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나라( 전한 후한) 왕조 계보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은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황조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황조다. 수도는 장안으로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5대 문제(文帝), 경제(景帝)에서 시작된 전한의 선정은 무제(武帝)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무제 이후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득세한 황후의 아비들인 외척은 결국 권력투쟁까지 했다. 그중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섭정하여 그 위세가 극에 달했고 결국 전한을 멸망시킨다. 이후 왕망은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제위에 올랐고 건국된 지 15년 만에 유방의 방계 후손 유수(劉秀)에게 멸망당한다. 전한시대의 황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제1대 고조 유방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한나라(漢)의 초대 황제(재위 :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는 계(季).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진(秦)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키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가 항우(項羽)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정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 능호는 장릉(長陵)이다. 제2대 혜제 한 효혜황제 유영(漢 孝惠皇帝 劉盈, 기원전 210년 ~ 기원전 188년) 전한의 2대 황제(재위 :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 고제(高帝)의 차남이자 적장자로, 어머니는 고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매우 선량하고 우애가 깊고 약한 심정을 가진 인물로 야심이 큰 어머니 때문에 평생을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고 혜제는 결국 기원전 188년, 23세의 나이로 갑자기 붕어하였다. 시호는 효혜황제(孝惠皇帝). 능호는 안릉(安陵) 제3대 소제 유공(劉恭) 한 소황제(漢 少皇帝, ? ~ 기원전 184년, 재위 : 기원전 188년 9월 - 기원전 184년 8월) 전한 제3대 황제, 휘는 알려지지 않았다. 역대 황제에게 포함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혜제와 장황후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양자로 들여서 양육하였으나 일설에는 남의 아이를 데려왔다는 설과 혜제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는 설이 전해진다. 여태후는 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염려하여 소제의 생모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88년, 혜제가 승하한 후 등극하여 소제가 된다. 여태후는 소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정사에 관여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는 등 전횡을 일삼는다. 기원전 184년, 소제가 성장하면서 과거 진상을 듣고 보복할 것을 공공연히 이야기하는데 이를 알게된 여태후는 대외적으로 중병이라 공표하곤 그를 유폐시킨 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곧 시해한다. 제4대 소제 유홍(劉弘) 한 소황제 유홍(漢 少皇帝 劉弘, ? ~ 기원전 180년) 전한 제 4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4년 ~ 기원전 180년). 본래 휘는 산(山)이었으나 항산왕(恒山王)이 된 이후에는 의(義)로,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홍(弘)으로 고쳤다 혜제(惠帝)와 후궁인 미인 주씨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처음은 양성후(襄城侯)으로 봉해졌다. 항산왕(恒山王) 유불의(劉不疑)가 죽자, 그 대를 이어 항산왕으로 봉해졌다. 후에 형 소제(少帝)가 여태후에 살해되고 황제로 즉위했다. 고후 8년(기원전 180), 고후(高后)가 죽었다. 황족 및 대신 진평(陳平) · 주발(周勃) · 관영(灌嬰) 등의 주도로 여씨 일족이 축출되었고, 소제는 형제들과 함께 감금되었다. 곧 대왕(代王)이 조정으로 와 황제로 즉위하였고(문제), 즉위 직전에 소제 유홍은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에 의해 궁내에서 추방되어 소부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대왕이 입성한 후 소부에서 형제 항산왕,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과 함께 시해되었다. 