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양동마을은 경주의 신라 천년 고도 이미지와 다르게 조선시대 향기를 짙게 풍기는 색다른 역사문화관광자원이다. 조선시대 전통문화의 맥을 그대로 잇고 있어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을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에 이미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양동마을은 입구는 작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호리병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창 번성할 때는 350여 가구가 생활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지금도 158세대가 촘촘하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보기 드물게 큰 집성촌이다. 양동마을은 오래도록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서로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집성촌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유교적인 생활문화를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래된 역사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전통마을, 초가와 기와집이 어우러진 경주 양동마을에서 역사기행을 떠나본다.
❚양동마을의 형성
경주 양동마을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안강현에 속했던 마을이다.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500년이 넘도록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씨족집단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 마을이다. 현재 양동마을이 이루어진 것은 양민공 손소가 양동으로 장가와서 처가 마을에 살면서부터라는 것이 다수설이다. 손소에 이어 그의 사위가 된 찬성공 이번도 양동을 처가로 장가를 들어 후손들이 처가마을에서 살면서 양동마을은 손씨와 이씨의 집성촌인 씨족마을을 형성해 번성하기 시작했다. 손소의 둘째 아들 우재 손중돈과 손중돈의 생질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 태어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양동마을이 양반 씨족마을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손소가 중앙정계로 진출하고, 이언적이 죽은 후에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유림들이 옥산서원을 세워 영남유림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부터다. 양동마을의 주요 성씨인 손씨와 이씨들의 주거지는 마을을 이루는 네 개의 골짜기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맨 처음 양동에 자리한 손씨의 대종가는 안골을 차지하고, 이씨의 대종가는 그 앞의 골짜기 물봉골에 자리하고 있다. 그 다음 손씨는 서백당에서 분가한 첫 번째 집인 관가정을 마을 입구 분통골에 지었고, 이씨의 첫 번째 분가집 향단은 그 바로 동쪽 옆 줄기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관가정과 향단 고택은 초가들이 형성된 낮은 곳을 지나면 언덕위에 고택으로 남아있다. 양동마을은 조선후기에는 양반보다 노비들의 호수가 많았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갔다. 지금도 손씨와 이씨들이 대부분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이씨 집안이 80여 가구고 손씨 집안이 20여 가구가 남아있다.
❚양동마을 사람들
양동마을의 입향조 손소의 내외 자손인 손중돈과 이언적은 연산군과 중종 때에 중앙 정계로 진출 활약했다. 이후에도 나라와 경주지역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며 활약했던 두드러진 인물들이 배출됐다. 손소(1433~1484)는 145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직되었다.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처가인 양동마을 서백당으로 옮겨왔다. 1467년 5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훈되고 내섬시정으로 특진됐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했으나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었고 그 곳 주민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는 등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양민이다.
손중돈(1463~1529)은 손소의 둘째아들로 성종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봉교를 거쳐 여러 중요한 관직을 역임했다. 중종반정 직후에 상주목사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중종4년에는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공조판서와 이조판서, 세자시강원빈객을 지낸 뒤 도승지를 세 번, 대사헌을 네 번 지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절이며 양동마을에서 목 백일홍과 향나무가 어우러진 관가정을 지어 살았다. 이번(1463~1500)은 양동마을 이씨 입향조다. 손소의 사위로 양동마을에 정착한 이언적의 부친이다. 경주향교의 교생으로 있을 때 성종이 그의 글을 인정해 궁궐로 불러 직접 글을 지어 올리기도 했다. 연산군 시기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다 죽었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중종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인동현감과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중종25년 김안로 일파가 상소를 올려 관직에서 쫓겨나게 되자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유배생활 6년 동안 저술에 힘써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중용구경연의, 봉선잡의 등을 펴냈다. 중종32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 첨정과 시강관을 겸하였다.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1538년 청백리로 선정되고 의정부 검상,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병조참지로 있다가 전주부윤으로 근무하면서 조정에 일강십목소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했다.
