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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크고 작은 뜻이 없다'
“무엇이 스님의 큰뜻(大意)입니까?”
“크고 작은 것이 없다(無大無小).”
“바로 그것이 스님의 큰 뜻 아닙니까?”
“털끝만큼이라도 있으면 만겁토록 한결같지 못하다(萬劫不如).”
조주선사의 큰 뜻(大意)이 무엇인지 물었다. 큰 뜻이란 조주의 가풍, 또는 조주란 말과 같은 의미이다.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느리고 빠르고, 아무것도 나누어 생각할 뜻이 없다. 그러자 그 스님,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는 그것이 바로 스님의 큰 뜻이 아닙니까?”라고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물었다.
“만약 털끝만치라도 있으면 만겁토록 한결같지 못하다.” 아무 뜻도 없고 그 어떤 걸림도 없는 게 선사의 마음인데 무슨 큰 뜻이고, 작은 뜻이고 생각하고 헤아리는 게 있겠는가? '여여(如如)'란 한없이 한결같아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수백생을 한결같이 지낼 만큼 조그만 찌꺼기(습기)도 남아있지 않고, 있고 없다는 생각은 티끌만치라도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156. '나오면 죽는 것'
한 스님이 물었다.
“만법은 본래 한가한데 사람 스스로가 시끄럽다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나오는 족족 죽는다(出來便死)."
'만법은 본래 한가하다.'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 '만법은 오직 식이다(萬法唯識)'등등 불법(法)에 대한 이야기는 구구절절하다. 허공이고, 땅이고 아무 말이 없고, 시비하지도 않는데 사람들 스스로가 시끄럽다, 이런 말도 한다. 누구의 말이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조주선사에게 누구의 말인지 물었는데“나오는 족족 죽는다(出來便死)."라고 대답한다. 질문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대답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것을 뛰어넘어야 선사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한데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무엇이 나오면 바로 죽는 것일까?
모든 법이 그렇다.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조금 기다리면 모두 사라진다. 사람 몸뚱이도 시시각각 생멸(生滅)을 오가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 보통 사람의 몸은 60조의 세포를 가지고 있다 하는데, 3~4년이 지나면 한 사람의 모든 세포가 한 번씩 바뀐다고 한다. 매초 몸의 세포는 생겼다가 죽고, 죽었다가 다시 생기는 것이다.
번뇌 망상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괴로운 생각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진다. 조주 말대로 나오기만 하면 문득 죽어야 한다, 비록 번뇌가 보리요, 부처라 할지라도.
그러나 이것은 본래 나온 것이 아니다. 인연으로 났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 무생(無生)이다. 나지 않은 것을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157. '이뭣꼬?'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라고 한 말씀은 부정논법(斷語)입니다. 무엇이 부정논법 아닌 것입니까?”
“하늘 위, 하늘 아래 나만이 존귀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
저 위에서 이뭣꼬? 화두의 맛을 한번 봤다.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마조대사가 처음에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卽佛)' 라고 설했다가 나중에는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법문을 하였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부처도, 물건도, 중생도 아니다'로 발달한 것이다. 여러 긴소리 하지만 마음 하나 알자는 소식이다.
위 문답에서는 한 스님이 아니다, 아니다 하는 부정논법은 그만두고 긍정적인 한마디 해달라고 조주에에게 간청한다. 부정논법 아닌 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조주는 대답한다.
석가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오른손은 하늘, 왼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읊었다.' 하늘, 땅 온 누리를 둘러봐도 존귀한 것은 나뿐이구나!' 갓난애가 이렇게 자화자찬할 수 있었을까? 또 이 말은 석가가 자신을 미화하여 말한 것인가. 우리 마음이 온 누리에 두루 미치는 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말로만 이해해서 무엇하리오. 이뭣꼬? 화두를 끌어안고 잠을 자는 게 좋다.
굳이 명상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딴생각 모두 버리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이뭐꼬'를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이면서 잠을 청해 보라. 나중에는 잠도 모두 달아나 버리고 이뭐꼬? 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결국엔 길이 스스로 길을 찾을 것이다.
158. '비로자나의 상호(相好)'
“무엇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圓相)입니까?”
“나는 어려서 출가한 이후로 눈병을 앓아본 적이 없다. (不曾眼花).”
“큰스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십니까?”
“부디 그대가 비로자나의 원만한 상호를 길이 보기를 바란다.”