소제와 상산왕, 양왕, 회양왕은 혜제와 혜제의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모두 진짜 아들이었다. 그런데 장황후가 그들을 모두 자기 아들로 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해 대신들에게 여후가 세운 가짜라고 의심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제5대 문제 유항(劉恆) 한 태종 효문황제 유항(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 6월)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이다. 고제(高帝)의 사남이자 혜제(惠帝)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효문태후(孝文太后)이다. 즉위 전 대(代)나라 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지치를 이룩하였다. 기원전 157년 6월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에서 사망했다. 도덕적인 군주로 평가되며 어머니 박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한다. 능호는 패릉(覇陵) 제6대 경제 유계(劉啓) 한 효경황제 유계(漢 孝景皇帝 劉啓,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41년) 전한의 제6대 황제로, 문제(文帝)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효문황후(孝文皇后)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 왕조의 기반을 다지고 선정을 행하여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닦았다. 또한 후한 왕조의 창시자인 광무제와 삼국 시대의 촉의 창시자 유비는 경제의 먼 후손을 칭했다. 재위 15년 째인 기원전 141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호는 양릉(陽陵) 제7대 한무제 유철(劉徹)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로 아명은 체(彘)이며 자는 통(通)이다. 경제의 열한번째 아들이며 효경황후 왕씨(孝景皇后 王氏)의 소생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한족 역사상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韓半島)에 한사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중앙집권화와, 밖으로 지역이 확대되고,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열어놓았다. 곽광(霍光)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능호는 무릉(茂陵) 제8대 소제 유불릉(劉弗陵) 한 효소황제 유불릉(漢 孝昭皇帝 劉弗陵, 기원전 95년 ~ 기원전 74년) 전한의 제8대 황제(재위 기원전 87년 ~ 기원전 74년)이다. 무제와 구익부인 소생이다. 기원전 87년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즉위전 여태자가 역모로 죽임당하고 장성한 아들 창읍애왕마저 병으로 죽자 장성한 다른 아들 연날왕 유단, 광릉여왕 유서가 있음에도 구익부인 조씨 소생의 어린 아들 불릉을 태자로 내정하였다. 한무제는 어린 아들에게 젊은 모(태후)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 하여 구익부인 조씨를 자결하게 하고 그의 인척들을 축출하였다. 그 뒤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했다. 능호 평릉(平陵) 제9대 전한 폐제 한 폐제(漢廢帝) 또는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는 전한의 제9대 황제(재위 기원전 74년)이며 세종 무제의 서손자이자 창읍애왕 유박(劉髆)의 아들이다. 뒤에 강등당하여 해혼후(海昏侯)가 되었다. 사마광은 그가 소제(昭帝)의 빈소에 가면서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길위에서 고기 반찬을 먹으니, 곽광(霍光)이 그 죄를 묻고 폐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소학의 외편에 고사로 인용되었다. 제 10대 전한 선제 유순(劉詢) 한 중종 효선황제 유순(漢 中宗 孝宣皇帝 劉詢, 기원전 91년 ~ 기원전 49년)은 전한의 제 10대 황제(재위 :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로, 자는 차경(次卿)이다. 본래 휘는 병이(病已)였으나, 피휘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즉위할 때 순(詢)으로 바꾸었다.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고, 곽광(霍光)에게 옹립되어 황제로 즉위했다. 곽광이 죽곡 2년 후에 친정을 개시하였다. 