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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릿말
최근의 세계신학계는 영성신학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신학계도 이런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60년대의 토착화 신학은 한국에서의 복음 선교과정에서 부딪히는 문화적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적 신학의 이론(Orthodoxy)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이어서 등장한 1970년대의 민중신학은 복음의 실천과정에서 야기되는 정치적 갈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신앙의 바른 실천(Orthopraxy)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의 통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복음을 한국적인 상황에서 바로 이해하고 바로 실천하기 위한 근본적인 태도로서 ‘한국적 영성’에 대한 신학적 관심이 새로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기독교학회에서도 1987년에 ‘한국교회와 영성’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한국 가톨릭 신학계에서도 ‘영성의 토착화’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 연구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WCC 산하 신학교육위원회(PTE)가 주관하여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는 주제로 모인 아이오나 협의회(1987,4,24-28)에서는 기독교 영성은 보다 넓은 세계의 다른 종교와 문화의 영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는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경향에 따라 이 글에서는 영성의 토착화 또는 한국적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신학사에 나타나는 한 사례로서 영계 길선주 목사(1869-1935)의 생애와 신학을 제시하려고 한다. 길선주 목사는 선도(仙道)에 심취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선도의 관습에 따라 새벽기도, 정오 기도, 그리고 철야 기도를 처음으로 실시하고, 매일 새벽마다 묵시록 전체를 20분 동안 암송하고 성경을 연구에 심취하였으며, 1907년 대부흥운동과 이어서 계속된 사경회를 주도하였고, 그리고 삼일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유동식의 평가에 의하면 길선주는 새벽 기도회 운동과 부흥사경회 등 한국교회의 신앙의 몇 가지 특성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유불선을 접촉한 바 있으므로, “새벽기도회가 불교의 새벽 예불(禮佛)과 선도(仙道)의 정시(定時) 기도(祈禱)에서 그 전통을 배운 바 있다고 한다면, 성경에 대한 그의 열의는 불교의 경서(經書) 연구열을 이어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동식은 길선주를 단지 “한국장로교회 보수주의 신학 사상 형성에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만 평가하였다. 영계 길선주 목사가 시작한 새벽기도, 성경 독송과 같은 신앙적인 덕목이 한국 개신교 영성의 토착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은 새롭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신학사적으로 볼 때 우리들의 재래 종교인 유불선 3교와 기독교의 실존적인 만남의 대표적인 신학적 사례가 희귀한데, 그 중에서 유교에 심취하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탁사 최병헌 목사(1858-1927)의 신학에 관한 논문들은 몇몇 발표되었고 종교신학 또는 문화신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선구자적인 혜안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선도에 심취하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길선주 목사의 신학에 관한 연구는 드문 편이다. 일찍이 김인서는 영계 길선주 목사의 신학을 이렇게 평가 한 바 있다.
“이렇듯 웅심(雄深)한 선생의 신학은 영미나 어느 외국에서 배운 것이 아니요 선생 독특의 신학이었다. 그런고로 선생의 신학 즉 조선 독특의 신학이라 하여도 가하다. 유(儒)에 취(就)하야 문(文)과 인(仁)을 배우고 불(佛)에 취(就)하여 선(禪)을 배우고 선(仙)에 입(入)하여 현돈(玄牝)을 수(修)한 선생의 신학에는 아마 동방적 색소가 농후한 바가 있다.”
따라서 한국신학의 한 흐름으로서 한국적 영성 또는 영성의 토착화를 논의하려면 길선주의 경우를 반듯이 짚고 넘어 가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그의 호가 영계(靈溪)였다는 사실이 함축하고 있는 영성적인 의미심장함을 전제하고, 한국의 전통적 영성과 기독교적 영성의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영성신학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영계의 길선주 목사의 생애와 신학을 영성신학적 측면에서 재평가하려고 한다.
2. 선도(仙道) 수행
길선주(1869.3.25-1935.11.25)는 네 살 되던 해부터 모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7세부터는 16세 까지 유학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부친은 공직을 사직하였다. 1885년 17세 되던 해에 병을 얻어 평양 용악사에 들어가 휴양하며 불문(佛門)을 접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병세의 차도가 있었으나,19세부터 인간 사회가 싫어졌고 이러한 염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도에 입문하여 10년간 수도하였다. 처음에는 관성교(關聖敎)의 보고문(譜告文) 몇을 만독(萬讀)하였다고 한다. 이 주문을 외우던 어느날 “을밀대에 가보라”는 꿈을 꾸고 을밀대에서 함경도 도인 창일 도사(蒼日道士) 김순호(金舜昊)를 만나게 되었다. 창일도사는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적어주고 밤낮으로 이 주문을 계속 송독하면 7일이 되지 않아 강령(降靈)이 되어 몸이 떨리고, 심신이 유쾌하게 되고, 기력이 강건하게 되면서 도에 취미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대성산 두타산(頭陀山)에 가서 정력을 집중하여 밤낮으로 이 주문을 송독하다가 무아경에 이르게 된지 사흘만에 강령이 되면서 몸이 떨리고 기력이 되살아나고 힘이 나기 시작하였다.