우리 자성(自性), 마음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맑고 깨끗한 진리의 몸, 즉 청정법신(淸淨法身)을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고대 인도어로 비로자나불(佛)이라고 한다. 그러니 저 하늘에 있는 것처럼 또는 석가처럼 육신을 가진 부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중생 모두가 마음의 근원(바탕)에 간직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깨닫기 전에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미신 혹은 신화, 수수께끼 같이도 느껴지는, 그렇지만 모든 부처, 조사, 선사가 증명한, 이런 온갖 수식어를 붙이고 옛말로써 입증하려고 해도 도저히 불가사의 하다시피한, 한 말로 옛 고향이라고 한다. 이것만 알면 되는데...
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원만한 상호(相號)가 무엇인가? 보통 부처는 32상(相) 80종호(種號)를 갖췄다고 한다. 거룩한 생김새와 높이 쌓은 덕(德)을 존경하여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 스님은 비로자나불이 무슨 형체가 있는가 하여 상호를 묻고 있지만 형상이 있는 건 아니다.
조주는 "내가 어려서 출가한 이래 아직 한번도 눈병을 앓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안화(眼花), 눈꽃이라고 하는 것은 다래끼 같은 눈병에 걸렸을 때나, 눈을 비비면 혹은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눈앞에 별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헛것이 보이는 것을 말한다. '나는 허깨비 같은 환상을 믿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비로자나불의 원만 상호란 허깨비 같은 환영이라는 조주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수행자는 도리어 선사에게 질책하듯 말한다." 큰스님은 도대체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합니까, 망치려고 합니까?” 조주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그대는 부디 환상의 부처 상호를 소원이 없을 정도로 오래도록 보거라.”
금강경 사구게에서 말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159. '불조(佛祖)가 전하는 것'
“부처와 조사(佛祖)가 계실 때에는 부처와 조사가 서로 전하지만 부처와 조사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누가 전합니까?”
“예나 지금이나 모두 내 일(分上)이다.”
“그 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도 모두 생사에 속하는 것이다(箇箇總屬生死).”
“조사 스님들을 매몰시키지 마십시오.”
“그럼 무엇을 전하는가?”
석가는 마하가섭에게, 가섭은 아난에게... 달마는 2조 혜가에게...5조 홍인은 육조 혜능에게, 이렇게 전해주고 전해줘 선(禪)의 불법이 계속 이어져 왔다. 이제 부처와 조사 모두 천화한 후에는 누가 전해줍니까? 이 스님 참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다.
조주는“옛날에도 지금도 그것은 모두 내 일, 내 역할(分上)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이 말은 '옛날이건 지금이건 모두 내가 전한다.'는 뜻이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멍청한 질문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조주 같은 선사가 후배들에게 전해 명맥을 이어가게 하겠지만 옛날에도 자기가 전했다니 청정법신을 깨치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전한다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주는' 그것들도 모두 생사에 속하는 것이다(箇箇總屬生死).”고 답한다. 이 수행자는 지금 열을 받았다. 아! 상식적으로도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서 참선하고 도(道)를 닦는다고 들었는데, 조주는 생사에 얽힌 것을 전한다고 하니 열 안 받게 생겼는가? 하하!
그 말은 역대 조사 스님들을 모두 매몰시키고,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지적한다. 조주의 다음 말은? “그럼, (생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전하는 건가?” 당연히 생사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가? 잘 의심해 보라.
160. '범성(凡聖)을 다했을 때'
한 스님이 물었다.
“범(凡)과 성(聖)을 다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대는 부디 고승 대덕(大德)이 되거라. 나는 불조께 폐나 끼치는 자이다.”
확실히 깨달은 자는 '범부도 성인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고도 하지 말고, 성스러운 부처라고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머리에 이따위 모습(相)은 한 티끌만치라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중생, 부처라는 생각이 다 없어지면 어떤 경지에 도달합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그대는 부디 고승 대덕(大德)이 되거라 '대덕(大德)이란 큰 스님, 조사, 선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경지라면 당연히 큰 스님으로 불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조주는 뒷말에 왜' 나는 부처, 조사들에게 폐나 끼치는 자이다.”라고 했을까? 조주는 병에 걸렸음을 단언한다. 겸손도 지나치면 병이다.
161. '조주의 허물'
한 스님이 물었다.
