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船員)이란 직업을 가진 자는 해상(海上)에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家庭)과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요즘이야 세계 어느 곳에 있거나 휴대폰 하나면 영상통화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아가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대이다.
1977년에만 해도 국제전화 한 통화하려면 나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특정한 곳(전신전화국이나 호텔 등)을 찾아가 어렵사리 신청하고서도 몇 시간을 기다려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통화료도 만만찮았다.
내 경우는 1985년도에 처음으로 선장실(船長室)에 위성전화가 설치, 침실에서 바로 집까지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 번 통화하려면 값도 값이려니와 요즘같이 좀 길어도 숫자로 된 번호만 누르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중간중간 연결되는 터미널과의 대화에 응해야 했기 때문에 웬만큼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었다. 말이야 승무원들의 편의를 고려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선주(船主)들의 사업상 신속한 정보나 오더(order)를 위한 수단이 더 중요하고 큰 때문이었다. 이것이 불과 40여 년전인데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고마웠던 것은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곳까지 편지는 찾아고 간다는 것이었다. 특히 파란색 종이 가장자리에 색깔을 달리한 표시가 된 항공엽서가 거의 세계적으로 통용이 되었고, 주소야 한글이든 외국어이든 관계없이, 국명(國名)만 영어로 알아볼 수 있게 쓰면 그 나라까지는 보내주었으니, 그 다음은 국내의 문제였던 터라 어떤 때는 몇 개의 대륙을 돌고 돌아 겉이 너들너들해지기는 해도 받아 든 사람에게는 어느 방향으로 얼만큼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것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지만 님 보듯 반가운 것이었음은 분명했다. 특히 원양어선(遠洋漁船)의 경우는 편지가 기항지에 도착하고서도 선박이 입항하기까지 다시 수개 월을 기다려야 했으니 ‘편지’ 그 녀석도 지루했을 것이다. 지금에 비하면 옛적 봉홧불로 알리듯 원시적이랄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 입항하여 대리점이 최우선적으로 승선하면 누군가가 한 명이 선장실 혹은 응접실 문앞에서 대기한다. 편지뭉치부터 받아 가기 위함이다. 입항 중에도 선장이 시내 대리점에라도 다녀오면 맨 먼저 보는 것이 선장의 봇따리와 손이다. 두툼한 봉투묶음이 들려 있는가의 여부이다. 절실하고 처절한 기다림의 표현이다.
편지를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의 표정이나 행동이 확연히 차이가 나고, 다음 편지를 받을 때까지 생활의 활기도 달라진다.
“야, 김 군아, 이번에 편지 안 왔다고?”
“예”
“와 무신 일 있었나?”
하고 시작된 일상의 대화 끝에 무심코 농담삼아, “고무신 거꾸로 신은 갑다.”는 농담 한마디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인정사정 없는 언쟁이나 싸움이 터진다. 그렇지 않아도 속으로 끓어 올라 쌓인 분노에다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들을 수도 없기에 모든 가정사(家庭事)는 전부가 자신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도 그날 그 시간의 기분에 따라 내용은 엄청나게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가정통신도 선장으로선 여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다. 국내 회사에게 연락하여 편지를 자주 쓰도록 독촉도 권유도 해야 한다.
1977. 4월. 일본 국적선 宏島丸(히로시마마루)에 승선 중 아프리카 황금해안에 있는 나이제리아(Nigeria) 라고스(Lagos)항에 정박중의 일이었다.
아프리카 황금해안의 라고스 항
한 달 전인 3월에 교대할 15명의 선원들을 인솔, 부산김해 공항을 출발, 일본 오사카, 하네다, 알라스카의 엥커리지 공항을 경유하여 네덜란드에서 환승하여 아프리카까지 38시간을 비행기에 시달려 녹초 직전의 상태로 공항에 내리자 적도 직하의 화끈한 열기에 정신이 아찔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겨우 안정을 찾고 업무를 이해할 만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이곳은 우리나라 625 직후의 혼란스런 사회와 비슷했다. 검은 황금, 석유가 발굴되자 그 힘을 바탕으로 한창 독일회사가 항구를 현대화하고 있었지만, 부두의 군데군데엔 사람의 똥 무더기가 잘 살피지 않으면 발에 밟히기가 일쑤였다.
2등기관사 김x석 군이 느닷없이 선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나와 같이 간 자가 아니고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던 자였다. 즉 나와는 처음 보는 관계였다. 얼굴도 익지 않은 상태였는데, 대뜸 편지를 내밀면서 “선장님, 이거 좀 보이소.” 하며, 성난 들짐승처럼 씩씩거렸다. 마치 그 책임이 선장에게 있지 않느냐고 따지는 듯했다.
낮에 대리점 직원인, 우람한 덩치에 마음씨는 온순한 흑인 Mr. 우쯔그가 더위에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났던지 그냥 오기는 뭣하고 핑계로 편지 한 장을 미끼로 가지고 온 것을 주었는데….
