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계약 집중연재 -「침투당한 공화국-서독內 슈타지」 발췌①정권의 골키퍼가 간첩이었다!
월간조선 09 2002 MAGAZINE 김주일
슈타지, 브란트의 집권 社民黨으로 침투하다…원내총무·총리 보좌관이 간첩
동독 정보기관(슈타지)은 社民黨과 브란트를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그 내부에 간첩망을 심었다. 社民黨이 집권하자 이 간첩망은 국가기밀을 동독으로 보냈다. 동독 수뇌들은 서독 총리보다 먼저 서독의 상황을 알 때도 있었다. 서독연방의회內에 「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의 의원들을 첩자(또는 정보원)로 포섭한 동독 정보기관은 브란트가 불신임 위기에 몰리자 이들을 이용하여 親동독 정책을 편 브란트를 구출했다.
브란트 총리의 서류가방을 들고 다닌 비서도 슈타지의 첩자였다. 슈타지는 섹시한 남자 공작원을 보내 서독 정부內 여비서들을 「이불 속에서 포섭」하여 정보를 빼냈다. 슈타지는 또 서독內의 親동독 세력을 동원하여 反共정치 지도자들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한때 서독에서 「동독을 편드는 것이 진보적이란 知的 분위기」가 팽배했었고, 슈타지에 약점을 잡힌 언론의 반역적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편집자 注] 東獨 정보기관 「슈타지」(정식명칭은 국가안전부=MFS: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의 西獨 침투 및 파괴공작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계, 경제계, 노조, 학계, 종교계, 학생운동 등 어느 분야 하나 슈타지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후베르투스 크나베가 쓴 「침투당한 공화국-서독內 슈타지」(독일 프로필렌社 2000년 출판)를 읽어보면 1980년대 말, 東유럽 공산주의가 붕괴되기까지 40여 년간 슈타지에 놀아난 서독의 허약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그동안 빌리 브란트를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한 「간첩 기욤사건」을 비롯해서 몇몇 슈타지 관련 스파이 사건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슈타지에 포섭되어 서독 사회 각계에서 슈타지에 협력한 소위 「非공식 정보요원(IM)」은 2만~3만 명쯤이었다는 것이 크나베의 추정이다.
서독의회(분데스타크) 안에서는 한동안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의원들이 슈타지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동독 공산당 정권의 서독 파괴 공작이 얼마나 집요하고 철저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著者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슈타지가 그처럼 종횡무진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서독 사회의 정치적·정신적·知的(지적) 분위기, 또는 풍토였다.
1960년대 이후 서독 지식인 사회에서는 동독 편을 들어주고, 동독을 인정해야만이 「진보적」이라는 논리가 팽배했다. 많은 서독人들은 독일에서의 敵(적)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에 있다고 생각했다.
크나베는 그러면서 동독 공산당이 40여년의 장기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서독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크나베의 주장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슈타지의 활동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는 이상, 「통일 이전의 서독 현대사도 다시 써야 한다. 동독 공산 정권에 협력한 서독 지식인들의 附逆(부역)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독일인들 앞에 놓여 있는 지상과제」라고.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이상으로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도 없을 것 같다. 크나베의 이 저서를 집중 연재한다.
브란트 총리 불신임 결의안 투표의 수수께끼
한순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심장박동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1972년 4월27일, 카이-우베 폰 하셀 서독의회(분데스타크) 의장이 빌리 브란트 총리에 대한 의회 불신임 결의안 투표결과를 발표하는 순간, 서독 국민들은 무엇에 홀린 듯 멍한 표정들이었다.
야당은 취임 3년밖에 되지 않은, 社民黨(SPD) 출신의 인기 있는 총리 브란트를 불신임 투표로 물러나게 하고, 대신 야당인 기독교민주당(CDU) 당수 라이너 바르첼 의원을 총리로 앉히려 했던 것이다.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자민당 연립정부는 연립정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자민당 의원 일부가 이탈한 상황이어서 원내 다수의석의 지위를 잃고 있었고, 따라서 정권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브란트가 총리직에서 물러나면 그동안 그가 새롭게 추진해 오던 東方정책(Ost-Politik)도 무위로 돌아갈 판이었다. 브란트 총리는 동방정책을 통해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과 상호공존, 협력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획정된 국경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었다.
불신임 투표 최종 집계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기민당과 기독교사회당(CSU)이 함께 총리 후보로 천거한 바르첼 의원은 자신이 과반수 표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했던 249표 대신, 그는 247표를 얻는 데 그치고 말았다.
자민당의 이탈로 브란트 총리의 패배가 확실했던 불신임 투표가 어떻게 그런 결과로 나타났는지, 그날 이후 서독 정계는 커다란 수수께끼 풀이에 빠져들었다. 야당 진영으로부터 최소한 두 명의 의원이 브란트 지지로 넘어갔다는 얘기인데,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기민·기사당 의원들 가운데 몇 사람이 혹시 사민당으로부터 돈을 받고 바르첼 의원에게 반대표를 던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제기되기도 했다. 기민당 소속의 율리우스 슈타이너 의원이 사민당 원내총무 칼 뷔난트 의원으로부터 매수되었다는 주장이 있긴 했지만, 이와 관련해 1973년 구성되었던 조사위원회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社民黨 원내총무가 東獨 첩자 노릇
그 사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밝혀졌다. 브란트 총리 불신임 결의안이 부결된 데에는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서독 연방검찰청은 당시 동독 국가안전부 對外선전담당(정보) 책임자 마르쿠스 볼프가 불신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조건으로 기민당의 슈타이너 의원에게 5만 마르크를 주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슈타이너 의원은 실제로 東베를린에서 볼프를 만나 합의서에 서명하고, 약속한 액수의 돈을 건네받았다. 4월27일 불신임 결의안이 의회에 상정되자 슈타이너 의원은 동독 정보당국과의 밀약대로 라이너 바르첼 의원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마르쿠스 볼프의 서독 의원 매수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볼프는 자민당 소속의 에리히 멘데 의원에게도 접근, 오래 전 국가안전부와의 모종의 관계를 들먹이며 브란트 총리에게 표를 던지도록 압력을 가했다.
멘데 의원이 볼프의 압력에 못 이겨 실제로 브란트 편에 섰는지,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때 볼프의 부하직원이었던 귄터 본자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 슈타지 요원이 자민당 당수직을 지낸 바 있는 멘데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날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슈타지가 요구하는 대로 투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멘데 의원은 그같은 전화는 물론, 브란트에게 찬성투표했다는 주장도 부인했다.
서독 정치인들에 대한 슈타지의 영향력 강화 흔적은 그외에도 많이 있지만 명백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5년, 한 전직 소련 정보요원은 동독주재 소련 KGB 책임자였던 이반 파데이킨 중장이 1972년 4월, 자기에게 100만 마르크의 매수자금을 내놓으면서 이를 동방정책 입안자이자 브란트 총리의 최고참모였던 에곤 바르에게 넘겨주도록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100만 마르크면 최소한 당시 서독의회 의원 네 명을 매수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에곤 바르와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이 정보요원은 그같이 폭로한 후 곧, 바르가 이 돈을 받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KGB 책임자에 되돌려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와는 달리, 社民黨 원내총무 칼 뷔난트 의원이 여러 명의 야당의원들을 상대로 바르첼에게 반대표를 던지도록 설득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여기에도 돈이 흘러 들어갔다고 했다. 뷔난트 원내총무도 슈타지에게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마르쿠스 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슈타지는 1960년대 말부터 뷔난트와 접촉을 취해 왔다.
1970년대 이르러 뷔난트 포섭을 위해 특별차출된 정보요원 알프레트 ♥켈, 일명 「크뤼거」는 뷔난트와 슈타지의 관계를 「확실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으며 이같이 다져진 관계는 그뒤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동독 국가안전부에 「슈트라이트」라는 이름의 비공식 정보요원(IM)으로 등록되어 있는 뷔난트 의원은 동독정권이 무너진 뒤 실제로 간첩죄를 인정받아 2년6개월의 구금형에 100만 마르크가 넘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독 의회內에 교섭단체 구성할 정도의 의원들을 매수
뒤셀도르프 소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州(주)고등법원은 社民黨 원내총무 뷔난트 의원이 1976년 말부터 금전적 유혹에 못 이겨 정기적으로 연방정부 내부 정보를 동독 국가안전부에 넘겨준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그 전모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슈타지가 西獨 수도 본의 중앙정치 무대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빌리 브란트에 대한 불신임 투표사건만이 아니었다. 동독 국가안전부는 한때 서독의회內에 거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의원을 정보요원으로 심어놓고 있었다.
이 점은 동독정권 붕괴 후 슈타지 본부 요원이 폭로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자민당 소속의원 윌리암 보름과 社民黨의 西베를린 출신 의원 요셉 브라운이 그런 의원들이다. 녹색당 소속으로 당내에서 兩獨(양독)문제 대변인으로 활동한 디르크 슈나이더 의원도 정기적으로 東베를린에 들어가 슈타지 요원들과 접촉했다. 그는 동독 국가안전부에 「루트비히」라는 이름의 비공식 정보요원(IM)으로 등록, 활동했다. 슈타지 문서를 보면, 「정치적 조종장치」니 「빼돌린 국회의원」 등의 표현이 반복해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들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고 있다.
西獨정치에서의 슈타지의 역할은 독일 戰後史(전후사)에서 가장 흥분을 자극하는, 그러면서 안개 속 깊숙이 빠져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西獨에 대한 이같은 침투행위와 영향력 행사는 아직까지도 현대사 연구사가들로부터 거의 외면받고 있고, 체계적인 조사 또한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문제를 연구테마로 다룰 때마다 접하게 되는 정치적 편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와 관련한 사료와 문헌의 불완전성에 주된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동독 슈타지의 역할과 활동내용은 관련자료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어 구체적인 부분까지 밝혀낼 수 있지만, 서독 정당들과 의회에 대한 침투행위 부분은 그동안 보관해 오던 문서와 자료들을 슈타지가 거의 모두 폐기시키는 바람에 진실규명이 쉽지 않다.
西獨의 주요 정치인들 및 정치단체들과 주고받은 슈타지 문서들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西獨 정보부가 보관하고 있는 문서라도 접할 수 있으면 연구에 도움이 되겠는데,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를 비밀로 하고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관련 당사자들의 기억이나 회고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들도 전혀 입을 열지 않거나, 입을 열 경우에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언만 하기 때문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제한된 관련자료들만으로도 우리는 슈타지가 그동안 西獨을 상대로 펼쳐 온 정보활동의 목표와 방법, 그리고 그 효과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 폐기를 면하고 남아 있는 문서들을 보고 있노라면 슈타지가 西獨에서 얼마나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1957년 선거 때의 활약상
西獨에 대한 슈타지의 엄청난 관심은 소위 「평의회」라고 불리는 東獨의 국가안보 관련 중앙 간부회의 회의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슈타지의 총 책임자 에리히 밀케의 주재下에 열리는 이 간부회의에서는 주기적으로 눈앞의 현실문제는 물론 앞으로의 계획도 함께 논의되었다. 여기서는 동독內의 적대세력 타도문제만이 관심사가 아니었다. 東獨 슈타지 장성들은 오히려 西獨 내의 제반상황과, 국가안전부가 西獨에서 「기대하고 있는」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동독 국내문제라는 것도 오직 계급의 敵들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모든 思考(사고)의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국가안전부 간부회의는 때로 중앙정부 각료회의를 대신하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슈타지의 활동은, 이를 테면 西獨에 선거가 임박했다거나, 혹은 동독 공산당 정치국이 결의한 정치 캠페인을 정보기관의 힘을 빌려 추진하고자 할 때마다 적극성을 띠었다. 1957년 9월 西獨에서 연방의회 선거가 있었는데 슈타지는 선거 13개월 전부터 이미 자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마 당사자들인 西獨 각 정당 선거운동본부들보다도 더 일찍 선거채비에 나섰을 것이다.
