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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계속 평화로울 수는 없다. 국외에는 적이 없다 해도 국내에 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이 접근하지 못하는 건강한 육체라도, 그 육체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내장 질환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니발(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입에서 예언과도 비슷한 경구의 말이 나온 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147년, 제3차 포에니전쟁도 어느덧 3년째에 접어든 카르타고 땅에 로마에서 갓 도착한 젊은이의 모습이 있었다.
증원군에 배속되어 바다를 건너온 병사는 아니다. 불과 몇 달 전에 성년식을 치른 이 젊은이는 이제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싶을 때는 투니카(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 위에 토가(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 원래는 남녀 계급에 관계없이 널리 이용되었으나, 공화정 시대에는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만 착용했다)를 걸칠 수 있는 나이인 16세가 되었지만, 로마의 병역은 17세부터 시작된다. 젊은이는 카르타고 시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진영에 총사령관의 초대를 받고 와 있었다. 총사령관의 막사 안에 잠자리까지 제공받은 특별한 손님이었다.
그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라쿠스의 누나의 남편이고, 그라쿠스의 외가는 스키피오 가문이기 때문에, 총사령관은 그라쿠스의 매형인 동시에 외사촌형도 되는 사이였다. 친척가운데 성년식을 치른 젊은이가 있으면 그를 전쟁터로 초대하여 막사 안에서 함께 기거함으로써 지휘관 생활을 실습시키는 관습은, 로마 사회의 대들보인 상류층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16세의 젊은이가 보기에,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은 대국의 수도를 공략한다고 해서 밤낮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긴박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카르타고 시내에는 아직도 5만여 명의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이 농성자들은 기원전 149년부터 시작된 공방전을 벌써 2년이 넘도록 견뎌왔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운명은 누가 보아도 확연할 만큼 소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충 카르타고를 둘러싼 포위망은 완벽했다. 육지와 연결된 서쪽은 높이 14m, 폭이 10m나 되는 삼중 성벽이 지키고 있었지만, 이제는 곳곳이 파괴된 상태였다. 항구 쪽에서 쳐들어갈 준비도 끝나 있었다. 시내에 비축되어 있던 식량도 농성 3년째에는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는 이듬해 봄을 기해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가해질 대공세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총공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작전 지역 안에서의 모든 결정은 총사령관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카르타고의 운명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양할아버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친아버지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나 다른 민족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대한 38세의 총사령관은 카르타고의 운명을 혼자서 결정하는 데 망설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양고모부인 스키피오 나시카는 로마 원로원에서 카르타고의 멸망을 주장하는 강경파 카토에 맞서 카르타고의 존속을 주장하는 온건파의 영수였다.
기원전 147년부터 기원전 146년에 걸친 겨울철 휴전기를 이용하여 젊은 총사령관은 로마 원로원에 사람을 보내어 마지막 훈령을 요청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강화를 시도할 것인가를 물은 것이다. 로마에서 회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식탁에는 몇 년 뒤부터 포에니전쟁사를 저술하기 시작할 그리스인 폴리비오스도 동석해 있었다. 그리고 휘하 장군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식탁에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총사령관의 특별 손님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젊은이도 말석에 앉아 있었다.
즉 그리스인 역사가와 로마인 장수들이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는 16세 젊은이의 귀에도 들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기원전 146년으로 해가 바뀐 봄에 로마에서 훈령이 도착했다. 그 내용은 카르타고 말살이었다. 마침내 로마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시가전으로 대항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엿새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시가지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이레째 되는 날 카르타고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수도가 함락된 뒤, 투항 권고를 거부하고 저항한 시민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붙잡혀 노예로 팔렸는데, 그 수가 어린이까지 포함하여 5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랫동안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카르타고의 멸망에는 승자인 로마인 조차도 그 감회가 여느 때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눈 아래 펼쳐진 카르타고 시가지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건국한 지 700년, 그 오랜 세월 동안 번영을 누린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것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700년의 긴 세월 동안, 카르타고는 넓은 땅과 수많은 섬들과 바다를 지배해 왔다. 그에 따라 카르타고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어떤 강대한 제국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방대한 양의 무기와 군선과 코끼리와 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과거의 어떤 제국보다도 용기와 기개가 뛰어났다. 로마의 강요에 굴복하여 모든 무기와 모든 군선을 빼앗겼으면서도 3년 동안이나 로마군의 공격을 견뎌냈다. 그런데 지금 그 도시가 함락되고 파괴되어 지상에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적국의 이런 운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렀다.
