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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고향이 어딘가?”
학창시절, 무슨 과목인지는 잊었지만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과제를 발표하던 학우에게 물었다. 교수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는 순박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스산인디유!”
평소에도 사투리 심한 그였지만, ‘스산’이라는 한 마디에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알아들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 서산! 아주 좋은 데서 유학 왔군. 그런데, 자네 그 내포 방언이 아주 구수하구먼.”
그 이후 학우들은 충청도에서 서산, 당진, 예산 등을 언급할 때면, 다른 곳은 몰라도 서산만큼은 반드시 ‘스산’, 그것도 일부러 턱을 치켜올리며 길게 ‘스으산’이라고 발음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이후 길손의 머릿속에도 서산은 언제나 ‘스산’으로 각인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1,058m)에서 갈라진 금북정맥이 금강 이북 땅의 근간을 이루며 서해로 가다가 세력을 다하기 전에 예산과 서산 사이에 힘을 쏟아 빚은 산이 바로 가야산(伽倻山·678m)이다. 전통적으로 이 가야산 둘레의 여러 고을을 내포(內浦) 지방이라 불렀고, 이 일대를 내포평야라 불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현을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구석에 막히어 끊기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병자년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넉넉해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고 적고 있다.
내포지방은 딱히 눈길을 끌 만한 빼어난 절경은 없어도 부드러운 구릉과 들판, 풍요로운 갯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그 순박한 말씨처럼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충청도 중의 충청도’로 꼽히면서, 오래 전부터 살기도 좋고 인심도 좋은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허나 이중환의 지적대로 만(灣)에 길이 끊겨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000년 총길이 7,310m의 서해대교가 개통되자 모두 옛말이 되고 말았다. 내포지방의 대표 고을인 서산도 그렇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으로 나와 덕산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를 타고가다 상왕산(307.2m)과 수정봉(453m) 사이의 계곡으로 들어서면 ‘백제의 미소’가 반긴다. 먼저 용현계곡 입구의 돌무지 위에 자리잡은 석상이 눈길을 끈다.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겨있는 석상은 머리에 관(冠)을 썼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불상이 분명하다. 고려 말기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런데 왜 여기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 그것도 마을 입구 서낭의 돌무지 위에.
이 석상의 원래 자리는 지금보다 좀더 하류인 고풍리다. 1972년 고풍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지금의 자리로 이사왔다.
민간신앙의 상징인 서낭당 돌탑 위에 불교의 석불을 세워 놓으니 이 석상은 미륵불과 장승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그래서 ‘미륵석장승’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민간신앙과 불교가 어울리는 장면을 보여주는 석상인 것이다. 그런데 보통, 마을 입구의 장승은 길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있거나 마을 바깥을 향해 서있게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 석상은 입구쪽에 등을 보이고 있어 찾아오는 길손을 모른 채 하는 형국이다. 가까운 덕산 상가리의 미륵불은 남연군묘를 보기 싫어 등을 돌리고 있다는데, 두 석상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 석상의 시선은 자신의 뿌리인 보원사지와 서산마애삼존불을 향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크게 흠잡을 일도 아닌 성싶다.
마애불을 조각하던 석공이 쉬었을 용현계곡의 가을빛이 제법 짙다. 절경은 아니지만 무더운 여름이라면 ‘백제의 미소’를 만나고 내려온 탐방객들이 맑은 계류에 잠시 발을 담그고 땀을 식히고 가는 곳이다. 마애삼존불은 인암(印岩)이라 불리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흔히 마애불은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이 마애불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계곡 안쪽에 자리 잡았다. 그런 탓에 1,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용히 숨어 있다가 1959년에야 발견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론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이라는 평가도 받는 모양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빼어난 조각솜씨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주불인 여래입상의 미소는 부드럽고 푸근하다. 어찌 보면 장난스레 웃는 것 같기도 하다. 오른손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이요, 왼손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여원인(與願印)이다. 이 불상을 제작할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 밀리면서 국가적 위기에 빠져있었다. 허나 여래입상의 넉넉한 미소에서 백제의 재부흥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던 옛 백제인들의 희망이 엿보인다. 마애불은 미소 지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으니 너무 두려워 말라!’