슈타지 두목 밀케는 1956년 8월 이미, 그 다음해 9월에 있을 연방의회 선거와 관련, 슈타지가 해낼 수 있는 모든 활동 가능성을 담아 지령을 내렸다. 광범위한 행동계획이 담긴 지령이었다.
밀케는 이 지령에서 「당과 국가지도부가 평화주의자들의 협조를 받아 다방면에서 西獨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선거준비와 관련한 모든 문제를 정확히 밝혀내라고, 다시 말해 스파이를 통해 정보를 캐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서독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정보요원들과 접선대상 인물들은 「進軍(진군)」이라는 암호下에 아데나워 연립정부의 패배를 유도할 수 있는 정보를 수집, 제공하고, 나아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지저분한 스캔들을 들추어낸다거나, 여타의 유용한 문서들을 빼낸다거나, 연립정부의 내부적 갈등을 부추기는 것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슈타지는 西獨연방의회와 각 정당 정부조직에 심어놓은 비밀정보요원(GM)들과 접선인사(KP)들을 뚜렷한 목표下에 배후조정, 지휘하고 연방의회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포섭함으로써 西獨에서의 「활동기반」을 강화한다는 방침이었다.
국가안전부(슈타지)는 전체 직원들에게 西獨총선에서 이용하기 적합한 정보, 그리고 당과 연립정부 내 고위인사들의 개인적인 약점을 폭로하고, 정부 내 갈등을 조장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이같은 활동을 지휘, 조정하기 위해 「출동부대」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밀케 자신이 그 책임자 자리를 차고 앉았다.
西베를린에서 아데나워의 기민당 파괴 공작
총선은 기민·기사당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기존의 243석이 270석으로 늘어났다. 기민·기사당의 득표율은 50.2%에 달했다. 동독정권 내부의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對西獨 공작 책임자 마르쿠스 볼프는 선거가 그처럼 참담한 결과로 끝난 것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들과 교회, 그리고 「독점자본」이 기민당을 지원하고 「국민여론을 일방적으로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같은 결과에 대한 책임은 무엇보다도 社民黨 지도부 자체에 있다는 것이 슈타지의 분석이었다. 즉 社民黨 지도부는 『온갖 수단을 다해 평화보장과 같은 중요한 이슈들을 선거전의 중심에 올리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것이다. 西獨에서 나타나고 있는 형세에 더는 「환상」을 지닐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물론 볼프는 동독 공산당(SED)과 슈타지가 앞으로도 계속 西獨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근거는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부르주아 진영 내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런 근거라고 했다. 그는 社民黨이 이미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세력들로 세분화되고 있다면서, 동독에 가장 도움이 되는 세력이 힘을 잃고 세력권에서 제거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에 반대하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해 장차 대규모 사회적 투쟁이 예상되며 이들 세력을 올바로 이끌어 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동독 공산당 중앙委 제30차 전체회의에서 결의된 사항들이 옳았다는 것은 그런 점들로 증명되고, 이것은 또 적들의 중심부에서 펼치고 있는 공작활동을 더욱 강화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西獨 노동자 계급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 이를 위한 투쟁이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제』라고 말했다.
슈타지 두목 밀케는 또 회의석상에서 슈타지 장성들에게 『좌파진영의 블록화를 도와달라』면서 『행동 단일화를 위한 투쟁을 적극 지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동독 공산당 파괴를 위한 「지하운동」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社民黨 지도부에 대한 높은 수준의 첩보활동」이 요구되고 「지하운동 임무를 부여한 자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적대적인 플랜을 준비하는 西獨 국가기구 내 각종 부서에의 침투가 요청되고 있다는 것이다.
1958년 12월7일의 西베를린 市의회 선거를 몇 달 앞둔 9월, 국가안전부 간부회의는 국경문제 이외에 市의회 선거준비 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슈타지는 「출동부대」라는 것을 구성, 본부 제2인자인 한스 프루크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밀케는 『우리들은 社民黨 內의 혁명세력을 강화하는 데 우리 정보요원들의 총 역량을 집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 후 슈타지 본부 제5국은 13쪽에 달하는 계획서에 西베를린 선거전에 참여하는 자신들의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동독 공산당의 목표는 西베를린에서 아데나워의 기민당에 패배를 안기고, 기민·社民黨 연립정권을 무너뜨리고,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의 단합을 막고 그리고 西베를린 시의회가 내놓은 민중 선동적이고 도전적인 제안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민당 연방 副당수 슈벤니케 축출 工作 성공
이를 위해 슈타지는 우선 각당의 선거전략이라든가 선거운동 방법, 그리고 내부적인 정치관에 대한 정보 등, 가능한 한 모든 문서와 자료들을 손에 넣고자 했다. 나아가서 주요 후보자들의 개인적 스캔들을 들추어내는 자료수집도 계획했다. 에른스트 렘머, 프란츠 암렌, 빌리 브란트, 요아킴 리프쉬츠, 헤르베르트 오닝, 롤프 슈베들러, 칼-후베르트 슈벤니케 등이 그 대상이었다.
이무렵 슈타지는 西베를린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위험하고 민감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자민당 연방 副당수 칼-후베르트 슈벤니케에 대한 슈타지의 성공적인 응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슈벤니케는 1946년부터 1956년까지 西베를린市黨(시당)을 이끌면서 자민당에게 득표율 20%가 넘는 대성공을 가져다 준 정치인이다.
슈타지는 동독 공산당에 비판적인 입장이라는 이유로 1950년대 초반, 자민당 내에 인기 있는 정치인 슈벤니케에 반대하는 세력을 본격적으로 규합하는 운동을 벌였다. 자민당 중앙당은 마침 1954년부터 슈벤니케와는 달리 독일의 再통일 가능성과 관련해 동독 공산당과 의견을 같이하는 토마스 델러가 당수직을 맡고 있어서 슈타지에게 도움이 되었다.
드레스덴을 떠나 자민당 西베를린시당으로 침투해 들어간 비밀정보요원(GM) 귄터 헤게발트는 슈벤니케가 델러를 당수직에서 몰아내기 위해 비방, 무고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해 슈타지 지령대로 델러 당수와 그의 黨동료들에게 보냈다.
베를린市 라이니켄도르프와 크로이츠베르크 지구당 간부회의의 임원인 비밀정보원 「알브레히트」와 「레텐」도 그와 비슷한 「비밀구호」를 퍼뜨리는 임무를 맡았다. 템펠호프 지구에서는 정보원 「페터」와 「보토네」가 슈벤니케의 정책노선에 반대하는 활동에 들어갔고, 노이쾰른 지구에선 정보원 「툴페」가 그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나섰다.
슈타지는 당직자들과 여타 당원들에게 소위 소식지라는 것을 보내 슈벤니케의 자민당 축출을 공공연히 요구했다. 그리고 슈벤니케를 정치적으로 매장키 위해 개인적인 스캔들을 폭로하고, 그의 사무실에 몰래 침입, 편지를 훔쳐냈다. 그리고는 팩스를 통해 이를 만천하에 공개하기도 했다. 1955년 슈타지는 심지어 그에게 폭탄 상자까지 배달한 바 있는데 이때 다친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여비서였다.
1956년 2월 기민·기사당과 자민당 간의 연립정부가 깨지고 얼마 후 아데나워 총리를 지지하던 자민당 정치인들은 「자유국민당(FVP)」을 창당했다. 슈벤니케도 베를린 출신 일부 의원들과 함께 이 新黨에 가입했다. 그러자 슈타지는 곧 신당에 대한 파괴공작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자유국민당이 독일국민당(DP)을 비롯해 여타의 군소정당들과 합당하는 것을 방해하고 나섰다.
동독 국가안전부는 그같은 목적달성을 위해 자체 직원인 베르너 헨(간첩명:「라데베르크」)과 「테디」, 그리고 「가이어」를 자유국민당에 침투시켰다. 이들 첩자들의 도움으로 슈타지는 또다시 당내에 슈벤니케 반대세력을 조직했다. 1957년 11월 슈타지는 슈벤니케의 정치생명은 이제 「끝장났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흡족해했다.
약점 잡힌 언론의 협조
이무렵 東유럽 공산주의 진영은 西獨의 서방세계 편입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1959년 1월 소련은 독일 분단을 일단 국제법적으로 인정하고, 그러면서 현재의 경계를 국경으로 해서 장차 독일을 중립화, 非군사화하는 내용의 평화협정 초안을 내놓았다. 社民黨은 그 두 달 후 「독일플랜(Deutschland plan)」이라는 것을 내놓으면서 단계적 통일의 첫 시도로 同數(동수)의 東·西獨 정부대표가 참여하는 全獨(전독)회의 구성을 제안, 소련 측 평화협정 제의에 관심을 보였다.
1959년 여름, 美·英·佛·蘇(미·영·불·소) 등 제2차 세계대전 승전 4개국은 제네바에서 베를린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60년 5월, 이들은 또다시 파리에서 만나 장차 독일의 지위와 분단된 수도 베를린에 관하여 협의할 계획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동독 공산당은 1960년 4월, 소위 「독일민족의 독일계획」을 제안, 다시금 西獨의 서방세계 편입저지를 시도하고 나섰다. 이 계획은 프로파간다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아데나워 정권의 정책을 저지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社民黨, 기민당, 無黨派(무당파) 노동자들, 도시와 농촌의 진정한 애국자들」, 그리고 「진보적 기업인들」에게까지 『西獨의 군국주의를 타파해, 東·西獨 연방구성을 위한 전제조건을 마련하자』고 촉구했다.
이 「독일민족의 독일계획」을 선전키 위해 국가안전부(슈타지)가 또다시 암약하기 시작했다. 슈타지 본부는 1960년 5월 초, 西獨 및 西베를린 시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13쪽 분량의 제안과 조처를 작성한 바 있는데, 이것이 폐기되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참고가 되고 있다.
슈타지는 민족전선 전국협의회, 평화협의회, 독일통일위원회, 군소 연합정당 등에서 소위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정간첩들을 통해 이같은 계획을 西獨 내 각종 정치, 사회단체, 언론기관, 그리고 영향력 있는 개인들에게 보낸다는 방침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접촉대상은 「자유유권자 연맹」, 「액션 61」, 「독일인 동맹」, 「의회 밖 야당」, 「全獨 노동자연맹」 그리고 「反核투쟁연합」 등이었다. 이들 단체들은 슈타지로부터 전해받은 계획서 내용을 가지고 접촉이 가능한 언론매체를 통해 선전하고, 「아데나워 정권에 대항해서 좀더 적극적으로 투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西獨의 각종 언론매체들은 국가안전부(슈타지)와 접촉해 온 것이 약점으로 이용되어 동독 공산당의 「독일계획」에 호의적인 글을 실어야 했다. 이를 테면 「베를리너 블라트」, 「프라이하이트보텐」, 「도이췌 슈팀메」 등의 신문에 유명인사들의 입장표명을 담은 글을 내보내도록 한 것이 그런 것들이다. 「인두스트리쿠리어」와 「도이췌 인포마치온」과 같은 경제지에도 슈타지는 아데나워를 비판하는 글을 싣는다는 방침이었다.