21세부터 관성교를 포기하고 선도에 심취한 길선주는 수십년 동안의 선도 수련으로 유명한 평양의 장득한(張得漢) 선생을 ?O아가 지도를 간청하였다. 玉經을 연구하던 장선생은 옥경의 구령삼정주송문(九靈三精呪誦法)과 삼령주문(三靈呪文)을 가르쳐 주었다. 위의 두 주문을 몇 십만 번을 송독하였으며, 심산 유곡을 ?O아 다니면서 21일, 49일, 100일에 걸처 불면불후(不眠不休)의 기도에 전념하였다. 기도는 묵상과 송독을 겸한 고행이었다. 사(邪)가 틈타지 않게 심혈을 기울였으며, 잠을 쫓기 위해 엄동설한 얼음물로 목욕하고, 밀 심지에 불을 붙여 손가락 끝을 지지기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강령에 도달하여 신통의 영험을 얻게 되었다. 방안에서 옥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총소리 같은 폭발음에 들려 오기도 하였다. 않아서 주송(呪誦)하는 자세 그대로 몸이 두 세척 높이로 도약하여 전진하기도 하였다.
23세부터는 차력(借力)에 정진하였다. 주문을 송독함으로서 강령과 신통력을 얻는 신차력과 자정마다 자정수(子正水)를 일곱 대접 마시는 수차력(水借力)과 비방의 약제를 조제 복용하는 약차력(藥借力)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였다. 마침내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망치를 손으로 끊었으며, 화로의 부손을 손으로 끊을 만큼의 괴력을 보여 주어 이인(異人)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세 가지 차력으로 신통력과 초인적인 힘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능(心能) 개발을 위해 심월관(心月觀)을 계속하고 소강절(邵康節)의 정좌법(靜坐法)과 장랑(張良)의 도인법(導人法)을 계속 겸행하였다. 그리고 도가에서 널리 수행된 방중술(房中術)에도 기력(氣力)을 수련하는 방도로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성의 축복을 향유하고 명민한 자식을 낳는 것을 중시하여 성교육을 위한 가전(家傳) 비장의 춘화도(春花圖)가 있었다고 한다. 성교육은 민족 개량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방법임을 강조하면서 이를 ‘영웅 낳는 법’이라고 하였다.
23세 되던 해에 선도를 수양하면서 심공(心工)을 잘한다는 김종섭을 방문하여 밤새워 도리를 상론하고 각자가 심공에 깊이 들어가 망아 망형(忘我忘形)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25세 되던 해 자산(慈山) 북암(北菴)에서 수도하던 중 그곳에서 둔갑술(遁甲術)을 배우고 있던 김찬성을 만나 자신의 삼령주문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이 주문을 불철주야 송독(誦讀)한지 사나흘이 되자 격렬하게 떨면서 강령이 되어 초약(超躍)을 하기 시작하여 절간 천정을 떠받기까지 하였다. 심신은 유쾌하고 기력이 강건하게 되니 두 사람은 칠성단에 올라 상제께 예배하고 결의 형제가 되었다.
길선주는 당시의 선비에게는 패기가 상실되었고 무부(武夫)에게는 창의력이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민족의 참상은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파멸이 그 근인(近因)이라 할 수 있지만, 인간 상실도 그 근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먼저 심기를 계발하고 체력을 증진시켜 인간을 되찾고 민족정기를 회생시키는 대중 운동이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정신과 기력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인격함양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최근의 영성신학에서 영성을 영육의 전인성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영성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관계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하나님의 영은 때에 단지 인간의 영혼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의 인간학이나 신약성서 특히 바울의 인간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작용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영이 전인으로서의 인간에게 현존할 때 인간은 영적인 몸(spiritual body)과 영적인 정신(spiritual soul)을 지닌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영의 현존과 능력을 안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 살게 될 때 인간은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바르트(K. Barth)도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혼에만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인간은 영혼이요 동시에 육체 즉, 영적인 영혼(spiritual soul)이며 동시에 그와 마찮가지로 영적인 육체(spiritual body)인 경우에만 인간이 영이라고 옳게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영성을 인간의 영육의 통전성의 빛에서 해명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길선주는 선도 수련을 통해 이미 정신과 기력의 수련을 동시 병행하였으며, 한국 재래종교의 통전적 영성에 심취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길선주의 선례에 따라 이러한 통전적 영성의 전통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3. 삼령신군(三靈神君)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
길선주는 구도심이 간절하여 도와 진리에 관한 토론을 즐겨하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 하여 마포삼열 선교사가 새 교를 전한다하여 방문하여 담론을 나눈 일이 있었는데, 후에 그의 도우(道友) 김종섭에게 서양도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라고 마포삼열 선교사를 소개하였다. 마침내 김종섭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에게 전도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민족적 긍지와 자기 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길선주는 양교(洋敎)를 정도(正道)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세상을 평정케 하는 날에는 서학에 변심하는 김씨 같은 자는 마땅히 참(斬)하리라”고 김종섭의 변심회도(變心回道)에 분개하였다.
