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경북 문경
* 산행일시 : 2024년 06월 08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좋은사람들)
* 산행코스 : 하늘재~모래산-탄항산(인증)~편천재-부봉삼거리(인증)-부봉-조령 동암문- 마패봉(인증)~조령 3 관문~깃대봉(치마바위봉)-신선암봉(인증)~조령산(100 명산)~이화령 (약18.5km/10시간)
* 산행시간 : 02:18~10:57 (산행 8:38분/휴식시간:0시간 51분)
* 산행속도 : 2.41km/h
* 산행거리 : 18.78km
* 날씨 : 흐림. 비
* 기온 : 20
* 약수터 정보 : 조령약수(거의 나오지 않음), 조령샘
* 조망점 : 부봉, 마패봉, 신선암봉, 조령산 기타 능선길
* GPX 트랙 : 별도 첨부
* 산행난이도 : 고도차:상, 거리:중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오늘 날씨가 비가 온다 한다.
그것도 아침 8시부터..!
상당히 많은 비가 예상되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모객이 되지 않아서 가느니 마느니 하고 있었는데.
비가 온다 하여 회비를 내고도 오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결국 13명이라는 조촐한 인원으로 산행을 하게 되었다.
4일 쉬는 날에 6일 날은 설악에 다녀오고 하루 쉬고 6월 8일 날 이곳 백두대간 산행을 하게 되었다.
백두대간 시작 지점인 하늘재인데.
예전에는 이곳에 버스가 올 수 없었는데 이곳에 주차장이 생기고서 버스가 올 수 있어서 하늘재 바로 아래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되었다.
[하늘재]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사이를 이어주는 도의 경계로,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하늘재'는 525미터로 이름처럼 높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겨릅산, 계립령, 대원령으로도 불리는 하늘재는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 신라시대부터 북방의 문화를 영남지방에 전해주던 관문으로, 지금도 성벽이 남아 있다.
신라 제 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다. 하늘재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신라는 일찍이 하늘재를 교두보로 한강으로 진출했고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다. 이처럼 중요한 전략 거점이다 보니 하늘재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시도했으며,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몽진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신라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 공주가 금강산으로 향할 때 피눈물을 머금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한다. 충청북도는 자연환경명소 100선의 하나로 선정했고, 월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하늘재의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고갯길 1.5km 구간을 '역사 생태관찰로' 로 조성했다.
또한 불가의 불성이 깃든 관음세계에서 미륵세계로, 현세에서 미래로 가는 희망의 상징. 지명처럼 미륵리에는 마이애미 미륵불상과 문화재급 다수가 있으며 불가의 요람으로 되어 있다.
1. 겨릅산, 계립령
겨릅은 겨릅대의 준말로, 껍질을 벗긴 삼대를 일컫는 순 우리말로, 계립(鷄立)은 겨릅을 소리 옮김한 것이다.
하늘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로 거슬러 오른다. 이 기록에는 아달라 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했다. 아달라왕 3년은 156년이니 죽령 길의 개척보다 2년이 앞선다. 같은 책 권41 「열전」의 김유신 조에 등장하는 이름은 마목현(麻木峴)이다.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 「열전」의 온달 조에는 "계립령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온달의 출사표로 등장한다.
2. 대원령(大院嶺)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이 보인다. 고려 고종 42년(1255) 10월에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대원령이란 바로 미륵대원에서 시작되는 말이다. 연구가들은 미륵사지의 창건 연대를 대략 10세기로 어림잡고 고려시대의 절 이름을 대원사로 보는 견해에 거의 동의한다. 우리나라의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 역시 고려시대이니 본래의 절에 원(院)을 두고 대원, 혹은 미륵대원이라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늘재 또한 이 무렵에 대원령이란 이름을 얻는다.