언론을 통한 공작
「社民黨과 독일 노동조합연맹(DGB)에 대한 영향력 행사 방침」, 이것은 「독일계획」 선전과 관련한 슈타지의 세 번째 주요 관심사였다. 社民黨에 대한 영향력 행사방침은 연방 의회의원 칼로 슈미트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의회의원들에게 집중키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외에 슈타지는 함부르크, 미텔라인, 헤센-쥐트 지역의 청년社民黨과 「젊은 자연의 친구」 간부들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끝으로 슈타지는 노조 청년위원회를 비롯해 인쇄 및 출판 노조연구위원회 회원, 그리고 核무장 문제에서 「대화가 가능한」 금속노조 간부들의 지지에 희망을 걸었다.
이들 조직 내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社民黨과 연방노조 속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슈타지 요원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社民黨의 「독일계획」을 지지하고, 또 국가안전부(슈타지)로부터 「자료」를 지원받아 동독 공산당의 「독일계획」과 社民黨 「독일계획」 사이의 공통점을 부각해야 했다. 社民黨과 노조를 지지하는 신문들, 이를 테면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와 「함부르거 에효」에 조직적으로 독자편지를 보내는 방안도 잊지 않았다.
슈타지는 부르주아 정당들과 기업인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경제계의 경우, 슈타지는 무엇보다도 크루프, 클뢰크너, 피르마 오토 볼프처럼 「대화가 통하는」 기업들 및 해양경제 분야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소위 할슈타인 독트린에 반대하는 북부 독일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에 대해 활동의 초점을 맞추었다.
전쟁이 끝난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많은 西獨인들은 독일의 분단을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左派와 右派진영 다같이 중립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동독 공산당은 정치적인 색깔과는 상관없이 그런 분위기를 최대한 이용하려 들었다.
물론 西獨 주민들의 대다수는 미래가 불투명한 독일의 중립통일보다는 西獨만이라도 서방 동맹체제에 편입하자는 의견이었다. 동독 공산당과 슈타지가 수많은 방안과 조처를 강구해 보았지만 西獨의 그같은 분위기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60년 3월 처음으로 이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통일보다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파리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자 社民黨도 1960년 헤르베르트 붸너(社民黨 원내총무를 지냄. 브란트, 슈미트 등 두 전직총리와 함께 전후 社民黨을 이끈 3頭 마차의 일원임)의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아데나워 정부의 對서방 동맹체제 편입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로써 동독 공산당의 독일 중립화 정책은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그뒤 여러 해 동안 社民黨 지도부는 공산당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을 받고 지내야 했다.
西獨 금속노조를 존중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슈타지는 다시금 1961년, 그해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총선 준비에 들어갔다. 슈타지 對西獨공작 책임자인 볼프는 1961년 1월 선거관련 간부회의석상에서 기민당에 대한 슈타지의 정보활동에 『여전히 약점이 있다』고 질책하면서 하루빨리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볼프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요구하고 나섰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우리는 수도 본의 연방정부를 이끌어 가는 모든 주요인사들의 신상정보를 들춰내는 문제를 비롯해서, 이들과 독점자본 간의 밀착관계, 社民黨 내 우파세력과 노조 지도자들의 배신자적 역할을 폭로키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이와 함께 모든 의원출마 후보자들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 각 이익단체 사이에 존재하는 견해 차이를 잘 이용함은 물론, 야당세력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보존이 되지 않아 접할 수는 없지만, 슈타지는 자신의 활동계획에 社民黨과 연방노조內 진보세력에 대한 지원방안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다고 했다.
이 계획에는 또 西베를린(장벽구축 前)의 非정상적인 지위를 타파하기 위한 투쟁을 비롯해서 西獨 내 보복주의 및 군국주의세력 제거, 西獨 연방군과 나토연합군의 해체, 그리고 심리전과 동독에 대한 西獨의 사보타주 활동 퇴치 지원방안 등이 담겨 있었다.
이와 관련해 볼프는 西베를린에서 있은 금속노조 회의를 언급하면서, 이 회의야말로 우리들이 西베를린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 西베를린에서는 마침 여러 차례 노조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금속노조는 실제로 그해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西獨의 核무장과 비상조치법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西獨의 불법 정치단체인 독일 공산당(KPD) 노조담당 위원회는 한 내부 분석보고서에서 이 「투쟁 결의안」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독일연방공화국(西獨)의 가장 강력한 노조세력인 금속노조는 이 결의안을 통해 우리가 西獨에서 추구하고 있는 정책과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세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 안에 있는 강력한 힘이 필요한 것인데, 바로 그런 힘이 지금 여기서 등장하고 있다』
1961년 6월 마르쿠스 볼프(슈타지 對 서독 공작 책임자)는 또다시 당시의 社民黨 입장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社民黨은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社民黨 지도부內 우파세력의 정책노선에는 기민당과의 대결이라든지 논쟁이 없다』, 『社民黨은 「항복선언」 이후(西獨의 서방진영 편입을 지지하는 헤르베르트 붸너의 의회연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국방정책을 뜻함) 호전적인 군국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現 기민당 정부정책을 바꾸기는커녕, 이를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연방공화국(西獨)에 대한 모든 공격은 하나하나가 바로 우파 社民黨 지도부에 대한 공격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어갔다.
『우리들의 활동은 이같은 사태발전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연방의회 선거와 관련해 진정한 야당세력을 규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서로 맞서 싸우고, 견해차이를 더욱 크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야당세력을 강화하고, 그 지도자들로 하여금 대결의 자세로 나가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마르쿠스 볼프는 또 빌리 브란트가 대안으로 내놓은 「통치 프로그램」과 붸너가 「울트라들」과 함께 추구하고 있는 구체적인 협력방안의 정체를 폭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데나워에 반대하는 「진보적」 노조원들의 요구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볼프는 이같은 일반적인 결론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조처들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전 반드시 국가안전부 간부들과 협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독內 對동독 협상세력과 보수세력 간 대결구도를 조성
베를린 장벽 구축을 통해 국경을 닫아버린 뒤부터 西獨에서의 동독 공산당과 국가안전부(슈타지)의 목표설정도 바뀌었다. 그동안 전술적으로 추진해 오던 「하나의 독일정책」 대신에, 이제 동독 정권은 국제사회에서 西獨의 단독 대표권 주장에 맞서 싸우면서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이같은 방향전환은 점차 성공을 거두어 갔다.
1961년 12월 슈타지 총책 밀케는 휘하 간부들에게 내린 지시에서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과제는 냉전을 극복하고 西獨 정치인들을 부추겨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내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문제점들을 西獨人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긍정적」인 세력을 강화하고, 「울트라와 그 走狗(주구)세력」들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대화하고자 하는 협상세력과 종전의 입장을 고수하는 수구세력 사이에 첨예한 대립, 대결 관계를 조성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얼마 뒤,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안보담당 부서도 슈타지의 작업을 검토한 후, 西獨 연방정부의 성격과 그의 전쟁준비, 그리고 反민족적 정책의 정체를 폭로하고 「정치·경제·군사 중심부와 적들의 지도부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인 조치」의 이행이 필요하다면서 이에 더욱 열심히 이바지하라고 요구했다.
이 무렵의 정치현실과 시간도 동독 공산당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정당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社民黨의 경우에는 동독과 공식적인 협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1963년 말경, 당시 西베를린 시장으로 있던 빌리 브란트는 동독 정권과 통과협정을 이룩해 내, 2년여 만에 다시 東·西베를린 간의 내왕을 가능케 했다.
이 통과협정으로 西獨은 사실상 동독을 인정한 셈이고, 그리고 西베를린의 독자적 지위를 요구해 온 동독 정권의 주장도 인정한 셈이다. 社民黨은 새로운 동방정책을 개발, 실천하고 나왔는데, 1963년 에곤 바르는 이를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말로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1965년 9월의 연방의회 선거가 있기 두 달 전, 밀케는 간부회의를 갖고 에르하르트 정권에 맞서 모든 세력을 총 동원 하도록 지시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당시 기민당과 社民黨 양당 간의 선거예측은 막상막하, 백중세였다. 슈타지 총책인 밀케는 상황이 이러하자 『社民黨이나 社民黨 지도부 고위인사들에게 불리한 그 어떤 조처와 행동도 취하지 말라』고 했다.
밀케 다음의 슈타지 제2인자인 마르쿠스 볼프도 이 자리에서 총선과 관련, 「그에 상응하는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다고 밝혔다. 당시 西獨정부는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일절 갖지 않겠다는, 소위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슈타지는 이같은 할슈타인 원칙을 타파키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동독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기민당을 타도하고 싶다』는 社民黨 분위기
슈타지 문서에 따르면 西獨의 社民黨도 동독 공산당과의 전술적 동맹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에곤 바르나 디트리히 슈팡엔베르크 같은 社民黨 지도자들은 1960년대 중반 비밀채널을 통해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그러면서 社民黨에게는 총선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실용적인 제안을 여러 차례에 걸쳐 동독 측에 전달했다.
이를 테면, 1965년 社民黨의 한 對동독 특사의 보고로도 알려진 것이지만, 브란트는 여전히 동독과의 접촉을 강화하고 불신을 제거하고, 긴장을 해소하고자 하는 입장이고, 총선과 관련해 동독이 기민·기사당에 맞서 社民黨과 협력하면 社民黨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社民黨은 이 선거에서 종전보다 3% 이상 더 득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승리는 이번에도 47%를 조금 더 넘게 얻은 기민·기사당의 몫이었다.
1966년 여름 공식적인 「연설자 교류」로까지 이르게 되는 社民黨과 동독 공산당간의 새로운 협력이 시작되었다. 社民黨은 그해 부활절로 예정된 새로운 東·西베를린 통과협상을 이같은 양당 간 협력의 시금석으로 보고 극비리에 동독에 밀사를 보내, 이번 협상이야말로 「간단명료하게」 진척,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래야만이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1966년 3월12일에 있을 西베를린 市의회 선거에서 社民黨의 새로운 승리가 확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西베를린 市의회 의장 디트리히 슈팡엔베르크의 태도는 더욱 분명하고 노골적이었다. 그는 1966년 5월 밀사로 활동하고 있는 헤르만 폰 베르크를 동독 공산당에 보내 자신은 『동독 공산당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기민당을 타도하고 싶다. 확실한 점은 오직 동독과의 연방을 추구하는 것뿐이다』라고 전했다.
1962년부터 슈타지에 협력
폰 베르크는 당시 社民黨 내에서 동독 공산당 내의 對西獨 협상파와 줄을 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채널로 통했다. 관련문서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1962년부터 「귄터」라는 가명으로 슈타지에 협력해 왔다. 폰 베르크와 관련된 문서가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슈타지로부터 그가 소위 슈피겔 선언문 작성자로 의심받은 당시의 정황 덕분이다.
이 문서는 슈타지의 활동을 증거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긴장완화정책의 단초와 슈타지의 역할을 만천하에 드러내 준 것이기도 하다.