“멀리서 조주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는데 어째서 보이지 않습니까?”
“내 허물이다.”
이번 스님은 대담하게 '멀리서 조주의 이름을 듣고 찾아와 보니 조주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말로 조주를 못 보면 깨친 사람이다. 조주의 답. “다 내 허물이다." 아니, 그 중의 주둥이를 닥치게 하지 못한 내 죄이다.
162. '그대 땅을 디뎌라.'
한 스님이 물었다.
“밝은 달이 공중에 떠 있을 때, 방안의 일(室中事)은 어떻습니까?”
“나는 출가하고부터 살 궁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큰스님께서는 금시(今時)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병도 못 고치면서 어찌 남의 병을 고치겠느냐?”
“제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는 건 어찌합니까?”
“의지한다면 땅을 디디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동쪽이건 서쪽이건 그대 마음대로 해라.”
저기 앞에서도 나왔다. 하늘에 밝은 달이 항상 떠 있으면 마음공부에 좋은 징조이다. 그때 우리 마음 안의 일은 어떨까? 조주는 스님이 된 이래 내 마음의 살림살이에 대해선 걱정해 본 적도 없다고 답한다. 알음알이(識)라곤 한 점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다음 이 스님의 질문에서, '금시(今時), 지금의 시간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의문스럽다. 마음공부에서 현재를 위한 일은 당연히 본분사(本分事) 이다. 우리 자성, 마음의 근원을 밝히는 일 아니겠는가?
조주는 짐짓 '내 병도 내가 못 고친다. 다른 모든 사람의 병을 어떻게 내가 고치냐?'고 넋두리한다. 그 수행인은 '그러면 제가 의지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다시 울상을 짓는다. 아이구! 창천(蒼天), 창천(蒼天). 이렇게 순진한 수행자들이 많다.
이런 자들이 또 깨치기는 제일 잘 깨친다. 조주의 다음 말에 퍼뜩 눈을 뜨기 바란다. “의지한다면 땅을 콱 딛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동쪽이건 서쪽이건 네 마음대로 해라.” 어디를 가든 그곳임을 알아채야 한다. 헐!
163. '둘이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 마음이 헤아리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누구를 헤아리는가?”
“자기 자신을 헤아립니다.”
“둘이란 없다(無兩箇)”
'마음 마음이 헤아리지 않을 때'는 아무 분별하는 마음이 들지 않고, 머리가 맑고 명쾌해질 때가 아니겠는가. 그럴 때는 어떻습니까? 그런데 조주의“누구를 헤아린단 말이냐?”는 질문에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한다. 조주는“둘은 없다(無兩箇)”라고 답했는데 잘 나가다가 어디서 일이 틀어버린 걸까?
헤아리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헤아린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조주의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누구를 헤아린단 말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라고 했다면 조주의 반응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조주의“둘이란 없다(無兩箇)”는 자신이요, 자신이 아님이요는 모두 넋두리고, 진실은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이라는 말이다.
164. '끝과 겉을 보지 않다'
한 스님이 물었다.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선사가 물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은 무엇이냐?”
“물병입니다.”
“훌륭하다. 끝과 겉을 보지 않는구나(不見邊表)."
‘변표(邊表)’란 말이 있는데, 끝, 가장자리 변(邊)에 거죽, 겉면이란 뜻의 표(表)가 합쳐져 사물의 양 끝과 겉을 말한다.'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을 때'는 사물이나 마음의 안팎도 보지 않고, 겉과 끝도 보지 않고, 무심의 경지에서 직관(直觀)으로 보아 아무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럴 때는 선적으로 매우 좋은 때 아닌가.
그럴 때는 조주선사처럼 물병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뭔가?'라고 물으면, 그냥 물병이라고 대답하면 글러버린다. 물병이 물병인지 몰라서 조주가 이것이 뭔가? 라고 물었겠는가. 선(禪)은 그런 게 아니다. 그래도 분수 밖은 아니다.
조주의 “그래 참 잘 했다. 끝과 겉을 보지 않는구나(不見邊表)."는 말은 반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놈아! 그렇게 사물을 분별해서야 어디에 쓰겠느냐?’ 그렇다. 아직은 물병은 물병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인가? 왜 물병은 물병이 아니라고 하는가? 깊이 탐구해야 할 의문이다. 뱀의 다리를 붙이자면, 나중에는 물병은 그냥 물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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