김종섭은 그에게 ?이선생전?(李先生傳)과 ?장원양우상론?(張元兩友相論)과 ?천로역정?(天路歷程)과 같은 책을 구하여 주면서 삼령주문만 외우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하였다. 길선주는 “나에게도 섬기는 삼령신군(三靈神君)이 있으니 김형의 믿든 삼위일체신(三位一體神) 하나님 역시 삼령신군(三靈神君)일지라 어찌 다른 하나님께 기도하리요”라고 반문하였다. 이에 김종섭은 그에게 “예수교의 진위를 알기 위하여 삼령신군 하나님께 기도하여 보라”고 권하였다.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한 길선주는 “삼령신군이시여 현세계를 움직이는 예수교가 참 도이오니까? 거짓 도이오니까? 밝히어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여러 날을 계속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선도를 통해 영생불사의 도리를 알고 싶어했던 선생은 ?천로역정?을 통해 큰 감동을 받게되고 자신이 믿어온 도에 대한 의심이 생겨 번민에 사로잡혔다.
다시 김종섭이 ?O아 왔을 때 삼령신군께 기도하니 번민만 생기더라는 길선주의 말을 듣고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권하였다. 이후에 일어나 사건을 김인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선생이 말하기를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리요’하였다. 전도자(金宗燮)는 아버지란 어구를 빼고 그저 상제(上帝)님이라 칭하여 상제 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침으로 선생은 다시 이번에는 상제 님께 기도하기 시작 하엿다. ‘상제님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 시옵소서. 다년간 지성껏 신봉하고 공부하던 선도는 의심이 나고 예수 도는 의롭고 참인 듯 하나 영생의 진도(眞道)인지 깨닫지 못하야 저는 심한 번민 중에 죽을 지경이오니 저를 살려 주옵소서’ 기도한지 삼일이 되었다. 만뢰구적(萬?俱寂) 가을 밤 새로 한 시쯤에 꿇어 업대여 ‘예수가 참 구주이신 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옥저(玉?)소리와 갓흔 청랑한 소래가 방에 들리더니 이에 총소리 갓흔 요란한 큰 소래가 있어 공기가 진동하는지라 선생이 크게 놀내여 잠잠하니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삼차 부르거늘 선생이 더욱 두렵고 떨니여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디어 ‘나를 사랑하시는 아바지시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방성대곡하니 그때의 선생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서 더욱 힘써 기도하엿다.
인방(隣房)에서 깊이 잠들었던 이정식(李貞植)은 선생의 통곡과 기도 소리에 놀라 깨어 전일 선생에게 배운 옥경의 구령삼정주문(九靈三精呪誦)을 외우고 있엇다....
선생은 밤을 새여 기도하는 중 희열이 충만하야지고 감사의 눈물이 샘솟듯하여 여광여취(如狂如醉)한 마음 위에는 평화가 주장(主張)하였다.... 이날이 바로 주일이므로 선생은 김전도와 함께 평양 창설 교회인 판동예배당 아침 공부예배에 참여하니 교인들이 이상히 여기는 중 예배 인도하는 김전도는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선생에게 기도하라고 말한 즉 선생은 성령의 감동함으로 기도하매 교인들이 더욱 놀라고 감사하엿다.”