헤르만 폰 베르크는 슈타지 본부 제10과 「위장정보 담당」의 지시下에 활동했다. 폰 베르크가 정보요원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기록해 놓은 제10과 문서에 따르면 그는 1959년에 이미 동독內 라이프치히市 소재 칼 마르크스 대학의 동·서독문제 연구, 그 중에서도 특히 괴팅겐 클럽 소속 학생들과의 접촉을 지휘, 관장케 하기 위해 동독 「방첩부서」가 채용한 인물이다. 폰 베르크는 당시 동독 정권에 「비판적인(리버럴한) 태도」를 보이면서 西獨으로 넘어가 살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슈타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부터 西獨에서는 그를 은밀히 활동하는 反체제 인사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슈타지는 이렇게 특별히 「다듬어」 그를 西獨으로 침투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계획을 黨 고위층에 보고하는 바람에 슈타지는 일단 이를 취소하고 말았다.
1962년 그는 동독 총리실 소속 공보국에서 언론관계 일을 맡으면서부터 西獨 언론인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넓혀갔고, 그러면서 활동영역도 확대되어 갔다. 「방첩부서」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얼마되지 않아 슈타지 본부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그는 곧 東·西獨을 넘나들며 兩獨관계를 주무르는 중요인물로 성장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폰 베르크는 黨 지도부의 신임下에 兩獨 고위 정치인들, 이를 테면 동독의 울브리히트 공산당수, 슈토프 총리와 西獨의 키징거 총리, 브란트 社民黨首 사이에 비밀편지를 전달해 주는 밀사 역할을 맡았다.
수도 본에서 그가 외교관 여권에 고급 리무진을 타고 다니면서 고위 정치인들과 밀회를 하고 다니자 西獨 고위 정계에서는 그에게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여러 언론인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社民黨 지도부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준 클라우스 엘로트, 데트마 크라머 등과의 관계를 긴밀히 다져갔다.
社民黨, 슈타지의 미끼를 물다
당시 西獨 社民黨은 동독 공산당 지도부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나 열심히 그 길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1966년 빌리 브란트가 기민당과의 大연정 구성 후 외무장관직을 맡으면서부터 동독 정권을 향한 社民黨의 구애는 더욱 절절해 갔다.
「귄터(폰 베르크)」의 보고에 의하면, 브란트는 1967년 3월 그의 정책기획수석 에곤 바르에게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독일연방정부(西獨)는 이제까지 구축해 온 기반(그동안의 비밀편지 교환, 슈팡엔베르크와 바르 간의 정보교환 회담, 특히 도르트문트 社民黨 전당대회를 계기로 한 바르와의 회담 등을 의미함)을 바탕으로 해 동독과 계속 회담을 갖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제안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동독 측에 전달하라』
그러나 동독 측엔 극비리에 회담을 이끌어 갈 대화 파트너가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브란트는 생각했다.
이때 나타난 헤르만 폰 베르크는 社民黨에겐 적격의 대화 파트너로 보였다. 동독 공산당 내 여타 관료들과 달리 그는 슈타지의 표현대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재치가 넘쳐 흐르고 쾌활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타입」이어서 西獨 측 대화 파트너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社民黨은 슈타지가 던진 미끼를 곧 덥석 물고 말았다. 슈타지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폰 베르크는 동독 빌리 슈토프 총리의 신임을 받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 지도부 내의 리버럴한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폰 베르크는 그렇게 해서 社民黨 내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통했다. 빌리 브란트는 東·西獨 정상회담을 위해 에어푸르트로 가는 도중, 특별열차 안에서 몸소 그를 맞아주기까지 했을 정도다. 슈토프 총리와의 단독회담 자리에서 브란트는 앞으로 兩獨 총리들 사이에 「비밀접촉」이 필요할 때에는 폰 베르크에게 그 역할을 맡기자고 제의했다.
서독 측이 강력히 요청하고, 슈타지가 뒤에서 돕고, 슈토프 총리가 보호하고, 그렇게 해서 폰 베르크는 비밀 안테나를 갖춘 가장 중요한 접촉창구로 발전했다. 이 안테나에 잡힌 모든 정보는 곧바로 슈타지 실무진의 손으로 들어갔다가 볼프와 최고책임자인 밀케를 거쳐 공산당 지도부로 전달되었다.
폰 베르크의 보고에 따르면 社民黨은 기민당과의 연립정부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독 공산당의 품안에 안기고 말았다.
『이제 社民黨은 연정참여를 통해, 전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정보자료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폰 베르크는 1967년 3월 西獨 측 대화 파트너의 말을 인용, 그렇게 보고하고 있다.
마르쿠스 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긴장완화 정책의 준비는 나를 거쳐 진척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은근히 자랑했다. 그는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우리 슈타지의 정보와 접촉활동이 나름대로의 특별한 방법으로 긴장완화 정책을 도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와 슈타지는 당시의 동방정책을, 동독과 사회주의 진영을 「내부로부터 파괴」하기 위한 「敵」의 매우 위험한 시도로 보았다.
특히 밀케는 1967년 2월 슈타지 본부 당대회에서 『붸너와 브란트 같은 社民黨 지도자들의 對동독 투쟁관이 西獨연립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동독에 대한 적대행위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슈타지, 社民黨도 불신
1969년 9월 총선 결과, 社民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빌리 브란트가 연방정부 총리실에 入城(입성)했다. 에리히 밀케는 선거 1년 후쯤에 있은 한 정보기관 회의에서 정치적 역학관계가 사회주의 쪽으로 유리하게 바뀌더니만 西獨에서도 그 효과가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그는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의 일관되고 상호 협조적인 행동이 西獨정부로 하여금 제2차 세계대전 후 획정된 국경의 불가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민·기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세력들이 과격한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브란트 정부를 넘어뜨리려는 등, 완강히 저항하는 데 있다고 했다. 밀케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현재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진실로 유럽의 평화를 걱정하는, 西獨 국내외 세력들을 지원해 보복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정보기관에 막중한 과제가 부여되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적의 행동계획, 여러 가지 구상, 의도에 대한 정보를 시의적절하게 그리고 정확히 파악, 제공함으로써 당과 정부가 효과적으로 상호 협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밀케에 의하면, 특별히 주의하고 관심을 기울인 것은 「우파세력」의 의도와 행동계획이었다. 하지만 에어푸르트 兩獨 정상회담 때 빌리 브란트에게 보여준 열광에서 나타났듯이, 동독인들 사이에서 西獨 社民黨의 인기가 점점 높아가자 슈타지는 社民黨에 대해서도 불신을 갖기 시작했다.
밀케는 1970년 12월 東유럽 사회주의 국가정보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社民黨과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소위 동방정책이라는 것은 「전체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의 한 변형」일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에 상응해 요구되는 전술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정부 요소요소로부터 나오는 최신정보 외에 각종의 부르주아 단체들, 그리고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당과 조직 내에서 이들 부르주아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실질적인 영향력과 이들 내부의 상이한 평가, 의도 등을 알아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슈타지 본부 책임자인 볼프는 1971년 3월 국가안전부 간부 세미나에서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제시하고 나왔다. 즉 『서방국가들에 외교대표부를 개설해 놓고 있지만, 우리는 나토(北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에서는 「법 테두리를 벗어난 노선」에 따라 활동할 수밖에 없다. 슈타지 본부의 가장 중요한 활동지역은 여전히 西獨이다. 그 이유는 西獨이 유럽에서 미국의 최대 동맹국이고, 그리고 동독에 대한 거의 모든 적대행위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주요목표」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슈타지가 지니고 있는 모든 잠재력을 좀더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社民·自民 연립정부 안정에 총력 기울여
1970년대, 슈타지는 사민·자민당 연립정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親동독계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브란트 총리에 대한 의회 불신임안 저지를 위해 의원들을 매수하는 것은 물론, 슈타지가 벌이고 나선 일체의 對서독 정보활동도 그같은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점은 무엇보다도 밀케가 슈타지 활동의 지침으로 삼은 기본계획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테면 1976년부터 1980년까지 4년간의 계획내용에서 밀케는 서독 내의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세력을 강화하고 이를 부추키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방향으로 일을 집중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특히 1976년의 총선을 맞아 슈타지는 당시 연립정부를 지원하고 연립정부 정책 내의 현실주의적 부분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를 계속 강구해 실천에 옮기라고 했다.
『슈타지의 과제는 西獨 내의 반동세력, 다시 말해, 노골적으로 보복주의적 태도로 나오면서 긴장완화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철퇴를 가하고, 보수세력, 특히 기민·기사당 내의 보수세력과 그 배후세력을 타도하는 데 있다. 우리들은 現 연립정부안에서 긴장완화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방해하고 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세력에 대해서도 투쟁을 벌여갈 것』이라고 했다.
매해 작성하는 계획안에서 밀케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구체화시켰다. 이를 테면 그는 1978년 한 해 동안 현실주의적인 세력을 강화하고 우파세력의 지속적인 침투를 막기 위한 사전조처로 西獨의 현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민·자민당 연립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기민·기사당의 안간힘」을 對서독 정보활동의 중심에 두었다. 유럽안보회의(KSZE)를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모든 계획, 그리고 「브레즈네프 동무의 西獨방문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정탐하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소련의 SS-20 로켓 실전배치와 그에 뒤따른 北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비확장 결정 그리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1970년대 말 東西 진영 간 긴장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슈타지는 서방진영의 군비확산 정책에 대한 정보활동을 더욱 강화하고, 특히 核 미사일 반대운동을 선동, 지원하라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1982년 기민·기사당과 자민당 간의 연립정부가 정권을 넘겨받으면서 물론 정치적 여건도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전쟁위험을 제거하고 모든 면에서 동독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1983년 한 해 동안 슈타지가 추구해야 할 기본과제다.
슈타지 본부의 對서독 책임자 볼프는 1983년 1월, 조직 내의 한 당대회에서 그같이 밝히고 지난 1년간 자신들이 이룩해낸 업적에 만족을 표했다. 정보입수 방법을 개선하고 주요 정보활동 대상 내에서 새로운 입지를 확보함으로써 슈타지는 최근 몇 년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작업성과를 달성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하지만, 새로이 들어선 기민·자민당 연립정부도 현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西獨의 對동독정책도 기본노선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대 우리들이 달성해 낸 투쟁성과를 그냥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볼프는 아마도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국가안전부는 기민당이 주도하는 西獨 연립정부를 현실로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정보활동을 펴나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민당에 대한 첩보활동 강화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우리들 특유의 전략과 방법을 동원, 기민당 내의 현실주의적 입장과 세력에 강력한 지원을 보내줄 필요가 있다』고 볼프는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社民黨은 여전히 중요한 加工대상이라는 것이 볼프의 견해였다. 社民黨은 야당으로 전락하면서 다시 강하게 좌파적 색채를 나타냄으로써 슈타지를 만족스럽게 했다. 『社民黨 지도부는 社民黨에 대한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좌파세력의 주장들 가운데 일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서 核미사일에 대해 신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프는 말했다.
