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만세 반석이신 주님
Text Pslm 73,22-28
(22)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1. 오늘은 부활 후 제 1주일이며, 총회가 정한 제 8회 무궁화주일입니다. 국화인 무궁화는 영어 학명이 ‘샤론의 장미’인데 기독교는 샤론의 장미가 예수님을 상징하는 꽃이라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있는 꽃입니다. 무궁화라는 꽃 이름의 의미는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래전, 고조선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겼고 신라는 스스로를 ‘무궁화 나라’(근화향:槿花鄕)라고 부를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꽃입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한서 남궁억 장로님이 애국 운동 일환으로 무궁화 보급사업을 펼치기도 하였고 그 시절 이심전심으로 불리던 애국가에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노랫말이 포함되면서 더욱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리교회가 2016년 총회에서 4월 첫 주일을 무궁화주일로 정하여 지키기로 한 것은 무궁화 보급 사업을 한 한서 남궁억 선생이 감리교회의 장로였고, 남궁억 장로님이 돌아가신 날이 4월5일(1939년)이었기 때문입니다. 2017년부터 지키기 시작하여서 금년은 제 8회 무궁화주일이 됩니다. 부활절 후 제 1주일이며 무궁화주일인 오늘 성경 시73,22-28을 중심으로 ‘만세반석이신 하나님’이란 제목의 말씀을 나누며 은혜받고자 합니다.
2. 본문 말씀은 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는 구절이 본문의 요절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반석이 되시고 분깃이 되시기에 성도는 험악한 세상에서도 안심하고 천성으로 가는 길을 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토록 반석이 되어주시고 분깃이 되어주시기에 더욱 그렇다는 말입니다.
찬송가에도 주님을 만세 반석이라고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74장 “오 만세 반석이신 대주재 하나님”, 386장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417장 “주 예수 죄인 위해 십자가 졌으니 이 만세 반석 위에 나 굳게 서겠네”, 494장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등입니다. 성경에는 구약 창49,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를 필두로 신32장, 삼상2장, 삼하22장 23장, 시편18편 19편 28편 31편 62편 71편 78편 94편 95편 144편, 사17장 26장 30장 44장, 합1장 등과 신약성경의 마7장, 눅6장 등에서 하나님을 주님을 반석이라 표현하였습니다.
반석은 흔들림이 없고 깨어질 염려가 없는 든든하고 안전하다는 뜻의 바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세 반석(the Rock of Ages)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서 영원히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영원한 반석’(an everlasting rock)이라는 뜻으로, 사26,4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만세 반석 혹은 영원한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니 성도는 그 안에서 언제까지나 평안하게 지낼 수 있으며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무궁화라는 꽃 이름의 뜻은 없을 무, 다할 궁, 즉 다함이 없이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무궁화 는 신라시대에 외국으로 보내는 국서에 신라를 ‘근화향’(槿花鄕/무궁화 나라)이라고 한 기록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아주 흔하게 많이 피어 있었다 합니다. 하지만 일제가 무궁화를 베어내고 자기네 국화인 벚꽃 나무를 심는 바람에 많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무궁화의 꽃말이 ‘무궁무진한 영원함’, ‘일편단심’,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섬세하고 아름다움’ 등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믿는 주님의 속성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어 신묘한 느낌을 주는 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원하고도 완전한 대속의 은총을 단번에 완성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히9,12) 그렇게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심으로(히9,26-28)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벧전3,18) 또한 주님은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당신을 믿고 따라나선 성도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게 하여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하고도 안전한 반석이 되십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무궁화를 국화로 내세우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무궁화의 꽃 이름과 꽃말을 마음에 새기며 무궁화로 이루어진 ‘화려강산’을 꿈을 꾸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나라요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궁화가 상징하는 바 무궁하신 주님, 만세 반석,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세 반석 되시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 힘차게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3. 십자가와 부활로 성도에게 영원한 반석이 되신 주님은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든든하고 안전하여 평안을 누리게 하는 피난처, 안식처가 되십니다. 22절에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의 일도 모르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진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우매하고 무지합니다. 지각이 없는 짐승과 같습니다. 절벽에 매달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밧줄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위에서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공포와 혀를 날름거리며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뱀의 공포를 망각한 채 입에 떨어지는 꿀맛에 현혹된 짐승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매무지하여 얼마나 불필요하게도 자신의 심령을 괴롭혔습니까? 지금도 역정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말씀에 은혜를 받아 그런 자신을 책망하고 자기의 불만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십시다. 