3. 마목(痲木) 마골(麻骨岾)
마목이나 마골은 겨릅을 한자로 뜻옮김 한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를 기록에 남기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면 비로소 이를 정리하여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거 나 "속칭 마골산이라 한다"는 기록으로 발전한다.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미륵대원에 관한 기록이 사라지는 일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새재 길이 새로 개척되고 하늘재 길은 점점 그 쓰임새를 잃게 되지만 가령,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여전히 하늘재 길의 역원이 등장하는 반면 유독 대원과 미륵사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4. 한원령(限院嶺)
한원령이 음과 훈이 혼용되어, 한원령→한월령→한월재→하늘재로 전음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大院의 院을 훈독하여 에운담, 곧 '울'로 읽으면 '한울'로 읽을 수도 있으므로, 한울재→하늘재로 전음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탄항산 856m
거리 약 2.0km 소요시간 50분
산행을 하다 보면 기억이 정상석은 온전히 남아 있는데.
그곳을 오르는 길은 확실하게 기억이 남지 않는다.
생각에 편하게 올랐던 것 같은데.
제법 굴곡도 있고 오름도 있었다.
[탄항산(월항삼봉)]
탄항산의 탄항(炭項)은 아마도 변방·국경 등을 지킨다는 의미의 수자리 '수(戍)'자와 지키기에 알맞은 '목'이라는 의미의 '항(項)' 자가 합성되어 '수항'이라 일컫던 것이 숫항→숯항으로 전음되어 숯 탄(炭) 자의 훈을 빌리어 뜻옮김 하여 불리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의하면,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이 산정에 봉수대가 시설되어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월항삼봉의 월항(月項)도 여지도서 문경조의 조령산성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음과 훈이 혼용된 달항(達項)으로 불리었음을 살 필 수 있다. 달항은 다시 달목→달매기로 전음되어 속칭되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뜻옮김하여 월항이라고도 칭하게 된 것이다.
이의 본래 이름 달항은 아마도 '큰 목'이라는 의미에서 일컫던 큰 고개의 목이 되는 곳, 곧 평천재(월항재) 부근 959m 안부에서 한 줄기는 백두대간 줄기로서 서쪽으로 뻗어가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주흘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크고 중요한 산줄기의 목을 지칭하던 땅이름으로 추측된다.
[평천재] 월항재
조령에서 북쪽 마패봉을 경유하여 동쪽 백두대간을 따라가면 현재 월항삼봉(月項三峯·857m)이라 일컫는 탄항산(炭項山)이 자리하고 있다. 탄항산은 '項'자가 유사자형인 '頂(정)'자로도 잘못 표기되어 동국여지승람 문경조 등에는 '탄정산(炭頂山)'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이보다 앞서 이미 세종실록지리지 문경조에 탄항산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대동지지 등에도 이를 탄항산으로 바로잡아 놓아 현재까지도 탄항산이란 산 이름이 그대로 전하여 온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발간된 각종 지도상에 월항 마을 부근의 세 봉우리라는 의미로 누군가가 '월항삼봉'으로 잘못 표기한 이래 이 산이름으로 잘못 왜곡되어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
부봉 917m
거리 약 4.8km 소요시간 2시간 00분
탄항산을 올랐다가 잠깐 내리막을 걷고서 급하게 오르면 이곳 주흘산 부봉에 도착을 한다.
블랙야크 인증 지는 부봉 갈림길 이정표이며 이곳은 대간길에서 약 200m의 계단을 올라야만 정상석을 볼 수 있다.