그는 처음으로 녹색당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슈타지 본부는 녹색당이 3월에 있을 총선에서 연방의회에 진출할 경우 새로이 형성될 세력판도에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브란트 총리의 서류가방을 든 사나이
그는 총리의 그림자로 통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개인 보좌관인 그는 모든 社民黨 주요 간부회의에 빠짐없이 자리를 같이했다. 브란트 총리가 여행에 나서면 총리의 서류가방은 항상 그의 보호下에 있었다. 1974년 4월24일 브란트 총리의 노르웨이 휴가를 동반했을 때, 총리가 외부와 주고받은 문서 및 서신교환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그런 그, 귄터 기욤은 그러나 동독을 위한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그것은 독일연방공화국(西獨) 역사상 가장 떠들썩한 간첩사건이었다. 슈타지 첩자가 권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가 자연스럽게 국가 최고권력자의 정치적 비밀과 개인적 비밀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全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사건이 터지고 몇 주 안 되어 빌리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에 「한센」이라는 가명으로 등록된 「기욤 간첩사건」은 그뒤 계속해서 여러 가지 형태로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했다. 그의 인생역정을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영화도 만들어지고, 심지어는 기욤 자신이 저자로 등장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 진실이 제대로 밝혀질 것인가 하는 물음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기욤 개인과 브란트 총리 개인 비서로서의 그의 역할과 관련한 슈타지 문서는 단 한 건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독 정계 각 정당에 침투해 들어간 대부분의 첩자들이 그렇듯이, 귄터 기욤 역시 동독 슈타지 내의 정치선전조직 요원이었다.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이 정치선전 요원, 즉 정보요원으로 채용된 것은 이미 1955년의 일이다. 정치선전 부서에서 西獨 社民黨과 연방노조를 담당하는 책임자 파울 라우퍼가 발탁한 것이다.
이들 부부가 西獨으로 넘어간 것은 그 1년 뒤였다. 西獨에서 「우파」 社民黨원으로 위장한 기욤과 부인 크리스텔은 社民黨 내의 주요 인사들을 접촉해, 각종 정보자료를 빼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렇게 활동하기를 여러 해, 이들 두 사람은 슈타지 본부 지도부에 의해 고급정보를 캐내는 정보원으로 육성되었다.
기욤이 西獨 총리실까지 침투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社民黨 정치인 게오르그 레버(社民黨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역임했음)의 덕분이었다.
기욤은 1960년 총선에서 레버의 선거운동에 참여, 연방의회의원 당선에 도움을 준 바 있다. 슈타지 본부 책임자 볼프의 지시로 작성된 연구보고서에는 기욤이 브란트 총리의 측근으로 올라가기까지의 얘기가 마치 영화 시나리오만큼이나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총리실 침투방법으로써 「주요 정치인들과의 적극적인 접촉 및 활동, 그리고 정당 정책적인 인연과 친분을 최대한 이용하라」고 적고 있다. 이들 지도적 정치인들은 순전히 당정책을 바탕으로 소명되어 그 직책을 부여받고 또 그들에게 필요한 보조인력, 즉 비서라든지, 보좌관, 운전기사 등도 일반적으로는 이제까지 자기들 주변에서 함께 일해 오던 사람들 가운데서 채용했다. 그러니 슈타지는 침투 가능성이 엿보이면 결코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나는 東獨의 시민이자, 東獨의 장교다』
기욤은 프랑크푸르트 지역 社民黨에서 오랫동안 당원으로 일하면서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책임 있는 정당인으로 성장하는 데 슈타지의 도움이 있었는지, 도움이 있었다면 어떻게 도왔는지, 그런 점들은 아직도 어둠에 쌓여 있다. 프랑크푸르트市의 한 지구당 의장을 지낸 바 있는 에밀 베른트는 브란트 총리의 실각과 함께 없어지긴 했지만, 1960년대 자신이 관장하는 지역에서 社民黨 침투행위와 관련한 기욤의 여러 가지 움직임을 지적한 바 있다.
1964년 기욤은 社民黨의 한 지역구 총무직을 맡았고, 그 5년 뒤인 1969년 社民黨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레버의 천거로 연방총리실로 진출하게 되었다.
부인 크리스텔은 헷센주 당 사무국에서 자리를 하나 얻었다. 1972년 브란트의 선거운동 본부장으로까지 올라간 그는 선거가 끝나고 브란트 총리의 개인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슈타지로서는 간첩활동을 위해 이보다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기욤의 西獨정계 잠입은 슈타지에게는 「피러스의 승리」, 즉 희생을 잔뜩 치르고 얻은 유명무실한 승리가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2년 전 자신들이 의회 불신임 투표에서 구해준 그 브란트 총리를 낙마시키고 말았으니 말이다.
1973년 가을, 또 하나의 거물간첩인 노조간부 빌헬름 그로나우가 체포되고, 1973년 여름에 이미 기욤의 부인이 西獨 정보부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슈타지는 그들의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장교」 기욤을 계속해서 브란트의 곁에 놔두었다.
기욤이 총리 보좌관에서 최종적으로 물러나게 된 것은(브란트의 경우도 마찬가지) 간첩행위 증거가 아니라 체포당할 당시 그가 보인 자부심에 넘치는 반응 때문이었다. 기욤은 西獨 보안요원들에게 체포되면서 이렇게 외친 것이다.
『나는 동독시민이자, 동독의 장교다. 그 점을 존중하기 바란다』
마르쿠스 볼프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실각에 대한 책임을 실각 당시에도 인정치 않았고 그후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지만, 단지 그는 기욤을 관찰하면서 왜 지난날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의 무선통신 내용을 주목하지 않았는지 자책하고 있을 뿐이다.
슈타지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무선통신 내용은 그동안 서방세계에 의해 다 解讀(해독)되어, 총리실 간첩 기욤의 뒷덜미를 잡는 데 이용되었다. 볼프에 의하면 브란트 총리의 실각에 진짜로 책임이 있는 것은 기욤의 간첩혐의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대로 그를 브란트 총리 곁에 내버려 둔 西獨 정보당국, 그리고 브란트의 당내 적대자들이었다.
볼프의 보고서
「西獨에서의 사민·자민당 聯政(연정)의 위기진전과 브란트의 권위실추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슈타지의 對서독 책임자 볼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반적인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로 모든 西유럽 국가들과 해외의 여타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안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가속화되었고, 그같은 현상은 西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브란트 총리의 실각은 이같은 사태발전의 결과물이다. 반동적이고 긴장완화에 적대적인 세력들은 브란트 개인 보좌관 기욤의 체포를 계기로 그동안 인간 브란트에 대해 조직적으로 펼쳐오던 반대 캠페인을 더욱 강화하고 나섰다』
볼프는 또 브란트 총리 밑에서 특별임무를 띠고 일한 바 있는 에곤 바르가 「특히 나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서, 동방정책이라는 이름의 그의 「잘못된 계획」이 兩獨관계에 일시적인 정체현상을 가져다 주었다고 주장했다.
바르는 또 西베를린 시장 클라우스 슐츠와 함께 西베를린에의 연방환경청 설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옴으로써 브란트를 난처하게 만들었고, 西獨의 對동독 및 對蘇(대소)관계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붸너는 모스크바 방문 중 西獨정부가 베를린 관련 4개국 협정에 과장된 태도를 취하는 것에 경고를 한 바 있는데, 붸너의 그같은 모스크바 발언도 「객관적으로」 브란트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볼프의 보고서 내용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즉, 기욤이 체포된 후의 몇 가지 사건들과 그에 뒤따른 언론 캠페인을 보면 야당인 기민·기사당과 西獨 정보부 요원들 사이의 협력, 합작사실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연방 내무장관 겐셔(후에 외무장관 역임)도 「일정한 역할」을 행사했다.
겐셔와 연방헌법 수호청장 놀라우는 기욤사건의 모든 책임을 브란트에게 떠넘겼다. 앞서 열거한 사실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면, 브란트 총리의 실각은 西獨 정보기관과 기민·기사당 내 고위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협력下에 소위 「반동세력」들이 비밀리에 준비해 온 사건이며, 거기엔 연립정부內 일부 세력들의 不忠(불충)한 행동도 한몫 기여했다.
11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는 많은 사람들이 브란트 총리의 사임 책임자로 등장하고 있지만, 정작 기욤을 브란트 총리 옆에 심어놓은 슈타지 본부의 공작 책임자 볼프 자신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당시 그는 일기장에 자신의 「주장하는 바」가 공산당수 에리히 호네커에 의해 당정치국에서 응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만족스러운 듯 적어놓았다.
볼프는 긴장완화 시대에 동독 국가안전부가 西獨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그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對서독 간첩 침투활동에 쏟은 어마어마한 노력은 열쇠구멍을 통해 국제정치를 함께 추적하고, 함께 만들어 보려 했던 그의 끝도 없는 욕심과 자만심까지 곁들여져 어쩔 수 없이 東·西獨 관계 발전에 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당內 첩자 120명
에리히 밀케가 내린 관계지침에 따르면, 슈타지가 고용한 서독內 비공식 정보요원은 슈타지가 부여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西獨의 각 정당에서 암약했던 비공식 정보요원의 수는 12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엔 연방의회 의원만도 8명이나 되었다. 여기엔 정부 각 부처를 비롯해 관청, 노동조합, 각 정당재단 및 단체에 침투한 상당수의 간첩들은 계산하지 않았다.
西獨 정치에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그동안 헌법보호청과 연방검찰이 정보활동 측면과 형법 측면으로 나누어 많은 관련사건을 검토 분석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관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자신들에 대한 슈타지의 침투활동 규명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어야 할 각 정당들은 정당소속 연구소, 재단, 전문위원회 내에 고급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테마에 대한 연구를 회피했다.
따라서 동독간첩들의 서독정당 침투활동을 재구성키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당침투로 정치에 어떤 영향이 미쳤는지 따져볼 수 있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아닌 개개의 사건에 국한될 수 있을 뿐이다.
동독이 무너지는 전환기에 슈타지가 대부분의 문서들을 폐기시키는 바람에 중요한 사건들이 여전히 안개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얼마 남지 않은 자료만이라도 연구 분석해 보면 충분한 가치와 보람이 있을 것이다.
서독 정당들을 「정탐」하는 임무는 주로 슈타지 본부 제2국이 맡고 있었다. 2국은 50명의 正직원을 거느리며, 대령 계급의 쿠르트 가일라트가 책임자로 있다가 해체되었다. 각 정당, 모든 주요 정부기관, 수많은 협회와 조직들을 정탐키 위해 국가안전부 내에 제각각 담당 팀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팀이 하는 일이란 「먹이」가 정해질 경우 책임지고 이를 가공, 요리하는 것이었다.
동독 국가안전부의 계산 속에 西獨의 社民黨은 초기부터 아주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의 경쟁자로, 야당세력으로서, 그리고 마침내는 집권정당으로서도 그랬다. 社民黨員을 상대로 한 정보원 포섭조건은 이들이 기본적인 정치신념이나 세계관에서 공통적인 바탕을 지니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쉬웠다.
社民黨 의원을 포섭한 「잊지 못할 저녁」
여러 정당들 가운데 社民黨에 대한 「작업」과 정탐은 본부 2국에서도 주로 4과가 책임지고 수행했다. 해체 직전까지 이 4과의 지시를 받고 정보를 제공해 준 첩자는 알려진 것만도 14명이었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西베를린 市의회 의원으로 있던 社民黨 정치인 보도 토마스(가명 「한스」)와 함부르크 市의회 의원 루트 폴테(가명 「블루멘펠트」)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 말고, 또 전직 郡黨 간부회의 위원이자 한때 함부르크 시당 위원장을 지낸 트라우테 뮐러(女)의 남자친구였던 쿠르트 반트(가명 「쿠겔」), 西베를린시당 언론담당 책임자 칼-하인츠 마이어(가명 「코메트」), 정부 참사관 하르트무트 마이어(가명 「루빈슈타인」), 社民黨 연방사무국 女비서 도리스 비젠바움(가명 「이름가르트」), 社民黨 연방간부위원회 소속 전문 연구위원 우줄라 폴러트(가명 「우도」)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 4과에 포섭된 인물 중엔 「도른」이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이것은 가명이고, 진짜 이름은 한때 社民黨 출신 정치인 루돌프 드레슬러의 개인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헨닝 나제라는 것이다.
