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빼앗김(창47장) 이제 창47장을 통해서 거룩한 빼앗김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볼 때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성도의 삶의 특징을 종합하여 보여주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과 교통을 하며, 소명과 중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단계라는 것을 볼 수 있고, 이삭은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거저 물려받아 누리는 측면에서의 성도의 특성으로 영화의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야곱은 성도 자신의 행위나 노력이나 특성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다루시는 손길에 의해 영광스런 아들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105:9-10에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세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풍부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반복해서 저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며 나아가 오늘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바로 우리 교회 자신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면 우리 교회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 무엇이지요? 그 세 사람이 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림이 잃어버림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찾아 짐으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르치실 것을 모두 가르치신 후 이삭을 고스란히 돌려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음에서 다시 찾았다고 기록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림이 결국 완전한 찾음으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이삭은 야곱이라는 아들에게 속아 그를 축복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을 수 십 년간 잃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다시 아버지 이삭에게로 돌려주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20년간이나 죽은 아들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요셉의 동생 베냐민까지 빼앗기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둘을 모두 빼앗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아니 살다 뿐입니까?애굽의 총리라는 주가 되어서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왜 우리의 언약의 조상들이 모두 아들을 잃는 경험을 해야 한 것일까요? 아들은 바로 '나'라는 존재의 확장입니다. 아들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더 나아가 아들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행복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집착하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다 포함하는 그런 것입니다. '나'라는 우상을 만족스럽게 행복하게 만들고자 내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조상들의 아들을 죽이시는 사건으로 '나'라는 우상과 그 우상을 섬기는 데에 필요한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모든 가치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을 잃는 사건이 아니라, 다른 말로 '나'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아니라 더 멋진 '나', 새로운 '나'의 완성에로의 필연적 과정이며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풍요를 얻는 필연적 통과의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잃었던 아들들을 더 멋지게 변화시켜 돌려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아들들이 바로 하나님나라에서 완성이 될 우리 성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이나 고난 등을 빼앗김이나 잃음이나 실패로 정의하지 말고, '나'의 아들을 빼앗으심으로 더 좋은 것을 주고야 마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배려의 손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 없다는 식의 신앙은 신앙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하는 것이며, 멸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었으며, 하나님의 재산이었으며, 하나님의 능력뿐이었던 것이니까요. 렘31:15에 라헬이 라마에서 아들을 잃고 통곡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 아들들을 돌려보낼 것이다'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라헬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에브라임이 북 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이고, 베냐민이 남 유대의 대표이므로 그 라헬의 아들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어미로 불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과 베냐민, 즉 이스라엘을 잠시 빼앗아 버리십니다. 요셉과 베냐민의 빼앗김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로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빼앗아 망하게 하시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기근과 흉년에 내 던지기도 하시는 일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반복하고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지만 결국 매번 다시 돌려보내 주십니다. '돌려보내실 것을 왜 빼앗아 가십니까?'하고 질문하실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들들을 빼앗으시고, 라헬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던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시며, 교회인 두 증인을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여버리신 것은 그들을 골탕 먹이시려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의뢰하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들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그들을 부인시키시는 방법으로 잠시 사용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아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통해, 다른 말로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고도 힘으로 작용했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함으로 해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빼앗기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상실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예수께서 통곡하고 있는 라헬에게 오셔서 내가 너에게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는 '진짜 아들'즉 '영원한 생명'을 돌려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늘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우리의 아들, 즉 우리의 힘을 빼앗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빼앗김은 가장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시기 위한 거룩한 빼앗김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해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올바른 선 이해가 없이 오늘 본문을 보면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매점매석을 하여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을 다 끌어 모아 바로에게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돈이 떨어져 이제 더 이상 곡식과 맞바꿀 아무런 재화가 없는 이들의 땅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그것이 언약의 후손이 할 일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요셉이 그렇게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끌어 모아 애굽왕 바로에게 바쳤다는 그 사실은 성경을 기록을 통해 사실로 확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도덕관이나 윤리관, 그리고 사회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이 7년간풍년이 들고, 나중에 7년간 흉년이 들 것을 명확하게 계시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기만 준비를 했다가 나중에 흉년이 들자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빼앗아 버리는 것이 옳은 처사냐는 것입니다. 정말 민중을 위하고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위정자는 백성들을 계몽하여 흉년에 대한대비를 철저하게 시켰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셉이라는 사람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오로지 자기 위의 왕의 유익만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얻은 고급 정보로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를 하는 오늘날의 정신나간 관리들과 똑같은 행태 아닌가요? 매점매석으로 자유인들을 일시에 전부 소작농으로 전락을 시켜버린 악덕기업가의 원조같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요셉은 지금 이방 왕조가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차지하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셉이 바로 예수의 모형이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 왕에게 완전히 복속이 되어 순종을 하는 전제 군주제의 애굽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볼 때 자신의 가치관이나 도덕관, 그리고 오늘 날의 시대정신 등을 전제하고 보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인간과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책이지 도덕책이나 윤리 책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잘 못 보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무식하고 폭력적인 하나님이라느니, 유다는 며느리와 근친상간을 한 나쁜 인간이라느니, 요셉은 애굽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고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했다는 등의 잘 못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인간의 죄와 구원을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설명을 위해 창세전의 작정과 예정과 계획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건화 되어 설명이 되고, 그 객관적이며 실제적인 역사가 우리에게 계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들을 빼앗아 버리는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너무나 많은 것들로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과 만족을 채우려 애를 써왔습니다. 