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놀이 외 2편
전 호 준
몸도 마음도 비 오는 날 세탁기에 내팽개친 양말짝이 된 지 오래다.
언제까지 이 지겨운 괴질의 올가미를 벗고 하늘 우러러 숨 한번 오롯이 쉬어볼까?
괜한 짜증에 무슨 신통한 구석이 없나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저녁 한 끼 하자는 친구의 반가운 전화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친구가 좋아하는 칠성시장 보신탕집이다. 코로나 시국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붐빈다. 좋은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도 보신탕이 몸에 좋다는 믿음 때문일까? 어렵던 시절의 향수일까? 비교적 늙수그레한 손님들이다. 동물 애호가나 젊은이들이 보면 꼰대들 식당이라 비아냥거릴 것 같다.
보신탕에 소주 한잔을 걸치고 나니 누가 뭐래도 기분 만 땅이다. 생존을 위한 먹거리에도 색안경이 필요할까? 먹거리는 나라마다 종족 간 세대 간 종교적 신념 등에 따라 다르다. 남녀노소 개개인의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기호와 혐오가 달라진다. 보신탕을 혐오식품이라 치부하는 그들의 정서를 내가 모르듯 그들 또한 나 같은 꼰대의 정서를 알지 못한다. 단풍은 봄꽃을 알지만, 봄꽃이 어찌 단풍을 알리요. 멀 잔은 세월 계절의 변화를 느낄 때쯤이면 이해가 될까?
지하철을 탔다. 다수 사람이 휴대폰에 얼굴을 묻고 있다. 갑자기 전염된 듯 나도 휴대폰을 꺼냈다. 얼마 전까지 작동되던 휴대폰이 갑자기 먹통이다. 벌써 건전지가 다되었나? 어저께 충전한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온 즉시 충전기를 연결했다. 한동안 기다려 얼추 충전되었다고 생각하고 휴대폰을 켰다. 작동이 되질 않는다. 고장 날 연유도 없었는데 뭘 잘못 건드렸나? 아무리 주물러도 도통 반응이 없다. 한밤중 갑자기 정전된 것 같이 답답하다.
밤늦게 들어온 아들 녀석에 보였다. “아빠! 휴대폰 좀 바꾸세요. 고물이 다 되어 그래요.” 아들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고놈의 자석! 제 놈이 사줄 일도 없으면서’ 언짢은 속내보다, 걱정이 앞선다. ‘살릴 수 없으면 어떡하지! 저장된 정보가 모두 박살 날 수도 있다는데, 꼰대 놀이 옹고집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는 마음이 초조하다.
언제부터 스마트 폰을 쓰는 아내와 아들 녀석의 성화에도 구식 폴더 폰 사용을 고집했다. 특별히 쓸 일도 없다. 전화나 걸고 받고 문자의 송수신 사진 촬영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떨어진 고무신을 때워 신고 구멍 난 양말도 더덕더덕 볼 받아 신던 지난 세월에 머무른 나의 성격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요즘 신세대들은 새로운 기기가 나오기 바쁘게 줄 서서 바꾼다던데,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듯 그들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쩜 폰 맹이나 다름없는 나로선 급변하는 세태에 빠르게 진화하는 새로운 문명에 적응은커녕 되레 저항 아닌 저항심으로 두려움을 대신했다. 내심 바꾸어야겠다. 하면서도 꼰대의 자존심으로 차일피일 고집을 부렸다. 이젠 스마트폰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벌써 두 번째 스마트폰을 바꾸려고 가는 아내 손에 이끌려 지난 2016년 초 삼성 갤럭시 s16 최신 스마트 폰으로 겁 없이 바꾸었다. 생면부지 한 놈을 어떻게 사귈까 걱정도 되었지만, ‘모르면 배우면 되겠지, 가격도 만만찮아 망설이다 아내의 권유에 떠밀려 용단을 내린 지 벌써 5년이 훌쩍 넘었다. 탈이 안 난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라 치부해 보지만 첫정의 미련과 아쉬움에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서둘러 거래했던 SKT 직영점으로 갔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살릴 방법이 없다는 설명이다. 휴대폰을 교체해도 지금까지 저장된 정보가 모두 죽어 정보를 이전할 방법이 없다. 한다. 이를 어쩌나 정말 난감하다. 혹시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어 황금네거리 삼성 AS 센터로 갔다.
