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쯤 된 듯싶다. 불교 신도인 한 지인으로부터 『김교각(金喬覺) 스님과 지장사상(地藏思想)』이란 책 한 권을 건네받았다. 훑어보니, 스님은 신라의 왕자로서 출가, 중국에 건너가 정진 끝에 생불(生佛)이 되었다는 신이한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절에 가면 부처님께 절하고, 교회에 가면 하느님께 절하는 정처 없는 무신론자가 등신불 이야기며 지장보살 이야기를 읽는다고 별다른 감흥을 가졌을까. 아, 이런 분의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그리곤 책을 덮었다.
그 후로 더러 스님의 이름을 대하는 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전날에 읽은 책의 앞뒷면에 그려진 고졸(古拙)한 삽화뿐이었다. 벼랑 위에 얹힌 제비집 같은 암자,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노승, 열반 후에도 변하지 않은 육신을 보고 놀라는 대중들... 중국에 가면 아직도 이런 고승이며 신선들이 사는 아득한 산들이 있을지 몰라. 예나 지금이나 내게는 산 자체가 더 관심을 끄는 것은 매일반이다.
지지난 해 중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무렵, 우연히 구화산이 내가 머물 남경(자매대학의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1년간 체류)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여, 기회 닿으면 구화산을 찾아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 와서 보니 제 머무는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알았다. 열악한 교통 환경과 언어소통 문제가 가장 골칫거리였다.
다행히 남경에는 구화산행 직행버스가 하루 한 차례 있음을 알았다. 산까지 두세 시간이 걸린다는 정보도 얻었다. 봄날의 어느 주말, 내 강의를 듣는 중국 학생 샤오비옌에게 동행을 청했다.
새벽, 행장을 꾸려 교문을 나섰는데 소군이 우유며 만두를 사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문 버스터미널. 나로서도 처음 대하는 중국의 시외버스 터미널인데 말 안 통하는 외국인은 도저히 손 써 볼 수도 없게 돼있다. 표 파는 창구는 있지만, 행선지며 시간, 요금 등을 적어 놓은 안내판 하나가 없다. 창구에다 머리를 대고 가고자 하는 장소를 말하고 달라는 요금을 주는 식이다. 승차장은 또 전혀 엉뚱한 곳이다. 승차장에도 안내판 하나 없기는 마찬가지다. 여직원이 출구에 지켜 서 있다가 어디어디 갈 손님 나오세요, 소리를 치면 우르르 몰려가는 형국이었다. 그 말소리를 알아들으려면 몇 년을 이곳에서 살아야 될까.
20인승쯤 되는 미니버스가 정시에 출발하는 것이 신통했다. 그런데, 앞 의자 덮개 자락에 적혀있는 남경-구화산의 소요시간을 보곤 기가 막혔다. 7시20분 남경 출발, 오후 1시 10분 구화산 도착이란다. 장장 6시간이 아닌가! 중국 아이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왕복 시간이 아닐까요? 했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 편도 시간이었다. 넉넉잡아 3시간이면 된다고 한 여행사 사람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250킬로미터, 서울서 김천 가는 거리 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한없이 가야 한단다. 아찔한 느낌이지만, 차를 탔으니 달리 방도가 없다. 죽으라고 가보자, 정말 그 심정이었다.
마안산(馬鞍山) 시를 지나면서부터 시골 풍경이다. 들판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펴 있다. 세 시간을 달려, 무호(蕪湖) 외곽에서 잠시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주유소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또 남릉(南陵)을 지났다. 벌써 네 시간을 달렸는데 사방 어느 쪽으로도 낮은 산 하나를 구경하지 못한다. 양자강이 만들어낸 대평야가 이렇게 광활하다. 지칠대로 지쳤다. 여태껏 나는 이렇듯 불편한 버스를 이렇게 오래 타본 일이 없다. 어찌 사지가 뒤틀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지 않겠는가. 대망의 산을 구경한다는 기대보다는 내일 다시 이 길을 되돌아 올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 청양(靑陽) 시에 가까워지면서 비로소 산들이 나타난다. 시내를 감으며, 자락마다 마을을 앉힌 적당한 높이의 산들. 내 땅의 산야를 보는듯한 반가움이 있다.