무제 이후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하는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못하고 폐위도 생각했지만, 원제에게 후손이 태어난 것을 이유로 폐위을 보류했다. 능호 두릉(杜陵) 제 11대 전한 원제 유석 한 고종 효원황제 유석(漢 高宗 孝元皇帝 劉奭, 기원전 76년 ~ 기원전 33년)은 중국 전한의 제11대 황제(재위 기원전 48년 ~ 기원전 33년)로, 자는 성(盛)[1] 이다. 선제(宣帝)의 장남이며 허평군(許平君) 소생이다. 유교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에 근거하는 정책도 실시되어 전매제를 폐지해 재정을 악화시키는 등 국정을 혼란시켰다. 선제에 의해 중흥 된 국세는 다시 쇠약해져 원제의 황후 왕씨 일족으로부터 나온 왕망의 찬탈의 요인을 만들어 냈다. 후한의 역사가 반표(班彪)는 그 치세를 「우유부단으로 하여 선제의 업적 쇠약해졌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제 12대 전한 성제 유오(劉驁) 한 효성황제 유오(漢 孝成皇帝 劉驁, 기원전 51년 ~ 기원전 7년, 재위 기원전 33년 ~ 기원전 7년)는 전한의 12대 황제, 자는 태손(太孫)이다. 주색에만 빠져있었고 성제는 황태후 왕씨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능력과 덕도 부족했던 인물로 조합덕의 침상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성제가 급사한 지 얼마되지않아 조합덕은 자살하였다고 한다. 능호 연릉(延陵) 제 13대 전한 애제 유흔(劉欣) 한 효애황제 유흔(漢 孝哀皇帝 劉欣, 기원전 27년 ~ 기원전 1년)은 전한의 13대 황제. 남자를 밝혔던 황제. 능호 의릉(義陵) 제 14대 전한 평제 유간(劉衎) 한 효평황제 유간(漢 孝平皇帝 劉衎, 기원전 9년 ~ 기원후 5년, 재위 기원전 1년 ~ 기원후 5년) 전한의 14대 황제. 본래 휘는 기자(箕子)였으나, 간(衎)으로 고쳤다. 중산효왕 유흥(中山孝王 劉興)의 아들로 어머니는 위희(衛姬)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중산왕이 되었으며 애제의 죽음으로 아홉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기원후 4년 왕망의 딸을 황후로 맞았고 이듬해에 왕망에 의해 독살당했다. 연호는 원시(元始). 능호 강릉(康陵) 제 15대 전한 유자 유영(劉嬰) 유자영(孺子嬰, 5년 ~ 25년, 재위 : 6년 ~ 8년11월)은 말대황제(末代皇帝),정안공(定安公)으로 불리기도 하며, 성은 유(劉), 이름은 영(嬰)이다. 중국 전한의 선제(宣帝)의 현손이며 평제(平帝)의 황태자이다. 안한공(安漢公) 왕망(王莽)이 평제를 독살한 후, 왕망은 원제의 후손이 더 이상 없었고, 다른 제후왕들이 장성했는데 만약 그들이 황제가 된다면 자신이 실각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태어난지 1년 밖에 안된 광척후 유현의 아들인 유영을 6년 3월 기축일(1일)에 황태자로 세운 뒤, 옛날 주나라 때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한 것을 본받아 유자(孺子)라 호칭했다. 그런 뒤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를 ‘가황제(假皇帝)’로 호칭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섭황제(攝皇帝)’로 호칭하게 하여 마침내 임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유자는 어리다는 이유로 황제로 세우진 않았다. 마침내 왕망이 8년 11월에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웠고 유자는 정안공(定安公)으로 삼았는데, 왕망은 유자를 바보로 자라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지황(地皇) 4년(23년) 왕망의 패망 후 반란 세력이었던 경시제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출처: https://oldconan.tistory.com/1375 [올드코난 (Old Conan) 세상사는 이야기] 후한(後漢, 25년~220년)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후한이라고 부르며 후한 시대 황제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제1대 후한 광무제 한 세조 광무황제 유수(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기원전 6년 ~ 57년; 재위25년 ~ 57년)는 중국 후한 황조의 초대 황제로, 이름은 유수(劉秀), 자는 문숙(文叔)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 출신으로 전한의 초대 황제 고제(高帝)의 9세손으로, 왕망(王莽)에 의한 찬탈 이후 신(新) 말기의 혼란을 통일하고 한 왕조의 재흥으로서 후한 왕조를 선포하였다. 시호인 '광무'는 한 왕조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광(光), 화란을 평정하였다는 뜻에서 무(武)의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묘호 한 세조 (漢世祖), 시호 광무황제(光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25년 ~ 56년/건무중원(建武中元) 56년 ~ 57년, 능호 원릉(原陵) 제2대 후한 명제 한 현종 효명황제 유장(漢 顯宗 孝明皇帝 劉莊, 28년 ~ 75년)은 후한의 제2대 황제(재위 : 57년 ~ 75년)로, 다른 이름으로는 양(陽)이 있으며 자는 자려(子麗)이다. 