우선 편지부터 읽었다. 그의 집사람의 것이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 내밀한 부인의 편지를 보여주었을까만…. 얼굴의 땀은 열대지방의 더위 때문이 아님도 직감했다. 그래도 믿고 털어놔 주는 데는 고마움보다 부담감을 느낀다.
그 아내의 편지 속에 단 한 구절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살겠으니 떠나겠다.”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 치명적인 문구(文句)이다. “아마 지금 가고 없일 깁니다. 내일 당장 귀국시켜 주이소.” 하며 울부짖는다. 이런 경우 방치하거나 자칫 잘못되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보다 내가 더 막막했다. 마치 내 마누라한테 받은 것으로 착각이 되기도 했다. 우선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부터 꺼내 놓고 숨이나 좀 돌리자고 했다.
이렇게 하여 신상에 관한 얘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그 자신의 사정부터 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 뭣이 우쩨 된 기고?”
고졸 학력의 20대 후반의 나이, 8남매의 장남. 결혼한 지 한 달 만의 출국, 그 시절의 대부분이 그랬듯이 가난 속에서 자란 인생이었다. 김치 이외는 반찬이라고 먹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 친구들에게 얻어먹은 빵에 대해 자신이 보답하지 못하는 형편 때문에 결국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 남들이 간식하는 걸 보면 간식을 위한 배가 따로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며 오직 밥만 먹었다는 것, 그래서 일찍부터 돈의 절대적인 위력을 깨닫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결심했었단다. 진해(鎭海)가 고향이라 해군(海軍)에 입대한 덕분에 기관면허를 취득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승선할 수 있었다. 왜정(倭政)시대 그 어렵다던 동경제대(東京帝大: 지금의 도오쿄오대학)를 입학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일본 때문에 신세를 망친 그의 부친, 어려움 속에서 늘 가져왔던 잠재적인 열등의식 등등 스스로도 자신이 별난 성격이라고까지했다. 풀어지지 않은 한(恨) 덩어리가 켜켜히 쌓여 있는 듯 했다.
그의 부인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분명히 썼다. 1년이면 온다더니 6개월을 연장하는 통에 한 가닥의 희망마져 끊어졌다는 애절한 사연임에 틀림없다.
출국할 때 계약기간을 1년으로 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생각보다 급료 이외의 작업수당 등이 괜찮아 자신의 계획에 맞추자면 6개월 정도만 더 계약을 연장하면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좋았는데, 이것을 그의 부인에게는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알린 것이 탈이었다.
듣기만 했다. 2시간가량 자기의 한(恨)을 풀어놓고 나니 어느 정도 흥분도 가라앉고 속도 좀 풀리는 듯 보였다.
졸저(拙著) 「항해일지(航海日誌)」의 서문 ‘일기장을 열며’에서 이렇게 쓴 부분이 있다.
「배 위에서의 삶을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은 거친 파도와 폭풍 같은 외부적, 자연적인 현상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갇힌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뇌와 고독, 솟구쳐 나오는 인간의 본능을 때로는 기상이변보다 예측하기 힘들었고, 두렵게 다가오곤 했다.」
바로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내가 얼마만큼의 위로를 주고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상담역이나 자문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공부한 영상강의나 주로 읽은 정신과 의사들이 쓴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 들어준 것만으로도 일단 상담(相談)의 시작은 성공한 듯 했다. 내담자(來談者)인 2등기관사의 한(恨)을 속시원히 풀어준 것이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즉 내가 얘길 해 주어야 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막막하기만 했다.(계속)
첫댓글 선장님은 이야기를 들어주면 해결은 본인이 할수있다.
젊은 시절 이야기꺼리가 많아서 좋겠습니다.
올만이네요. 건강하시제? 늘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워요. 부산넘
요즘은 이유없이 그바쁘던 젊은 날의 시간에 비하면 모든것이 여유로워 지는 것 같습니다
늙어가는 증거이겠지요? 그래서 대사카페 이곳저곳을 자주 들립니다 오늘은 늑점이님 의" 편지" 이야기에
잠시 머물면서 순간순간 우리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깊은 고뇌를 껶은 이야기에 저도 함께 동행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절친 명미가 떠난 후에는 제가 이유없이 가끔 눈물이 자주납니다 보지않아도 주고 받은 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네요 늘건강하신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모두들 보고 싶네요 올 가을이나 내년봄에는 한국 방문을 기대해 봅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
승희님! 감사함다. 그 곱고 화사한 얼굴이 떠오르네요. 故 명미 님을 대신해서라도 오래 버티셔야죠. 올가을 기대합니다.
건강이야 남 안주고 지키면 되지요. 어릴적 제 할머니가 "야 이넘아 니도 살아봐라" 하시던 말씀의 뜻이 이제야 조금 알듯함다.
오늘도 크게 숨 한 번 쉬고 먼 하늘 깊숙히 쳐다보며 화이팅 합시다. ㅎㅎㅎ 부산넘
눈물샘을 자극하는 편지 이바구.
리드가 된다는 건 책임감이 큽니다.
순진한 아기들도 아니고 개성이 뚜렷한 어른들이니까요.^^
쩐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