나제에 대한 재판은 1998년 20만 마르크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끝났는데, 그 후에서야 「도른」이라는 첩자가 1987년까지 모두 113차례에 걸쳐 슈타지에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넘긴 정보 가운데에는 고급정보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홀름」이니 「슈라이버」, 그리고 거의 30년 동안이나 슈타지의 끄나풀이 되어 첩자활동을 해온 「젠제」 등의 이름도 등장하고 있지만 이들이 실제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西獨연방의회 내에서는 최소한 두 사람의 社民黨 소속 의원이 슈타지를 위해 간첩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1970년대 말까지 유럽의회와 西獨연방의회內 주요 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있던 파울 게르하르트 플레미히(「발터」와 「율리우스」라는 두 가지 가명을 쓰고 있었음)였다. 그는 슈타지 본부 제2국장 쿠르트 가일라트의 지령을 받고 활동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1969년 파울 게르하르트 플레미히를 설득해 간첩으로 포섭한 날 저녁을 되돌아보면서 「잊지 못할 저녁」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볼프의 기뻐하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플레미히에 대한 재판은 1998년 그의 병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슈타지 정보원 노릇을 한 또 한 사람의 주요인사로는 연방의회 의원 요셉 브라운을 들 수 있다. 1927년 독일 공산당(KPD)에 입당한 브라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黨의 지시를 받고 社民黨으로 들어갔다.
社民黨에 입당한 그는 처음엔 공산당 선전부의 지령下에, 그런 다음엔 슈타지 본부의 前身(전신)인 동독 對外 정보기구(APN)의 지령下에 「501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西베를린市 社民黨에서 일하면서부터 브라운은 빠르게 출세했다.
1952년 그는 西베를린市黨 부위원장이 되었고, 1952년부터 1961년까지는 市黨 총무직도 겸직하였다.
그에 뒤이어 1966년 갑자기 사망하기까지 브라운은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볼프는 브라운을 1950년대 중반부터 직접 자신의 관리하에 두고 이용해 왔는데, 그런 볼프에게 연방의회 의원으로까지 진출한 브라운은 「무궁무진의 가치를 지닌 간첩」일 수밖에 없었다. 슈타지에 등록되어 있는 그의 이름은 「프레디」이고, 이 가명으로 그는 볼프의 「회고록」에도 등장하고 있다.
브라운과 볼프의 交遊
슈타지의 對서독 공작 책임자 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브라운이 처음에는 자기 주변인사들에 대한 정보제공을 거부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APN으로 넘어갈 당시의 그의 인사기록을 보면 그때까지의 활동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정기적으로, 구체적으로, 광범위하게 정보보고를 함」이라고. 이 개인 기록에서 또 한 가지 알아낸 것은 그가 자신의 활동대가로 「매달 300西獨마르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장차의 「일자리 가능성」으로는 西베를린市黨 위원장, 경우에 따라서는 하노버市黨 위원장직이 거론되었고, 「전망」이라는 부분에서는 「당과, 노동조합과, 행정당국 고위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강화한다. 社民黨 안에서의 활동을 강화한다. 과업을 심화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52년 브라운을 관리하고 지령을 내리는 슈타지 당국자들은 그가 보내오는 정보들을 분석하고는 『社民黨 베를린市黨 지도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가운데 유용한 정보를 상세히 보고해 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브라운이 수집한 자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은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위원회에서 논의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중요한 정보가 나올 수 있는 다른 곳에도 첩자를 심는 문제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테면 베를린市黨 내 핵심그룹이라든지, 나아가서는 본의 중앙黨 간부회의 내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내용을 캐내기 위해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1952년 7월, 브라운이 西베를린市黨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뒤부터는 중요한 정보수집도 더욱 활발해졌다. 그가 보내오는 자료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었고, 「매우 큰 가치」가 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물론 정보 당국자들은 브라운의 활동내용이 현존하는 가능성에 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때로는 그의 신뢰성에 의심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西베를린市黨 지도부에 선출된 후에는 그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철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로 社民黨 내에 또 한 사람의 첩자를 확보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브라운은 비록 성실치 못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언제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정보원으로 계속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볼프의 회고를 들어보자. 그는 어느 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별장 베란다에서 외부세계와 완전 차단한 채 브라운과 단둘이 마주앉았다.
얼음을 곁들인 샴페인잔을 앞에 두고 이들 두 사람은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 가능성을 신뢰하고, 그리고 정보활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함께 西獨의 再무장은 물론이고 이를 지지하는 社民黨 정책에 맞서 투쟁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후, 「프레디」(브라운의 가명)는 社民黨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상황과 권력관계를 분석해, 옳고 중요하다 싶으면 이를 볼프에게 보고했다. 「그가 西베를린을 떠나 본의 연방의회로 가는 날이면 우리는 한번도 빼지 않고 매번 東獨 내의 통과지역에서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나에게 필요한 자료를 넘겨주었고, 社民黨과 빌리 브란트와 관련한 최근의 상황을 설명해 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런 다음 우리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내어 정치며 인생문제를 놓고 토론도 하고, 또 철학적 견해를 주고받았다」고 볼프는 회고했다.
스냅사진 때문에
1979년, 社民黨 출신의 바이에른州의회 의원 프리드리히 크레머가 체포되었다. 그 1년 전 스웨덴에서 「의견교환」을 위해 그가 마르쿠스 볼프와 만나는 스냅사진 때문이었다. 西獨 정보당국은 이 스냅사진을 계기로 전향자인 베르너 슈틸러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이 「얼굴 없는 사나이」의 정체를 밝힐 수 있었다.
슈타지 본부에 「베커」라는 가명의 비공식 정보요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크레머. 1974년 그에게 슈타지 본부 제2국의 간부, 한스 리히터 박사가 접근해 말을 걸었다. 「리히터 박사」는 그 뒤 西獨의 정치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보기 위해 최소 10여 차례나 그를 방문했다.
볼프에게 있어서 크레머 의원은 건설적인 정치대화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존경할 만한 西獨 정치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회고록에서 볼프는 크레머를 「西獨 내에서 흥미롭고, 또 속이 트인 대화 상대자의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크레머는 결국 정부 및 당내 비밀을 누설하고, 여타의 간첩행위죄목이 인정되어 1980년 5월,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이외에도 슈타지는 社民黨 내에서 여러 명의 女비서들을 포섭해 간첩으로 이용했는데, 1977년 체포된 총리실비서 라크마르 칼리하쉐플러(가명 「잉게」)와 그녀의 동료인 헬가 뢰디거(가명 「한늘로레」)가 그런 여인들이었다.
총리실 부국장 만프레트란슈타인의 비서였던 「한늘로레」는 1974년 그를 따라 재정부로 자리를 옮기더니만, 5년 후 자신을 관리하던 또 다른 첩자 게르트슈벵케(가명 「슐레겔」)와 함께 東獨으로 넘어갔다.
언론인들도 공작 대상
크누트 그뢴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지금은 연방의회 의장으로 있는 볼프강 티어제 곁에서 함께 일했고, 1980년대엔 內獨省(내독성:우리나라의 통일부-편집자 注)의 정치담당 과장직을 지낸 인물이지만, 1973년 이래 슈타지 본부 제1국 5과에 「퇴퍼」라는 가명으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처음 그는 역시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요원인 볼프강 하르트만의 지시를 받고 있었는데, 하르트만은 1960년대에 슈타지를 위해 암약한 西獨 대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을 맡은 바 있고, 장벽 붕괴 후에는 여러 가지 기고를 통해 동독 정보요원들의 「평화임무」와 관련한 전설을 홍보하기도 했다.
슐레스비히 홀슈타인州 社民黨 당수 권터 얀센의 개인 보좌관이자 언론인이었던 베른트 미헬스 또한 1973년부터 「베른하르트」라는 이름의 비공식 정보요원으로 슈타지 본부 제10국에 등록되어 있었다.
제10국은 西獨에서 위장정보와 「적극적인 조처」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제를 맡고 있었다. 「베른하르트」는 社民黨으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빼내어 슈타지에게 제공했는데, 이같은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수」, 아니면 「우」라는 높은 점수를 얻었다.
체포되고 난 후에 쓴 책에서 그는 여러 東獨인들과 몇 차례씩 만난 적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별다른 뜻이 없는, 무해한 만남들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西獨 연방검찰청 수사에 따르면 그는 매달 슈타지로부터 많은 돈(마지막에는 매달 1200마르크)을 받았다. 1996년 「베른하르트」는 18개월 징역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제10국에는 1983년부터 「레터」라는 이름의 정보요원도 등록되어 있었는데 西獨 연방검찰청은 전직 社民黨 소속 연방의회 의원 디터 라트만이 그 실제인물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노르베르트 간셀 의원과 호르스트 융만 의원 밑에서 과학담당 보좌관으로 일한 한스마리오 바우어는 슈타지 본부의 국방기술 담당부서인 제4과 소속이었다. 1978년부터 「유르겐」이라는 이름의 비공식 정보원으로 활동해 온 바우어는 1980년대 초반 「핵무기 없는 유럽」이라는 단체에서 일한 바 있다.
매월 500마르크의 월급을 받고 그는 주로 西獨의 국방정책에 관한 자료를 슈타지에게 넘겨주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西獨 연방의회에서 社民黨 총무직을 맡고 있던 칼 뷔난트도 1989년까지 슈타지 제6국 제1과(재경담당)에 등록되어 있으면서 고급 정보원 역할을 했다.
외교문서 보관소 소장도 간첩
노이브란덴부르크 소재의 슈타지 分所(분소) 제2과는 전직 동독 女기자 브리기타 리히터로 하여금 社民黨 내 군축전문가인 카르스텐 D.포익트 의원에 접근, 정보를 빼내도록 하였다. 이와 관련한 재판은 1991년 「죄가 아주 적다」는 이유로 벌금형 선고를 받고 끝났다.
이제까지 언급한 社民黨 내 비공식 정보요원들의 서류가 하나같이 모두 폐기된 데 반해, 헤르베르트 붸너의 측근인 아르민 힌드릭스(가명 「탈라르」)의 슈타지 활동내용은 관련서류가 일부나마 남아 있어 그의 전체 활동기 가운데 최소한 10년의 것은 비교적 잘 再구성할 수 있다.
힌드릭스는 東獨 바우첸에서의 오랜 형무소 생활 후 슈타지에 포섭되어 1960년 간첩 임무를 부여받고 西獨으로 넘어왔다. 수도 본 소재의 東·西獨문제 연구소 직원으로 들어간 그는 1970년대 초반, 슈타지가 지시한 많은 과제들을 의욕적으로 수행했다. 1972년 그는 연방의회 社民黨 원내 교섭단체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국내외에서 슈타지 요원들과 은밀히 만나서, 아니면 원내총무 헤르베르트 붸너의 참모들 가운데 숨어 있는 또 다른 첩자를 통해 각종 정보를 넘겨주었다. 원내 교섭단체 내에서 힌드릭스가 부여받은 분야는 외교정책이었고, 1983년부터는 이곳에서 외교문서보관소 소장직을 맡아 일했다.
그가 함께 도와 일한 정치인들 가운데에는 社民黨 소속인 쿠르트 마티크, 호르스트 엠케, 페터 코르테리어, 마리 슐라이 등이 있었다. 간첩으로서의 그의 역할이 점점 커지자 1978년부터는 슈타지 본부가 직접 그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는 힌드릭스의 활동과 관련한 문서도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1996년 3년형을 선고받았다.
