것이며, 죄는 그것 자체의 성질상 죄인에게 죄책을 가져옵니다. 그 죄값으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그 법이 저주에 매여 있어서 그 결과 영원한 모든 비참을 동반하는 죽음 아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여러분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과 생각과 모든 것이 더러워져 있습니다. 거룩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우리가 죄와 거짓의 욕망으로 충만해져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거짓과 죄의 욕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깜짝 즐거움을 더더욱 기대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간간히 보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비로소 자신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던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형제간의 싸움을 본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살인사건을 본 것이 아닙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하게 자신들의 삶을 지배해 가고 있는 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밖에 없는 사건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을 선악과를 따먹는 유혹으로 인도하였던 그 사단이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하게 될 아벨을 살해하는 가인을 유혹하고 있음을 봄으로써 아담 부부에게 한번 들어온 죄가 얼마나 온 인류를 구속하게 될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서 가볍게 생각했던 아담과 하와는 이제 그 아들들의 큰 사건을 통해서 죄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똑똑히 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살인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먼저 미혹함으로 범죄케 한 사단이, 이번에는 아담의 자녀인 가인을 도구로 삼아 재차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시도를 봄으로써 자신들이 지은 죄의 심각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죄는 이토록 비참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죄에 대하여서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죄에 대한 민감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기도 하지만,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다기 보다는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에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늘 우리는 경계해야 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설교자의 외침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하는 설교자의 외침 앞에 늘 겸손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포항남교회 중고등부 여러분~!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죄가 여러분을 온통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를 깊은 유혹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의 존재는 비참합니다. 인간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오직 절대적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주실 그 참된 구원만이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사람은 비참한 존재요, 사람에게는 죄 이외에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절대적인 은혜를 잠잠히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계속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2.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앞서 말씀드릴 때에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낳고는 뭐라고 했다고 했습니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가인이 ‘여자의 후손’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후손은 가인이 아니라 아벨이었습니다. 그들이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가인은 정작 진짜 여자의 후손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아벨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 오게 될 것인데, 가인은 그를 죽여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은 정말로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하여서 교만해지고 완악해 지고, 아직도 그 죄의 심각함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을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써 인간을 더더욱 낮추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한없이 낮추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만 올 수 있는 은혜를 기다리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절대주권적인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가인이 여자의 후손일 것이라는 그들의 교만한 기대를 꺾으심으로써 “너희들이 아무리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라고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하시는 분이지만 “한 사건”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과 역사라는 방편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물론 우리의 순종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은혜를 위해 우리가 치른 희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통로이기는 하지만 원천은 아닙니다. 은혜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속죄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적인 대속의 공로를 기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1)
사랑하는 포항남교회 중고등부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은 죄의 노력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뭐가 이루어집니까? 공부를 죽어라 하면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착각하지 마십쇼? 여러분들이 백날 공부해 보십쇼.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오히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인간의 무지함을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절대로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해보십쇼?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아직 죄가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보다 공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통로인 교회를 학원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여러분들이 답답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학원이 교회보다 중요합니까?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이럽니다. 학원가야 되는데요. 어이가 없습니다. 답답합니다. 학원은 가야 하는 곳이고 교회는 안가도 되는 곳입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면 여러분이 정말 똑똑해 지고 여러분이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교만함만 높아질지 모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오직 의지함으로써 겸손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우상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단지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죄인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벤자민 B. 워필드 라고 하는 세계 3대 개혁주의 신학자 중 한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하는 전능과 전능하신 사랑 뿐이다.......죄인이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능하신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전능하신 은혜 뿐이기 때문이다.”2)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은혜를 베푸실 절대자, 그리고 그가 베푸실 절대적 은혜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죄인이기에 더욱 구원이 필요하게 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신뢰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은혜가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셋을 통한 은혜 회복
가인이 아벨을 죽여버림으로써 아벨을 통해서 오게 될 여자의 후손의 계보가 끊겨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실 것인데, 이제 아벨이 죽어서 그 계보가 끊겨 버렸습니다. 옛날에 조선시대에 아주 심각한 죄, 특별히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역적행위를 한 사람에게 내리는 벌이 무엇입니까? “삼족을 멸하라”라는 벌입니다. 아마도 사극 같은데서 한번쯤은 보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측, 어머니측, 그리고 아내측 사람을 다 죽이라는 벌로서 아주 무서운 벌입니다. 왜 무서운 벌입니까? 씨를 말려버리려는 벌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한 것 때문에 아주 그 씨를 말려버리는 벌이라서 매우 무서운 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가인이 해 버렸습니다. 아벨을 죽임으로써 여자의 후손의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신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 가운데 두 번째 본문을 한번 더 자세히 읽어보기를 원합니다. 25-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아벨을 대신하여 새로운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셋’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의 범죄와 아벨의 죽음으로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기대’는 없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아담부부로 말미암아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진행됩니다. “셋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에노스요, 그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고로 말씀드리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말은 예배드렸다는 말의 숙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대를 계속해서 이어가게 하셨고 그들로 말미암아 예배를 받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끊긴 줄만 알았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 그러나 그것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은 계속해서 성취되어가고 있었고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어져서 결국은 셋을 통한 약속 계승으로 이어졌으며, 그 약속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에도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 누가복음 3장 38절에 보면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셋과 에노스의 후손으로 참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자기가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이처럼 끊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후손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하여 비참해진 인간을 위한 놀라운 성취였습니다. 아담부부의 죄가 가인에게 미쳤던 그 극심함을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극복이 되어졌습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로마서 5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것으로 인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는데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는 그 첫 열매인 가인의 범죄함을 통해서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첫 열매를 뒤엎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분의 역사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죄로 인하여서 죄가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뒤덮은 그 무게보다 은혜의 무게가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를 죄의 끊임없는 족쇠에서 해결해주실 은혜의 구속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로마서 5장 17절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결론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은 죄는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결과물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또한 이 가운데 아직도 참된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영향력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1) 예수 안에서 참된 회심, 다시 말하면 오직 예수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고백으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온전히 의지하는 자라고 한다면 비록 죄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 죄를 빨리 빨리 깨닫고, 또한 그 죄가 얼마나 위험하며 나를 해롭게 하는지, 또한 그 죄가 얼마나 심한 것인지를 알고 하루 빨리 죄에서 돌아오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 가운데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2) 그러나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전혀 예수 믿는 사람과 같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릅니다. 참된 회심이 없는 사람, 그래서 말로만 예수 믿는 것이지 실제로 그 삶에서 예수 믿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산다면, 예수님을 그저 나의 수단으로 삼고 어쩌다 한번씩 필요할 때 써먹는 도구로만 생각하고, 내가 급할 때는 잠시 제쳐 놓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그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마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만 되면 오는 사람 수준으로 교회를 가볍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죄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이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왕노릇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포항남교회 중고등부 여러분~~! 가인에게 있는 사망이 아니라 셋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생명을 좇아 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왕노릇하게 하시는 그 진리를 좇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서 우리 영혼에서 늘 흘러나오는 더러운 죄를 씨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필요를 깨닫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용서를 위하여 날마다 무릎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3) 아멘.
1) 김남준, “죄와 은혜의 지배”,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5), p.64.
2) 벤자민 B.워필드, 구원의 계획, “The Plan of Salvation”(Grand Rapids: Eerdmans Publ.Co., 1977),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p. 52.
3) Richard Sibbes, The Bruised Reed and Smocking Flax, "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 전용호 역, (서울:지평서원, 1999) p.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