그는 비록 승자였지만, 인간만이 아니라 도시와 국가, 그리고 제국도 언젠가는 멸망할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트로이, 아시리아, 페르시아, 그리고 20년 전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한번 성한 자는 반드시 쇠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역사는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모르나, 승리한 로마 장군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군 총사령관 헥토르의 말을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하리라."
뒤에 서 있던 폴리비오스가 왜 하필이면 지금 그 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폴리비오스를 돌아보며, 그리스인이지만 20년 지기이기도 한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대답했다.
"폴리비오스, 지금 우리는 지난날 영화를 자랑했던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 거라는 비애감이라네."
함락된 카르타고는 로마 원로원의 훈령에 따라 성벽도, 신전도, 민가도, 시장 건물도, 선착장도, 창고도 모조리 파괴되었다. 로마군은 돌덩어리와 흙 밖에 남지 않은 지표면을 가래로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렸다. 신들의 저주를 받은 땅에는 소금을 뿌리는 것이 로마인의 방식이었다.
불모의 벌판으로 변해버린 카르타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대한 순간에 대한 감회도 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어떤 감회를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전해주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마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제2차 포에니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였다. 그런 만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3차 포에니전쟁의 종말과 카르타고 멸망에 대해서 남다른 인상을 받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리고 그는 16세였다. 16세라면, 56세의 폴리비오스나 38세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느꼈던 성자필쇠의 비애감과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예를 들면, 로마만은 절대로 트로이나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특히 카르타고의 전철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카르타고는 700년의 역사를 쌓은 뒤에 멸망했지만, 이 무렵에는 로마도 건국된 지 어언 600년이 지나고 있었다.
제1장 그라쿠스 형제의 시대-기원전 133년에서 기원전 120년
서양에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다. 아쉬울 것 없는 혜택 받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역사상 '그라쿠스형제'로 유명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야말로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표현이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외조부가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조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도 노예 군단을 이끌고 로마 방위의 최전선에서 한니발과 맞서 싸우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용장이다. 그라쿠스 가문에서는 장자한테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을 물려주기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 이름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인데, 이 사람도 공화정 로마에서 기원전 2세기 전반에 활약한 위정자들 가운데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태어난 해는 분명치 않지만, 성장한 뒤의 경력에서 역산하면 기원전 220년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90년,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와 싸우기 위해 로마 군단을 이끌고 오리엔트에 상륙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명령으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한테 가서 로마군에 대한후방 지원을 요청한 것이 그라쿠스가 맡은 최초의 공적 임무였다.
기원전 187년, 호민관으로 선출된 그는 이른바 '스키피오 재판'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변호한다. 이 재판은 사용처가 불분명한 500탈렌트의 행방을 추궁하기 위해 열렸지만, 카토를 선두로 한 정적들의 진짜 목적은 스키피오의 실각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 혼자 나서서 피고를 편드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33세의 그라쿠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조국을 위해 그만큼 공헌을 했으며, 공화국 로마에서는 최고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 만백성의 감사와 존경을 받은 인물이, 이제 피고석에 끌려나와 앉아 자신에 대한 탄핵과 비난을 들어야 할 판입니다. 이 같은 수모는 스키피오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기보다. 오히려 우리 로마 시민들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그라쿠스의 간곡하고도 단호한 변호 덕분에 스키피오를 강제 연행하자는 제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정적들의 진짜 목적이었던 '자마 전투의 승자'의 실각은 실현되었다. 스키피오는 정적들의 책략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로마를 떠나 공직생활에서 은퇴해 버렸던 것이다.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는 이때 보여준 그라쿠스의 용기있는 행동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라쿠스에게 딸 코르넬리아를 시집보내어 은혜에 보답했던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에게 명장 스키피오의 피가 흐르고 있는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스키피오를 변호한 해로부터 5년이 지난 기원전 182년, 38세의 그라쿠스는 안찰관(아이딜리스)으로 선출되었다. 안찰관의 역할에는 행사 기획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라쿠스가 연출한 경기대회의 화려함은 로마 시민들도 깜짝 놀랄 만한 규모였기 때문에 원로원이 주의를 주었을 정도였다. 자기가 가진 재산과 '클리엔테스'(후원자)들로부터 받은 헌금으로 비용을 충당했으니까, 그라쿠스는 이 화려한 경기대회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동시에 수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 '파트로네스'(일족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과시한 셈이다.
