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님께서 많은 고민과 습사 분석을 통하여 하나의 동작도 엄밀하게 한 뒤에야 말씀하시는 분이란건 잘 알고 있습니다. 온깍지카페에서 사법논의를 하던 시기부터 글을 통해 익히 보며 지내왔으니까요. 저도 궁금한건 작은것부터 하나하나 물어보았거든요.
지금이야 별절이라고 하지만 전에 활을 배우면서 있는힘 없는힘 다해서 밀고 당기며 쏘아보니 저절로 고자채기가 되고 뒷손은 뒤로 휙 뿌려져 호랭이꼬리 같이 되기도 하고 뒤로 휙 뿌려지기도 하곤 하더군요. 그리쏘면 흔들려서 안된다고 선배들한테 지적을 받기도 했고요. 이런것들도 어쩌면 저하나만의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연구라는게 더해지면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겠죠.
한산님께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가며 별절은 찾아내고 철전사법을 복원하셨다고 하시는것은 치하받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1930년대 활쏘는 영상처럼 활을 힘껏 쏘아보면 그렇게 되는것이 정상이지만 현재의 활터에서는 그런 모습이 시수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 사라져 버린지 오래되기도 했습니다.
실전되었다고 하던 철전사법이 정사론이 발견되면서 어떻게 쏘는 것인지 알려지게 되었는데 어디에도 지금 별절사법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쏘아야 한다고 명시해놓은곳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예결해에도 그렇게 쏘아야 한다고 명시한것은 없는것 같고요. 사결에 극력견전의 대목이 있고, 쏘는 모습을 묘사한것이 별절에 대한 기록 전부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속에서 한산님께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시면서 외체직내지정하는 몸자세에 고고원원하는 거궁자세 + 조선의 궁술 신사입문지도에 쓰여진 줌손을 반대쪽 눈위로 들어 당기라는 기록을 참고하여 죽머리를 내전하여 오두에 두어 어깨로 힘을 받게 하고, 전거정원하고 후거집방하며 리를 행하면서 양손을 여요한의하고 깍지를 시위를 끊듯이 쏘면 멀리까지 화살을 보낼수 있게 되며 이렇게 발시할때 두손이 앞뒤에서 불거름으로 지고 엉덩이를 치게되는 철전사법을 발견하셨다고 하셨고 이를 회원들께 알리며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고의 노력을 통해 발굴해낸 철전사법에 대해 자부심이 크시겠지만 이를 알리고 전파하는 과정에서 한산님께서 공부하신 내용과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신 활꾼들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면 매우 거칠게 대하신것은 기억하십니까?
그 결과로 활꾼들 사이에서 철전사법을 거론하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일쑤이고, 막상 그렇게 활을 내면 활을 패대기치는거냐며 조소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저야 사범이란 명분으로 그런 소리를 말없이 눌러버리고 있지만요.
그래서 어렵게 찾아내고 복원이라고 할 정도까지 완성시킨 철전사법만을 사법이라고 하고 타인의 사법은 개법이라고 하기보다는 철전사법이 기본원칙이며, 이 원칙 범위내에서 두손의 높이를 수정한다던가하여 유엽전을 쏘는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별절에 매이지 않으면서 뒷손을 뒤로 빼는 방식으로 편전을 쏘는 방법 이런식으로 철전사법의 범위를 확대해서 전파한다면 보다 많은 이들이 "아하! 우리나라 사법이 원래 철전사법이 기본사법이었구나"하고 깨닫고 이를 배우고 여기에 터잡아 유엽전도 배우고 편전도 배우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생각에서 짧은 소견을 피력했던 것입니다.
웅천현감 이춘기공도, 부북일기에 200시 200중을 하셨다는 두 형제분도 모두 철전사법으로 철전을 그렇게 쏘셔서 명궁소리를 들었던 것일까요? 정사론에도 창하는 사람이 높은 소리를 낼때 하는것처럼 다리를 구부려가며 쏜다고 했는데 철사연분들은 이순신같은 이들이 과연 그렇게 멋지지 않은 모습으로 정량궁을 쏘았겠느냐고 하며 그림에 나온 정량궁 가르치는 모습을 잘못된 것으로 말씀하신 기억이 있지 않으신가요? 정량궁으로 활쏘는 사람의 용력을 시험하는 것이니만큼 모두가 갖은 노력을 다해 육량전을 120보 이상 멀리까지 보내려고 했다는데 왜 철사연에서는 멋진 자세로 바로서서 철전사법을 구사했을거라고만 지레짐작을 하셨는지요?