인간들은 성(城), 돈, 명예, 인기 등등 제한되고 유한한 이 세상의 자원들을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구원에 도달하려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로는 절대로 인간이 참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사와 경험과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고,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시도를 할 때 그 길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것들을 다 빼앗아 가시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의 소유나 힘이나 명예나 자랑이나 인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고, 오직 유일한 절대 상위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의뢰하는 삶만이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크! 마카리오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생에 가끔 빼앗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빼앗기기도 하고, 자식들을 빼앗기기도 하고,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고, 명예를 빼앗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비워 내시고 그 빈 공간에 예수를 채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삶이 우리에게서 격발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요셉에게 와서, 먹여만 주시면 땅도 다 내 놓고 노예가 되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하자 요셉이 그들의 땅을 몰수한 후 곡식을 주고 종자와 식량으로 쓰라고 하지요? 그 때 그 백성들이 씨를 뿌리는 것으로 그 흉년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한 왕에게 종속이 되고, 항복이 되자 흉년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출의 5분의 1만 왕에게 바치고 5분의 4는 자신들이 갖게 되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고대 농지법이 만들어 집니다. 요셉에 의해 새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다시는 농민들이 굶을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자유농들이 나라와 왕과의 관계 속으로 복속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출이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소작농이 아닌 자유 농때에도 그만한 세금은 냈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진면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들의 꿈이 펼쳐지고 백성들의 의견이 다수결에 의해 수용이 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빼앗긴 피조물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에 이끌려 그 분이 주시는 하늘의 생명력으로 배불리는 그런 나라인 것입니다. 자기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 그런 삶이 아닌 자신이 속한 나라의 법에 따라 그 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다수결에 의해 교인들의 의견이 관철이 되는 그런 집단이 아니라 다수가 불편하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라는 고통에 의해 운영되는 신앙공동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그런 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성경이 하라는 것은 하고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 그런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말씀의 진의를 왜곡하고 성경의 근본 지평을 벗어난 그런 행태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24:23-28에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예수님께서 말세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 말씀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말세 때는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거짓 그리스도들이 큰 표적들과 큰 기적들을 행하여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미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를 성경이 말세라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이 바로 말세입니다. 왜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기적과 표적들을 일으킬까요? 사람들이 기적과 표적 앞에서 맥을 못 추기 때문입니다. 성공주의에 물든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자기에게도 영향을 미쳐 무엇인가 유익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큰 기적과 표적을 갈망합니다. 자기의 삶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가 해결이 되고, 불치병이 낫고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을 마귀가 잘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이 임하실 때 번개처럼, 시체를 보고 달려드는 독수리처럼 임하실 것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번개는 동쪽에서 일어나면 동쪽에만 있어야 하는데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번쩍이듯이 주님이 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의 장면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해가 가는데 주님이 시체 위에 내려앉는 독수리처럼 임하시겠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독수리가 창공을 유유히 날다가 맹수가 잡아먹고 남은 시체를 발견하게 되면 그 많은 공간 속에서 정확하게 그 자리에 내려 앉아 그 먹이를 채 가는 것 아시지요? 주님이 바로 그렇게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인간들이 있지만 독수리와 같은 우리 주님은 정확하게 주님의 백성들만을 잡아채서 주님의 날개 위에 얹어 하늘로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가 내려앉는 목표물이 시체입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독수리가 내려앉아 그 날개위에 얹어 하늘로 옮길 목표물들은 이 세상에서 시체가 되어 있는 자들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골로새서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골3:1-4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위엣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그 분과 함께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주검 들에 내려앉으시는 것입니다.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이렇게 이미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결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의 재산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고, 우리들의 육신적 건강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고, 우리들의 명예에 대해서도 죽은 것입니다. 진실로 그런가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평가에 대해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민감해야지 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다 보면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서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롬6:11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로 자신을 채워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마10:37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요12:43에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딤후3:4-5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아비나 어미, 아들이나 딸, 사람들의 평가, 쾌락, 재물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앞서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유한하고 한시적인 것들입니다. 유한하고 한시적이며 가변적인 것이 나의 생명으로 자리 잡고 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배신을 하거나 소멸이 될 때 우리들은 함께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성경이 예수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속에 가득 담아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 자 만이 영원히 삽니다. 그 분은 변하지 않으시며 소멸되지도 않으시고 배반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 이외의 이 땅의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다 빼앗겨야 합니다. 창47:25에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입에서 이 고백을 들으시기 위해 그 백성들의 삶에 기근을 허락하시기도 하시고, 흉년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 모두 빼앗긴 자로,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자로 만들어 내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아를 꼭 붙들고 있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해 내고야 마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제군주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그 나라는 한 왕에 의해 독재적으로 끌려가는 왕국이란 말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그 왕 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겨야 합니다. 눅9:23-25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렇게 말해도 하나님이 가진 힘이나 이용하고 그 분에게서 얻어내고자 하는 그 어떤 것들을 목적으로 그 분을 신앙하고 사랑하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진 그 어떤 것을 이용하기 위해 거짓 사랑을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비록 이 세상에서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나의 꿈의 실현에 침묵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알기에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도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는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