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집 『다른 계절에 만나요』 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깨진 대문의 안쪽. 2부 젖은 땅을 어루만지는 일. 3부 떠나보내지 않았으나. 4부 닦아내도 얼룩지는 기억. 총 50편의 시를 수록했다. 시집 『다른 계절에 만나요』에서 시인은 상실의 고통을 낭비하지 않고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또 다른 계절’ 의 만남으로 희망한다. “신경숙 시인의 시선은 낡고 부서지고 쇠락해가는 사물들을 향하고 있다. 더이상 이 계절을 버틸 수 없는 생生을 애도하고 빈집과 껍데기로 남은 장소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사라지는 지금의 순간을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흩어져 사라진다. 시인이 바라본 것들은 시인의 마음속에 움을 트고 한 편의 시(詩)로 피어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시인이 바라본 것들이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옮겨 심어진다. 따스한 희망이란 이름으로.” - 해설 〈또 다른 계절의 꿈〉 중에서-
신경숙
당진 출생. 안양에서 성장. 2002년 『지구문학』으로 등단. 시집 『비처럼 내리고 싶다』 『남자의 방』이 있다. 제 17회 서울 시인상 수상. 2014년 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시나모〉 동인. 〈용인문학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의 말
시를 만드는 작업은 잠수潛水다. 수영을 배운 적 없는데 수면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이다. 일상의 껍질로부터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비우고 덜어내고 올해 빈집을 또 한 채 사들인다.
2024년 오월의 끝날에 신경숙
목차
1부· 깨진 대문의 안쪽
달이 야위어 간다 측도測島 10월의 햇살, 마른 씨앗처럼 쏟아지는 꽃차를 마시는 저녁, 달의 배꼽을 만진다 뒤늦은 바다부채 길 억새 날다 얼굴 화석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축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해가 지는 곳의 뒤축은 무겁다 자막대기로 깨진 이를 재는 시간 다른 계절에 만나요
2부·젖은 땅을 어루만지는 일
시詩를 만들 수 없는 소문을 봉인하다 다락방에서 뒤축이 무너지다 달항아리 경로를 이탈했다 11월, 서둘러 저녁을 건너는 기억을 걷는 시간 풀치* 목격자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봄 냄새를 열어본다 이제는, 꼬리뼈의 흔적만 부드러워지다 뿌리를 옮기던 날
3부· 떠나보내지 않았으나
사이에서 길을 잃다 슬픔을 읽었다 생을 박음질하는 4월 여기산麗妓山의 아침 갯벌계곡 길 길·3 길이 환하다 나는 가끔 두루마기를 빨고 싶다 으아리꽃 크로키 환절기
4부· 닦아내도 얼룩지는 기억
나무로 자라는 물 불통의 사내 기억의 오류 아버지의 내력 빈집 날아오르다 봄 냄새를 열어본다 우산을 접고 돌아온다던 다시, 당진 바람의 모서리 지나간 자리 또 다른 계절의 꿈 / 해설 출판사 서평
책 속으로
달이 야위어 간다
등뼈를 구부린 그믐달이 그물에 걸려 있었다
가장 가벼운 몸으로, 썩은 나무의 등걸 같은 척추의 계곡을 지나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너무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210호 병실 침상 그물을 뚫고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 없는 닳아버린 달의 옆구리를 만진다
어둠 속에서 죽은 아버지가 살아 나올 것 같은 삼길포에 빠진 비린 달을 건진다 돌아오지 않는 거라고 물을 버리지 못해 설마, 엄마는 그믐밤마다 정화수를 떠놓았다 갈퀴 같은 굽은 손으로 그물을 던진다 그물에 걸리는 것은 유채꽃뿐
빈 껍데기 속을 들락거리는 아홉 형제를 머리에 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어 솔잎을 긁어 파는 맏딸 어린 동생을 살리려고 부뚜막에 올라가 죽을 끓이는 이젠 요양원 침상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달이 야위어 가는 밤이면 어머니는 그물을 던지러 침상을 내려와 삼길포에 빠진 달을 건지러 간다
뒤돌아보니 어머니 발자국마다 내가 달의 옆구리 를 만지고 있다
바람의 모서리 지나간 자리
실핏줄을 팽팽히 당겨본다 지워야 할 무늬가 많은 사 내의 무릎 일으켜 세우듯 안개비 내리는 새벽, 울음 삼 키는 바람의 모서리에 눈이 찔리고 강이 되어 흐른다
어떤 이는 지문을 남기고 집을 세운다 누군가는 흐 린 발자국에 먹물을 엎지른다 조심조심 굳은 관절 세 워보지만 여러 날 접어 둔 책갈피를 화인처럼 들추어 내는 아침, 혹시나, 혹시나 역시, 모세혈관이 길을 잃 고 붉은 길을 만든다
들숨이 꽈리를 부풀리는 초저녁, 날숨의 꼬리 경계 의 철조망을 넘지 못하고 바람의 흉터를 남긴다 한 번 더 눈을 찔린다 검색어 순위에 고정된 눈동자 인 공 눈물을 넣어야 깜빡거린다
졸혼과 이혼 사이 저울질하며 경계의 너머를 생각 해 본다 새살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흐리게 흉터를 지우며 모서리각을 낮추는, 눈 안에 갇힌 사내 접은 무릎 세우며 붉은 길을 절뚝거리며 출구를 찾는다
봄 냄새를 열어본다
벌레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자 천둥소리에 놀라 부드러워지는 흙 식목일 앞서 삽날을 세우고 젖은 땅을 뒤엎는다
북동풍이 동쪽으로 밀어놓은 봄, 계절을 앞서 걸어놓은 옷을 정리하는 사이, 속살을 감싸고 원추리 손을 내민다
산비탈 돌 틈을 빠져나온 바람 냄새가 가까워지며 무너져 내린다 순해진 열린 땅을 맨발로 걷는 봄
온몸을 밀어 계절을 건너온 벌레의 주름, 무너져 내리는 속살처럼 생의 절개지, 굽은 등이 잊혀진 봄에서 눈발이 날린다 폰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처럼 살포시 밀어 보는 봄 젖은 몸을 뒤집어 흙냄새를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