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무정
서막 1
비극의 서막
①
대명(大明) 홍무(洪武) 5년 5월 21일.
하루의 일과를 마친 태양이 황하(黃河)의 나루터 위로 어스름히 기울 무렵. 아름답게 타오르는 석양(夕陽)에 취한 듯 한 소년이 나루터에 앉아 있다.
소년의 나이는 일곱 살 가량 되어 보였는데 석양을 받은 얼굴은 붉게 채색되어 있었고 두 눈은 꿈꾸는 듯 몽롱해 보였다.
아는 사람은 소년의 자세와 눈빛 만을 보고도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소년은 고기잡이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년의 집안 내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 중 비교적 세력이 약한 진산채(進山寨)에 속한 하급 녹림가의 집안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포구에서 선부(船父)로 일하며 어머니는 수채(水寨)에서 주방일을 보고 있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어부(漁夫)였다. 지금 소년은 어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석양은 핏빛으로 타오르다가 차츰 보랏빛으로 변하며 서녘으로 기울어가고, 석양에 물든 황하도 같은 색으로 점차 물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황하 저편으로 고기잡이배들이 나타났다.
"오셨어!"
소년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배를 향해 냅다 두 손을 흔들었다.
과연 멀리 보이는 깃발은 장강십팔채의 표식을 달고 있었으며 그 배들 중 한 척에는 소년이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기잡이 배는 모두 다섯 척이었다. 배는 금방 나루터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종걸음으로 내리는 어부들 가운데 한 명의 백발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소년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노인은 팔을 활짝 벌려 달려오는 소년을 마주 안았다.
"헤헤! 할아버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세요?"
"오냐, 오냐. 허허헛......!"
노인은 손자의 재롱이 몹시 귀여운 듯 연신 웃음을 흘리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소년은 노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소년은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비릿한 고기 비늘 냄새가 몹시 좋았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행복(幸福)의 냄새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소년을 업고 걸었다. 다른 어부들은 조손(組孫)의 그 같은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부 생활은 늘 단조로운 것이고 이런 사소한 행복은 어쩌면 그들의 인생의 전부인지도 몰랐다.
어느덧 석양은 떨어지고 나룻터에는 어둠이 잦아들고 있었다.
진산채(進山寨).
장강십팔채 중 서열 16위에 해당하는 수채였다.
지금 진산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단의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도열한 채 저녁 짓는 연기가 평화롭게 피어오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백색무복(白色武服)을 걸쳤으며 가슴에는 승천하는 용(龍) 형상의 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빛이 부리부리하고 양 쪽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는 인물들이었다. 문득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 준비되었나?"
나직하게 깔리는 음성에는 진기가 충만하게 담겨 있었다.
"옛!"
일제히 대답하는 자들의 두 눈에는 열기, 흥분, 살기(殺氣)와 같은 기운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럼 쳐라!"
시작(始作)이었다.
이것이 훗날 무림사가(武林史家)들이 정사대전(正邪大戰), 또는 사십일백화대전(四十日白華大戰)이라고 기록한 정도연합맹(正道聯合盟)과 녹림무림(綠林武林)과의 전쟁이었다.
죽음(死)의 광란무(狂亂舞).......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오래도록 준비해온 정도연합맹은 전력으로 보나 인원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월등히 앞섰던 것이다.
백화(白華)란 무림을 정화(淨化)하겠다는 백도인의 일방적인 선언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싸움은 불과 40일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막(幕)이 내린 후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무비한 것이었다.
충천하는 화광(化光)!
"허억...... 콜록......꼭 잡아라 강아(江兒)야......."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면서 불길 속을 달리고 있었다. 노인의 목을 꽈악 끌어안고 등 뒤에 업힌 소년은 겁에 질린 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소년은 보았다.
아버지의 수급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어머니의 치마가 뜯겨 허연 허벅지가 보인 채 쫓기다가 헛간에 쓰러지고.......
그 위로 여러 명의 백색무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번갈아 능욕을 한 뒤 죽이는 광경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으아아악!"
비명과 비명!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충천하는 불길 속으로 노인은 필사적으로 손자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었다. 노인은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오직 손자를 살려야겠다는 일념 만으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문득 노인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노인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그림자들은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노인은 두 자루의 검을 맞고 허공을 휘저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면서도 행여나 다칠세라 손자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진 노인의 등으로 다시 한 자루의 장창(長槍)이 사정없이 박혔다.
마치 노인이 안고 있던 손자까지 일부러 겨냥한 듯 백색무복의 무사는 장창을 땅에까지 박히도록 깊숙히 꽂았다.
노인은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창이 파고든 순간 손자를 안은 채 필사적으로 몸을 구부렸다.
그는 창 끝이 소년의 얼굴을 온통 피로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도 소년의 귀에 대고 필사적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강아...... 절대 움직이지 말아라...... 절대로...... 울지 말아라...... 넌 살아야 해...... 반드시...... 끄르륵!"
노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의 혀도 더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노인의 손에 더이상 힘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노인은 눈을 부릅뜬 채 미처 감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할아버지......!'
소년의 얼굴은 할아버지의 등을 뚫고 나온 창에 길게 찢긴 채 온통 피투성이었다. 흘러내린 피가 소년의 눈과 입 속으로 흘러들어와 잠시 후에는 그만 숨이 막혀 기절을 하고 말았다.