아마도 기록에 나온 명궁들은 정량궁으로 육량전을 잘 쏘아서 명궁소리를 들은것이 아니고, 유엽전을 잘쏘는 신기를 보였기에 명궁소리를 듣고 승진하거나 했을 겁니다. 정조대왕도 육량전 잘쏘았다는 기록은 없던데, 궐내 활터나 장용영 등에서 유엽전을 쏘았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철사연에서 연구하고 있는 철전사법 다시말해 육량전사법이 별절로만 쏘았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나 기록이 있는건가요?
큰활을 별절로 쏘아 힘차게 내려쏟고 엉덩이를 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바로 이런데에서 타인들은 의문을 갖고 물어보고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저같은 경우, 육량전사법 즉 철전사법은 용력을 키우고 시험하기 위한 사법이라 보고, 그 사법을 익힌 사람은 어떤 활이나 도구라도 능숙하게 몸을 쓰고 힘을쓰는 능력을 갖췄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저는 활배우려는 신사들에게 시간이 오래 걸릴수 있으나 건강하고 아픈곳 없이 오래도록 활을 즐기며 쏘는 활꾼이 될 의향이 있으면 배우고 그렇지 않으면 내게 배울 생각을 하지 말라고 먼저 일러주고나서 몸쓰는 법부터 익히게 하려고 외체직내지정하는 몸자세에 고고원원하여 전거정원하고 후거집방하는 '리' 를 여력으로 추사전신하는 법을 배워 구사하게끔 하고 있어서 우리 신사 3명은 높이 든 활로 멀리까지 화살보내는 것에 치중하여 습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제가 보기에 몸과 힘쓰는 법이 익숙치 않으면 몇달이 지나도 유엽전쏘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본사법을 갖추지 않은자가 유엽전쏘며 과녁두드리는 재미에 빠지면 젊은날의 장언식 공처럼 몸이 망가지는 일은 불보듯 뻔한 일이니까요. 또 육량전사법을 익힌 사람에게 약간 수정한 유엽전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기에 서둘러 가르치지 않습니다.
앞서 한산님께서 사예결해 가전편에 引之之時 兩手齊擧 其高無下於耳上을 이해하신 과정을 기술하셨는데 그분들이 채록할 당시에 육량전을 쏘신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유엽전을 쏘느라 약간의 변형을 통해서 쏘고 있었는데 그날 두 손을 들은 높이가 이마 앞쪽에 있는데 그 손은 귀아래로 내려오게끔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쏘는 것을 보고 기록한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 일것입니다. 한산님처럼 그렇게 심오하게 보지 않고 '아! 두손을 앞으로 거드는데 두 손 높이가 귀아래로 내려가지 않게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두손의 높이에 따라 근육과 뼈마디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지곤 하는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글귀 하나를 때로는 그냥 단순하게 쓰였다고 받아들일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의 글자대로 '당길때에 양손을 모두 드는데 그 높이가 귀위보다 아래가 아니다(즉, 이마높이거나 그 이상 높이라 추정)'라고 읽으면 내용이 달라지는가요?
뒷손을 높이 당겨도 앞손높이가 과녁을 향해 낮춰져 있고 거리는 120보라면 화살대는 귀보다 아래에 위치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화살을 멀리까지 보내는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또 과녁을 잘 맞추던 이춘기공이 과녁을 안쏘고 멀리보내기만 하느라 화살대를 귀때기 위에 닿도록 활을 높이 들어 조준한것이 아니라면 그 글귀는 어떤 의미로 쓰여졌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단순명쾌하게 해석하는 것도 필요하고 그런 의견에 귀기울여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소소한 점 한 두가지 때문에 훌륭한 성과로 나타난 철전사법이 다른 활꾼들에게 욕먹거나 비난과 조소를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모쪼록 헤아리시고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이거나 훌륭한 이치일수록 널리 이해하고 품어안을 대상과 폭이 넓고 많을수 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살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