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 년사 속 시인 100 명이 추천한 애송시(愛誦詩) 중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詩人)
로맨티스트 시인 백석(白石)
백석의 시(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그리고 그를 영원히 사랑한 여인
' 길상화 법명을 가진 '자야(子夜)'
여사의 글을 함께 감상 해 봅니다.
한국의 현대 시인 김소월, 윤동주, 조지훈, 서정주 박목월 ..... 등은 많이
알고 있지만 북에 체류한 시인 백석은 상대적으로 모르는 분이 많은듯
합니다.
백석(白石)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으로 1912년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
학교와 일본 아오야마(靑山) 대학 졸업후 귀국 후, 1934년 조선 일보에
취직중1935년 24세에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 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고 합니다.
1933년대 백석의 시집 <사슴>은 이 땅의 시 토양에 많는 경이를 던졌다고
합니다. 백석의 1930년-1940 년은 백석에게는 사랑과 낭만의 시절이었으며
이 시기에 통영의 란, 자야 여사등 많는 여인들을 만나며 그의 시심을 마음껏
펼쳐 보입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이 1936년 (25세) 초판 500 부는 발간 되자 마자 팔려
나갔고, 당시 문단의 김기림은 우리 시단에
" 포탄을 던져 일거에 광풍을 일으큰 경이 ! "
라고 했고,
신석정은 시집 <사슴>을 받고 스스로 감동해서 헌시 <수선화> 를 썼다고
하며. 윤동주는 시집에 밑줄을 그어가며 배우며 경탄 했고, 당대 시인들이
이구 동성으로 찬탄했다고 합니다.
해방후 우연찮게 시집 '사슴' 을 구한 신경림, 김춘수....등
현대의 시인들은 백석의 시에 매료되어 백석의 화두로 1970년-1990년을
보냈다고 하며, 1930년-1940년 대 백석의 문학은 가장 주옥 같은 경이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
- 지은이 : 백석 (1948년 문예지 '학풍' 에 발표된 시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제목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
남신의주(南新義州)시 유동(柳洞) 마을에 사는 박시봉(朴時逢) 이라는
사람이 있는 방(方, 방향, 방면) 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주소(화자의 현재
위치)를 나타내는 말로, '박시봉'은 아마도 시적 자아가 세 들어 있는 집
주인인 목수의 이름일 것이다.
■ 시 감상
1948 년에 서울에서 발행된 ' 학풍' 지에 발표된 작품인데, 당시 백석은 이미
북쪽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백석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로 영문학을
공부했던 이른바 모던 보이였습니다. 신문 기자와 영어 교사도 했던 요즘
연예인들 못지 않게 잘 생긴 시인 백석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사투리로
박시봉 집에 살게 된 과정,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보면서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합니다.그리고 '운명'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런 운명에 전적으로 굴복하거나 회피하지 않겠다고 하며 새로운 삶을
다짐 합니다.
서정적 자유시로 독백적 반성을 토속적 소재와 사투리로 편지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근황을 진솔히 들어내며 무기력한 삶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새로운 삶의 의지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 19세에 문단에 등단한 20대 백석 >
광화문통이 갑자기 훤해진다. 녹두빛 양복의 단추를 열어젖히고 검은 물결의
머리를 휘날리며 광화문 네거리를 한 청년이 지나간다. 시인 백석(白石)이다.
그가 지나가는 광화문은 잠시 식민지의 우울한 네거리에서 예술과 지적 교양이
넘쳐나는 낭만의 거리,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변해는 듯하다
(조선일보 1936년 1월 29일)고 김기림은 썼다.
< 함흥여고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
북한 인민증에 붙어 있는 백석의 증명사진(왼쪽)
1980년대 중반에 백석 70 대에 촬영한 가족사진(오른쪽)
백석 옆에 있는 이가 해방 후 조만식 통역 비서로 평양에 가 14살 연하
이윤희 여사와 네번째로 결혼하여 평생을 살았으며, 뒤는 둘째 아들과
막내 딸이다. 송준 작가가 구해서 발표했다.
1948년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백석의 시가 발표됐다.
위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다.
일본 유학과 경성에서의 조선일보. 잡지사의 편집일,
평양과 함흥에서의 여고교사 생활 그리고 일제가 대동아전쟁으로
우리 민족 수탈의 절정에 이른 시기에는 세관직원으로 무일푼으로
만주를 떠돌던 백석은 몇개의 시를 남겼는데 위의 시가 그렇다.
당시 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부친 시인 것이다.
당시 백석의 심사를 가장 잘나타낸 시다.
해방후 남북 분단이 되자 북한에 남게 된다.
1933년대 백석의 시집 <사슴>은 이 땅의 시토양에 많는 경이를 던졌다.
백석의 1930-40년은 백석에게는 사랑과 낭만의 시절이었다. 첫선과 정처의
아내,통영의 란, 자야여사등 많는 여인들도 이때에 만났다.
짧은 사랑에 긴 이별
ㅡ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사랑
밤이 깊었습니다.
병실의 밤이 고즈넉합니다.
백석! 그대 이름을 또다시 불러봅니다.
세상은 저를 ‘백석의 애인 자야 여사’라고 부릅니다.
제 나이 어느덧 여든셋, 이번에는 걸어서 퇴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어가는 이 밤에 그대와의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가을, 함경남도 함흥에서였지요.
그대는 시집 『사슴』을 낸 그해, 조선일보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시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었습니다.
그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난 촌사람인데 2년여 서울 생활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생고보에 있던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이 있자며
불렀고, 에라 머리나 식히자고 함흥으로 왔던 것이지요.