이것저것 살펴보고 내장된 건전지까지 새것으로 갈아 끼워보며 갖은 처방을 다 해 보았다. 안된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무리 전문 병원인들 죽은 놈을 어찌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수명이 다한 줄도 모르고 너무 오래 부려 먹은 것이 탈인 것 같다. 그 많은 갤러리 사진. 연락처, 메모장 기록 등, 5년여 쌓아둔 정보가 한순간 살아진다니, 머릿속이 완전 백지장白紙張이다.
언제부턴가 건전지 소모가 빨라지고 터치를 하면 조금 느리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사용하는 데 별 불편은 없었다. 말썽을 부릴 때마다 “휴대폰 좀 바꾸세요! 그러다 큰일 나요.” 하던 아내의 성화를 잔소리로 들었다. 결국 오늘의 사달이 났다. “이러니 나이 든 영감들을 꼰대라 하지.” 아내의 핀잔에 할 말이 없다. 꼰대 놀이가 따로 있나 남의 말엔 귀를 막고 내 생각만 옳다고 뇌에 말뚝을 밖아 버리는 아집이 꼰대 놀이다. 아내의 핀잔 덕에 삼성 갤럭시 s21 최신 스마트폰을 구매했다. 빛 좋은 개살구에 팥소 빠진 찐빵 같은 최신 핸드폰이다. 믿었던 친구에 맡겨둔 소중한 뭔가를 한순간 잃어버린 낭패감, 텅 빈 머릿속이 우윳빛이다. 전화번호는 그대로 유지되어 오는 전화라도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억지 춘향으로 최신 휴대폰을 손에 잡고 보니, 어린애같이 마음이 들뜬다. 누군가에 자랑도 하고 싶은 충동이다. 나이가 들면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더니, 이 또한 꼰대 놀이의 또 다른 이면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난다.
세월의 흔적
전 호 준
밤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까지 추적추적 이어진다. 겨울 채비를 하라는 자연의 섭리일까? 한결 선선해진 날씨에 시원하기보다. 되레 어설프고 서글프다. 인심人心은 조석지변朝夕之變이라더니, 노심老心은 수시지변隨時之變일까? 엊그제까지 폭염에 숨 막히던 마스크마저 한결 편해졌는데도 하는 말이다.
급히 송금할 일이 있어 집을 나셨다. 뭔가 허전하다. 한길에 나와서야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걸 알고 되돌아온다. 어떨 땐 핸드폰을 두고 나오다 돌아서는 일도 더러 있다. 건망증? 혹여 인지기능 이상 괜스레 맘이 수선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대다수 모바일 뱅킹을 한다는데 나는 언제나 발품으로 은행 ATM기를 이용하거나 창구에 기다려 볼일을 본다. 익숙하지 못한 디지털 놀이의 두려움보다 보이지 않은 가상공간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안한 심리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 시간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ATM기 앞에 줄을 서 있다.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하다.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휴대폰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다. 방금 ATM기에서 볼일을 보고 나니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없어졌다고 한다. 은행 창구 안내원까지 뛰어나와 휴대폰을 보았거나 주운 사람이 없느냐며 주변을 살피며 허둥댄다.