손종로는 손소의 5세손이며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월성군으로 책봉된 우재 손중돈의 현손이다. 손종로는 특별하게 신체가 장대해 5대조인 손소가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용기와 힘이 뛰어났다. 21세 되던 해 무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그는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자 삼강이 무너졌는데 벼슬을 하겠느냐며 고향 양동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해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에 보답할 때가 지금”이라며 집안의 종과 함께 출정했다. 손종로는 진영 앞에 서서 활을 쏘아 많은 적병을 죽였다. 그는 1637년 쌍령전투에서 청나라군대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양동마을 입구에 손종로의 ‘손종로정충비각’과 전쟁에서 함께 죽은 하인 ‘억부’의 정려문이 함께 있는 ‘정충각’이 있다.
강석근 교수는 “양동마을이 가진 정체성을 확보하고 이를 문화적으로 개발하는 데는 손종로와 그의 정려비각은 아주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며 깊은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양동마을에는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 이전인의 아들 이준, 손중돈의 손자 손엽, 이언적의 양자 이응인의 아들 이의윤과 의징, 의활, 의잠, 의온 등 5형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 양동마을은 경주지역에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영남학파의 근간을 이루었다.
❚양동마을의 보물
국보 제283호 통감속편은 서백당에 전해 내려온다. 중국 고대에서 송나라까지의 역사를 원나라 진경이 편찬한 역사서다. 복제본이 양동마을 유물전시관에 있다. 보물 제1216호 손소 초상은 선생이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에 책봉될 때의 모습을 10년 후인 성종 7년에 비단 위에 채색해 그린 초상화다. 오랫동안 방치돼 떨어져나간 부분도 있지만 색채나 윤곽, 글은 비교적 뚜렷하다.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며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경주시의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15점 중 13점이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오래된 한옥으로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집 서백당이 있다. 낙선당, 사호당고택, 상춘헌고택, 근암고택, 두곡고택, 수졸당, 이향정, 수운정, 심수정, 안락정, 강학당, 양동마을이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서백당은 양동마을 손씨의 입향조 손소의 장인 류복하가 살았던 집이다. 우리나라에서 충남 아산의 맹씨 행단 다음으로 오래된 집이다. 양동마을은 손중돈에 의해 크게 일어났는데 이집에서 태어났다. 회재 이언적도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서백당의 산실청은 삼현지지라 해서 세 분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는 속설이 전한다. 마을사람들은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났고 세 번째 현인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손씨의 대종가가 관가정에서 1924년 서백당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당시 서백당에 사당을 지어 선조의 위패를 옮겨 모시고 있다. 관가정의 사당에는 양민공의 영정을 남겨 재실처럼 사용되고 있다.
무첨당은 양동마을의 아랫마을 물봉골에 이씨의 대종가로 자리하고 있다. 살림채와 별당,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고택으로 보물 제411호로 지정됐다. 무첨당은 여강 이씨의 양동마을 입향조 이번이 지었다는 설과 회재 이언적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이집은 건축 형식에서 모범이 될 만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규모에서도 다른 집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커 대종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서백당이 1460년경, 무첨당은 15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무첨당에는 ‘좌해금서’(左海琴書), ‘영남의 풍류와 학문이 여기 다 모였다’는 뜻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후기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이곳에 들러 대쪽으로 쓴 글씨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정집에서 법률로 금지했던 초석을 사용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관가정은 손중돈이 서백당 본가에서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양동마을 입구가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남향으로 지어졌다. 보물 44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여강 이씨의 향단과 함께 양동마을의 입구 경관을 좌우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것을 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향단은 보물 412호로 관가정과 함께 앞면의 가로 길이가 9칸으로 위풍당당함을 과시한다. 관가정이 월성 손씨의 상징물이라면 향단은 여강 이씨의 대표적 건물이다. 향단 건축년도에 대해서는 1543년과 1555년에 지었다는 설이 많다. 이언적이 관직생활을 하면서 양동을 떠나 있는 동안 동생 이언괄이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며 거주했다고 전한다. 향단은 살림집이 면서 오래된 건축기법이 많이 남아 있고, 전체에 원기둥을 사용했다. 건축가들이 애호하는 건축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수운정은 양동마을 깊은 곳에 위치해 찾기가 쉽지 않다. 손중돈의 증손 손엽이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유학자들과 성리학에 몰두하며 거처하던 집이다. 중요민속자료 80호로 임진왜란 때 왜구를 피해 집경전에 모셔져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참봉 정사성과 함께 수운정으로 옮겼다. 청허재 손엽은 ‘물과 같이 맑고 구름처럼 허무하다’는 뜻의 수청운허(水淸雲虛)에서 정자 이름을 ‘수운정’이라 지었다. 회재 이언적이 성리학을 학문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저술활동을 펼치고, 후학들이 세운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양동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부분은 서원 편에서 다시 언급한다. 양동마을에는 국보 1점을 포함해 국가지정 문화재와 경북도지정, 경주시 지정문화재 30여점이 있다.