긴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어둠이 가고 거짓말처럼 광명(光明)이 대지에 밀려들었을 때 소년은 할아버지의 시신 밑에서 간신히 기어 일어서고 있었다.
"......!"
소년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도 공포스런 것이었다.
온통 시신과 불에 탄 잔해(殘骸)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살아있는 것은 단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시신 뿐이요, 폐허 만이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한 할아버지의 말이 소년을 다시는 울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년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내심 피를 토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만 울테야......'
"으허어엉......! 할아버지이......!"
소년의 간장을 끊어내듯 애처러운 울음이 폐허가 된 진산채를 울렸다. 소년의 울음은 길게 이어졌고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소년의 이름은 백리진강(白里眞强)이었다.
②
대명(大明) 홍무(洪武) 8년 10월 4일 아침.
백제성(白帝城).
이곳은 사천(四川)의 명소였다. 이곳 백제성에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집안이 있었다. 일명 금문장(金文莊)이라 불리는 곳으로 장주(莊主) 백난천(白蘭天)은 유림(儒林)의 선비로 인품이 출중하고 명리에 담백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기로 유명했다.
이 금문장이 때아닌 비보(悲報)로 온통 발칵 뒤집혀지고 있었다.
백난천의 금지옥엽이자 하나뿐인 외동딸 백가소(白茄韶)가 돌연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백가소는 아름답기로 사천일미(四川一美)이며, 학예(學藝)에 뛰어나고 심성 곱기로도 인근에 널리 알려져 명문가의 청혼이 줄을 잇는 소녀였다.
그런데 어제 오후 시녀 국향(菊香)을 대동하고 산책을 나간 뒤로 귀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발칵 뒤집혀 식솔 전원이 동원되어 수색을 나갔다.
결국 다음날 새벽 식솔들은 백가소의 몸종인 국향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국향은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녀는 전라(全裸)로 능욕을 당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잔혹하게도 그녀의 유두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심하게 유린당한 흔적이 나신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국향의 나이 17세.
백가소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나이였다. 그로 인해 금문장은 경악과 충격에서 휩싸이고 말았다.
식솔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장주인 백난천은 경황이 없는 채 안색이 백지장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이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백가소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국향이 시신으로 발견된 후 금문장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였다.
한 명의 청년이 금문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자 금문장의 식솔들은 모두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장주인 백난천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맨발로 뛰어나와 맞이하고 있었다.
백난천은 급히 그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여보게! 마침 잘 왔네. 큰일이 났네."
백난천은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청년에게 얘기했다. 얘기를 듣는 청년의 얼굴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금문장의 젊은 집사(執事)였다.
그는 삼 일 전 장주의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이 청년은 금문장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해왔으며 차분하고 정확한 일처리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신임을 사고 있었다.
그는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나이였으나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실수가 없고 완벽했던 것이다. 따라서 백난천조차 그를 태산같이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난 청년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국향의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별원에 안치해 놓았네."
"일단 시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그러세."
청년은 별원으로 가 국향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관을 보았다. 그는 서슴없이 관뚜껑을 열어 젖혔다.
"......."
관 속에는 국향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발견 당시의 모습이 하도 처참하여 그녀의 몸에는 흰 천을 덮어놓고 있었다. 청년은 천을 걷어 제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 나타났다. 아무리 죽은 시신이라 하지만 한창 무렵의 처녀였으므로 백난천은 민망함을 금치 못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고 국향의 나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향의 육체 곳곳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
그러는 동안 청년의 안색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는 시신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한 후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낸 듯했다.
먼저 흉수(凶手)는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셋, 또는 넷은 된다. 그것은 국향을 능욕한 자의 숫자였다. 또한 변태적이며 야비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녀의 육체를 가지고 희롱했다는 것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손자국, 이빨 자국, 국향의 국부에 남아 있는 상흔들.......
그러나 청년 집사의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내심 놀란 것은 바로 국향의 사인(死因) 때문이었다. 국향의 직접적인 사인은 능욕 때문이 아니라 어떤 무공(武功)으로 인한 내부적인 공상(功傷)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치밀하고 교활한 짓이었다.
그녀를 죽인 자는 무림인이되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고의로 강호상에서 가장 흔한 내력지기(內力之氣)를 이용하여 그녀의 장부를 파열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파(派), 어느 자의 소행인지 짐작할 수도 없게 만든 것이었다.
"무슨...... 단서라도 발견했나?"
백난천은 청년이 오랫동안 말이 없자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제발...... 범인을 잡아 주게. 관부(官府)에서도 다녀가긴 했네만 아무래도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네."
과연 그렇다.
관부에서는 국향의 시신을 슬쩍 살펴보고 갔을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청년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후 반나절을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백난천은 청년이 다시 나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저녁이 될 때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 무렵,
청년은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방 안에서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녹슨 철검(鐵劍)이 들려 있었다.
금문장의 식솔들은 그가 검을 갖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였기에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청년 집사는 아무도 모르게 장원을 빠져 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국향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금문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산이었다.
그곳에 당도한 청년은 면밀히 주위의 흔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밤새도록 반경을 넓혀가면서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별 무소득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
청년은 바위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가고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새벽 여명이 사위를 비출 무렵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청년의 눈은 어떤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추적(追跡).
바야흐로 추적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청년의 눈은 야수안(野獸眼)이 되어 있었고, 길바닥을 훑어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매서운 광채가 점차 강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청년 집사, 그의 이름은 장천림(長天林)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