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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7 연중8주일 다해 – 113위 073° 김사범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4).
113위 073° ‘하느님의 종’ 김사범
이름 : 김사범, 세례명 미상
출생 : ?년, 청주
순교 : 1866년, 장사, 수원
김사범은 충청도 청주의 양반 출신으로 온양 방아사골[0.1](현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에서 살았다. 그는 6형제 가운데 맏이로 성품이 굳세고 의연하였으며, 어려서 천주교에 입교하여 교리에 밝은 데다가 이를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또 남과 사귈 때는 말에 조리가 있고 도리에 맞게 행동하였으므로 비신자들도 그를 비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세례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김사범은 형제들과 함께 부모를 모시고 산속에 살면서 농업과 상업에 힘써 제법 살 만했는데,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취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던 중 부친이 병이 들어 여러 해 동안 앓게 되자 그는 정성껏 약을 마련하여 드렸고, 거의 밤마다 부친을 수발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마을의 비신자들조차 그를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이후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모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으며, 동생이 진 빚을 갚아 주면서도 원망 한마디 하지 않았다.[1]
그러던 중 다블뤼 주교가 방아사골로 오자 김사범은 그곳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3년 동안 주교의 복사가 되어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였다. 이후 다블뤼 주교는 1865년에 방아사골을 떠나 홍주 신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 62-3)로 거처를 옮겼다.[2]
다블뤼 주교가 신리로 이주한 다음 해인 1866년에 병인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김사범은 여러 동생들을 위하여 관속(官屬)에게 돈을 주어 체포를 면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중국으로 피신하려고 배를 기다리던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신부[2.1]를 자신의 집에 모시기도 하였다.[3]
1866년 가을, 김사범은 온양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를 결심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원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원 유수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다블뤼 주교를 모시고 있던 사실을 거짓 없이 자백하였고, 막내 제수와 교우들이 옥으로 끌려오자 그들에게 순교를 권면하고 신앙을 북돋워 주었다. 이때 막내 제수가 순교를 원하지 않자 김사범은 오 요한이란 배교자를 설득하여 그 제수를 친가로 돌려보내 주도록 주선하였다.
이후에도 김사범은 함께 수원 유수부 옥에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면서 순교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태장 수백 대를 맞고 ‘예수, 마리아’를 크게 부르며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이었다.[4]
[註]__________
[0.1] 방아사골 :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에 ‘방아산골’에서 유래하는 ‘방사삭골’(마곡리 644)과 ‘방아사골’(마곡리 산80)이 있다. ‘방아삭골’은 온양에 유구로 가는 국도 39번 길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 352-6번지에서 동남쪽 광덕산(廣德山, 699m)을 향해 폭 300m쯤 되는 고라실논이 펼쳐지다가 깊이 1km쯤에서 좌우로 디딜방아 모양의 Y자 지형으로 갈라진다. 왼편으로는 방아삭골(마곡리 산53-1)로, 오른편으로는 ‘배댕이’(마곡리 산84)로 500m 이상 전답(田答)이 펼쳐진다. ‘배댕이’고라실 끝에 교회사 기록에 나오는 ‘방아사골’(마곡리 산80)이 있다. ‘방아-’는 길이나 골 등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곳에 쓰이기도 하는데, ‘방아삭골’과 ‘배댕이’가 있는 골로 비스듬히 갈라지는 지형이라 ‘방아+산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방아삭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마곡리 중심 지형이 조개 형국이라 ‘합동(蛤洞)’, 곧 대합조개를 뜻하는 ‘배댕이’라고 부른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위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배’는 ‘바위’, ‘-댕(이)’는 사방이 산이나 골짜기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를 뜻하는 ‘듬’을 가리킨다. ─ 충청남도, ‘2020년 일본식 지명 등 조사 연구용역 연구보고서’ 참조.
다블뤼 주교는 1865년에 ‘방사골’(Pang-sa-kol, 혹은 방아사골)에 거처했는데, 이웃집에서 옮겨붙은 화재로 조선어와 한문으로 기록된 순교자 관련 원본들을 모두 소실 당하였으며, 1865년 10월(양력)부터 신리를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황석두 회장과 함께 당진군 합덕읍 신리 손자선의 집에 거처하였다.
‘달레 교회사’ 下, p.430에 ‘방아사골’(현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인용한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에는 분명히 ‘방사골’로 나온다. 다만, 이 방사골이 전자의 방아사골과 같은 마을로 보는 데는 이견이 있다. 위에서 본 방아사골은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피신하던 중에 신자들이 배를 구하기를 기다리면서 머물던 교우촌이다. 한편 지금까지는 1863년의 화재 때 다블뤼 주교의 거처가 있던 곳을 ‘판서골’(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의 판숫골)로 이해해 왔으나(차기진, ‘내포 지역의 복음 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내포 천주교회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대전교구 솔뫼성지, 2002, 113쪽), 그 장소는 ‘방사골’로 보아야 하고, 방사골의 화재는 1865년으로 보아야 한다.