브란트 측근 집에 도청 장치
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CDU)과 기독교사회당(CSU)에 대한 「책임」은 슈타지 본부 제2국 제1과가 맡고 있었다.
1988년 말 현재 이 제1과에 등록되어 있던 서독內 정보원은 모두 7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이름은 수도 본 소재의 기민당 개신교도 연구회 회장 고트프리트 부쉬(간첩명 「바움」)뿐이다. 그 외에 슈타지는 기민당 소속의 연방의회 의원 율리우스 슈타이너외의 관계도 계속 유지했다. 볼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중간급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정기적으로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민·기사당에 대한 정보활동엔 제2국 제1과 이외에 다른 부서들도 자체적으로 첩자들을 동원해 함께 참여했다.
재경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제1국 제6과가 西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州의회 기민당 원내 교섭단체 전문위원인 라인하르트 오트(간첩명 「리하르트」)를 비공식 정보원으로 포섭한 것, 그리고 유럽공동체(EU) 각료회의 담당 부서인 제5과가 전 총리 헬무트 콜의 측근이자 재벌기업 플리크社 로비스트인 한스-아돌프 칸터(간첩명 「피히텔」)를 첩자로 이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한스-아돌프 칸터는 西獨 內 슈타지 첩자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암약한 인물이다. 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두고 브란트 총리실 간첩 귄터 기욤에 「거의 뒤지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정보요원이라고 적고 있다.
한스-아돌프 칸터는 이미 1948년부터 당정치선전국을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말이 정치선전국이지 그것은 전쟁 직후 설립한 東獨 공산당 정보기관이었다. 라인란트 팔츠州에서 그는 원래 州자민당(FDJ) 청년당원으로 일하다가 1949년 자민당을 떠나 기민당으로 옮겨갔다.
칸터는 플리크사의 매니저인 에버하르트 폰 브라우히취의 절친한 친구였다. 폰 브라우히취는 후원금과 경제계를 대변하는 정치적 지원을 통해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기민당 소속 정치인 헬무트 콜을 黨의 정상에, 그런 다음엔 연방정부의 정상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칸터는 슈타지의 도움으로 1960년대 본에 재무 및 경제문제 상담소를 개설하고는 정계와 경제계 고위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보지를 발간했다. 정보지에 실리는 대부분의 글은 칸터의 「지도자」로서 「프랑크 박사」, 또는 「옌리히」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베르너 K박사가 집필했다.
칸터는 수도 본의 정계 要路 인사들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단 기민당 소속 정치인들뿐이 아니었다. 폰 브라우히취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슈타지 첩자는 「투자」 목적으로 본에 단독주택을 한 채 구입했다.
이 집엔 브란트의 측근이자 동방정책 설계자인 에곤 바르가 세입자로 입주했다. 이같은 사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볼프는 슈타지가 에곤 바르의 「私邸(사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볼프는 이렇게 계속하고 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바르가 그의 소련측 파트너와 비밀리에, 솔직하게, 때로는 아주 즐겁게 대화하는 것을 도청했다. 그 결과 나는 브란트의 심복인 바르가 얼마나 노련하게 자신의 비밀채널을 통해 협상을 추진해 나가는가를 때로는 브란트 총리보다도 먼저 알지 않았나 생각한다」
칸터는 1974년 플리크 콘체른의 본 所在 경영본부 내 정치담당 副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이곳에서 그는 경제계의 대표적인 로비스트로서 막대한 액수의 기부금 지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주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첩자로 발전했다.
칸터 관련서류 모두 파기돼
1981년에 있었던, 소위 플리크 스캔들은 그 당시 재계의 정당 기부금 지출 실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발생한 것인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제도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의회의원들에겐 재계로부터 돈으로 매수될 수 있다는 이미지가 붙어다녔다. 마르쿠스 볼프는 슈타지 본부는 플리크 스캔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폰 브라우히취는 슈타지가 플리크 사건에서 특별한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공산주의자를 잡아먹는 자」로 일컬어지는 폰 브라우히취는 1981년 3월 독일 경제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83년 1월1일자로 회장직에 취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슈타지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자신의 회장취임을 방해하고 나섰다면서 시사주간지 슈피겔을 참고해 보라고 했다. 슈피겔에 발표된 문서를 플리크사가 보유하고 있는 문서 전체와 꼼꼼히 비교해 보면, 1982년 슈피겔에 넘긴 문서는 바로 인간 폰 브라우히취를 개인적으로 매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플리크 스캔들로 본 所在 플리크 콘체른 사무소가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슈타지에게 있어서 칸터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헬무트 콜이 西獨 총리로 선출된 후 칸터는 총리실 장관 필립 옌닝거와의 친분관계를 이용해 1982년부터 연방정부 내부의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슈타지 본부가 운용하고 있는 시라(SIRA) 데이터 뱅크는 간첩들이 보내온 비밀정보들을 모두 해독해 보관하고 있었는데, 칸터가 보내온 정보는 자그마치 1200건이 넘어, 슈타지 첩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한 사람의 하나로 통하고 있다. 그는 1995년, 2년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슈타지 정보원으로서의 관련서류가 모두 폐기되었기 때문에 그의 간첩활동이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를 야기했는지 오늘날까지도 평가할 수가 없다.
이미 보다 더 오래 전에 基民黨 내에서 암약하던 일련의 첩자들이 그 정체를 드러냈다. 이들의 정체는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슈타지의 지시를 받고 東獨으로 퇴각하면서 밝혀졌다.
이 가운데 슈타지와 가장 오래 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사람은 基民黨 창당위원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내무장관, 농업장관, 니더작센州 부총리직을 차례로 지낸 바 있는 귄터 게레케였다.
東獨 공산당수였던 울브리히트와 한 차례 접촉한 것이 발각되어 1950년 基民黨으로부터 축출된 그는 곧 독일 사회당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동독 공산당의 정치 선전국이 초기에 西獨을 상대로 정보활동을 벌이는 데 이용됐다. 게레케는 정체가 폭로될 위험이 제기되자 1953년 東獨으로 소환되었다.
그 1년 뒤 基民黨 소속 연방의회 의원 칼 프란츠 슈미트-뷔트마크가 게레케의 임무를 대신 떠맡고 나왔다.
슈미트-뷔트마크는 이미 독일 공산당(KPD) 정보국을 위해 일한 바 있고 수도 본에서는 연방의회 내 여러 주요 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1959년 슈타지 본부의 基民黨 담당 과장 막스 하임이 西獨으로 망명하면서 西獨에서 활동하고 있는 10여 명의 또 다른 정보원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 중 한 사람이 아데나워의 측근인 하인리히 크로네, 그리고 全獨장관 에른스트 렘머와 절친한 사이인 볼프람 폰 한슈타인이었다. 폰 한슈타인은 1950년대 중반, 간첩죄로 東獨 드레스덴에서 25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슈타지와의 협력을 약속하고 풀려난 인물이다.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西獨으로 넘어온 그는 동독지역 담당 社民黨 사무소 책임자 슈테판 토마스를 비롯해서 「단일조국 도이칠란트」, 「자유를 지키자」라는 이름의 작가위원회, 「스탈린주의 희생자협회」 등에 대한 정보활동을 벌였다.
1958년 말에는 독일 인권연맹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이 연맹을 분열시키는 일에 나섰다. 슈타지는 단합된 힘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키 위해 다른 단체들에도 그랬듯이 이 독일 인권연맹에 비공식 정보요원들을 침투시켰다.
1975년 11월 西獨 연방의회內 기민·기사당 원내 교섭단체 소속의 한 기획참모가 사라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60년대에 슈타지가 발터 되치라는 「차용」 이름으로 西獨에 밀파한 인물이었다.
사회학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이력서에 약간의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자, 독일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던 부인 에디트와 함께 東獨으로 자취를 감췄다.
슈타지는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에도 유능한 정보원을 심는 것을 잊지 않았다. 基民黨 두뇌집단의 일원으로서 개발정책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유르겐 레엡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女비서들을 첩자로 포섭
슈타지가 밀파한 남자 간첩들이 주로 노리는 대상은 女비서들로서, 그들은 사랑을 수단으로 해서 이들 여비서들을 첩자로 포섭했다. 소위 「로미오」라고 불리는 이들 슈타지 요원들의 여비서 포섭은 비열한 것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을 약속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로미오 수법의 「발견」은 아마도 슈타지 본부와, 이를 오랫동안 이끌어 온 마르쿠스 볼프라는 이름과 영원히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여자 스파이들을 침투시켜 性을 무기로 해서 정보를 빼내곤 했지만, 슈타지는 그와 정반대로 남자를 동원해 여자를 포섭하는 식이었다.
이런 수법은 슈타지가 처음이었다. 슈타지는 이를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다듬어 완전한 스파이 포섭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어떤 「대상」을 정하고 거기서 정보원을 포섭해 내는 방법은 간단하고도 효과적이었다. 슈타지 소속의 모든 정보원들은 실질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西獨에서 찾아낼 의무가 부여되었다. 법관이나 각종 대리점 운영자 또는 대학생, 그 누구보다도 여비서들이 그런 대상이었다. 포섭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슈타지가 침투시킨 비공식 정보요원(스파이-Ⅰ)이 일차적인 작업을 통해 많은 후보자들의 개인 이력서를 준비하면 슈타지는 곧 제2의 비공식 정보원(스파이-Ⅱ)을 출동시켜 포섭행동에 들어가도록 한다.
이 「스파이-Ⅱ」는 여러 종류의 능력과 자질을 구비해야만 하는데, 이를 테면 정보활동에 필요한 지식이 프로급이어야 하고, 개인신상에 관한 서류가 완벽해야 하고, 사람을 끄는 악의 없는 친화력, 달리 말해 에로틱한 매력을 지녀야 한다.
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슈타지가 정규 로미오 스파이를 순진한 西獨 여성들 속에 침투시켰다는 얘기를 부인하고 있다. 물론 西獨에 남자 스파이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여자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얘기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볼프의 주장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속에 특별임무를 숨긴 스파이들을 西獨으로 침투시켜 그곳 독신 여성들의 머리와 이성을 몽롱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TV 여성저널리스트인 엘리자베트 피스터는 한 다큐멘터리 작품에서 슈타지가 수많은 여성을 포섭하면서 바로 이 「로미오 수법」을 이용한 사실을 상세히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이들 당사자들이 수십 년이 지난 요즘까지도 얼마나 끔찍하게 당시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잘 서술해 놓았다.
슈타지가 말 그대로 적합한 로미오들을 「주문」했던 사실은 슈타지 문서에서도 발견된다. 슈타지가 주문한 로미오들은 포섭대상 여성의 키, 나이, 피부색, 습관 등 자세한 개인정보를 포함해, 그녀와 관련한 일체의 자료를 오랫동안 관리하면서 섹스문제까지 보살펴야 했다.
총리실 정무차관의 여비서를 유혹
마르쿠스 볼프는 1970년 이같은 여비서 포섭방법을 여러 가지 實例(실례)를 참고하여 「과학적으로」 연구 분석토록 지시했다.
그 얼마 뒤 소위 연구결과라는 것이 나왔는데, 이것은 슈타지 본부 제1국 국장대리인 루돌프 겐쇼프 대령과 「정보학교」 책임자인 오토 벤덴 대령 두 사람이 작성했다.