‘백제의 미소’를 뒤로한 뒤 서산, 해미 선비들이 놀러와 시를 짓던 방선암(訪仙岩)을 지나 상류로 1.5km 오르면 계곡이 한껏 넓어지며 펑퍼짐한 들녘이 나온다. 보원사(普願寺)터다. 폐사된 절터만큼 쓸쓸한 게 또 있을까. 잡초 우거진 황량한 터에 덩그마니 서있는 석탑과 당간지주 등은 보는 사람의 심사를 쓸쓸하게 만든다. 이런 감정은 자연의 무대장치가 완벽한 늦가을에 더욱 고조되게 마련이다.
땡감 하나 달려있지 않은 늙은 감나무 너머로 바라보는 절터는 정말 스산했다. 최대 전성기인 고려 초기엔 으리으리한 전각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넘쳐나는 샘물로 승려와 길손의 목젖을 적셔주었을 석조는 깨어진 채 한쪽에 뒹굴고 있다. 가을바람 싸늘하게 불어대는 이 황량한 들판에서 한때 1,000명이나 되는 승려가 머물렀던 흔적을 찾긴 쉽지 않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세워져 있는 당간지주 너머로는 5층석탑이 보인다. 이 석탑은 고려 때 작품이면서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곳이 백제의 옛 땅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터 중간엔 피라미 헤엄치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방화(防火)를 위해 시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한때 다리와 누각이 세워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그렇다면 5층석탑 기단에 새긴 팔부중상(八部衆像) 다듬는 솜씨를 봐서 제법 화려했음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상상으로 그려보는 보원사는 이렇듯 대단한 절집인데, 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하니 더욱 기이하다.
상왕산 기슭의 개심사(開心寺)는 언제나 조용하다. 답사 열기 때문에 제법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음에도 아늑한 맛은 한결같다. 거의 완공된 일주문을 지나면 숲길 입구에 자그마한 표석 두 개가 반긴다. 왼쪽엔 세심동(洗心洞), 오른쪽엔 개심사 입구(開心寺 入口)라고 새겨져있다. ‘마음 씻는 골짜기’ 세심동의 돌계단은 아이가 혼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낮다. 또 굽잇길에선 절묘하게 태극 문양으로 계단을 휘어 쌓았다. 비록 짧은 길이지만 이처럼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사람이 걷기에도 편한 길도 흔치 않다. 걷다보면 마음이 반쯤 열린다. 계류의 수량이 많지 않은 게 아쉽지만, 홍송(紅松) 들어찬 솔숲의 돌계단 길은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그 길 끝에 연못이 있다. 경지(鏡池)다. 풍수상 뒷산인 금북정맥의 상왕산(象王山·307.2m) 코끼리가 목이 말라하니 물이 떨어지지 말라고 일부러 파놓은 비보(裨補) 연못이다. 기(氣)를 모으는 역할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원 조성법의 하나로 경치를 끌어들이는 인경(引景)이 돋보인다. 하늘의 구름과 앞산의 숲과 꽃을 수면으로 가깝게 하는 것이다. 봄이면 신록이 반갑고, 여름이면 붉은 배롱나무 꽃 그늘 아래 수련이 말간 얼굴을 내밀어 좋고, 오늘 같은 늦가을엔 붉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 정취가 제법이다.
수면 위에 걸린 외나무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 좁다란 해탈문을 지날 때면, 어느새 마음의 문이 거의 열린다. 개심사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절집이다. 1941년 수리 당시에 1484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왔는데, 바로 그 해에 지어진 대웅전은 다포계와 주심포계 양식을 함께 갖춘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개심사는 전망이 아주 빼어나진 않아도 금북정맥의 험하지 않은 산세와 내포의 넉넉한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절집이다. 과장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내포 사람들의 심성을 그대로 닮았다. 무엇보다 심검당(尋劍堂)은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살린 기둥이 자연스런 파격미를 드러낸다. 마음껏 휜 나무의 곡선을 전혀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돋보이게 살린 솜씨에서 대범함과 비범함을 동시에 느낀다. 굽은 나무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심검당에서 찾을 지혜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심검당뿐만이 아니고 무거운 지붕과 종을 휘어진 네 기둥이 너끈히 받치고 있는 범종각도 신비하다.