일본 청산학원 영문과를 우등으로 나온 실력에 서울서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
이라, 영생고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그대는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집안이 망하자 1932년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지요.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신 선생이 함흥형무소에 투옥되자 저는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잠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를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한 그대는 술잔을 저한테만 권하면서
관심을 보였지요. 자리가 파하여 헤어지면서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
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제가 사는 하숙집에 수시로 찾아와 만주에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내뱉곤 하셨는데
그 말씀 또한 진심임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하셨지요.
저는 기생이었기에 그대의 ‘숨겨 놓은 애인’이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게지요.
그대는 제가 선물한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고
저를 ‘자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그대의 자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시던 그대의 부모님은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지요.
쉰이 넘은 그대 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다고 조바심을 냈지요.
한 집안의 장남이 객지를 떠도니까 가정을 꾸려 안정을 취하라고
친척들도 번갈아 가며 충고했습니다.
저 역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야지, 기생 치마폭을 잡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성혼을 부추기곤 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대는 집에 다녀왔는데, 혼례를 치른 뒤 사흘 만에 달아나듯이 집을
와 함흥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대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왔습니다.
1937년 4월에는 그대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4월 7일에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처녀 란(蘭)이 결혼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그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신현중이란 분과.
저는 그저 애인 정도였고, 란이란 분과 결혼을 하기 원했던 것 같은데
무너진 사랑탑이 돼버린 것입니다.
다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38년 봄이었지요.
저는 청진동에 작은 집을 구해 기예를 닦고 있었는데 웬 아이가 쪽지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제일은행 부근 오뎅집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모든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저는 평생 그대를 사랑하며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밤차로 함흥으로 떠나는 그대를 배웅하면서 저는 그대의 아내가 누구이던지 간에
평생 사랑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교사였던 그대는 전선(全鮮) 고보 축구대회에 참가하려고
선수들을 인솔해 서울로 다시 왔습니다. 와서는 선수들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저한테만 와 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영생여고보로 전보발령이 납니다. 선수들이
유흥장에 간 것이 합동단속교사에게 적발된 것입니다. 몇 달 뒤 그대는 사표를 써
우편으로 부치고는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합니다. 『여성』지 편집을 하다가 조선
일보사로 다시 들어갔지요.
그대는 저와 청진동에다 아예 살림을 차렸습니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가 딸린 작은
찬방으로 된 집은 우리의 단란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대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
은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타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하더라며
저녁 때 들어와서 몇 번이고 넥타이 잘 고른 제 안목을 칭찬해 주던 그대의 자상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생애에서 그때만큼 밥 짓는 것이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대는 고기보다는 나물반찬을 좋아했지요. 그대의 첫 부인은 아마도 크게 낙심한 채
친정으로 갔을 것입니다. 저와의 살림살이를 알고 있던 그대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새장가를들이기로 했습니다. 1939년 6월이었지요. 그대는 충청도 진천으로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쪽 사람과 혼인을 하러 가는구나, 저는 짐작했습니다.
부모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 온 그대인지라 부모님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을
테지요. 보름이 넘게 아무 소식이 없자 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짐을 싸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시각에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자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망설이다가 에라 얼굴이나 보고 완전히 헤어지자고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에 황급히
나가 보았습니다. 그대는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더군요. 저의 독한 마음은
또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새 색시를 버려두고 또다시 저한테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이런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 다 팽개치고 만주로 가서 숨어살고 싶었나 봅니다. 저한테 같이 가자고
몇 번 권했지만 저는 기생으로서의 제 생활이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해 말, 그대는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습니다. 오랜 꿈을 이룬 것이겠지요.
그대의 역마살을 제 사랑이 부족하여 붙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하여 출간하고자 서울에 잠시 다녀간 것이
1940년이었고 그 이후 그대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지만 함흥고보 제자가 찾아가 보니
중년의 초라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생활도 궁핍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대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 요정 ‘대원각’을 인수했습니다. 장안 최고 요정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월북시인이 아니었음에도 월북시인으로 간주되어 시가 읽히지 못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지요. 이동순 시인의 노력으로 그분의 첫 전집이 나온 것이 1987년,
이때부터 저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인 백석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정은 불교계에 기증하였고 재산을 정리하여 2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돈을 백석문학상의 제정에 써달라고 기탁했습니다. 그래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백석 시인은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저는 그 은혜에 조금 보답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 자야(子夜) : 본명 김영한(金英韓)/ 법명 길상화(吉祥花) 1900년 -1999년 >
백석(白石) 이 지어줬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였던 백석을 함흥의
한 기방에서 백석을 만났으며,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백석은 그녀에게
청혼도 했고, 당시 진향이라는 기명이 있었지만 '자야(子夜)' 라는 이름도
선사했다. 자야(子夜), 이태백이 수자리간 낭군을 그리는 자야(子夜) 라는
여인의 심회를 읊은 시 자야오가(子夜吳歌) 에서 따왔다. 자야 여사는 노후
마지막 거처에 자야오당(子夜晤堂) 이란 편액 액자를 걸어 두었으며,
백석은 창작 전성기였던 1936년 부터 그녀와 3년간 함께 살며 '바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시편들을 선사 했다고 한다.
자야 여사는 1999년에 작고하였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시인이었던 백석은 1945년 말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6년 사망할 때까지 33년 동안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 여사가 그렇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다 갔다는 것도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ㅡ『빠져들다』에서
김영한 여사는 언제 시인이 가장 보고싶냐는 기자의 말에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때가 따로있겠냐는 대답을 했고
대원각을 길상사로 봉헌할때 백억이 아깝지 않냐는 물음에