방아사골의 '하느님의 종' 김사범을 두고 다블뤼 주교나 리델 신부가 관련되어 있다. 또한, 세 사람이 관련된 '방사골'은 어떤 자료에도 없다. 그렇다면 ‘방사골(Pang-sa-kol)’은 위에서 보듯이 ‘방아산골’에서 유래하는 ‘방사삭골’(아신시 송학면 마곡리 644)이나 방아삭골(마곡리 산53-1)이나 ‘방아사골’(마곡리 산80)이 줄여져 변형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병인치명사적』, 14권, 12-13면; 『치명일기』, 정리 번호 372번.
[2] 샤를 살몽,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정현명 역,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340-341.376면; 『병인치명사적』, 14권, 13면. 다블뤼 주교의 방아사골 거주와 신리 이전 사실은 차기진의 「신리성지의 교회사적 의의」(『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를 참조할 것.
[2.1] 리델, 펠릭스 클래르(1830∼1884) (한국가톨릭대사전‘ 4권 pp.2299-2301)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제6대 조선교구장(1869∼1884). 한국명은 이복명(李福明). 1830년 7월 7일 프랑스 낭트(Nantes) 교구의 샹트내(Chantenay) 소읍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1857년 12월 19일 사제서품을 받고 보좌 신부를 역임한 뒤, 1859년 8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1860년 7월 27일 칼래(Calais, 姜) 신부와 함께 마르세이유항을 출발 8월 28일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당도하였다. 조선 신학생 2명(金 요한, 林 빈첸시오)을 만나본 리델 신부는, 9월 초순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에 도착하여 조안노(Joanno, 吳) 신부와 페낭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이 바울리노와 합류했다. 같은 해 12월 19일 일행은 상해를 출발하여 24일 산둥반도 체푸(지금의 煙臺)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랑드르(Landre, 洪) 신부와 합류하였다.
[조선 입국과 활동]
1861년 3월 11일 리델을 비롯하여 칼래, 조안노, 랑드르 등 조선 선교사 4명과 신학생 이 바울리노는 체푸를 출발하여 위해(威海)를 거쳐 4월 7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부교구장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와 보름 동안 함께 지내고 서울에서 400리 떨어진 반자리로 옮겨 11월말까지 우리말을 익혔다. 그 후 진밭(공주시 寺谷面 新永里)에 거처를 정하고 경상도를 순회한 데 이어 1862년 봄에는 내포 지방을 순회하였으며, 1863년 4월 13일 둠벙이(공주시 新豊面 造平里)에서 조안노 신부의 임종을 돌보았다.
또 랑드르 신부가 그 해 9월 14일 황무실(예산군 고덕면 好音里)에서 병사하자 이튿날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 1864년 8월 말에 리델 신부가 간헐열(間歇熱, 날마다 주기적으로 열이 오르내리는 병. 말라리아, 쥐물림병 등)에 걸리자 다블뤼 보좌주교는 문병을 와서 함께 연례 피정을 하였고, 판공 성사를 주기 위해 10월 12일부터 전라도와 경상도의 여러 공소를 순방하였다.
그러던 중 187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2월 23일 서울에서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26일 브르트니에르(白) 신부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27일에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가 신답리(성남시 雲中洞)에서 같은 날 도리(Dorie, 金) 신부가 손골(용인시 水枝區 東川洞)에서, 3월 2일에는 배론(제천시 鳳陽面 九鶴里)에서 푸르티에(Pourthi, 申妖安)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신부가 체포되었다. 이어 3월 11일에는 다블뤼 주교가 거더리(당진시 합덕읍 신리 도촌[嶋村])에서 붙잡히고, 3월 12일에는 인근에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吳) 신부가 자수하여 모두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다.
리델 신부는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교 활동을 중단하고 공주 신영리 진밭 근처에 들렀다가 3월 12일 밤에 그곳을 떠나 인근 교우 집에서 숨어 지냈다. 5월 8일 페롱(權) 신부가 그곳에서 70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리델 신부는 연락을 취하여, 5월 18일 중간 지점 교우촌인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 버시니( 팔봉산의 남서쪽. 선학리에서 우성면 봉현리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 선학리 132 일원)에서 그를 극적으로 만났다. 이들은 여기서 함께 숨어 지내다가 6월 24일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 방아사골 교우촌으로 옮겨가 닷새를 보낸 다음 6월 29일 작별하였다.