이제 다 왔다! 나름의 요량을 하며 반대편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홀연, 희붐한 연무 속, 천상에 걸린 기이한 산봉들의 형자가 눈에 잡힌다. 구화산이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중국에서는 흔히 4대 불교 성지(聖地) 산이 운위되는데 그것이 곧 오대산(五台山), 아미산(蛾眉山), 보타산(普陀山) 그리고 구화산(九華山)이다. 이들 산들은 보살사상을 일으키고 심화 발전시킨 근원지다. 이 불산(佛山)들 마다 추앙하는 보살이 다른데 구화산은 지장보살 사상의 근원지이며 그 확대 보급처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간, '지옥세계의 부처님'으로 신앙되는 보살이다.
빼어난 산인지라 구화산은 일찌감치 수많은 명류들을 끌어들였다. 그 전까지 구자산(九子山)으로 불리던 산 이름을 구화산으로 고친 이가 이백(李白)으로 전해지며, 두목(杜牧)과 왕안석은 인근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이 산을 찾아 다수의 즉흥시를 남겼다. 왕양명은 구화산에 대한 시작(詩作)만도 55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원도 산간 마을처럼 한적한 구화산 시외버스 장류장에 내린다. 구화산 산봉들은 이곳에서도 손에 잡힐 듯 빤히 쳐다보인다. 봉우리들은 크게 두 무리를 지어 있는데 이편에서 보이는 산들이 전산(前山)이다. 우람하기보다 기이함이 많다. 훨씬 덩지가 큰 영암 월출산을 보는듯한데 조밀함은 월출산보다 덜하다.
호객꾼에게 이끌려 길가의 한 작은 식당에 들어간다. 홀에 테이블이 둘뿐인 주막. 그나마 깔끔한 것이 다행이다. 요리를 시키고 빼갈 한 병을 소군과 함께 마신다. 피곤을 잊는 데는 이런 묘약도 없다. 이어 승합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오른다. 비로소 장쾌한 산야의 조망을 얻을 수 있다. 해발 7, 8백 미터는 올랐을까. 갑자기 산중 번화가가 나타난다. 사찰들이 이마를 맞대 있고, 규모 있는 호텔이며 상점들도 즐비하다. 관광객들의 내왕도 많다. 예부터 산중불국(山中佛國)이라 일컬었던 구화가(九華街)가 이곳이다.
차를 내려, 기원사(祇園寺)며 화성사(化城寺)를 일별하곤 곧장 육신전(肉身殿)을 찾아간다. 교각 스님의 육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전각이다. 한 뭉치의 향을 소군에게 들리고 층계를 오르니 전면이 탁 트인 전각 마당에 분향 기원하는 불자들이 가득하다.
육신전은 스님의 육신을 모신 전각이지만 하나의 거대한 사찰과 다름없다. 이곳은 원래 신광령이라 부르던 벼랑 꼭대기다. 즉 교각 스님의 만년 수행처이며 입적(入寂)을 했던 그 자리다. 처음엔 육신을 모시는 탑 하나를 세웠지만 그 후 탑을 보호하는 전각을 세우고 그 규모를 키워 오늘에 이르렀다. 스님의 육신탑은 전각 가운데 위치한다. 방각의 탑에는 여러 좌의 금불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스님의 등신불 형상이다. 스님의 진체(眞體)는 탑 속에 모셔져 있어 누구도 볼 수 없다.
나와 소군도 향 뭉치를 사른 뒤 한 바퀴 탑을 돌았다. 스님이야 날마다 찾아오는 한국 사람들 탓에 별다른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여섯 시간 지옥버스를 타고 온 나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교각 스님에 대한 연구는 중국에서 먼저 이루어졌으며,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큰 성과가 있었다. 그사이 교각스님의 실존설에 대한 회의도 없지 않았지만, 근래 스님이 생전에 이미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 받았음을 입증하는 금인(金印. 757년 당 숙종이 하사한 것)이 공개됨으로써 스님의 실존 여부를 둘러싼 논란도 종지부를 찍었다.
그동안 스님은 신라 성덕왕 소생 왕자라는 것이 한,중 양쪽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스님의 생몰연대가 밝혀짐에 따라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최대로 높이 잡아도 스님의 탄생 때 성덕왕의 나이가 10세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학자들 사이에 새롭게 제기된 것이 태종 무열왕 소생이라는 학설이다.