이런 체험이 있은 후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O아 오는 손님을 끊고 백일기도와 성경연구에 전념하였다. 1897년 29세 때의 일이었다. 길선주는 유교적 전통과 도교적 전통에 따라 자신이 이제까지 믿고 기도하여오던 삼존천(三尊天) 또는 삼령신군(三靈神君)을 ‘상제’ 또는 ‘하나님’으로 자연스럽게 호칭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신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데에 대하여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복을 달라고 천사와 씨름했듯이, 길선주는 자기가 이제까지 믿어오던 신에게 어느 신이 참 신인지를 알려 달라고 간곡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자신 섬겨오든 선도의 신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성서의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토착화의 신비를 드러내는 특기할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마침내 ‘인격신’을 인격으로써 부닥쳤을 때 그 순간에 그의 입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자신이 죄인임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길선주의 개종은 사도 비울 이래로 세계교회사에 그 유례가 없는 특이한 것으로 세계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길선주는 선도의 심취하여 있을 동안 여러 번 강령의 체험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재래 종교의 풍부한 영성이 매개가 되어 기독교적 영성으로의 개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영성의 토착화의 특기할 사례임에 분명하다.
길선주의 영성신학의 원초적인 체험은 십수년간의 선도의 영성 수련이 토양이 되어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이 소명의 사건에서 ?O아져야 할 것이다.
4. 선도(仙道)의 영성에서 기독교의 영성으로
새벽기도뿐만 아니라 철야기도는 한국교회에서만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외국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는 새벽기도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유독 이런 특별한 기도를 강조하여 왔는 데, 그 전통은 영계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길선주는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에 9년동안 선도 수련에 전념하여 겸한 고행적인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심산 유곡을 ?O아 다니면서 21일, 49일, 100일에 걸처 불면불후(不眠不休)의 기도에 전념하였으며, 사(邪)가 틈타지 않게 심혈을 기울였으며, 잠을 쫓기 위해 엄동설한 얼음물로 목욕하고, 밀심지에 불을 붙여 손가락 끝을 지져가며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기도는 주로 참선과 유사한 묵상기도였다. 심월관의 심공에 깊이 들어가 망아 망형(忘我忘形)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때로는 기도 중에 강령에 도달하여 신통의 영험을 얻기도 하였다. 방안에서 옥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총소리 같은 폭발음에 들려 오기도 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성신이 자기 안에 늘 충만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아침 5시 또는 밤 10시로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였다. 매일 한 시간의 이상의 보통기도와 매주 사흘씩의 금식기도와 매년 1주일간의 금식 대기도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1901년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된 길선주는 마포삼열 목사와 의논하여 교회행정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주일 아침에 성경공부반을 조직하고 장년, 청년, 아동반을 편성하여 출석부를 만들고 신앙 실천사항으로서 ① 성경을 읽는가, ② 기도를 하는가,③ 전도를 하는 가, ④ 매 주일 예배에 헌금을 하는 가를 표시하게 하고 매주일 성경공부의 요절을 외우게 하였다.
길선주 장로는 신자의 신앙의 열을 보유하기 위하여 기도와 성경 공부, 전도와 예배 출석, 헌금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기도의 열심을 모범으로 보여 주었다. 신자는 각자가 시간이 허락되는 한 하루에 한 번씩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서 심령의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예배당을 밤낮 개방하였고, 교회를 순례하는 발걸음이 새벽부터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교회의 영적 변화가 크게 일어나야 할 것을 통감하고 박치록 장로와 함께 두 분이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안 교인들이 참여하여 새벽기도가 시작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선생은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한 영적 개혁 운동에 모든 교인들의 정성이 집중되고 성령의 역사로 승화됨이 있음을 확신하고 이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새벽기도회는 대중적으로 매일 계속된 것은 아니었고, 개개인이 자유롭게 기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특수한 사정이 있을 때마다 그 필요에 따라 집단적으로 새벽기도를 하였다. 이 날부터 새벽마다 종이 울렸고, 교?琯湧? 교회로 몰려와 울며불며 자기 죄를 자복하며,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1905년 두 사람이 시작한 새벽기도회의 불씨는 전국교회로 번져 나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장병일은 “이것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시초였다”고 평가하였다.
길선주는 십여년 동안 선도 정진하면서 여러 차례 21일, 49일, 100일에 걸친 불면불휴(不眠不休)의 기도에 전념하였는데, 이 기도는 묵상기도와 송독을 겸한 것이었다. 참선을 통한 묵상 기도와 동시에 평양의 장득한(張得漢) 선생으로 부터 배운 옥경(玉經)의 구령삼정주송법(九靈三精呪誦法)과 삼령주문(三靈呪文)을 암송하였다. 때로는 참선 기도 중 심공에 깊이 들어가 망아 망형(忘我忘形)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선도에 정진하는 십수년 동안 이 두 주문을 몇 십 만번을 송독하였다고 한다. 강령에 도달하여 신통의 영험을 얻게 되었다. 않아서 주송하는 자세 그대로 몸이 두 세척 높이로 도약하여 전진하기도 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길선주 목사는 기도와 더불어 성경암송과 성경연구를 병행하였는 데 그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은 수치로 전해지고 있다.
