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9/5) 이른 아침, 숙소를 정리한 후 광주를 떠나 정읍으로 향했어요.
기행의 마지막 여정지는 동학농민혁명(1894~1895)의 시발점이 된 정읍입니다.
1894년 조선 고종 때에 고부(정읍의 옛 이름)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한 민중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혁명을 일으키는데요, 이렇게 국내의 봉건제의 모순과 억압에 저항함으로써 시작된 혁명은 일본과 청나라가 개입하게 되면서 외세를 내쫓아 척결하려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로 그 흐름이 이어지게 됩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혁명의 배경에서부터 과정, 역사적 평가와 의의 등 당시 동학 농민들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한 곳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이후 3.1운동과 4.19혁명, 그리고 5.18민중항쟁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지요.
동학농민혁명은 오랜 시간 전쟁 혹은 난(亂)으로 불리며 그 뜻과 희생이 왜곡되고 평가절하 당했어요. 거기다 박정희는 5.16군사정변(1961)이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혁명'이라는 단어를 불의한 쿠데타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사용했지요. 실제로 그가 동학을 어떤 식으로든 재평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가 선산지역의 접주로 활동한 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정희 이후에 전두환은 한 술 더 떠 황토현 기념관을 세워 정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이용하지요. 이러한 '역사의 정치적 이용'은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침탈 뿐만 아니라 최근 뜨겁게 논쟁이 불거진 홍범도 장군님의 흉상 이전 문제와 같이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지요. 우리의 역사와 뿌리를 공부하며 밝게 깨어있어야할 필요를 더욱 깊이 절감하게 됩니다.
이대로는 못살겠다,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한겨울에 짚신 신고 꽁꽁 언 발로 죽창들고 싸우러 나아간 농민군들. 기꺼이 자기 목숨 내어놓고 나아가면서도 다른 이들의 생명은 존중하고 지키고자 했던 숭고한 정신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동학농민과 전투한 일본군이 기억하는 농민군. 그리고 남겨진 농민군 후손들의 고난
처참하게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목숨 걸고 싸운 이들과 그 후손들의 삶은 비참했어요. 고향에서 내쫓기듯 도망쳐야했고, 이름과 신분을 바꿔 숨어살아야 했지요. 지금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5.18민중항쟁의 기억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 역시 어떤 보상은커녕 극심한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간다는 이야기 들을 때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 나라 소망하게 되는 마음 간절해져요.
정의가 꽃피는 그의 날에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 넘치리라.
(시편 72:7, 공동번역)
황해도 출신이신 김구 선생님은 18세의 나이로 동학농민군에 참여해 이른 나이에 접주가 되셨지요.
기념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戰跡地)
황토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첫 승리를 거둔 곳이에요.
서두에 설명한 것처럼 전두환은 동학의 역사, 그중에서도 이 황토현 전투를 신군부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에 이용합니다. 전적지 안에 있는 정화비에는 전두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요, 여러 사람들에 의해 긁히고 깨진 것을 볼 수 있었어요. 기행 둘째날 방문했던 망월동 묘지 입구에 묻혀 많은 이들의 발길에 밟히던 전두환 이순자의 방문비가 생각나네요.
혼자 우뚝 솟은 동상 대신 '사람 인'을 그리며 수평으로 넓게 퍼진 동학농민들 동상이 인상 깊었다. 이래서 방향 설정이 중요한가보다. 위가 아니라 옆으로, 곁을 살피며 나아가는 것 떠올렸다.
- '광주기행: 우리는 어디에 서 있나요' 수연 -
‘혁명(革命)’을 우리말 어순으로 놓으면 '명'을 '혁'하다, 즉 ‘명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라고 해요. 동학도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가르쳐 도를 전했지요. 자신들의 명을 분명하게 세워 악한 구조와 외세 앞에서 맞서 싸웠어요. 우리 또한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의 우상 앞에 더 밝히 깨어 뜻을 분명히 세워야겠습니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아파하고 신음하는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 초대하고 만나가야겠지요. 그렇게 함께 혁명, 함께 해방 이루어가자구요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