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밤에 찾아오신 주님
사도행전 23:1-11
금년 초에 방송을 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소망을 불어 넣어주었던 한 자매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름 이지선, 생일 1978년 5월 24일. 그리고 또 하나의 생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2000년 7월 30일. 혈액형 O형, 사는 곳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샘마을 쌍용 아파트 205동 303호, 종교: 믿음의 집 교회, 학교: 서울 둔촌 국민학교, 세륜 국민학교, 서울 오륜 중학교, 창덕 여자 고등학교, 이화여자 사범대학 유아 교육과 97년 입학, 2001년 8월 졸업.
이미 국민일보에도 그 간증이 소개된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2000년 7월 30일 KBS뉴스 광장 앵커의 다음과 같은 뉴스 보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어젯밤 11시 30분쯤 서울 한강로 1가에서 서울 후암동 마흔 두살 김모씨가 만취상태에서 갤로퍼를 몰다가 마티즈 승용차 등 6대와 추돌 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 23살 이모씨가 온 몸에 2도(사실은 3도 화상)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습니다. 경찰 조사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 김씨는 혈중 알콜 농도 0.35%의 만취상태였습니다."
이 사고로 꿈이 많았던 아름다운 자매, 교회 찬양 팀에서 찬양하기를 늘 좋아하고 즐겨했고, 얼굴도 고왔던 이 자매는 계속되는 피부이식 수술로 턱이 없어졌습니다. 등도 굽어져 척추에는 압박 골절이 생겼습니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습니다. 사고 이후 처음 의식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그녀는 산소 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죽음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빠, 나 어떻게 살아, 나 죽여 줘"라고 외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다만 처절한 목소리로 그녀가 좋아했던 가스펠송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을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들인 후에 우리는 종종 믿음이 우리의 고통을 예방할 것을 기대합니다. 혹은 내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 인생의 여정에 장미꽃 같은 아름다운 길이 펼쳐질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의 그 좋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여정에는 때때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예측하지 못하는 고난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할 때에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나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환경의 장애이지 생각과 의지의 장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그 고난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산다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물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고난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누구에게나 똑같지만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고난이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어거스틴은 그의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러나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내 인생의 여정에서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고난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저주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손길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 때에라도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의지하고 새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내게 약속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오순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헬라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는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인 23장의 내용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사도 바울의 변명과, 이로 인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분쟁과 음모, 그리고 바울의 가이사랴 호송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위협하는 폭도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사람들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이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습니다. 이러한 바울은 후일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모름지기 양심은 인간이 인간답게 하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 무너지면 안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무너지면 신앙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벵겔이라는 사람은 "믿음은 고귀한 향유 같고, 착한 양심은 유리 그릇 같다"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는 이것은 그의 체험담입니다. 실제로 당시 소아시아에는 신앙에서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생활에도 결정적인 오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울은 그의 눈으로 보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국은 믿음을 저버리고 죄악된 길로 갔더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양심을 버리고 그의 믿음은 파선했다.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과 생활을 따로 놓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과 생활이 따로 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생활이 부패하면 신앙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양심을 가지고 바른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도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생활이 무너지면 신앙에도 힘이 없습니다. 결국 배가 파선하듯이 그의 인격과 신앙도 파선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흥분되어 있는 폭도들과 제사장들을 보면서 소아시아에서 보았던 신앙과 생활이 무너진 그래서 양심을 잃어버렸던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양심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속된 말로 양심에 털 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근본적으로 범사에 양심에 따라 살고 이것 위에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도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사도 바울처럼 "나는 오늘까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도 되지 말고, 타락한 양심도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를 닮은 깨끗한 양심으로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이 있지만 타락한 신앙인처럼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바울의 말을 듣고 그렇게 살지 못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주후 48년부터 59년까지 11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성격이 난폭하여 사람을 잘 치고 많은 재물을 탈취하며, 유대인으로서 친로마 정책을 취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떠한 인물인가는 본문에서도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입을 치는 행위는 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모독하는 표현입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이치를 따져 보기도 전에, 즉각적으로 입을 치라고 한 것은 그의 성격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양심을 잃어버린 아나니아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바울의 이같은 항의는 예언처럼 적중되어서 후일에 그는 셀롯당을 피하여 하수도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피살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날 바울의 변론으로 인하여 엄청난 분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툼이 있었습니다. 9절에 보니까, "크게 훤화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큰 소동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부장은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염려하여 바울을 피신시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그 날 밤에"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이라는 긴 여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도 못했습니다. 변론만 벌였습니다. 자신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하는 사람이 40여명이나 생겼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입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순교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곤고한 밤이었습니다. 피곤한 밤이었습니다. 순간 순간마다 낙망이 됩니다.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그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날 밤입니다. 곤고한 그 날 밤에 우리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밤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큰 어려움이나 곤란함 등을 표현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인생의 시간에도 찬란하게 밝아 오는 아침 같은 시간이 있는가 하면, 캄캄하게 어두움이 짙어 가는 밤과도 같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날 밤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이 곤고한 밤을 당하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때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 곁에서 항상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 가운데는 그 날 밤이 질병의 밤일 수 있습니다. 