오직 현재 일만을 생각하며 장차 올 것은 결코 내다보지 못하는 짐승(behemoth-큰 짐승)과 같은 사람이 나라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단지 나보다 형통하다는 이유 때문에 악인을 부러워했다면, 자신이 그 악인 중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들과 상황을 바꾸려고까지 생각했다면 지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만세 반석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23절에 보니까 만세 반석 되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그 주님께서 그 사람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주의 교훈으로 그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시리라고 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때로 마음에 들지 않고 성에 차지 않으며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다면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주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뜻이 있어서, 꼭 그렇게 해야 했기에 그렇게 인도하셨음을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과 같이 고백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 말씀과 같이 하늘에서는 주 외에 아무도 주님을 대신할 자가 없으며, 땅에서도 주밖에는 사모할 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지금 어떠한 재난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만세 반석 아래에 피난하여서 거기에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안에서 평안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라고 말하면서 찬송해야 합니다. 무슨 찬송을 합니까?
제가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두 번째 달이 됐을 때, 식권을 살 돈이 없어서 사흘을 굶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흘을 굶으니 배고픈 거 하고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기숙사 방에서 혼자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예수가 더 좋다고 찬송하더니 다 거짓말 아니었더냐? 겨우 사흘 굶었는데 네 믿음은 대체 무엇이냐?’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 굶어도 좋고 학교에 다닐 수 없어도 좋습니다. 단 하나 그렇게 되더라도 내 영혼이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평안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찬송을 부르는데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주님의 평안이 임하였습니다.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의 구원하신 은총 하나만으로 눈물로 감사하며 찬송했습니다. 그리고는 다 내려놓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3일 동안 기도하고 있었는데 고마운 분들 덕분에 생활비와 학비까지 모두 해결되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그 때 주신 주님의 평안이었습니다. 만세 반석이신 주님, 무궁하신 ‘샤론의 장미’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4.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 만세 반석이신 주님, 영원한 분깃이신 주님,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실 주님을 깨달은 본문의 시인은 27-28절에서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 주를 떠난 자는 망하거나 멸망합니다만,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주께 피하는 것이 복이라는 고백입니다.
영원한 반석, 만세 반석이 되신 주님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도가 아직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당신께 피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며 풍성한 복을 내려주십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시7,7) 주께 피하는 인생 앞에 은혜를 쌓아 두신다고 했습니다.(시31,19) 또한 나훔1,7에는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유1,3 말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처럼,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합니다.
시16,1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한 글자 ‘께’를 ‘를’로만 바꾸면 영 이상해집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를 피하나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이라는 그늘로 달려가 피해야 하는데, 어려움을 당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피해 도망간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혹 내가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풍랑의 바다를 건너야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고 예배는 참석하지만 주께 피하는 대신 주를 피하는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죄의 모습이 있어서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피하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피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죄악의 구덩이에 빠져 온통 죄로 뒤덮여 있을지라도 피하지 말고 하나님의 품으로 다가와서 정결해지라고 하십니다. 내 모습이 아무리 초라해도 ‘주를 피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 피하는 자’가 되십시오.
세상적 생각으로는 피하고 숨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용감하게 맞서 싸우며 패하더라도 떳떳하게 나와서 마지막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영적 전투에 있어서는 피하고 숨는 것이 가장 잘 싸우는 것이며, 가장 큰 능력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 네 능력을 보여줘!”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공중 권세를 잡은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기에, 좀 궁색해 보이고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에 주님 등 뒤에 곧장 달려가 냉큼 숨어버리고 피하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이며 가장 잘 싸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고 주께 피하고 숨는 것은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성도, 마귀와의 싸움을 잘하는 성도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주님을 의지하고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께 피하여 숨는 성도입니다. 주께 피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생명줄로 여기고 기도의 끈을 붙들고 사수하는 성도가 승리합니다. 만세 반석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그 주님께 피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