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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21장
바울의 강론, 에베소에서 고별 연설, 고난의 길 예루살렘, 결박과 환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아마도 먼저 빌립보로 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의 마지막 시기에 고린도 전서를 쓴 뒤(행 19:22) 고린도 교회와 상당한 갈등을 빚고 "근심 중에" 아마도 배편으로 그들을 방문한 다음 에베소에서 돌아오자마자 많은 눈물로 편지를 쓴 적이 있었고(고후 2:1~4) 처음에는 이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습니다(고후 7:8~9).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 기간이 거의 끝나갈 때 고린도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심히 책망하는 편지를 보낸 뒤라 거기서 어떤 대접을 받을지 두려웠습니다.
바울은 배편으로 바로 고린도로 향하지 않고 먼저 북쪽으로 가서 길을 따라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방문하며 고린도에서 돌아오는 디도를 만나기를 희망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로 간 다음 아마도 마게도냐의 다른 교회들로 갔을 것입니다. 디도는 마침내 바울과 합류했고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리더십에 반대한 것을 회개하고 바울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고후 7:5~16). 그러자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1절~6절).
7절~16절
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밀레도로 이동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드로아에서 있었던 한 사건에서 바울은 한 젊은이의 생명을 회복시켰습니다. 이 사건 뒤에는 밀레도까지의 자세한 항해 여정이 이어집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유두고'라는 이름의 어원은 '운 좋은, 다행스런'입니다. 이 '운 좋은' 청년은 '많은 등불'(8절)과 긴 설교 때문에 아마도 창문 가까이 가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졸게 되었고 3층에서 떨어졌습니다.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죽은 것처럼 되었는지라'가 아닙니다) 이는 실제로 그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바울과 함께한 성령이 그 유두고라하는 죽은 청년을 살렸습니다(8~12절).
'기오'는 호메로스의 출생지였고 '사모'는 수학자 파타고라스의 출생지였습니다. '밀레도'는 에게 해의 주요 항구이자 바울 시대에 아시아 속주의 대도시 중 하나였습니다(15절).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지낸 터라 거기서 너무 많은 이들과 작별인사를 하게되면 일정이 지체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의 이르려고 '배 타고' 에베소를 지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16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연설합니다. 바울의 밀레도 연설은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주요 연설의 유일한 예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모든 연설중에서 이 연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준 바울의 편지들과 가장 공통점이 많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에베소의 장로들을 위한 본보기로 제시했고(18~21절), 자신의 미래의 전망에 대해 언급했으며(22~27절), 다가올 이단에 대해 경고했고(28~31절), 물질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장려했습니다(32~36절).
17절~38절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메어(헬, '데오', '동여메다', '묶다')라는 말은 비록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성령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신속히 곧장 가야 한다는 예의적으로 강한 압박감을 주셨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틀림없이 현재 예루살렘으로 가는 자신의 여행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가의 유사점들을 숙고하면서 자신도 거기서 삶을 마감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그해 그와 같은 증언은 아마도 그리스도인 선지자들과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바울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22~23절).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 받겠다는 뜻을 자주 표현했습니다. 딤후 4:7에서 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길'(또는 '경주' 헬, 드로모스)을 마친다는 똑같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24절).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에 닥칠지 모르는 미래에 어떤 교리적이나 도덕적인 오류에 대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책임이 없는 이유를 제시하면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그 어떤 부분도 꺼리지 않고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는 성경 속에 펼쳐진 하나님의 구속 계획 전체를 가르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부분은 인기가 없거나 어려웠지만 바울은 설교에서 그 중에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이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가르침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모든 이들에게 모델이 되는 담대한 본보기를 제시했습니다(26~27절).
'자기를 위하여....삼가라', 영적인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이 문구의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면서 쏟으신 피를 언급합니다. 이 문구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하나님의 교회)은 십중팔구 교회의 머리이자 삼위일체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만일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성부 하나님이라면 '자기 피'는 하나님이 '친히 낳은 자', 즉 '하나님의 친아들'의 피에 대한 언급입니다(이 또한 헬라어 원문에 대한 이치에 맞는 대안적 해석 일 것입니다). (어떤 헬라어 사본에는 '하나님의 교회' 대신 '주의 교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28절).
바울은 또다시 장로들에게 자신의 사역(주후 52~55년 경)의 본보기를 따를것을 촉구했고 그들의 섬김을 하나님의 권능과 인도하심에 맡기는 축복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사역에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말씀'은 신자들을 '능히 든든히' 세울 수 있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음을 가르쳐 하나님께 속한 이들이 '기업'(말세의 구원)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하심', 즉, 마음과 삶에 있어서 성령으로 인해 거룩해집니다(31~32절).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 말씀은 틀림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이 바울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35절).