[부봉] 917m
능선이 대체로 서진해오다가 약간 남쪽으로 치우치면서 만들어낸 봉우리다. 조령산이 건너편으로 마주하고 조령계곡의 '꽃밭서들'이 발아래 펼쳐진다. 정산 북쪽에 옛 산성이 있다. 정상은 대간에서 서쪽으로 100m쯤 비켜나 있다. 정상부위가 솥뚜껑처럼 볼록하고 생겼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 서쪽 능선으로 비슷한 모양의 봉우리가 한 개 더 있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약간 비껴난 부봉은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모두 6개봉으로 이루어졌고 제2봉이 제일 높다. 조령산에서 동쪽으로 보이며, 주흘산의 북서쪽에 바위벽으로 솟아 있다. 부봉(釜峰)은 멀리서 볼 때 가마솥을 얹어 놓은 형국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 일대는 물박달나무·자란초·미치광이풀·냉초 등 희귀 동식물이 많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문경시는 1987년부터 10만 그루 이상의 묘목을 심어 박달나무 군락지로서의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주흘산] 1106m
조령산, 포암산, 월악산 등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중심을 이루며 산세가 아름답고 문경새재 등의 역사적 전설이 담겨 있다. 산의 북쪽과 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 동쪽과 서쪽에서 물줄기가 발원하여 신북천과 조령천으로 흘러드는데, 이 물줄기들은 곳곳에 폭포를 형성한다. 그중 유명한 것이 발원높이 10m의 여궁폭포와 파랑폭포이다. 산기슭에는 혜국사(惠國寺)가 있고, 주흘산과 조령산 가운데에 난 계곡을 따라서는 문경관문(聞慶關門)이 세워져 있다.
해발 520m에 위치하는 혜국사는 신라 문성왕 8년(846) 보조국사 체징(體澄)이 개창한 고찰인데, 고려 말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절이다. 역사의 애환과 수많은 사연을 지닌 문경관문은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1 ·제2 ·제3 관문 및 부속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 ·제2 ·제3 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산 정상에 올라서면 운달산과 그 왼쪽으로 멀리 소백산 등이 이어진다. 남쪽에 백화산, 서쪽에 조령산, 북쪽으로는 1,107고지인 주봉이 보인다.
부봉에서 약 8km 지점까지는 평탄한 길로 이어지고 1km를 급하게 오르면 마패봉에 도착을 할 수 있다.
마패봉 920m
거리 9.0km 소요시간 3시간 25분
마패봉은 약 1km 거리를 급하게 오르면 정상에 도착을 한다.
또 마패봉에서 길이 2갈래로 있는데 우측으로 가면 신선봉으로 비탐길로 이어진다.
저곳 정상석을 넘어가면 조령 3 관문으로 하산을 할 수 있다.
[마역봉] 마패봉 927m
馬驛, 馬牌峰.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산을 넘을 때 조령 제3관문에서 쉬었을 때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도에는 마역봉으로 되어 있으나 현지에서는 마패봉으로 불린다. 일제 때 지도를 만들 때 오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령3관문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이곳이 조령 3 관문이다.
[조령] 650m
조령은 다른 이름으로 새재라고도 불리는데,
1.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어 쉬어 가는 험하고 높은 고개
2. 새(억새)가 우거진 고개(草岾)-고려사 기록(초점)
새재 골짜기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초곡방(草谷坊)으로 정했고, 현재까지도 상초리(上草理) 하초리(下草理)로 불리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새(억새)가 많았던 모양이다.
3.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의 고개
4. '새로 생긴(新) 고개'라는 뜻이다.
일찍이 신라 때부터 영로가 개통된 계립령과 죽령이 옛 고개, 묵은 고개임에 비해 늦게 생긴 고개, 새로 생긴 고개라는 것.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지방이란 뜻이다.
5. 비지재, 비조령(飛鳥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영산골에서 평천리로 넘어가는 주흘산 중턱에 위치한 고개로 옛날에 비조룡(飛鳥嶺)이라고 하는 전설상의 새가 영산골에서 평천으로 넘어가려고 날아가다 주흘산에 가로막혀 단숨에 넘지 못하고 정상에서 쉬어 넘었다고 하여 비조령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1700년경에는 최완룡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이 재를 비지재라고 불렀다 한다.
6. 문인들이 좀더 멋스럽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조령이라는 이름을 얻은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령샘인데.
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조령 약수]
조령 약수는 조선 숙종 34년[1708년] 조령성을 쌓을 때 새재 정상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샘은 조선조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타는 목을 적셔 주는 역사 속의 명약수로 사시사철 마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샘의 물을 많이 마시면 장수를 한다는 백수영천[百壽靈泉]이라고 전해 온다.