“성신이 자기 안에 늘 충만하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일임하였다. 매일 한 시간의 보통기도와 매주 사흘씩 금식 기도와 매년 1주일간의 금식 대기도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성경을 매일 한 시간씩 읽고 외우려고 힘쓰셨고, 성경 연구와 집필에 하루 평균 세 시간 그리고 하루도 빠짐 없이 두 시간의 독서를 계속하였다.
“그의 성경애독은 더욱 놀랍다. 구약전체를 30회 이상, 그 중에서 창세기와 에스더서는 540회 이상, 신약전체는 100회 이상, 묵시록은 만독, 요한서신은 500 독 이상 통독하였고”
“그가 새벽마다 기도가 끝나면 묵시록을 20분간 암송했다는 것은 유명 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다독과 암송은 그의 성경 지식의 폭을 넓혀 주었고 설교시 성경을 자유자제로 인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도록 가르쳤다. 목사가 된 이후 수많은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는 데 “그의 전도 목회의 자취를 보건대 선생의 문하에서 목사, 장로, 교사된 이가 팔백인 이상, 설교는 일만번 이상, 선생의 전도 설교를 들은 이 삼백팔십만명 이상, 선생의 손에서 세례를 받은 자 삼천인 이상”이었다고 한다.
영성사적으로 볼 때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양의 영성신학은 윤리적 영성 즉 성덕(聖德)을 지향하는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 존재론적 영성을 지향하는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으로 전개되어 왔으나, 두 전통이 모두 기도를 강조한 점이 특기할 만하다.
수덕(askeein)이란 경건의 훈련(gimnazein, 딤전 4:8)을 뜻하는 데, 베네딕트(Benedict Guzman,480- )에 의해 수덕의 규칙이 체계화되어 가톨릭 영성신학의 골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 규칙서의 중심 내용은 순명, 정결, 청빈이다. 수도자는 이러한 영성적 덕목을 수련하기 위하여 매일 세 가지 활동 즉, 기도, 독송, 노동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수사들은 전통적인 자정예배 외에도 낮 동안에 시편 119:114에 의거 하루 일곱 번의 공동기도를 드렸으며, 성서를 독송하거나 성서 또는 교부나 수도자들의 주석서 등 신앙 서적을 경건히 읽고 개인적인 묵상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노동은 수도사들의 생계 유지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베네딕트의 규칙은 이어서 등장하는 모든 수도원의 영성수련의 골간이 되었다.
신비신학은 “하나님의 비밀(mysterion)인 그리스도를 께닫음으로 그 안에 감추인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를 획득(골 2:2)”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성적인 경향이다. 6세기부터 수리아 수도승이 편집한 것으로 알려진 위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의 저서가 신비신학의 원조로 알려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저 유명한 영성의 세 길로서 정화의 길(catharsis: purification), 교화의 길(potismos: illumination), 연합의 길(teleiosis-henosis: perfection)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단계론은 후에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에 의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혼의 순례의 3단계와 그 단계에 이르는 수덕 방법으로 통합되어 외적 정화의 길(Pugative way)은 구성 기도(vocal prayer)를 통해, 내적 교화의 길(illuminative way)은 묵상기도(meditation)를 통해, 일치의 길(Unitive Way)은 관상기도(contemplation)를 통해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어쨌든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은 세 단계의 기도를 강조하였고, 수덕신학 역시 전례 기도와 성서 독송을 영성 수련의 일과로 제시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기도의 여러 단계를 영성신학적으로 구분하지 않았지만 회개와 자복의 통성 기도를 강조하였던 철저한 기도의 사람임에 분명하며, 성서의 인물들처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특별한 영적 체험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통성기도라 일컬어지는 구성기도(vocal prayer)에 국한되지 않았고 성경 암송과 독송을 통한 묵상기도도 병행되었다. 선도 수행이 매일 주문을 독송하듯이 개종 후에는 요한계시록을 매일 암송하여 만번 이상을 독송하게 되었다. 김인서는 계시록이 기록된 이후 길선주 목사만큼 이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세계교회사의 전무한 영성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이 두 가지 기도와 성경 독송이라는 영성의 덕목은 선도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몰트만은 “영성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삶과 하나님의 영과의 살아 있는 교제를 뜻한다”고 정의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기도와 성경 독송으로써 하나님과의 영 안에서의 삶과 하나님의 영광의 살아 있는 교제를 일 평생 줄기차게 이어온 것이다. 이러한 영성의 삶은 그의 개인적인 신앙으로 끝나지 않고 1907년을 전후한 부흥운동을 주도함으로서 한국교회의 신앙형성의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5. 