동병상련, 나이 든 사람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중 할아버지 왼손에 들려있는 반쯤 접은 우산 자락에 가려진 물건이 언 듯 보인다. 분명 휴대폰이다. 보물찾기 놀이에 숨겨둔 티켓을 발견한 듯 나도 모르게 흥분된 어조로 “거기 휴대폰 들고 계시네요!” 했다. 피땀 어린 살 같은 돈, 떨리는 손으로 송금 자판을 떠듬떠듬 누르느라 마음이 흐트러진 것일까? 왼손바닥에 걸고 있는 우산 걸이와 손가락에 낀 휴대폰 걸이가 겹쳐져 우산 자락에 가려진 휴대폰을 느끼시지 못한 모양이다. 황당해하며 멋쩍은 웃음으로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신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감사합니다.” 되레 위로의 예를 표했지만, ‘그것참! 별 고마울 일도 다 있다.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걸 알려 준 것뿐인데, 고맙다니 싱겁다. 주위 사람들을 연신 살피며 묵례黙禮로 미안함을 표하는 그분을 보며 젊은이의 이런 모습은 해프닝이 될 수 있지만, 나이 든 사람은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일까? 남의 일 같지 않은 지난 어느 때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매달 나오는 신용카드사용 명세서를 확인하다 아연실색이다. 지하철 교통비 0건에 00원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세간에 풍자되는 지공 거사가 된 지 10년이 가까워져 오는데 새삼스레 지하철 교통비 청구서라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짢은 기분으로 카드사에 전화하려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친다. 휴대폰 케이스에 꽂혀있는 교통카드를 꺼내 확인해봤다. 혹시나 하였는데 역시 나다. 평소 교통 카드는 편의상 휴대폰 케이스에 끼워서 사용했다. 지난달 초 갑자기 먹통이 된 휴대폰을 바꾸면서 지갑에 임시보관하고 있던 지공 거사 교통 카드와 일반 카드를 바꾸어 끼운 것이다. 아무리 같은 회사의 엇비슷한 카드지만, 콩과 보리도 구분 못 하는 숙맥 늙은이가 된 것 같아 허망했다.
도시철도공사가 매년 적자운영에 시달린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노인들을 배려해 주는 사회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작은 기여를 했다는 생각으로 다행이라 자위해 보지만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청구된 몇 푼의 교통비보다 요즘 부쩍 잦아지는 알 수 없는 어정쩡한 나의 모습이 마음에 켕긴다.
이태 전 샬 롬 기억학교 봉사활동으로 인지기능 장애 노인들과 글쓰기 공부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그분들의 애석하던 모습이 오늘의 내 모습에 겹쳐진다. 이 모두가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라면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으랴.
세월은 인간의 삶을 평준화시킨다고 한다. 60대는 외모의 평준화, 70대는 성性과 정신의 평준화, 80대는 부富와 수명의 평준화로 이어진다고 하니 세월을 거스를 장사壯士는 없다. 훌훌 털고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처럼 세월 따라 그르려니 하고 살 수밖에.
언제 저래 봤노 싶다
전 호 준
찬 이슬이 맺힌다는 한로寒露일, 한결 멀어진 청명한 하늘에 흰 구름이 한가롭다. 제법 서늘한 바람결에 가을이 성큼 얼굴에 와 닿는다. 얼마 전까지 훌훌 벗고 풍덩 뛰어들고만 싶던 수성 못의 시원스러운 물결이 오늘따라 오싹 한기로 다가온다.
수성못 둘레길 양쪽 가장자리로 엊그제까지 성큼한 몸매에 가는 목을 내밀고 하늘하늘 고갯짓하던 코스모스 꽃길이 사라지고 황토가 드러났다.
꽃 속을 넘나들며 희희낙락 삶을 희롱하던 벌 나비는 다 어디로 갔을까? 뭔가를 잃어버린 상실감, 공허한 마음이 어느 낯 설은 신작로에 들어선 듯 아득하다.