그러나 종각 옆 잘 보이는 곳에 설치해놓은 자판기는 개심사의 현주소를 조금 엿보게 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답사 인파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로 그러지 않아도 물 부족하던 절집의 샘물이 말라버린 것일까. 물맛 좋기로 소문난 절집에서 자판기를 먼저 찾는 일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개심사는 왠지….
개심사를 벗어나면 길은 해미읍성으로 이어진다. 성벽 위를 걸으며 금북정맥 마루금을 완상하기 위해 서두르다보면 도중에 이국적인 풍광을 만나게 된다. 삼화목장. 어떻게 보면 제주의 오름을 닮기도 한 언덕들이 둥글게 둥글게 어깨를 맞대고 펼쳐져 있고, 나무로 만든 울타리 안에선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춰 사진 한 컷 찍게 만드는 그런 풍경이다. 1969년 금북정맥의 산줄기를 깎아내고 초지를 조성하면서 생긴 목장으로 원 명칭은 ‘축협중앙회 개량사업본부 한우개량부 목장’이지만 원래 이름인 ‘삼화목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삼화목장 풍경은 역시 봄날이 최고다. 푸른 새싹이 돋는 목장의 언덕에 길게 이어진 벚꽃 띠 때문이다. 연분홍 꽃구름이 둥근 언덕에 피어나고, 금북정맥을 넘어온 해풍이 언덕을 스치면 나풀나풀 휘날리는 벚꽃 이파리…. 이런 정경은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와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이 땅에 벚꽃 명승지는 많아도 이렇듯 자신만의 독특한 풍광으로 봄날을 노래하는 곳은 드물다. 허나 벚나무의 진홍빛 이파리도 모두 떨어진 늦가을에 어찌 그런 호사를 누릴까.
한때 어두운 정치적 배경 때문에 주목을 받기도 했던 이 삼화목장은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으로 이름을 날린 천수만 간척지의 서산목장과 함께 서산의 대표적인 목장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는데, 서산 고을에서 목장의 역사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산을 비롯한 주변 고을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관할하는 목장이 있었다. 낮은 구릉지가 대부분이고 해안과 접하여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온난한 기후라 목축업에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산·홍주·면천·태안의 목장이 그것인데, 그 중 대산목장이 가장 컸다. 당시엔 소보다는 대부분은 말을 길렀다. 기록에 의하면 대산목장에는 말을 기르는 목자만도 100여 명에 달했고, 서산 전체를 합하면 수백 명에 이르렀다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말들이 무리 지어 물을 마시면 냇물이 마르고 풀을 뜯어먹으면 들판이 붉게 변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개심사에서 승용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해미읍성은 보존 상태가 좋다. 예전엔 성안에 면사무소, 초등학교, 민가 등이 있었지만, 1973년 성안의 건물들을 모두 헐어내고 일부를 복원했다. 순천의 낙안읍성보다 사람의 냄새도 적고, 답성놀이가 전래되는 고창읍성보다 덜 정겹지만, 성벽 위를 걷다보면 잠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해미읍성 돌틈에 아프게 새겨진 역사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무려 1세기 동안 이곳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살육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당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잡혀와 고문 받고 죽음을 당했는데, 주로 인근의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신자들이 많이 잡혀왔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숫자를 1,000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이전인 1790년대부터 희생된 사람을 모두 합하면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조정에서 신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고, 글로 전달하기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묶어서 눕혀 놓은 사람들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도 하였으며,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도 조여 죽였다. 또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키기도 했고, 나무에 매달고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기도 했다. 병인박해 때는 많은 사람을 단기간에 죽이기 위해 십수 명씩 생매장하기도 했다. 실로 끔찍한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지만 어찌 흔적이 남지 않을 것인가. 성안 광장에는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있던 감옥터와 모진 고문을 당했던 늙은 호야나무(회화나무)가 서 있다. 감옥터에서 질퍽한 옛 저잣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서문은 순교자들에겐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신도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도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개질하여 머리를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에 보존하고 있다. 또 성밖엔 신자들을 묶은 채 밀어 넣었던 ‘진둠벙’이 있고, 현재 순교성지가 된 ‘여숫골’은 생매장 당하던 신도들이 죽으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는 곳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성안에서 그토록 잔인한 일이 불과 1~2세기 전에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 바람이 불자 당시 피로 붉게 물들었을 자리개돌에 샛노란 은행잎 몇 개 떨어진다. 대살육 당시에도 가을은 이렇게 해미읍성을 어김없이 찾아왔을 것이다.