광무제(光武帝)의 아들이다. 그의 치세는 광무제, 장제와 대등하고, 약 200년 지속된 후한을 안정된 전성기를 만들었다. 묘호 한 현종(漢顯宗), 시호 효명황제(孝明皇帝), 연호 영평(永平) 58년 ~ 75년, 능호 현절릉(顯節陵) 제3대 후한 장제 한 숙종 효장황제 유달(漢 肅宗 孝章皇帝 劉炟, 57년 ~ 88년, 재위 75년 ~ 88년) 후한의 3대 황제로, 명제(明帝)의 아들이다. 외척 문제과 원정 등 후한 쇠퇴의 조짐이 보였던 시대 묘호 한 숙종(漢肅宗), 시호 효장황제(孝章皇帝), 연호 건초(建初) 76년 ~ 84년/ 원화(元和) 84년 ~ 87년/ 장화(章和) 87년 ~ 88년, 능호 경릉(敬陵) 제4대 후한 화제 한 효화황제 유조(漢 孝和皇帝 劉肇, 79년 ~ 106년, 재위 88년 ~ 106년) 후한의 제4대 황제로, 아버지는 장제(章帝). 본래 묘호로 목종(穆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환관의 횡포의 효시가 되어 훗날 후한은 화제의 시대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묘호 한 목종 (漢穆宗), 시호 효화황제 (孝和皇帝), 연호 영원(永元) 89년 ~ 105년/ 원흥(元興) 105년, 능호 순릉(順陵) 제5대 후한 상제 한 효상황제 유융(漢 孝殤皇帝 劉隆, 105년 ~ 106년, 재위 106년) 후한의 제5대 황제로, 화제(和帝) 유조(劉肇)의 차남이다. 화제는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했고, 외척 등의 모살을 의심했던 화제는 아들들을 민간에 위탁하여 양육하기에 이른다. 화제의 사후, 태후 등씨는 맏아들 유승이 지병이 있음을 이유로 삼아 당시 백일이 갓 지난 상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유아인 상제가 정치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실권은 등태후를 비롯한 외척에게 쥐어져 있었다. 즉위한 이듬해에 병으로 죽어 요절했다는 의미의 殤이 시호로 부여되었다. 묘호 없음, 시호 효상황제 (孝殤皇帝), 연호 연평(延平) 106년, 능호 강릉(康陵) 제 6대 후한 안제 한 효안황제 유호(漢 孝安皇帝 劉祜, 94년 ~ 125년, 재위 106년 ~ 125년) 후한의 6대 황제로, 장제(章帝)의 손자.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母后)가 수렴청정하고 모후의 오빠 등즐(鄧騭)은 대장군에 올라 병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등 태후가 죽자 안제는 환관과 연합하여 등씨 일가를 축출,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후 환관이 득세하자 나라가 혼란해졌다. 본래 묘호로 공종(恭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묘호 한 공종 (漢恭宗), 시호 효안황제 (孝安皇帝), 연호 영초(永初) 107년 ~ 113년/ 원초(元初) 114년 ~ 119년/ 영녕(永寧) 120년 ~ 121년/ 건광(建光) 121년 ~ 122년/ 연광(延光) 122년 ~ 125년, 능호 공릉(恭陵) 제 7대 후한 소제 한 소황제 유의(漢 少皇帝 劉懿, ? ~ 125년) 후한의 제7대 황제(재위:125년)이다. 아버지는 제북혜왕 유수(濟北惠王 劉壽). 제3대 황제 장제의 손자이다. 제6대 황제 안제의 사후, 황후 염씨(閻氏)에 의해서 옹립 된다. 그러나 즉위 후 200일 쯤에 병에 걸려, 곧 사망한다. 그 후, 환관 손정에 의해 염씨 일족은 살해당하여 유의는 황제의 지위가 박탈되어 왕의 예를 가지고 매장했다. 묘호, 시호, 능호, 연호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 8대 후한 순제 한 효순황제 유보(漢 孝順皇帝 劉保, 115년 ~ 144년, 재위 125년 ~ 144년) 후한의 8대 황제. 125년부터 14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25년부터 이듬해 126년까지 안사황태후 염씨(安思皇太后 安氏)가 섭정하였고 126년부터 132년까지 손정(孫程)이 섭정하였으며 132년부터 144년까지 친정하였다. 본래 묘호로는 경종(敬宗)이 올려졌으나, 붕어한 이후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어 경종(敬宗)이라는 묘호는 추탈되었다. 묘호 한 경종 (漢敬宗), 시호 효순황제 (孝順皇帝), 연호 영건(永建) 126년 ~ 132년/ 양가(陽嘉) 132년 ~ 135년/ 영화(永和) 136년 ~ 141년/ 한안(漢安) 141년 ~ 144년/ 건강(建康) 144년, 능호 헌릉(憲陵) 제 9대 후한 충제 한 효충황제 유병(漢 孝沖皇帝 劉炳, 143년 ~ 145년, 재위 144년 ~ 145년)은 후한의 9대 황제로 2살에 황위에 올라 얼마 안가 죽었다. 묘호 없음, 시호 효충황제 (孝沖皇帝), 연호 영희(永憙) 145년, 능호 회릉(懷陵) 제 10대 후한 질제 한 효질황제 유찬(漢 孝質皇帝 劉纘, 138년 ~ 146년, 재위 145년 ~ 146년) 후한의 10대 황제. 후한 장제의 현손으로, 장제의 서자 천승정왕의 증손이며 낙안이왕의 손자이고 발해효왕의 아들이다. 충제가 위독해지자 대장군 양기(梁冀)가 낙양으로 불러왔으며, 충제가 죽자 양기와 양황후가 황제로 세웠다. 질제는 양기에게 지절을 주고 건평후로 봉했다. 