스님은 24세 나이에 구법도해(求法渡海) 하여 당 나라의 들었으며, 이후 구화산에서 정진하다가 99세에 입적했다. 기록에 의하면, 스님은 입적하던 그 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넘치고 정신이 맑아 날마다 산에 올라 경전을 읽곤 하였다. 794년 7월, 스님은 홀연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이승의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앉은 자세 그대로 입적했다. 입적 후, 스님의 육신은 커다란 항아리에 모셔졌다. 3년 후, 부도(浮屠)를 만들고 그곳에 안장(安葬)하기 위해 항아리를 열었는데 놀랍게도 항아리 가운데 단정히 앉은 스님의 육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승도들은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의 ‘단상(端像)’을 떠올리면서 스님이 곧 지장보살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생전의 스님은 산중 과일로 끼니를 잇고, 조잡한 베옷을 입는 등 지극히 청고(淸高)한 수행생활을 한 것으로 소문났지만, 정감 넘치는 시승(詩僧)의 면모를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어느 날, 나이 어린 동자승 하나가 스님을 찾아와 수련생활의 고단함을 말하면서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동무들과 놀던 때가 그리워 못 견디겠다는 말이었다. 스님은 어린 제자를 나무라기는커녕 그 마음을 쓰다듬으며 시 한 수를 남긴다.
부처님 뫼시는 적막한 곳에서도 너는 고향집 생각뿐이지?
예를 차려 이별을 아뢰는 구름 방 아래로 구화산 산봉들뿐
죽마를 타고 놀던 그 곳을 향한 마음뿐인데
어찌 금지(金池)에서 금싸라기를 모을 수 있으랴.
석간수 바닥에 떡을 붙이고도 달을 손에 쥘 수 있으며
바루 씻은 물에서도 꽃송이를 희롱할 수 있거늘, 어쩌겠는가.
그렇게 번번이 눈물만 짓지 말고 돌아가거라
이 늙은 중은 산중 구름이나 짝하면서 지낼 터이니.
(送童子下山 -『全唐詩』)
천태봉 천태사로 오르는 6인승 케이블카를 탔다. 올라감에 따라 시야에 잡히는 산모습도 달라지는데 전체적으로 가파르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다. 해발 1,3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지만 날카로움이 전혀 없다.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에는 물론 산마루며 바위 꼭대기에도 크고 작은 절집들이 앉아 있다. 어느 때는 이 산중에 4백이 넘는 절간에 4천이 넘는 승려가 있었다지만 그 시절에는 이렇게 외람스런 규모는 아니었을 터. 절집이 산을 이기고 산을 누르는 형국은 과시 손에 쥔 것 없는 절 사람들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을 것인데, 시세가 바뀌었다.
케이블카 하차장에서 천태봉 정상까지는 가파른 층계길 2백여 미터를 더 올라야 한다. 행로의 안내판은 모두 한자와 한글 겸용이다. 길 양편에는 돈 달라는 이들밖에 없다. 장사꾼은 그렇다 치고, 육신이 성치 못한 이며 노인네들 사이에서 승복 입는 이조차 손을 내밀고 있다.
내 몸 고단한데다 억지로 술 힘을 빌렸으니 정상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마침내 <非人間>이 새겨진 통천문을 지나 정상에 섰다. 옅은 운무로 인해 선명치는 않지만 일렬로 도열한 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보는 전산, 후산의 산봉들은 기이하지도 우람스럽지도 않다. 넉넉하면서 부드럽고 부족한듯하면서 빼어나다. 황산에서 가졌던 그런 탄성이 나오는 산이 아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산을 내려온다. 문득 교각 스님이 머무던 때의 그 적막이 아쉬워지는구화산이다. 사람이 산을 찾으면서도 사람이 산을 버리는 예는 구화산에서도 마찬가지다. 구화가 아래편의 더러운 골 물, 그것은 차라리 눈으로 안 본 것만 못하다.
저녁 무렵, 적막한 한촌 주막에서 또 독주를 마신다. 우리 식의 미꾸라지 숙회가 있어서 한결 술맛도 괜찮다. 그리고 인근 여관에서 중국 제자 아이와 한 방에서 잔다. 화장실 물조차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 방이지만, 80원 짜리 여관 경험을 내가 언제 해보겠는가.
취기가 덜 가신 이른 새벽, 버스 주차장에서 쳐다보는 운무 속의 구화산 연봉이 기이롭다. 때마침 일출. 자못 신묘한 느낌까지 갖게 하는 그 일출의 감흥도 차 소리와 중국인들의 왁자한 소음에 이내 지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