갯벌이 그리웠던 것은 그래서였다. 서산 시내를 지나 가로림만으로 서둘러 방향을 잡았다. 가면서 일부러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다.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 갯마을 / 처녀들 부푼 가슴 꿈도 많은데 / 요놈의 풍랑은 왜 이다지 사나운고 / 사공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구나.”
어릴 적 동네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나 조미미의 노래 ‘서산 갯마을’을 들으며 서산이란 곳에 대해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물론 대학시절에 들은 ‘스산’이라는 한 마디에 서산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서산 하면 명색이 ‘갯마을의 대명사’가 아닌가. 허나 1980년 남쪽의 천수만이 간척지로 바뀌면서 서산에서 갯벌은 많이 사라졌다. 거기에 1989년 태안이 서산에서 분리되면서 한반도 최고의 리아시스식 해안인 태안반도도 갯벌도 철새 따라 떠나버렸다. 어쩌면 이 세월 동안에 ‘서산 갯마을’이란 단어는 고스란히 사어(死語)가 된 감도 없지 않다. 사정이 이런데 서산 북쪽의 가로림만에 바다가 아직 남아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21세기 초, 서산에서 진짜 제대로 옛 갯벌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팔봉·지곡면과 대산읍을 끼고 있는 가로림만뿐이다. 물론 간척지가 있는 천수만의 간월도 등에서도 갯벌을 만날 수 있긴 하지만, 손때를 덜 탄 순박한 어촌 갯마을 풍광을 즐기려면 아무래도 북쪽의 가로림만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찾아간 섬이 웅도(熊島)였다. 이 섬은 육지와 700m쯤 떨어져 있는데, 섬과 육지를 잇는 콘크리트 포장길은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만 오갈 수 있다. 서울서 가까워 인기 있는 제부도와 비슷하지만, 제부도가 명함 내놓기 어려운 매력이 있으니 바로 소달구지와 인심이다. 충청도 순박한 인심에 20여 대의 소달구지가 갯벌로 나가는 광경은 오로지 이곳 웅도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웅도를 제대로 느끼려면 섬 입구에 차를 놓고 물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걸어서 들어갔다 와야 한다. ‘느림의 미학’으로 발품을 팔아야 마을 사람들과 제대로 호흡할 수 있는 섬인 것이다.
자그마한 언덕을 넘자 바다로 나가는 소달구지 행렬이 보였다. 길이 끝나고 갯벌이 펼쳐졌다. 소들은 멈추지 않고 갯벌로 나갔다. 갯벌의 끝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간혹 바퀴가 갯벌에 박혔지만 소는 힘들이지 않고 달구지를 끌고 잘도 전진했다. 웅도 주민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게 지고 갯벌로 나갔으니 소달구지의 유래는 그리 오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엔 아낙네들이 갯벌에서 바지락을 잡아 삼태기에 담으면 남정네들은 바지게에 옮겨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려운 갯일도 갯일이지만, 캐낸 바지락을 지게로 지고 푹푹 빠지는 갯벌을 나오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던 1960년대 초의 어느 날, 누군가 소달구지를 몰고 직접 바다로 들어갔다. 지금은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당시엔 팔팔한 30대 중반이었던 김희곤 노인이다. 김 노인은 처음엔 지게로 갯벌 밖으로 져낸 바지락을 실어오려 달구지를 끌고 나갔다가 갯벌 안으로 몰고 들어갔던 것이다. 잘못하면 전 재산인 소까지 잃을 수 있는 모험이었는데, 소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소가 이래 뵈두 영물이유. 뻘강으루 해서 질을 알아서 찾아간다니깨유.”