❚양동마을의 풍경
양동마을의 풍경은 조선시대부터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자연풍경 12경과 생활풍경 12경, 계절적으로 드러나는 특별한 12경을 합쳐 36경으로 분류해 전하고 있다. 성주봉 숲길을 따라 오르면서 내려다보는 시원한 마을 풍경, 관가정의 저녁노을, 무첨당 마루에서 만나는 자연의 소리, 서백당 향나무와 사랑마당, 마을안길에서 바라보는 심수정과 회화나무, 양동뜰에서 일하는 주민들 삶의 모습, 매화가 핀 무첨당의 3월, 향단 안마당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초가지붕 이엉 가는 모습, 대보름 달집 태우는 풍경 등이다. 양동마을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전통민속놀이들이 있다. 매년 섣달 그믐날(음력 12월30일)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묵은세배’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양동마을의 줄다리기는 특별하다. 정월 보름에 아래, 윗마을로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고, 이긴 편의 줄을 조금씩 나눈다. 윷놀이와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행사도 매년 큰 행사로 진행된다. 민속전통방식의 결혼식이 양동마을에서 체험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마을의 유물전시관에는 풍속을 축소한 여러 모형과 보물들이 전시돼 있다.
수운정은 양동마을 깊은 곳에 위치해 찾기가 쉽지 않다. 손중돈의 증손 손엽이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유학자들과 성리학에 몰두하며 거처하던 집이다. 중요민속자료 80호로 임진왜란 때 왜구를 피해 집경전에 모셔져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참봉 정사성과 함께 수운정으로 옮겼다. 청허재 손엽은 ‘물과 같이 맑고 구름처럼 허무하다’는 뜻의 수청운허(水淸雲虛)에서 정자 이름을 ‘수운정’이라 지었다. 회재 이언적이 성리학을 학문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저술활동을 펼치고, 후학들이 세운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양동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부분은 서원 편에서 다시 언급한다. 양동마을에는 국보 1점을 포함해 국가지정 문화재와 경북도지정, 경주시 지정문화재 30여점이 있다.
❚양동마을의 풍경
양동마을의 풍경은 조선시대부터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자연풍경 12경과 생활풍경 12경, 계절적으로 드러나는 특별한 12경을 합쳐 36경으로 분류해 전하고 있다. 성주봉 숲길을 따라 오르면서 내려다보는 시원한 마을 풍경, 관가정의 저녁노을, 무첨당 마루에서 만나는 자연의 소리, 서백당 향나무와 사랑마당, 마을안길에서 바라보는 심수정과 회화나무, 양동뜰에서 일하는 주민들 삶의 모습, 매화가 핀 무첨당의 3월, 향단 안마당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초가지붕 이엉 가는 모습, 대보름 달집 태우는 풍경 등이다.
양동마을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전통민속놀이들이 있다. 매년 섣달 그믐날(음력 12월30일)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묵은세배’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양동마을의 줄다리기는 특별하다. 정월 보름에 아래, 윗마을로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고, 이긴 편의 줄을 조금씩 나눈다. 윷놀이와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행사도 매년 큰 행사로 진행된다. 민속전통방식의 결혼식이 양동마을에서 체험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마을의 유물전시관에는 풍속을 축소한 여러 모형과 보물들이 전시돼 있다.
첫댓글 노랗게 초가지붕을 새로 이은 후라면
더더욱 옛날 마을의 정취가 살아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