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2:2~13절로서 심판입니다. 후반부는 2:14~23절로서 회복(구원)입니다. 특별히 2:2~13절은 장르적으로 법정 소송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논쟁하다”라는 말은 “리브” 동사로서, 원어 성경에서는 맨 앞에 위치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논쟁하라”로 번역하였지만. 성경 안에서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본문은 문맥상 “법정의 고발, 고소”라는 의미입니다. “리브” 동사가 호세아 4장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남편이 아내의 음란을 고발합니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합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 각각을 의미합니다. 결국 2절의“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라는 말씀은 “이 죄에 대해서 어떻게 가만히 있느냐? 고발하지 않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고소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면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 남편이 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결혼 공식의 핵심인데, “아니다”를 강조해서 결혼 공식 파괴를 선언합니다. 결혼 공식 약속은 “정절”, “순결”입니다. 그 약속이 깨지면 그 공식도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인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향한 정절을 깨뜨렸기에 언약 파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언약 파괴의 위험은 아내의 음란 때문입니다. “얼굴에서 음란”에서 “얼굴”은 구약성경에서 “인격”을 의미합니다. “유방 사이에서 음행”에서 “유방”은 “육체”를 의미합니다. 인격 전체, 즉, 몸과 마음, 전 인격적인 타락입니다. 철저히 남편에게서 마음이 떠났음을 강조합니다.
3절은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애인을 만나 부정으로 간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은 2절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경고의 의미입니다. 즉, 2절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벌거벗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상징입니다.
이 상징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이해가 필요합니다. 결혼 서약(공식)을 보면 남편은 아내에게 “나는 너의 남편이고 너는 나의 아내이다.”라고 고백(선언)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나는 너의 아내이고 너는 나의 남편이다”라고 고백(선언)합니다. 이렇게 서약하면 의무, 책임이 생깁니다. 남편의 의무는 아내의 모든 것(의식주)을 챙깁니다. 책임집니다. 아내의 의무는 의식주 문제에 있어서 남편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다른 남자가 주는 의식주를 욕심내거나 따라가면 남편은 아내에게 준 모든 것을 다 회수합니다. 옷을 벌거벗깁니다. 집에서 쫓아냅니다. 음식도 없습니다. 이것을 “벌거벗기다”라고 표현합니다.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애굽의 포로 상태를 지칭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와 가나안에서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준 것을 다 빼앗깁니다. 다시 바벨론의 종이 됩니다. 제2의 애굽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0절을 보면 남편의 아내에 대한 의무를 소개합니다. 즉,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벌거벗는다”라는 말은 극도의 궁핍입니다. 결핍입니다. 3절의 “목말라 죽게 하겠다”라는 말은 당시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가 심했는데, 그래서 바알을 쫓았는데, 물이 없습니다. 바알은 천둥, 번개, 물의 신입니다. 풍요와 번영의 신입니다. 그런데 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남편을 버리고 바알을 쫓아갔는데 빈손입니다. 물이 없는 극도의 궁핍을 경험합니다.
남편만이 그 피로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남편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른 남편 만나면 그들이 기대했던 반대가 생깁니다. 바알을 섬기는 것은 더 많은 비가 내려서 더 풍족한 열매, 결실을 얻으려는 것인데 결국은 물의 결핍입니다. 반대의 상황이 나타납니다. 엘리야 시대는 바알을 섬기는 것이 극치였습니다. 그 결과로 바알을 극진히 섬기는데, 도리어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물의 결핍입니다.
4절의 “자식들”은 개개인의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5절의 “어머니”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부끄러운 일을 행했다”의 내용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입니다. 왜 따릅니까?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내게 준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준다고 해서 따릅니다.
물은 가장 필요한 것, 양털은 추울 때 입는 것, 삼은 아주 더울 때 입는 것, 기름과 술은 인생의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애인들이 아내를 유혹합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남편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책임지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못 믿고 애인들이 보내주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이고, 남편이 주는 것에 만족을 못 합니다. 애인이 더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배교”입니다. 결국 “무엇이 중심이냐?”의 문제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원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습니다. 형상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형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형상의 목적은 영광을 드러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형상은 도구인데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것이 목적이 되어서 사람이 형상을 만듭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바알을 만듭니다. 바알 형상을 만듭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욕망입니다. 세상의 우상, 형상이 다 그렇습니다. 모든 우상의 핵심, 중심에는 인간의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우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우리의 욕심,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하나님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삼는다면 그것 자체가 우상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 신이다”라고 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출애굽기 32:1~6).
고린도전서 10:31절을 보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이루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 자체이고 또 하나님의 참 형상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일 수 없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백성,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언약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남편이고, 우리는 그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남편으로서 하나님 노릇해 주십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일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는 인간 편에서 아내로서의 인간 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양쪽의 언약적 신실함입니다. 이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