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쉬운 일입니다.(2024년 7월 5일 금요기도회 설교)
성경 : 신명기 30:11-14(구약 311)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문명이 발달을 해서 상상하지 못했던 기계들을 만들어 내서 우리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계들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획기적인 프로그램들이 나와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획기적인 기계가 나오고 획기적인 프로그램들이 나와도 이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지만 지레 겁을 먹고 저런 기계나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은 힘들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아예 해볼 생각도 안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편리해진 측면도 있지만 발달된 문화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기계들은 사용하기 참 불편하고 힘든 물건들입니다.
물론 발달된 기계들이 오작동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 시청앞 사고에 대해서 본인은 급발진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발진으로 보기 어렵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 분야 명장 1호인 박병일 명장은 이번 사고의 경우 운전자 실수 30% 차량 결함 70%라고 분석을 했는데 박병일 명장의 분석은 "저 차의 브레이크는 기존 브레이크하고 다르다" 며 "저 차는 브레이크를 밟아 선다는 개념이 아니라 브레이크를 전자제어로 한다. 만약 앞에 물체가 나오면 운전자가 운전을 잘못하더라도 자동차를 세우는 그런 장치가 있다“
계속해서 ”G80의 2차 브레이크는 기존하고 다르다, 브레이크를 유압이 아니라 컴퓨터가 제어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차량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브레이크의 개념이 아니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단순한 자동차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고가 복잡하고 정밀하게 설계된 자동차에서는 약간의 오류가 발생하게 될 때 큰 사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복잡하고 어려운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 훨씬 좋다고 여겨지고 단순하고 간단하고 쉬운 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더 좋은 것을 만들지만 더 좋은 것은 반드시 쉽고 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고 복잡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할 수 신앙생활을 하고, 어렵지 않고 쉽게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지키기 힘들고 어려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주셔야지요?” 하고 항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지키기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어렵지 않아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첨단 스마트폰을 들고 이거 사용하기 참 힘들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원리와 사용 방법만 잘 알면 너무나 편리하고 좋은 것이지만 원리와 방법을 모르면 골치 덩어리가 스마트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골치 아프고 힘든 말씀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쉽고 행복한 축복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고 지키고 힘들다고 투덜대는 투덜이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고 말씀하고 다르게 말하면 “참 쉬운 일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어렵지 않습니다.
11절에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시려고 일부러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주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율법을 오늘 우리가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처음 율법을 받았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도 이 율법이 지키기 어려운 말씀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 유대인들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명을 주시고 규례를 주실 때 사람들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계명을 주시고 지키지도 못할 규례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실 때 그 시대 그 사람들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모세 오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규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규례인데 조금 다르게 말씀하신 것처럼 표현된 것을 찾아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여러 개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그 여러 문서들을 모아서 편집을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은 같은 규례를 다르게 표현한 것은 기록된 문서들의 특징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지내면서 그들의 생활에 맞게 그리고 그들의 상황에서 지킬 수 있게 조금씩 규례들을 완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지킬 수 없는 명령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그 명령을 조금씩 완화시켜주셔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지킬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을 해야만 한다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한 예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먹을 양식에 대한 성경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이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처음에 허락하신 양식은 채소와 열매였습니다.
창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에게 육식을 허용하셨습니다.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수로 인해서 땅의 모든 것이 물에 잠긴 뒤였기 때문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먹을 채소와 열매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홍수전에 미리 준비한 양식이 있기는 하지만 배에 머무는 동안에 양식은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고 홍수 끝에 채소와 열매를 얻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가족에게 산 동물은 모두 채소처럼 먹을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레위기 11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 시대의 상황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 생활 중이었고 날씨는 무덥고 그런 환경에서 먹으면 쉽게 병에 걸릴 수 있는 것들은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고 그런 환경에서 먹어도 전혀 탈이 나지 않을 것들은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육식에 대한 명령은 사도 시대에 와서 다시 한 번 변하게 됩니다. 행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유대인들과 달리 이방인들은 육식을 하는데 있어서 구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익숙해져 있던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처럼 먹으라는 것은 멍에를 메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멍에를 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먹는 것에 대한 규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해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우리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전혀 지킬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지킬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고전10: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고 말씀을 읽으면 말씀이 내 입에 꿀 송이처럼 달고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꿀 송이처럼 단 말씀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살리고 나를 회복시키는 축복의 말씀으로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2. 말씀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2-14절까지를 보면
30: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30: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아주 먼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바다 건너 저 멀리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말씀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이 말씀들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고 다른 성도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주시고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씀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은 언제나 나와 가까이 내 안에 그리고 내 곁에 내 상황과 관련되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말씀이 오늘 나에게 먼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어질 때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읽게 되던지 그 말씀이 지금 나와 관련된 말씀이라고 믿고 아멘으로 받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아멘으로 받으면 지금 그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면 지금 내 삶의 환경이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내게서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즉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주신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오늘 준비한 말씀은 오늘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날그날의 말씀이 그날그날의 영혼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밤에 주신 말씀은 오늘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매일 그날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고 그날의 말씀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붙잡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과 축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내 마음에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극동방송에서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목회를 시작하게 됐는데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작성을 해서 열정적인 설교를 하고 예배가 끝나고 문 앞에 서서 인사를 하는데 성도님들이 모두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시길래 속으로 “그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한 설교인데” 하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두 장로님이 가시면서 대화를 하는데 “형님 그런데 오늘 목사님 설교 이해하시겠어요?” 하고 묻더랍니다. 그러니까 “여보게 우리 같은 사람이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다 어떻게 이해하겠어? 다 좋은 말씀이겠지?” 그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충격을 받으셔서 어떻게 하면 성도님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정말 아주 쉽게 설교를 했더니 그 교회 전도사님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는 목사님의 설교를 전도사님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설교를 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학문적으로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철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내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내 형편과 처지에 맞게 즉 나의 상황에 맞게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모든 말씀을 그 말씀의 본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내 맘대로 내가 복음으로 해석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서 내 생활에 맞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학문적 의미를 찾고 철학적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의미를 마음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 말씀이 마음에서 깨달아지면 말씀이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있고 그 말씀을 내 입으로 말하면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말씀을 입으로 선포하는 순간 그 말씀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고 나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네를 내로 바꿔서 읽겠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내)게 매우 가까워서 네(내) 입에 있으며 네(내) 마음에 있은즉 네(내)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말씀은 결코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매우 쉬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되고 말씀으로 인해서 회복되고 넘치는 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