섬사람들은 또 같은 갯벌이라 해도 물이 흐르는 수로쪽은 섬에서 흘러나간 모래가 적당히 섞여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작은 갯강이 소가 다니는 길이 된 것이다. 김노인은 그 해에만 열 대 가까운 달구지를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이후 섬사람들은 모두 소달구지를 끌고 갯벌로 나갔다.
한참 산업화 바람이 불 때 경운기와 트랙터가 보급되면서 소달구지 대신 기계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뻘 씻어내는 일도 보통이 아니고, 갯벌도 오염되어 꺼렸다. 무엇보다 소금물에 기계가 쉽게 부식하는 바람에 수명도 아주 짧았다. 결국 소달구지로 돌아왔다. 모든 게 급하고 편리하게 돌아가는 산업화 사회에서 기계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소중한 사실도 깨달았다.
한 가구당 정해진 하루 수확량은 80kg. 오랜 경험으로 눈대중해 수확량이 되었다 하면 저마다 바지락을 소달구지에 싣고 갯벌을 되돌아나온다. 소가 힘들어하면 사람은 내려서 걷기도 한다. 소달구지가 갯벌 입구의 ‘동동바위’ 앞에 도착하면 바지락 계량작업이 이뤄진다. 거의 들어맞지만 혹 부족하면 이웃에서 한 바가지 나눠줘 80kg을 맞춘다. 바지락 가격은 계절 따라 들쭉날쭉하지만, 대체로 1kg에 2,000원 정도. 그리고 바지락 계량을 마치면 소달구지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주민들은 외지인들을 별로 반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엔 일년 내내 외지인 그림자 보기도 힘들던 작은 섬이었건만, 소달구지가 소문이 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드는 외지인들이 섬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외지인들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비닐 옷과 장화에 뻘이 잔뜩 묻어있는 주민들을 양해도 없이 찍어댔다. 순박한 노인들이라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은 못해도 참 불편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따로 없다는 게 젊은이들의 불평-.
“다음에 올 땐 사진 찍지 말구, 기냥 와유.”
웅도는 분명 소달구지의 풍광과 함께 따뜻한 인정도 넘치는 섬이다. 누구 말마따나 이 섬은 카메라 내려놓고 욕심도 버리고 그렇게 들어가야 하는 섬이다. 웅도 입구에 잠시 서있는 사이, 어느새 물이 들어차더니 콘크리트 길은 금새 바닷물에 잠겼다. 그리고 웅도는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웅도를 빠져나와 대산읍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남진한다. 부석면은 천수만을 향해 튀어나온 작은 반도다. 동아반도라 불리던 그곳엔 도비산(351.6m)이 우뚝하다. 마늘밭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문득 아담한 부석사(浮石寺)가 나타난다. 이름이 귀에 익은 이 절집은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특이하게 한자도, 유래도 저 영주의 부석사와 너무 똑같다. 아니 차이가 있다. 영주의 부석사가 백두대간 내륙의 조망이 좋은 절집이라면, 이곳은 부남호 너머로 보이는 서해의 일몰 풍광이 너무 아름다운 절집이라는 점이다. 또 영주의 부석사만큼 자랑할 만한 거창한 보물은 없어도 전망 좋은 산기슭에 아기자기 자리 잡은 당우들이 제법 특색이 있다.
부석사는 창건 이후 쇠락한 것을 조선 초기에 무학(無學)대사가 중건하였고, 근대에는 경허(鏡虛·1849-1912)를 이어 한국불교의 커다란 선맥을 형성한 만공(滿空·1871-1946)이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떨치기도 하였다. 통쾌한 필채로 써 내려간 부석사 편액은 만공의 글씨다. 강직한 성정과 담대한 기상이 잘 드러났다는 평이다.