[조령 관문]
1. 주흘관(主屹關) - 영남제1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설관하였다.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2. 조곡관(鳥谷關) - 영남제2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3. 조령관(鳥嶺關) - 영남제3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조령관문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합류했던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이미 때가 늦었다고 판단하여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로 후퇴한 신립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으나 전멸하고 만다. 그 후 선조 30년(1597) 2월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이것이 오늘날의 제2관문이다.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에서 조령 등 남관 요충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손명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 당하고 논죄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 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신선암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길이다.
깃대봉까지는 급하게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깃대봉 가림길이다.
깃대봉은 갈림길에서 약 200m 올라가면 정상에 도착을 할 수 있다.
깃대봉 835m
거리 약 10.8km 소요시간 4시간 16분
깃대봉 정상석이다.
[깃대봉(치마바위)]
산 이름은 정상 일대에 있는 화강암 절벽이 치마를 펼친 듯하다하여 생겨났으며, 산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다 하여 깃대봉이라고도 한다. 조령산 정상 북쪽 능선에 있다.
깃대봉을 지나서 시각이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점점 안개가 몰려오고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이다.
신선암봉을 가는 길에 주흘산 부봉 쪽의 모습이다.
참조팝나무 꽃
꼬리진달래.
이곳 조망점을 지나고 나면 점점 암릉이 나오고 몇 곳의 암릉을 넘어야만 신선암봉에 도착을 할 수 있다.
절벽 하산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가 오지 않아서 바위가 미끄럽지 않았다.
저곳이 신선암봉인 듯하다.
신선암봉 937m
거리 약 14.1km 소요시간 6시간
[신선 암봉] 937m
신선암봉과 깃대봉은 조령산 주능선상의 북쪽 방향에 있는 바위층이 많은 산이며, 조령산 구간 중에서 어려운 암릉 코스에 속한다. 그리고 깃대봉은 조령 제3관문의 서남방향의 능선에 가까이 보이는 봉우리로 그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게 솟아 올라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깃대봉의 정상 남서면은 치마바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선암봉은 조령산과 새재(조령 제3관문)의 중간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능선상의 암봉에 불과하지만 괴산군에서는 "괴산의 명산"이라고 하면서 별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가야 할 조령산 쪽 모습이다.
왜솜다리
조령산 1017m
거리 15.8km 소요시간 6시간 50분
이곳에 도착을 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히 아닌가 한다.
험한 암릉 구간을 비를 맞지 않고 지나올 수 있었다.
[조령산] 1025m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선상에 자리잡은 명산으로, 예전에는 공정산(公正山)으로 불리웠다.
전체적으로는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울려 마치 그림 같다. 능선 남쪽 백화산과의 경계에는 이화령이 있고 능선 북쪽 마역봉과의 경계가 되는 구새재에는 조령 제3관문(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제3관문이 위치한 곳은 해발 642m로서 예로부터 문경새재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이 연결되어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험난한 지세를 이용할 수 있어 군사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 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 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능선 동쪽을 흐르는 조령천 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조선조 제3대 태종이 국도로 지정한 간선도로였으며, 주흘관(제1관문), 조곡관(제2관문), 원터, 교구정터 등의 사적지가 있고 완만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와폭과 담이 산재하여 있다. 현재 이 일대는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안보온천, 월악산국립공원과 가깝다.
하산길은 비가 와서 우의를 입어야만 했다.
조령샘.
드디어 이화령에 도착을 했다.
[이화령] 이우릿재 529m
이화령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이다. 이화현으로 불리던, 사람통행이 적은 조그만 고갯길이었다. 그 고갯길이 1925년 일제에 의해 신작로로 개설되면서부터 중부와 영남을 잇는 새로운 동맥으로 급부상하였다. 당시 한국민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던 영남대로의 기(氣)를 꺾기 위해 일제가 의도적으로 조령 근처에 신작로를 만든 것이라 한다. 실제 이화령이 개설된 후 양조장과 시장이 설 정도로 번성했던 조령의 풍요는 마감됐고, 이후 조령 근처 상초리 사람들은 화전(火田)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다.