코스모스가 물러간 자리에 국화 분이 줄지어 앉았다. 이제 막 맺힌 꽃망울이 올망졸망 노란 비눗방울이 뽀글거리듯 보풀어 오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세대교체일까? 먼저 영화를 누린 벚나무 가지는 벌써 겨울 준비를 하는 듯 검붉은 잎 파리를 떨구고 있다. 이른 봄 해맑은 창공에 두둥실 흰 구름 같이 초로의 마음을 부풀게 하던 그 화사한 자태는 환상이었나, 지난여름 폭풍우에도 끄떡없이 싱싱함을 자랑하던 푸른 잎들이 누런 떡잎이 되어 한줄기 산들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진다. 앙상해져 가는 가지에 남은 잎이 춥다. 이 모두 자연의 섭리라면 안간힘을 써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름다운 꽃도 낙화를 피할 수 없고 곱던 단풍도 낙엽으로 이름을 바꾼다. 가을인가 하였더니, 겨울이다. 나무도 물도 바람도 세월 따라 변화한다. 인생인들 어찌 다를 바 있으랴. 세월은 이길 수 없는 것 그 져 하루하루 견디며 사는 것이 우리의 참삶이 아닐까? 며칠 전 이곳을 지나다 언뜻 들었던 어느 할머니의 한숨 같은 말 한마디가 가슴속 여운으로 남아있다. “언제 저래 봤노 싶다.”
맨발로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 때문일까? 수성 못 둘레 길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맨발의 청춘들을 더러 본다. 건강을 위해 힘쓰는 분들을 보며 그 옛날 어린 시절 맨발이 예사였던 고무신 세대인 나로선 그분들의 모습이 오히려 아이러니하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위해 발 씻는 부스까지 만들어져 있고 맨발 걷기 동호인들을 모집한다는 현수막도 내 걸려있다. 정말 재미있고 좋은 세상이다.
코스모스 꽃길 사이 가로놓인 의자에 80대로 보이는 할머니 세 분이 지팡이를 내려놓고 무거운 다리를 의자에 걸치고 쉬고 있다. 건강을 위해 걷기 운동에 나섰다가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계시는 듯하다.
맞은편에서 30대로 보이는 젊은 새댁들 서넛이 수다를 떨며 맨발로 걸어온다. 그중 한 명이 쪼르르 달려 나와 의자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뭐라 뭐라며 반가이 인사를 한다. 알 수는 없지만, 무척 반가워하는 모습이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짐작된다. 두 손을 맞잡고 환한 미소로 조잘조잘 연신 허리를 굽히더니 “건강하세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폴짝폴짝 동료들의 뒤를 쫓아간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시던 할머니, “언제 저래 봤노 싶다!” 무심히 내뱉는 한마디에 코스모스 꽃잎이 부르르 떨어져 땅 위로 흩어진다.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상실감일까? 가버린 청춘에 대한 아쉬움일까? 지난날 추억의 그리움일까?
괴테는 노인의 삶을 상실의 삶이라 했다 사람은 늙어가며 건강과 돈 일과 친구 심지어 꿈까지 상실하며 살아간다.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탄생의 환희도 죽음의 슬픔도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하나 상실해 가며 노년의 길을 걷는다. 어딘가 아파지고 눈과 귀는 흐려진다. 걸음걸이와 기억력도 문제가 생긴다. 애틋한 인연들도 하나둘 곁에서 떠나보내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렇게 하나씩 잃어가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리에 눕게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만 하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천리天理를 누군들 거스를 수 있으랴.
무릎에 갑자기 전류가 온다. 쉬어가라는 신호다. 몇 년 전 무릎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무릎관절 윤활유가 고갈되어 간다는 진단이 났다.
즐겨 찾던 마을 앞 법이산 산행도 접은 지 오래다. 될 수 있으면 계단을 피하고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칠십여 년을 사용했으니 미련은 없다. 그래도 마음은 아직 봄날인데 몸은 이미 가을 녘이니, 가까이 있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저 멀리 맑은 물 위로 오리 배 몇 척이 한가로이 떠 있다. 스킨십에 정신없는 청춘남녀의 모습이 낡은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좋은 시절이다.
쿵쿵 땅 울림에 돌아보니, 한 무리 청소년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힘찬 발길로 뛰어간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육상부로 추정된다. 그들의 힘차고 발랄한 모습에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할머니의 응어리진 한마디처럼 정말이지 나도 ‘언제 저래 봤노 싶다’ 는 말이 문득 가슴속에 메아리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