[조선 탈출]
1866년 7월 1일 조선 뱃사공 11명을 데리고 신창 용당리(아산시 仙掌面 佳山里의 龍堂)을 출발하여 7월 7일 산둥반도 체푸에 도착한 리델 신부는, 곧장 천진으로 가서 로즈(Roze) 제독에게 조선 실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체푸로 돌아와서 8월 중순 조선 뱃사공 8명을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고 3명만 데리고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 대표부로 가서 휴식을 취하던 중, 로즈 제독을 만나기 위해 조선인 3명과 함께 9월 7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일 체푸에 입항하였다. 그리고 9월 20∼30일 사이에 리델 신부 자신은 통역으로, 조선 뱃사공 3명(崔善一, 崔仁瑞, 沈順汝)은 뱃길 안내원으로 프랑스 함대 3척에 승선하여 인천 앞바다, 강화도, 마포 양화진의 수심을 탐사하였다.
리델 신부와 조선 뱃사공 3명은 1866년 10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도 동승하였다가 상해로 돌아올 때 조선 교우 7명을 더 데려왔는데, 이후 그는 상해, 산둥반도, 요동반도, 일본 등지에서 조선에 밀입국하고자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다. 1869년 리델과 블랑(Blanc, 白圭三) 신부는 5월 28일 요동반도 차쿠에 있는 성모 설지전 성당(聖母雪地殿聖堂, Notre Dame des Neiges)을 떠나 해양도(海洋島)를 거쳐 6월 9일 황해도 은율 앞 바다에 있는 초도 근처에 당도하여 여러 번 정박소를 바꾸면서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커지자 15일 교우들과 만나기로 된 초로를 떠나 18일 차쿠의 성모 설지전 성당으로 되돌아갔다.
[교구장 피임과 활동]
1869년 4월 27일 교황 비오 9세는 리델을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교구장직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결국 1870년 6월 5알 성령 강림 대축일에 로마의 예수회 성당에서 본죠스(Bonnechose) 추기경, 초대 만주교구장 베롤(Emmanuel Jean François Verrolles, 方若望) 주교, 일본 교구장 프티장(Bernard Thad e Petitjean) 주교에게 주교 서품을 받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871년 6월 27일 파리 외방전교회 상해 대표부에 도착한 리델 주교는, 이튿날 뜻밖에도 미국 군함 편으로 상해에 온 조선 교우 9명을 만나 조선 교회 실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 9명은 1872년 5월 조선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들 가운데 신심 깊은 최지혁(崔智爀, 요한) 노인은 리델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 교회 실정을 샅샅이 살펴보고 1875년 1월 중순 성모 설지전 성당에 있던 조선 선교사들에게 와서 보고하였다. 같은 해 9월 리델 주교는 블랑 신부와 함께 초도 근처까지 가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만나기로 한 배를 만나지 못해 다시 차쿠로 돌아갔다. 1876년 4월 29일에 리델 주교는 블랑 신부, 드게트(Deguette, 崔東鎭) 신부와 함께 차쿠를 떠나 5월 8일 황해도 은율 앞 바다 초도에서 마중 나온 조선 교우들을 통해 두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키고 자신은 신앙의 자유를 얻는 데 진력하고자 차쿠로 되돌아갔다.
이어 리델 주교는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와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를 데리고 1877년 9월 11일 차쿠를 떠나 태장하(太莊河) 항구를 거쳐, 23일 황해도 장산곶에 무사히 상륙하였다. 1866년 7월 1일 조선에서 탈출한 지 11년 만에 다시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그러나 재입국 이듬해인 1878년 1월 28일에 리델 주교는 자택에서 붙잡혔다.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요청으로 중국 정부가 개입한 덕분에 6월 11일 서울을 떠나 파주, 개성, 봉산, 중화, 평양, 안주, 정주, 곽산, 선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다음 6월 24일 저녁때 변문에 당도한 리델 주교는, 다음날 봉황성에서 중국 관헌들에게 인계되고, 6월 30일 봉천에 도착하여 본당 신부 슈발리에(Joachim Auguste Chevalier)에게 인계됨으로써 자유의 몸이 되었다.
리델 주교는 중국에 도착한 이후 장차 조선에 입국하게 될 선교사들을 위해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 가운데 《한불자전》(韓佛字典)은 1880년 요코하마의 레비(Lévy) 인쇄소에서 출판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조선어 문법서인 《한어문전》(韓語文典)도 같은 곳에서 출판되었다. 이 무렵, 그는 요동반도 차쿠에 있는 조선 진출 거점을 일본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뜻밖에도 1881년 10월 5일 나가사키 주교관에서 발병한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나가사키, 상해, 홍콩 등에서 요양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이듬해 블랑 신부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귀국한 리델 주교는 반느(Vannes)에서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두 차례 루르드 순례 방문으로 치유를 빌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884년 6월 20일 54세로 사망하였다.
[3] 『병인치명사적』, 14권, 13면; 펠릭스 클레르 리델, 『리델 문서 I』, 한국교회사연구소 번역위원회 역,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85면.
[4] 『병인치명사적』, 14권, 13-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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