실패의 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날밤이 상실의 아픔을 안고 몸부림치는 밤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은 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잊지 마십시오. 그날 밤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이색적인 공모를 했습니다.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를 "비행기를 이용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차를 이용해서, 자동차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 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일등은 바로 이 답이었습니다.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그렇습니다, 여러분. 좋은 친구와 함께라면 물리적인 시간은 많이 걸려도 심리적인 시간은 아주 짧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낮선 사람과 인사도 없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끼는 몇 초 동안의 짧은 시간은 심리적으로는 몇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짧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어느 날 4살 짜리 남자아이가 3살 짜리 여자아이 옆에 앉아서 손을 덥석 잡았다고 합니다. 이때 3살 짜리 여자아이가 너무 놀라서 "어머!"라고 하면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4살 짜리 남자아이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왜 그래?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두 아니면서…"
자, 보십시오. 자신의 신변을 보장받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피곤에 지쳐있는 바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는 주님께서 곤고한 밤에 홀로 있는 바울을 찾아오신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날 밤에 주님께서 왜 찾아오셨습니까?
첫째로, 바울을 위로하고 힘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바깥에는 분노한 군중들의 외침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 소리에 묻혀서 바울은 한없이 고독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바울의 사역을 살펴보면 그가 두려워 떨 때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보면, 향락과 음행이 만연한 고린도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밤에 그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힘이 드십니까? 피곤하십니까? 나는 지금 곤고한 밤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러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찾아가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교제를 나누기를 기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가 약할 때에 강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곤고한 밤중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아, 힘들지? 피곤하지? 두렵지? 그러나 걱정하지마! 내가 있잖아. 내가 너와 함께 하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 힘 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셨던 이 위로의 말씀을 저와 여러분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인생 여정에서 지치고 살아갈 용기조차 없어질 때에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죽은 후에 민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1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하시던 그 말씀, 사도 바울에게 하시던 그 말씀을 동일하게 오늘 이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강하게 하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우리 주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주님은 힘들어하고 있는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을는지 몰라도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기뻐할 때도 함께 기뻐하셨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도 함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과 함께 하셨던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과도 함께 하십니다. 내가 집에 있어도 주님이 내 집에 오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함께 동행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힘이 됩니다. 능력이 됩니다. 위로가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 곳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만 잡고도 홍해를 건넜습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함께 하셨더니 말입니다. 물이 없는 광야라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고, 절망이 있는 곳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다시금 희망의 닻을 올릴 수가 있습니다. 곤고한 밤일지라도 다시금 일어나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셔서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이 말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은 언제나 용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를 일으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주님은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위로를 받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 앞에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오신 것은 그에게 사명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 11절을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지금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었습니다. 꼭 한번이라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예루살렘에서 좌절되는가 싶었는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놀라운 확신을 주십니다. "너는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한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힘 내." 바울에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명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붙잡았을 때에 지금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더 큰 로마에 가기 위해서 겪는 과정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로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어려움 속에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고 할지라도 미래는 세계를 향하여, 로마를 향하여, 저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새 시대의 사명을 붙잡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에도 어려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더 굳세게 사명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환난은 좌절이 아닙니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를 짓고 낙심하는 것은 절망의 죄요,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과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희망의 죄다"라고 말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더 큰 죄인이 될 것이고, 죄를 짓고 회개하는 사람,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풍성한 위로와 은혜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환난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빛은 더 환하게 빛이 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시작했을 때에 주님은 소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주님은 이제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지 로마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비전으로 바울의 가슴을 불붙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더 큰 비전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신 교회가 언제까지 이 정도에서 머물러 있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더 큰 교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더 위대한 교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언제나 그 정도에서 멈추어 있을 것입니까? 아니예요. 더 많이 복 받은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큰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더 큰 사명을 붙잡은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큰 사명을 붙잡은 사람은 그 중심에 뜨거운 열정이 불타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이 비전이 된 사람들은 결코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냥 교회에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체험 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종교생활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 자신도 힘들고 모두가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사명을 붙잡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위대한 헌신이 위대한 교회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격려와 주님의 비전을 품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격려와 주님이 주신 비전으로 세상을 이기고, 교회를 세우고,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복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