총명하여, 양기의 전횡을 알고 조회에서 양기를 바라보고 “그대는 발호장군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양기에게 짐살당했다. 묘호 없음, 시호 효질황제 (孝質皇帝), 연호 본초(本初) 146년, 능호 정릉(靜陵) 제11대 후한 환제 한 효환황제 유지(漢 孝桓皇帝 劉志, 132년 ~ 168년) 후한의 11대 황제. 하간효왕 유개(河間孝王 劉開)의 손자이며 여오후 유익(蠡吾侯 劉翼)의 아들이다. 본래 묘호로 위종(威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묘호 한 위종 (漢威宗), 시호 효환황제 (孝桓皇帝), 연호 건화(建和) 147년 ~ 149년/ 화평(和平) 150년/ 원가(元嘉) 151년 ~ 152년/ 영흥(永興) 153년 ~ 154년/ 영수(永壽) 155년 ~ 158년/ 연희(延熹) 158년 ~ 167년/ 영강(永康) 167년, 능호 선릉(宣陵) 제 12대 후한 영제 한 효령황제 유굉(漢 孝靈皇帝 劉宏, 156년 ~ 189년, 재위 168년 ~ 189년)은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장제(章帝)의 고손자이다. 할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숙(劉淑), 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이며, 어머니는 후한 환제의 5촌 조카인 동태후이다. 재위 중의 잇따른 재해와 소규모 반란, 그리고 황건의 난 등으로 그의 사후,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되고, 이는 삼국 시대로 이어진다. 묘호 없음, 시호 효령황제 (孝靈皇帝), 연호 건녕(建寧) 168년 ~ 172년/희평(熹平) 172년 ~ 178년/광화(光和) 178년 ~ 184년/중평(中平) 184년 ~ 189년, 능호 문릉(文陵) 제 13대 후한 소제 유변 한 소황제 유변(漢 少皇帝 劉辯, 173년 또는 176년 ~ 190년 1월(음력))은 후한의 제13대 황제이다. 189년 영제를 이어서 황제에 올랐으나 동탁에 의해 폐위되어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당하고 이듬해에 살해당했다. 시호는 회(懷)여서 홍농회왕(弘農懷王)으로도 불린다. 묘호와 능호는 없다. 연호 광희(光熹) 189년/ 소녕(昭寧) 189년 제 14대 후한 헌제 한 효헌황제 유협(漢 孝獻皇帝 劉協, 181년 ~ 234년) 후한(後漢)의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자는 백화(伯和)이다. 휘는 아버지 영제(靈帝)와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지은 것이다. 삼국지의 시대로 조조 사후 아들 조비에 의해 폐위된다. 선양한 이후 산양공으로 격하되었다. 폐위된 후 유비는 그가 죽은 것으로 오해하여 제사 지내고 시호를 효민황제라 하였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조비가 선양을 받자마자 자객을 보내 헌제를 암살한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 천수를 누리다 제갈량이 죽은 해에 죽었다. 실제로 조비는 헌제 유협에게 황제 시절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했으며 선배로서 대우했다. 이에 헌제 유협은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지만 일신은 편안하게 보냈으며 헌제 유협은 제갈량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제갈량과 같은 나이에 같은 해에 죽었다. 묘호 없음, 시호 효헌황제 (孝獻皇帝), 연호 영한(永漢) 189년/중평(中平) 189년/초평(初平) 190년 ~ 193년/흥평(興平) 194년 ~ 195년/건안(建安) 196년 ~ 220년/연강(延康) 220년, 능호 선릉(禪陵) 이상 후한(後漢, 25년~220년) 14명의 황제들이었습니다. 출처: https://oldconan.tistory.com/973?category=492342 [올드코난 (Old Conan) 세상사는 이야기] 전한시대를 끝낸이는 외척 왕망이었다. 불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왕망은 황제에 대한 야욕을 숨기며 유능하고 청렴한 신료로 포장하며 인심을 얻고 권력을 잡고 결국에는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다. 신나라는 짦은 시기에 멸명을 했기에 왕망과 신나라는 같이 묶어서 정리해 본다. 전한을 멸망시키고 황위를 찬탈한 신(新)나라 황제 왕망(王莽)의 생애와 평가 1.왕망 개요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10월 6일)은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으로 자는 거군(巨君) 이다. 신(新)나라 황제로, 황제 즉위 전의 전한시대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며, 원제(元帝)의 황후 왕정군(王政君, 효원황후)의 조카로 성제(成帝)의 어머니쪽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왕우(王宇) · 왕획(王獲) · 왕안(王安) · 왕림(王臨) · 왕흥(王興) · 왕광(王匡) 등의 아들을 두었다. 