바울이 떠날 준비를 하자 에베소 장로들은 다시 바울을 보지못할 것이라는 사실으로 인해 더욱 근심했습니다. 바울은 적대적인 불신자들, 교회 안의 거짓 선생들과 자주 충돌했지만 이 구절은 바울이 교회들이 바울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친절하고 온유한 목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바울에게 항해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었을 것입니다(38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동합니다. 바울은 뱃길로, 그 다음에 육로로 예루살렘까지 갔습니다. 도중에 바울은 각 기독교 공동체에 눈물 어린 작별을 나누었고 그들에게서 예루살렘에서 직면하게 될 위험한 일들에 대한 불길한 경고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불길한 예감을 생각나게 합니다(눅 18:31~33).
21:4절~16절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는 명백히 두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몇 가지 예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이 바울에게 한 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갔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20:22~24). 해석자들은 이 제자들이 바울에게 한 말 중에 어느 정도가 실제로 예언(즉, '성령의 감동으로' 한 말)의 일부였는지에 대해 견해가 갈립니다.
(1)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이 초기 기독교 예언의 두 가지 종류의 잠재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로 예언 그 자체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둘째로 선지자 자신의 해석에 실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바울이 예언은 반드시 시험해봐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것입니다. 즉, (a) 예언자체에 있어서의 가능한 실수와 (b) 예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의 가능한 실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4:29; 살전 5: 20~21).
(2) 다른 해석자들은 그런 예언 자체는('성령의 감동으로' 임했기 때문에) 정확하지만 예언의 해석에 있어서는 여전히 실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언이 정확하더라도 그런 예언은 여전히 시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예언과 해석이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두 번째 경우에는 해석만 잘못될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든 모든 예언은 바울이 명한 것처럼 시험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4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기꺼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벧전 2: 21)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합니다(13절)..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라까지의 거리는 도로상으로 대략 100킬로미터 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주후 57년 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입니다(15절).
바울이 나실인 의식에 참여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성공을 기뻐하면서도 그가 유대인들에게 조상의 법과 관습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들은 바울에게 공개적으로 구약 율법(민 6:1~21)에 명시된 대로 나실인 서약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장로들도 다 있더라', 예루살렘의 교회의 리더십은 이제 일차적으로 이 '장로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사도로 간주된 것으로 보이지만 본문은 다른 사도 들이 예루살렘에 여전히 남아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선교 활동을 하러 떠났는지 말하지 않습니다(18절).
'서원한', 나실인의 서원을 한 이들은 보통 포도주, 독주, 포도주즙, 포도, 또는 건포도를 멀리하고 (시체와의 접촉 같은) 자신들을 더럽힐 만한 어떤 접촉도 피하며 머리도 깍지 않습니다(참조, 민 6:1~21). 서원의 때(보통 30일)가 지나면 이들은 머리를 깎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바울이 유대인들과 함께 가서 개인적으로 그들의 제사 비용을 지불했다면 이는 바울이 회심한 유대인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똑같은 관습을 요구하지 않는 한 구약의 관습을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음을 보여줄 것입니다(23절).
27절~40절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성난 군중이 바울을 공격합니다. 바울은 성전에서 그가 성전을 범했다는 거짓 혐의에 선동된 폭도들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바울을 구해낸 뒤 감금해 두었습니다.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한 이방인(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을 바깥 뜰(이방인의 뜰)과 (이방인에게는 제한구역이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해지는) 안쪽 '성소'를 나누는 석벽 너머로 데려감으로써 바울에게 성전을 더럽혔다는 혐의를 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발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사형규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방인의 금지구역에 데려가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28절).
로마의 '천부장'은 여기서는 여러 '백부장들'의 지휘를 받는 천 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한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급히', 로마군은 상황에 매우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군인들은 성전 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안토니아 망대로 알려진 헤롯 왕의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요새의 높은 망대에 오르면 성전 구역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요새에는 땅바닥까지 내려오는 두 곳의 계단이 있어서 군인들은 거의 즉시 군중들에게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망대 위에 보초병은 아래 있는 군중들을 감시하곤 했을 것입니다(31~32절).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이는 군인이 좌우 양편에서 한 명씩 결박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를 없이하자', 이 외침은 몇년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했던 군중의 외침을 떠올리게 합니다(33~36절).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4000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요세푸스(유대 역사가)도 '한 애굽인 출신' 유대인이 이끈 반란을 언급합니다. 이 반란은 로마 총독 벨릭스가 진압했고 그 애굽인은 도망치고 그가 이끈 운동은 무산되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자객' 즉, 군중의 비호를 받아 로마에 동조하는 자들을 찌르며 위협한 '단도 소지자'들(헬, '시카리오스')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천부장은 그 애굽인이 또 다른 반란을 일으키려고 되돌아 왔다고 생각한것이 분명합니다(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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