그라쿠스 가문이 속해 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은 원래 평민 출신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에도 아직은 평민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로마에서는 집정관을 배출한 집안은 로마 공화정의 위정자 계급인 귀족, 즉 엘리트로 대우받게 되었다. 이것은 제2차 포에니전쟁을 귀족계급과 평민층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치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원전 3세기부터 집정관을 배출하고 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도 뛰어난 귀족 가문이다. 기원전 2세기의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구별도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유력 가문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스키피오 가문이 속해 있는 코르넬리우스 일족, 아피아 가도를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배출한 클라우디우스 일족, 한니발에 대해서는 지구전 전술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속해 있는 파비우스 일족, 로마가 공화국이 되었을 때부터 명문인 발레리우스 일족, 그리고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배출한 율리우스 일족 등의 명문 귀족에 대해, 한니발에게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칼'로 칭송받은 마르켈루스와 그라쿠스 같은 유력한 평민층 가문은 '평민 귀족'이라고 불러서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후세 연구자들이 선호한 분류 방식이고, 당시 로마인들은 이런 분류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해마다 두 명씩 선출되는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평민 출신인 것이 통례였으므로, 이론적으로는 해마다 한 사람씩 새로운 귀족이 탄생한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의 '귀족계급'(노빌리타스)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신분은 아니었다.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파트로네스로서 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리고 있는 '평민 귀족'도 드물지 않았다.
안찰관을 지낸 지 2년 뒤인 기원전 180년, 그라쿠스는 법무관(프라이토르)에 선출되었다. 화려한 경기대회의 연출자로서 선전이 잘 되어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클리엔테스들이 대거 투표에 참가했기 때문인지, 또는 '스키피오 재판'에서 보여준 의연한 태도 덕분에 시민들이 존경을 표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이 모든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법무관으로 선출된 것은 전략 단위인 2개 군단에 대한 '절대 지휘권'(임페리움)을 가질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79년, 41세의 그라쿠스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에스파냐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든 에스파냐 원주민에게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그라쿠스는 타고난 진면목을 발휘한다. 노예로 이루어진 군단을 채찍 대신 자유민과 동등한 대우로 지휘함으로써 한니발에게 대항한 아버지의 아들다움을 보여주는 위업을 쌓았다. 집요하게 로마에 저항하고 있던 에스파냐는 그 후 반세기동안 평화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는 그라쿠스가 피통치자의 마음을 헤아린 공정한 통치 체제를 확립한 결과였다. 원로원도 로마로 귀환한 전직 법무관에게 개선식 거행을 승낙함으로써 그의 공적에 보답했다.
2년 뒤인 기원전 177년, 그라쿠스는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콘술)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2, 3년 뒤에 조르넬리아와 결혼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 지 12년이나 지난 뒤에 결혼한 것은 약혼 당시에 코르넬리아가 아직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다. 상당히 나이 차이가 많은 부부였다.
기원전 169년, 그라쿠스는 최고위직은 아니지만 공화정 로마에서는 매우 중요한 관직인 재무관(켄소르)에 선출되었다. 재무관의 임무에는 공공사업 발주도 포함된다. 그라쿠스는 정부에서 발주하는 건설사업을 일부 업자가 독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가결시켰다.
그라쿠스는 또한 장인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갖고 있던 포로 로마노 안의 저택을 사들여, 그 자리에 그리스식 회당(바실리카)을 건설하게 했다. '바실리카 셈프로니아'라고 불린 이 회당은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같은 장소에 '바실리카 율리아'를 세울 때까지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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