손자(왕우의 아들)는 왕종(王宗)이며, 딸은 평제(平帝)의 황후가 된 왕씨와 함께 왕화(王曄),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본부인은 한의 승상(丞相)을 지낸 왕소(王訢)의 손자 의춘후(宜春侯) 왕함(王咸)의 딸이며, 왕영(王永)의 동생으로서 왕광(王光)의 숙부이다. 2. 어린 시절 황후의 자리에 오른 백모 왕정군에 의해 백부들이 제후에 봉해지고, 고위 관리로서 유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아버지 왕만과 형 왕영(王永)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함을 가지고, 패군(沛郡)의 진삼(陳參)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고, 유생의 복장을 입고, 어머니와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의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양육하여(뒤에 살해), 왕망의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때부터 왕망은 대중들을 속이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고 보여진다. 3. 외척과 권세 백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자, 간병을 하였고, 왕봉의 인정을 받게 되고 왕봉이 죽은 후 왕상(王商)과 왕근(王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한다. 친척 순우장(淳于長)을 실각시켜, 대사마(大司馬)가 되면서, 왕망의 권세는 막강해진다. 애제(哀帝)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정계 복귀의 탄원이 계속 올라오자 다시 복귀를 한다. 기원전 1년 한애제가 급사하고, 한 평제(漢平帝)가 즉위하고 왕정군은 이를 기회로 태황태후의 지위를 이용해 한애제의 외척 및 측근 세력을 배제하여, 조카 왕망을 대사마에 임명하였다. 그 무렵 왕망은 찬탈의 의도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눈치 챈 왕정군은 왕망의 제후 임명에 반대를 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 평제가 독살되고 유영(劉嬰)이 황제로 옹립 되자, 왕망이 주나라의 성왕 (成王)과 주공 단(周公旦)의 고사에 모방하여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다. 왕망은 왕정군에게 전국옥새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요구했을 때, 다툼이 벌어져 옥새는 훼손되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애제가 붕어하자 애제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간(衎)을 옹립하고(평제) 대사마가 되었다. 이어 고문경학의 대가였던 유흠(劉歆)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많이 끌어들여 유학과 서상(瑞祥), 부명(符命, 일종의 예언서)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남 왕획(王獲)을 잡아 노복(奴僕)을 죽인 죄를 묻는가 하면 장남 우(宇)의 모략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자결하게 했다. 딸을 평제의 황후로 책봉하고, 재형(宰衡),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5년에 14살이 된 평제가 사망하고(왕망에 의한 독살), 광척후(廣戚侯) 현(顯)의 아들 영(嬰: 유자)을 황태자로 세우고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 · 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한다. 4.황위찬탈과 신의 건국 왕망은 제위 계승을 정당화하려 하는데 마침 애장(哀章)이라는 인물이 고조(高祖)의 예언이라며 금궤도(金匱圖)와 금책서(金策書)를 위조해 바쳤는데, 이를 전거로 거섭 3년(8년), 왕망은 고조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신 왕조를 열었다.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선양이지만 실상은 찬탈과 다름이 없다. 태황태후로서 전국새(全國璽)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은 사자로서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망의 사촌형제 순(舜)에게 왕망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순이 옥새를 내어줄 것을 재촉하자 옥새를 내던지며 "너희 일족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 저주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5.이상주의자의 허상 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은 주관(周官)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국가 정책을 실시하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각종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화폐 유통과 경제 활동도 정지되어 민중의 상활은 한조 말기 이상으로 곤궁해졌다. 