하늘재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조령이 조선시대에 고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이화령은 근대에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3번 국도가 쉬었다 넘는 고갯마루로 번성하였으나, 1998년 고갯길 아래로 이화령터널이 뚫려, 점차 잊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2004년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에 터널 길을 또 내어주고, 이제는 등산객들 아니면 찾는 이 없는 쓸쓸한 길로 전락했다..
2012년 11월 백두대간 훼손지 복원사업으로 이화령 옛길 위로 터널형태로 대간길을 복원했다.
- 梨花, 伊火
추풍령과 죽령 사이에 위치하며 중부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조령의 대체도로로 이용된다. 원래는 '이우리고개'였던 것을 지난 1925년에 신작로 형태로 개통하면서 이화령으로 개명했다. 고갯길 연변의 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당시 총독부에서 붙인 이름이다. 한때는 조령과 구분하는 말로 '큰새재'라고도 불렀다.
조령산 남쪽에 위치한 이화령 속칭 이우릿재는 조선세종실록 지리지 문경조 및 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의 역대 지리지 문경조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화현(伊火峴)으로 표기하던 고개 이름인데,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현재의 '梨花嶺' 표기는 조선총독부에서 1914~1918년에 걸쳐 조사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 잘못 표기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표기다. 1929년에 김유동이 저술 간행한 팔도명승고적 문경군조에도 伊火峴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살 필수 있다.
이화령은 증보문헌비고 권119 병고(兵考)에 보이는, 조선 숙종 31년(1705)조 기사에 의하면, 이오령(伊吾嶺)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방언 상에서 이화령→아와령→이오령으로 전음되어 일컬어지던 것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화령의 속칭 이우릿재도 이화령 부근의 동리 이름을 따서 이화리의 고개란 뜻으로 이화릿재라 일컫던 말이 이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거나, 또는 이화(伊火)의 음과 훈(訓)이 혼용된 이불(벌)재, 이부릿재→이우릿재로 전음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음과 훈이 혼용되어 일컬어지는 땅이름 용례는 우리 땅이름에 흔히 보이는 것으로, 예컨대 하늘재 동남쪽 문경읍 갈평리의 갈평(葛坪)도 속칭 갈벌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또는 이화령은 아득하다, 희미하다의 옛말 '입다'의 고형태인 '이블다(이울다)'에서 '이블'을 취하여 아득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블재[伊火峴]라 일컫던 것이 전음되어 이울재→이우릿재라 일컫던 고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 문경시청이 최근 '이화령'이란 지명을 폐기하고 '이우릿재'라는 전래명칭을 되살렸다.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버리고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걸어 넘던 오솔길일 때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GPS 트랙
|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비가와서 저는 대화종주 안갔습니다. ㅎㅎ
그러셨군요..!
토요일날은 비가 많이 와서.!
그래도 일요일은 맑게 개였는데..!
대간이다보니 이렇게 비가와도 가게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귀찮아서 못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선암봉에서의 조망은 벌써 몇번째 볼 수 없네요..!
갈때마다 비가 오거나 안개로 조망을 볼 수 없더라구요.
언젠가는 가서 볼 수 있겠죠..
@누리사랑 신선암봉 조망은 겨울에 눈덮였을때가 좋았던거 같습니다.
@동편
@동편
@동편
@동편
@동편 예전에 초록할 때 봤는데.
신선암봉 가는길에 그 경치가 정말 환상이더라구요.
언제 다시 한번 봐야지 했는데.
몇번을 날씨 좋지 않아서 못봤네요.
올 8월에 끝나니까
정맥 하나 골라서 하고 또 좋은곳 다녀볼려고요.
수고하셨습니다.
신선암봉에서의 경치를 보고싶었는데
아쉽네요.
네..
저도 신선암봉에서 조망이 쉽지 않네요.
벌써 4번째 그곳에 가는데.
한번을 못봤습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꼭 그런곳이 있더라구요.
언젠가는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