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이어 성경학교를 마쳤다.
그녀는 1912년 32살 때 미국 남장로교 외국 선교국이 해외로 파견하는 간호 선교사로 선발되어 한국에 왔다.
한때 군산 예수병원과 서울 세브란스 병원 간호학교의 교사를 거쳐 광주 제중병원(현 기독병원)간호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선교활동과 사회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광주에 와서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그
는 원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매사에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舒)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이라 했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서서평은 최흥종 목사가 설립한 나병환자 수용소를 틈나는 대로 찾아 나병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치료에 전념하기도 했다.
이때 양림 거리에서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 독일계 미국 처녀인 그녀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평
생을 처녀로 마친 그녀는 당시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했는데 직접 금주 동맹을 만들어 상가가 밀집한 지금의
충장로와 시장에서 계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다. 때로는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갈 뻔한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그가 설립한 이일학교에 이들을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는 1921년 백운동에 현 백운동 교회의 전신인 진다리 교회와 봉선리 교회를 세웠으며 1922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일교회의
전신인 금정교회에 부인조력회(여신도회)를 조직하여 신앙 수련과 협동사업을 벌이는 한편으로 교회의 봉사활동에 앞장서게 했다.
그
는 또 자비로 3년제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계몽에 나섰다. 그녀의 미국인 친구인 니일(Lois Neel)의 원조를
받아 양림 뒷동산에 붉은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고 "니일"양 이름자의 발음을 따서 한자로 ‘이일(李一)’학교라 했다.
서
서평은 또 여학생들의 자활능력을 기르기 위해 명주, 모시, 마포, 무명베 따위 천에다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예품을
만들게 했다. 이 물건을 미국에 수출했으며 미국에서는 버지니아주의 벤스(R.G..Vence)부인이 팔아 대금을 송금해 왔고, 이
돈은 이일학교 여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그녀는 양림동에 뽕나무밭과 잠실을 두어 양잠, 제사, 직포 기술을 보급하면서 자립을
꾀하게 하여 배우고 일하는 즐거움 속에서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일학교는 이 지방
여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 졸업생 가운데 간호사나 산파, 교사, 유치원 보모, 여전도사로서 계몽사업과
신여성 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한 사람이 많다.
서서평은 1923년 조선간호협회 결성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에 선임되었고, 그로부터 11년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협회 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며 그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조선간호협회를 만국간호협회(ICN)와 일본 적십자 간호협회에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간호
교과서>, <실용 간호학>, <간호요강>, <간이 위생법>등 4권과
<간호사업사>를 비롯한 많은 번역서를 책으로 냈다.
서서평은 1934년
6월26일 새벽 4시, 54세를 일기로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언에 따라 몸안의 장기는 모두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되었다. 장례식은 광주의 유지인 김신석, 최원순, 김용환, 정상호, 정광호(광주시장 제헌 국회의원) 최경식 등 계유구락부
회원들을 비롯한 비기독교인들의 주장에 의하여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라는 부재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그녀는 지금도 양림 뒷동산에 묻혀 있으며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아있다.
서서평이 별세한 뒤 이일학교는 1941년 9월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폐교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8년 9월 구애라 선교사에 의해
이일학교가 복교되었고, 1961년 3월31일 전주 한일여자신학대학(韓日女子神學大學)에 합병되었다.
글 박선홍<광주 1백년>저자
대동문화 47호 104쪽~106쪽 참고
조선 땅에 몸던진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년
전라도·제주 병자 돌본 간호 선교사 - 광주서 과로·영양실조 숨졌을때 담요 반장·강냉이가루 2홉만 남겨
아이 14명 입양, 과부 38명 돌봐줘… 총독부 나환자 정관수술도 막아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 보고를 하던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양국주(63) 대표가 울먹였다.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의 미국인 서서평은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독신여성 간호 선교사.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순회하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큰년' '작은년'에게 이름을
서 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 여행을 나서면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년' '작은년'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929 년 안식년을 맞아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1살 때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던 어머니를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된 선교사 생활로 가난이 몸에 밴 딸을 "니 몰골이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내친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으면서도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아이 14명을 입양해 훌륭하게 키워냈다. 과부 38명이 자립해 새 삶을 살도록 도운 것도 서서평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들을 모아서 서울로 행진을 벌인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 결국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한다. '나환자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은 이때 생겼다.
그 의 장례는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 일간지는 당시 사설에서 "서 양은 생전에 '다시 태어난 예수'로 불렸다. 백만장자처럼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에 눈감고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에 온 지 100년인 올해에야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기념예배 참석자들은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도 방문했다.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서서평의 이끼 낀 묘비 앞에서 설교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원본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믿음의 원본을 되찾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 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Source: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18/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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