1907년의 대부흥운동과 한국적 영성의 정초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된 영성운동으로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인데 그 주역은 길선주임에 분명하다. 1906년 장대현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시작한 길선주 장로는 여러 차례 사경회(The Bible Conference)를 인도하기도 하였으며, 1907년 장대현 교회의 사경회도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민경배에 의하면 사경회는 언더우드가 서울에서 1892년에, 그리고 평양에서는 1898년 1월에 각각 처음 열렸다고 한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글성경이 만주와 일본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번역된 바 있으며 이것이 국내에 전해져 성경만을 접한 후 기독교에 입교한 독특한 사례가 경전에 대한 한국교인들의 흠숭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경전을 숭상하여 암송하고 연구하는 오랜 유불선 재래 종교의 공통된 전통 때문인지 몰라도 사경회에 대한 한국교인들의 열정을 대단하였다. 예를 들면 1901년 평양에서 여성신자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위한 사경회가 개최되자 “평양에서뿐만 아니라 150-400리 이상 떨어진 삭주, 창성, 의주 등지에서까지 자매들이 몇 주일간 먹을 쌀을 짊어지고 참석”할 만큼 열심이었으며, 다음 해에 남자 신자를 위한 사경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자 400명 정도의 남자 신자들이 의주, 삭주, 창성 등 북부 지방에서는 물론 멀리 서울과 목포 무안에서까지 참석하는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다음 해인 1907년 1월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연례행사로 시작된 사경회는 1,500명이 모인 첫날부터 길선주의 남다른 영력(靈力)으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 날의 정경을 목격한 정익노(鄭益老)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날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한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이어서 나를 보지 못하였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이 사경회는 1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동안 모였고, 관례에 따라 성경공부에 주력하였다. 집회 기간동안 사경회와 더불어 통성기도가 계속되었다.
“단순한 설교가 끝나고 그라함 리(Graham Lee) 선교사가 사회하면서 회중에게 기도하자고 선포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기도를 시작하므로 그라함 리는 ‘여러분이 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면 다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더니 온 회중이 일제히 소리내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황은 실로 글로 적을 수없는 정도였다. 아무런 혼란도 없었고 도리어 심령과 심령이 호응하는 화음이 서리었고 기도를 올리고 싶은 충동을 저항할 수 없던 마음과 마음이 사귀는 심교(心交)였다. 기도소리는 마치 폭포소리와 같아서 기도의 대해조(大海潮)가 하나님의 보좌로 밀어올라가는듯 하였다.”
사경회 마지막 날 집회가 끝난 다음에도 교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특별 철야 기도에 돌입하였다. 영국의 세실(William Cecil)경의 기록에 의하면 “저녁 여덟 시부터 이튿날 다섯 시까지 이러한 상태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길 장로의 설교가 있은 뒤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근 6, 7백명이 기도하기 위해 남아있었다. 우리와 몇몇 선교사들은 길씨와 주씨 두 사람을 위해서 특별기도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회개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길씨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 특히 방위량(W. N. Blair)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 회개한다고 하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한 교인이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뿐만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 할 수 없는 온갖 죄를 다 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 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그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이 사경회 동안 길 장로는 세례요한처럼 통회와 자복의 회개를 외쳤고,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의 불길이 참석자들을 심령을 사로잡았다. 많은 선교사들의 의해 이 사경회는 “순수한 한국의 오순절”로 평가되었다.
성경공부와 기도는 언제든지 병행되었고 교인들의 영성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의 한국교인의 성경공부와 기도 생활에 관한 다음 보고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족한 것이다.
“한인들은 영혼을 위하여 매우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그들의 독실하고 진지한 신앙은 기독교국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지난 겨울 송도에서 부흥회가 몇 차례 열렸는데 교인들은 의례 밤 집회 후에는 산에 올라가 얼어붙은 맨땅에 엎디어 성신강림을 위하여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였다. 재령에서는 매일 새벽 5시반이 되면 몇몇 사람의 한인들이 내가 유하고 있던 선교사 집에 ?O아와 그 선교사와 같이 한 시간동안 기도하였다. 평양에서는 길 목사와 장로 한 사람이 교회당에 와서 새벽 기도를 드리는 습관을 가졌다. 다른 교인들도 이 소식을 듣고 같이 참석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길목사는 ‘누구든지 원하면 며칠 동안 새벽 4시반에 모여 기도할 수 있다’고 알렸다. 그 이튿날에는 새벽 1시반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2시에는 더 많이 모이더니 4시반에 가서는 400여명이 모였다.”