외교적으로도 마찰이 심해졌는데 고구려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와 충돌을 하게된다. 다른 이민족들의 관계 또한 악화되어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또한 전매제 강화도 실패하여 신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신라라 시기는 전한 말기 이상의 고통을 백성들에게 안겨준 시대였다. 6.왕망의 최후와 신의 멸망 배고픔과 차별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결국 왕망의 신나라에 맞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18년에 적미의 난이 일어났고, 남양군(南陽郡)에서 옹립된 유현(劉玄)을 토벌하러 보낸 신의 100만 군대도 곤양(昆陽)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劉秀)에게 패배하하고 전국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며 신라라는 대혼란에 빠진다. 그의 신하도 배신하고, 장안에는 경시제의 군대가 입성, 왕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吳)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7.왕망에 대한 평가 (1) 중국 중국 역사상 최초의 '찬탈'을 저지른 인물로 왕망은 중국 역대 황조에서 정치면에서뿐 아니라 인간성까지 포함해 비판적인 평가를 많이 받는다. 왕망은 외모나 대인관계에 특히 집착을 보여, 의식 때에는 수염이나 머리를 검게 물들여 좀 더 젊게 보이려 한 반면, 부명이나 서상 같은 신비주의적인 도참설을 이용해 자신의 등용과 즉위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그때에도 자신이 주위의 추천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받는 시늉을 하는 등 간계와 지모에도 능했다고 한다. 명대의 오승은(吳承恩)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孫悟空)이 날뛰던 시기(오행산에 갇힐 때까지)를 왕망 시대로 정했는데, 이것은 「폭군 · 왕위 찬탈자 · 거짓 천자가 황위에 있으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전승을 왕망의 찬탈과 겹쳐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 한국 고려의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보낸 답서에서 「기회를 엿보아 한(漢)을 도모하였으니 왕망·동탁(董卓)의 간계(姦計)만 보일 뿐이었다」고 하여, 견훤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쳐들어가 약탈을 저지르고 경애왕을 죽게 한 행동을 한 조정을 어지럽히고 애제를 독살한 왕망의 전적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고 《중종실록》에도 조광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훈구파들이 「주초(走肖)의 무리가 저지른 간사함이 왕망이나 동탁 같아 온 나라의 인심을 얻고 백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며 조광조를 왕망에 빗대고 있다. (3)일본 일본에서도 《도지가전(藤氏家傳)》 대직관전(大織冠傳)에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정치를 「안한의 궤휼(安漢の詭譎)」이라 비판하였으며,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도 조고(趙高) · 안록산(安祿山) 등과 함께 조정을 어지럽힌 조적(朝敵)으로서 왕망의 이름을 거론하였으며,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의 난폭한 행동을 왕망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간신의 대표격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4) 근대 반면 한국의 사학자 신채호는 왕조 교체가 빈번했던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왕조가 이전 왕조를 대신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요역을 면제하고 부세를 감해주는 고식적인 시혜를 베푸는 척하다가 다시 옛 왕조의 규정을 되살려서 폭(暴)으로 폭을 대신하는 무의식한 내란만 되풀이되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왕망만은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한다는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했다며 왕망의 찬탈을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신채호 선생의 평가는 왕망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역대 창업 황제들의 내건 혁명을 비꼰 측면이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