「서독 사회 주요 지도층에 대한 체계적인 잠입」 문제와 관련한 이들의 연구결과는 그 뒤 포츠담市 소재 슈타지 학교로부터 「마그나 쿰 라우데(매우 우수함)」라는 점수를 받아 두 저자에게 법학박사 학위수여라는 명예까지 안겨주었다
264쪽에 달하는 이 연구보고서에는 비공식 정보요원의 포섭대상이었던 여러 명의 본 거주 여비서 관련 사건들이 분석되어 있다.
슈타지가 소위 「실용 심리학」 차원에서 작성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희귀하면서도 구역질나는 논문이라고 하겠다.
마르쿠스 볼프의 말에 따르면, 이들 여비서들 가운데 하나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실 정무차관 한스 글롭케 밑에서 비서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프란츠」라는 이름(볼프의 회고록에는 펠릭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임)의 한 비공식 정보원이 1950년대 중반, 34세의 이 독신녀에게 접근해 친분관계를 다지기가 무섭게 곧 그녀를 슈타지에 첩자로 등록시켰다.
이 여비서는 부동산업자이자 아마추어 조종사인 함부르크 거주의 헤어베르트 S(아스토르)에게 구드룬이라는 여인에게 접근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헤어베르트 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후에 동독에서 비공식 정보요원으로 포섭된 인물이다.
심리학적 인격연구에 따르면 그는 무엇보다도 독신 여성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 여비서를 정보원으로 포섭하는 데 가장 좋은 전제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 슈타지 핵심요원들의 의견이었다.
물론 지속적인 접촉이 가능한 정도로 과연 「아스토르」가 「구드룬」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하는 문제는 슈타지로서도 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접촉을 시도할 때는 항시 위험부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이들 두 저자는 보고서에 적고 있다.
구드룬이라는 여비서와의 접촉, 그리고 정보원으로의 포섭은 아주 정교한 시나리오에 따라 이행되었다. 슈타지는 우선 요양차 집을 떠난 구드룬의 뒤를 밟아 몰래 그녀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알아냈다.
같은 호텔에 방을 잡은 아스토르는 다른 호텔손님을 통해 눈에 띄지 않게 그녀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슈타지의 지시에 따라 사무실을 쾰른으로 옮긴 아스토르는 그곳에서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구드룬과의 관계를 절친한 사이로 발전시켰다.
아스토르는 의도대로 곧 그녀와 첫 「이불속 행동」을 벌이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로미오」 아스토르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한 폐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슈타지는 하루라도 빨리 구드룬을 포섭하기로 결정했다.
스위스 휴가 중 「아스토르」로 하여금 적군파 장교로 가장케 해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결국 이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진 구드룬은 그를 돕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남자친구 아스토르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그 때문에 얼마 후 東獨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東獨으로 돌아간 아스토르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계속 그녀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이 편지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사망 후 「구드룬」의 물질적 생활을 완전히 보장시켜 준다는 내용의 「거짓 유언장」도 들어 있었다.
구드룬은 아스토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한센이라는 이름의 첩자를 통해 계속 그에게 총리실에서 빼낸 「값진 정보」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 연구보고서는 유감스럽게도 아스토르가 죽으면서 구드룬의 협조도 끝장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연방 재무부 소속 여비서 슈나이더와 세 정보원
겐쇼프 대령과 벤델 대령이 공동작성한 연구보고서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1957년부터 西獨 수도 본 소재 연방 재무부에서 근무한 여비서 「슈나이더」 관련 사건이었다.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원 「렌너」는 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이펠 지방으로 놀러갔다가 20세의 꽃다운 처녀 슈나이더를 알게 되었다.
그 직후 그는 슈타지 본부로부터 그녀와의 접촉을 넓혀, 정보원으로 포섭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해 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뒤부터 「렌너」는 슈나이더와의 관계를 굳혀갔다. 그녀와의 관계를 애인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은 비교적 용이한 일이었다.
슈나이더는 곧 「렌너」에게 결혼하자고 매달렸다. 이 정도의 「성공」단계에서 슈타지는 이 여비서를 포섭하기로 결정했다. 렌너는 어느 날 그녀와의 사랑 분위기를 이용해 「내부정보」를 수집하는 東獨 국민이라고 고백하고는 나와 함께 일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슈나이더는 협조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문서형식으로 약속해 주었다. 그 뒤부터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재무부로부터 여러 가지 비밀문서를 빼내 「남자친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슈나이더의 애인인 「렌너」는 사실은 슈타지가 아닌, 다른 정보부서에 소속돼 있었고, 이 부서에서도 꼭 필요한 정보원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슈타지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슈타지는 西獨에 침투해 있는 또 한 사람의 비공식 정보원 미르바흐에게 지령을 내려, 슈나이더를 지도하고 교육하고, 질을 높이는 임무를 떠맡으라고 했다.
그러면 슈타지는 슈나이더에게 뭐라고 변명했을까?
『너의 남자친구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다른 나라로 갔으니 최소한 1년 동안은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 안 가서 또 한 가지 진지한 문제가 생겨 슈타지를 괴롭혔다. 젊은 여비서 슈나이더가 그 무엇보다 가장 원하는 것은 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인데, 그녀에게 새로 붙여준 비공식 정보원 「미르바흐」는 유감스럽게도 남자다움의 전제조건을 갖추지 못해, 그녀와 함께 일할 자격이 안 되었다.
게다가 「미르바흐」는 비상 신분증마저 분실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슈타지 지도부는 미르바흐 대신 비공식 정보요원 「샤데」에게 슈나이더와 다시 개인적으로 은밀한 관계를 맺는 특수임무를 부여, 현장에 투입했다.
슈타지 장교들이 서술한 바에 따르면 샤데와 슈나이더 사이는 실제로 은밀한 관계로까지 발전했으며, 그러면서 상황도 안정되었다.
슈나이더는 그 사이 총리실 근무를 지원, 별 어려움 없이 채용되었다. 그가 맡은 일자리는 한 과장의 여비서였다. 연구보고서는 그뒤부터 『슈나이더는 연방총리실에서 정보원으로 일하면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샤데」 역시 땅 속에 숨겨놓았던 그의 비상 신분증이 사라지고, 그러면서 그에 대한 西獨 정보당국의 추적이 시작되자 東獨으로 사라졌다.
슈타지 본부 분석가들의 말에 의하면, 슈나이더는 얼마 뒤, 일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커서 이제까지 해오던 총리실에서의 일을 포기했다.
물론 슈나이더는 그 자리에 여동생 바우어를 천거해 자신의 뒤를 잇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때까지 西獨 국방부에서 속기사 겸 타이피스트로 일해오던 그녀는 1960년 휴가 중 언니 슈나이더와 「샤데」에 의해 포섭되었었다.
女비서들 줄줄이 체포되다
슈타지는 이제 새로운 지도원으로 「크뤼거」라는 인물을 본으로 밀파했다. 언니 슈나이더의 천거로 총리실에서 비서직을 맡게 된 「바우어」는 총리실로부터 중요한 자료들을 빼내 슈타지로 넘겼다.
그녀는 언니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우리들과의 협력을 중단할 때까지 정보원으로 암약했다고 슈타지 분석가들은 말하고 있다.
슈타지 본부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西獨으로 정보요원을 침투시킬 때, 소위 「진짜 西獨人」이면서 더는 西獨에 살고 있지 않는 사람의 신분증과 서류로 위장을 하곤 했다. 그러나 西獨 정보당국에 의해 이같은 수법이 들통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일련의 여비서들이 체포되거나 동독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基民黨에서 암약하던 요원들이다. 이를 테면 基民黨 본부에서 여비서로 근무하면서 8년 동안 당 내부 정보를 빼돌리다가 1977년 체포된 요한나 크레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 2년 뒤, 그녀와 함께 일하던 우줄라 회프스(일명 「우타」)와 우줄라의 남편 위르겐도 체포되었다. 위르겐은 한 西獨시민의 「빌린」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잡혔다.
특수임무를 띤 장교로서 基民黨 본부를 정탐하는 책임을 지닌 위르겐은 뚜렷한 목적을 갖고, 당시 26세의 여비서이던 우줄라에게 접근, 친분을 쌓은 후 결혼까지 했다. 그녀는 한때 위르겐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를 東獨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하나, 아니면 그와 함께 「평화를 다지는 과업」에 나서야 하나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소위 「평화 다지기」 쪽을 택한 후 서류와 정보를 빼내어 남편에게 넘겨주었고, 남편은 이를 받아 東獨으로 전달했다.
1976년엔 외국어 담당 여비서 헬게 베르거, 基民黨 외교정책 담당 보좌실의 하인리히 뵉스, 그리고 외무성의 한 직원이 체포되었다.
회프스 부부가 체포된 지 며칠 후, 슈타지 본부는 더 이상의 체포가 두려워 基民黨 지도부에 박아놓은 두 명의 스파이를 철수시켰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基民黨 소속 연방의회 의원이자 외교정책 대변인인 베르너 막스의 비서 잉게골리아트는 「헤르타」라는 가명으로 13년 동안 슈타지 본부 제10과를 위해 基民黨으로부터 당 정책과 관련한 내부정보를 빼냈다. 그러다가 1979년 남편 볼프강(일명 「네르츠」)과 함께 東獨으로 잠적했다.
이와 똑같은 시기에 당시 基民黨 원내총무 쿠르트 비덴코프의 여비서 크리스텔 브로스차이(크리스텔)도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녀는 1971년 슈타지 본부 제2국의 비공식 정보요원 콘라트 키플링, 일명 하인리히 호프만(베르터라고도 불리움)으로부터 포섭되었는데, 호프만 역시 크리스텔과 함께 東獨으로 도주했다. 다른 모든 간첩들의 경우, 슈타지 문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데 반해, 크리스텔 브로스차이의 반려자이자 지도원인 호프만에 관해서는 슈타지 본부의 「간략한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슈타지 창설 35주년 기념행사 덕분이라고 하겠는데 아마 이때 표창장을 받아 그것이 그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1984년 12월에 작성된 문서를 보면 국가안전부가 西獨에서 어떤 식으로 여비서 사냥에 나섰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해 보자.
『1966년 하인리히 호프만 동지가 슈타지 본부 비밀요원으로 채용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西獨)에서의 장기활동을 위한 준비훈련을 끝내고 1967년 작전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호프만 동지는 크리스텔 女동지를 포섭, 첩보수집에 이용했다. 크리스텔은 호프만의 도움과 자신의 사려깊고도 신중한 행동으로 基民黨 지도부에까지 침투했다. 마지막으로는 基民黨 사무총장의 개인 보좌관 및 비서에 오르기도 했다. 1979년 3월 동독으로 돌아간 이들 두 사람은 西獨에서의 스파이 활동공로를 인정받아 조국공로金章을 수여받았다. 호프만 동지는 결혼해서 지금은 에어푸르트에서 부인,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에어푸르트市黨 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곳 시청에서 수출분야 일을 맡고 있다』
볼프의 지시로 작성된 「연구결과 보고서」는 슈타지의 西獨 연방총리실 침투와 관련, 또 다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연구보고서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목표물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목표물 안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그 옆에 닻을 내리고 정박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특히 직원은 어떤 방법으로 채용하며, 동료직원들의 「심리상태」는 어떠한지, 체계적으로 연구·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방총리실 직원들의 성향과 심리를 보다 철저히 연구하고 그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을 넓히면 넓힐수록 비밀정보요원들의 활동도 그만큼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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