성경공부와 철야기도를 통해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한 사경회의 열기는 여성과 학생에게 전이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은 경이적인 사경회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길목사는 전국을 순회하면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중국에까지 그 불길이 번져 가게 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전후사의 맥락을 살펴보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채결된 후 사회적 정치적 불안과 분노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한국교인들 중에는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본을 축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들은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흥회를 선도한 선교사들에 의해 야기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결국 일제침략의 민족적 분노와 아픔을 종교적 카터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킨 몰역사적인 성격을 지닌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영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주목할만한 영향은 역시 성경공부와 기도의 열심히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더욱 고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O기 힘든 한국교회의 특징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때에 사경회에서는 성경공부와 철야기도와 더불어 축첩, 조혼, 음주, 흡연을 금하고 기독교인의 올바른 사회윤리관을 정립하는 각종 토론회와 교양강좌가 개설되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도 이 부흥운동이 크게 기여하였다.
6. 삼일독립운동의 실패와 종말론적 영성
1907년 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이는 영계 길선주 목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교회가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으로 치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영계 길선주 목사의 개인적인 신앙이 전적으로 비정치적인 일관된 것은 아니다. 그가 선도에 심취하여 정신을 명민케하고 기력을 강건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듯이, 사경회를 통해 통회와 자복의 회개를 호소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생의 삶을 살도록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정치 운동에 관여하였다.
1898년 영수가 되던 해에 판동과 보통문 내에 신교육을 실시한 사숙을 설립하였는데 이 두 곳이 평양에서 조선인 학교경영을 한 효시였다고 한다. 숭덕학교의 전신으로서 두 학교의 학생이 50명이었다. 교회 내에 남녀 야학을 세우기 도하였으며 선교사가 세운 숭실학교의 이사로도 활약하였다.
또한 경성의 서재필 선생에 호응하여 안창호 선생 외 17인과 더불어 평양의 독립협회를 발기하였다. “독립기원절에 대동관 광정(廣庭)에 독립협회 주최의 경축회를 열고(이광수는 이 때에 부벽루에서 회집하였다함은 오기임) 관찰사 이하 제관리(諸官吏)와 남녀민중 사오 천명이 회집하였다. 이 석상에서 선생과 도산 안창호 두 청년은 일대 정치연설을 시(試)하였다”고 적고 있다.
장자 진경(鎭亨)은 105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었으니, 그의 가족의 독립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이승훈의 교섭으로 길선주는 1919년 2월경에 3?1운동의 33인 대표로 가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 당일에서 사경회를 관계로 지방에 있어서 태화관에 불참하였고, 후에 체포되어 법정에서 “나는 인장을 이승훈에게 위임하여 독립선언서에 날인하였으므로 그 독립선언을 보지 못하였소 독립운동에는 찬동하였으나 나는 실명인(失明人)이므로 적극 활동은 없었다”고 대답하여 무죄 석방되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사회와 교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그의 명예는 땅에 떨치게 되었다. 이러한 “길선주의 법정 비겁”을 빌미로 장대현 교회의 청년들의 배척과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김인서는 길선주 목사를 변호한다. 길선주는 장연(長淵)교회 집회중 3월 1일을 당하여 독립선언의 소식을 듣자 사경회를 중지하고 김성여(金聖與)와 함께 말을 타고 즉시 상경하여 경무총감부에 자현(自現) 투옥되었으며, 이승훈과의 약속으로 이미 “민족의 제물로 이미 사(死)를 각오한 몸이매 최후로 하나님의 교회를 순회”하기 위해 인장을 맡기고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 날인하도록 위촉하고 최후전도의 길에 나섰다고 한다. “최후전도를 위하여 인장을 이승훈에게 위촉하고 선언서를 보지 못한 것도 그리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으니 법정에서는 목사의 입으로 사실 그대로 답한 것이다. 이는 사를 두려워서의 둔사(遁辭)도 아니요 영예를 위하여서의 과장도 아니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매장 당하는 조건이 되었으나 하나님 앞에는 진실한 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태화관에 불참한 네 명의 목사 중 길선주만을 무죄 석방한 것은 그의 태화관 불참과 인장 위촉을 빌미로 그를 조선인 사회에서 매장하고 기독교계를 분란시키고, 구미 선교사들에게 선전 자료를 만들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라고 하였다.