부석사를 내려서면 드디어 천수만(淺水灣). 수천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천수만은 한때는 한국 제일의 황금어장이었다. 물이 얕아 새우며 갖가지 어족의 산란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갯벌에서 캐고 주울 수 있는 갯것들이 워낙이 풍부해서 힘없는 아녀자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어렵지 않게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현대가 해외건설에서 남아도는 장비를 이용하고, 좁은 땅에서 식량증산이라는 명분이 맞아떨어지면서 간척지로 만들고 난 뒤엔 모든 게 변했다.
어류의 산란장소가 사라졌고, 간척지 밖의 인근 어장도 황폐화되어 갔다. 갯벌에서 나던 조개와 게들, 낙지, 굴 등 수많은 종류의 갯것들은 간척사업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요즈음엔 천수만에 가창오리 등 철새들이 날아와 조금의 위안이 되지만, 간척 이전의 무진장한 효용성을 다시는 회복할 수는 없게 되었다.
덩달아 인간의 생태계도 변했다. 대를 이어 갯일을 하던 수천 가구의 어민들은 졸지에 ‘문전옥답’을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았다. 간척지를 주민들에게 불하한다는 원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어민들의 터전을 대신한 넓은 간척지는 대기업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누구는 고향을 떠나 외롭게 대처를 떠돌았고, 누구는 간척지 일꾼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주민들은 천수만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당시 옛 어민들이 바라는 차선책은 간척지를 불하받는 일이었다. 허나 약속을 지키지 않자 현대건설과 주민들의 갈등의 골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지역 어민들은 20여년간 현대건설과 격렬하면서도 지루한 분쟁을 계속해 왔다. 다행히 지난 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간척 당시 천수만 인근 지역에 거주했던 어민 5,700가구에게 가구당 1,500평씩 간척지 농지를 우선 매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천수만 간척지가 어민들의 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들은 바지락 등 갯것 줍던 손으로 벼를 가꿔야 하고 새우 잡던 배 대신 트랙터나 경운기를 몰아야 한다. 천수만 어민들의 영원한 상실감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다시 둑을 무너뜨리긴 어렵다. 대신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천수만을 세계적인 철새의 낙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야 그 천혜의 갯벌을 잃어버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간월도 부둣가. 배를 개조한 포장마차 ‘간월호’에서 싱싱한 천수만 대하로 입맛을 돋우고 가창오리떼를 보러나갔다. 녀석들은 야행성이다. 낮에는 안전한 호수 안쪽에서 잠을 자다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하면 서서히 활동을 시작한다. 따라서 육안으로 녀석들의 군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해질녘과 새벽녘 두 차례뿐이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시시각각 색다르게 펼쳐지는 녀석들의 군무(群舞)는 황홀했다. 사람의 간섭이 두려워 높게 날진 않았지만, 수면 위로 날아갈 때는 파도 같기도 하고, 용틀임하며 승천하는 거대한 용처럼도 보였다. 또 짙은 먹구름인가 하면 어느새 나지막한 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가창오리의 군무를 보고 있는 사이 큰기러기떼 수십 편대가 날아갔고, 깜깜한 밤이 찾아왔다.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가창오리나 큰기러기 같은 철새떼의 울음소리와 퍼덕이는 날개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안다. 수십만 군사의 함성소리를 연상케 하는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생명력이 넘치는 에너지를 품고 있는지, 심장은 왜 그렇게 벌렁벌렁 뛰는지를.
거대한 회색빛 도시에서 작은 몸뚱이를 지탱하려 애쓰다 지치고 힘이 들 때면 길손은 천수만으로 다시 떠날 것이다. 시베리아로부터 그토록 먼 길을 날아오고도 싱싱한 생명력이 차고 넘치던 철새떼를 만나러. 그 달밤에 머리 위로 날아가며 힘차게 울어대던 철새의 울음소리가 또 그리워진다.
/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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