길선주 목사에 대한 재판 기록에는 “조선 독립은 하나님의 뜻인 고로 나는 독립운동을 하였소”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독립운동을 찬동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후의 행적이 그의 명성에 걸맞는 적극성은 보여주지 못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아들이 죽고, 자신도 삼일운동 이후 2년간의 옥고를 치렀지만 삼일운동의 실패로 인한 암담한 현실 속에서 길선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영원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옥중에서 요한 계시록을 만독한 것도 적지 아니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920-30년대의 정치 사회적 불안과 개인적으로 겪어야 했던 불리한 목회 상황이 겹치면서 그의 말세 신앙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길선주 목사는 철저한 종말론에 심취하여 ?말세론?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사경회에서는 주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였고 ?말세론?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주의 재림이야 말로 우리 신앙의 과녁이요 소망의 영역이라고 하였다.
“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의 신앙의 토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 있는 것이고 신자들의 변함없고 썩지 않는 무궁한 소망은 주님이 다시 오시어서 평화의 낙원을 건설하심에 있는 것이다. 께어 준비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소망 가운데 줄거움으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기 바라는 바이다.”
따라서 그가 인간과 세계의 종말 상태를 연구하는 종말론에 심취한 까닭은 신도들의 신앙 생활과 내세를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에 이바지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 신자로서 바라고 기대하는 우리의 세계, 곧 우리가 안식하고 복락을 누릴 천년왕국의 시기가 임박함을 알아 경성하여 예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재림의 징조로서 내증 29 가지와 외증 6 가지를 제시하여 주님의 재림과 세계의 종말을 강조하고 사태의 긴박성을 내세우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마 24:36)는 구절을 주석하기를 “이는 신자들에게 주님의 오실 시기를 감추어 알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징조를 보고서 급박한 주의 재림을 암시하여 준비시키는 목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주님의 오실 시일을 알 수 없으나 그 기한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계산을 통해 재림의 시기를 1974년 또는 2002년으로 예상하기도 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선도의 영성을 토양으로 하여 기독교적인 영성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암담한 정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영원한 소망에 기초한 말세론을 종말론적 영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최근의 영성신학은 참된 영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심화하는 것이지만, 내면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웃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샤르뎅은 수직적 영성(Vertical Spirituality)과 수평적 영성(Horizontal Spirituality)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길선주는 영원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종말론적으로 새롭게 심령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는 영성의 을의 종말론적인 차원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영성은 수직적인 영성과 수평적인 영성을 통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오나 협의회(1987)는 영성을 “하나님 백성들과 교제하는 삶(communion),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삶(compassion),이러한 삶을 부정하는 세력에 대항하고 투쟁하는 삶(combat)을 통합하는 삶이다.”이라고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길선주는 불의한 일제와의 투쟁보다도 불의한 일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신자 개인의 영적 투쟁을 통해 암울한 역사적 위기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지는 동시에 순결한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는 종말론적 영성의 길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영성은 수덕적 영성과 신비적 영성을 통전하는 영성의 보다 높은 차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 결론: 한국적 영성의 과제
앞에서 인용한 “유(儒)에 취(就)하야 문(文)과 인(仁)을 배우고 불(佛)에 취(就)하여 선(禪)을 배우고 선(仙)에 입(入)하여 현돈(玄牝)을 수(修)한 선생의 신학에는 아마 동방적 색소가 농후한 바가 있다.”는 김인서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길선주 목사는 한국재래 종교의 기도와 독송의 영성을 풍부히 수련한 자신의 체험을 개종후 기독교적 영성으로 토착화시키고, 한국교회 독특한 영성의 덕목으로 정초 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세계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새벽기도의 전통을 심어 주었고 그리하여 새벽기도회를 2부 또는 3부까지 보는 교회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사경회를 통해 성경을 강독하고 독송하는 전통을 물려주었는데, 이영헌의 평가처럼 “세계의 어느 곳의 크리스천보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애독하고 있다는 것은 늘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에 따라 성경통독사경회와 성경 쓰기가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이다.
길선주의 영성신학은 한국적 색체가 농후한 것이 사실이며, 재래종교와 문화의 영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주긴 하였지만, 영성의 사회적 정치적 측면이 약화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경회를 통해 전개된 심령대 부흥운동은 개인의 내면적 도덕적 회심에 목표를 두어 영적 투쟁을 통한 기독교의 신생의 삶을 촉구하였으나, 그 열정이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삶(compassion)과 이러한 삶을 부정하는 세력에 대항하고 투쟁하는 삶 (combat)”으로 승화되지 못하여 결국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가 말세론에 치중하여 시한부 종말론의 경향을 드러내 보였으나, 가난과 무지와 일제의 정치적 억압에 짓눌려 삶의 열정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상실한 민중들에게 내적 영적 투쟁을 자극하고 삶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과 불의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 적이고 종말론적인 영성이 지닌 한계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결하여야 할 영성의 과제이기도 하다.
자세한 각주: [청풍] 창간호(대전신대 종교문화연구소, 19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